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441화 (441/653)

제441화

광풍대 검사들도 글렌에게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저희도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들은 꼭 수색 임무에 참여하고 싶다며 뜨겁게 달아오른 감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흠….”

글렌은 다시 옥좌에 등을 묻으며 긴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툭툭 쳤다.

“위험만 있고, 돌아오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래도 갈 것이냐?”

“위험도, 보상도 관계없습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라온은 조금 전에 말했듯이 상도, 명예도 필요 없으니 보내만 달라고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바보 같은 놈들이로구나. 다만….”

글렌은 바람 빠진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야 할 일을 한다는 말. 그 말 만큼은 마음에 들어.”

그의 음성에 깃들어 있던 차디찬 냉기가 확연히 가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요즘에는 그걸 지키지 못하거나, 아예 모르는 놈들이 많으니까.”

옥좌의 팔걸이를 두드리던 글렌의 손가락이 우뚝 멈췄다.

라온이 슬며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허락해주시는 건가?’

처음과 달리 글렌의 말과 음성에는 냉랭함이 드러나지 않았다. 수색 임무를 받을 수 있겠다고 확신할 때 그의 말이 이어졌다.

“너희가 복귀했을 때 해주었던 말을 기억하느냐?”

“으음….”

라온이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시선을 내렸다. 지금 상에 관한 이야기를 할 리가 없으니, 어울리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난세가 시작되었다는 말입니까?”

“그렇다.”

글렌이 담담하게 턱을 주억였다.

“지금은 대륙의 역사를 통틀어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천문이 많이 열려있는 시기다. 하늘의 문이 개방된 만큼 인재와 천재, 괴물이 가득하니, 난세가 벌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지.”

그는 음성은 언제 차가웠냐는 듯 담백하게 이어졌다.

“난세에는 수많은 꽃이 제대로 피워지지도 못하고 흐트러지지. 허나, 그 지옥에서 피어나는 꽃이야말로 무엇보다 화려하고, 아름답다. 너희는 이 시대에서 스스로를 틔울 준비가 되어 있나?”

그는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 닥쳐도 이겨내고 가문으로 돌아올 수 있냐고 묻는 것 같았다.

“물론입니다.”

“예!”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고, 광풍대 전체는 알현실 천장의 먼지가 떨어지도록 포효에 가까운 외침을 질렀다.

“대답은 좋군.”

글렌이 주먹으로 턱을 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도 정해지지 않은 임무다. 네 판단에 광풍대의 목숨이 달려 있으니, 항상 머리를 차갑게 유지하도록.”

“예.”

“비연회주에게 정보를 받으면 바로 출발해라. 실종이 어젯밤이라고 해도 시간은 많지 않아.”

그는 빨리 가서 준비하라는 듯 손을 저었다.

“감사합니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라온과 광풍대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인 뒤 일어서서 등을 돌렸다. 그들은 누구 하나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알현실을 떠났다.

“허허허.”

로엔이 라온과 광풍대가 나간 문을 보며 옅은 미소를 그렸다.

“이제 무력만이 아니라, 정신 쪽도 확연히 성장하신 느낌이군요.”

“흥, 아직 멀었어.”

글렌이 입매를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가르쳐야 할 게 산더미 같은데 성장은 무슨.”

“그럼요. 많이 가르쳐주셔야지요.”

로엔은 당연히 그렇게 하시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철전대가 괜찮을지 걱정이 되는군요.”

그는 실종된 철전대를 떠올리며 눈썹을 축 내렸다.

“저 아이들이 제시간에 도착하기만 한다면 충분히 구할 수 있을 거다. 그런데….”

글렌이 턱을 매만지며 눈빛을 가라앉혔다.

“흑탑주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게 정말인가?”

“비연회의 정보에 따르면 95% 이상 확실하다고 합니다.”

로엔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번 일과 관계가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흑탑의 탑주는 몇십 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정말 난세가 시작되려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쯧.

글렌이 창밖을 바라보며 짧게 혀를 찼다.

“이번에는 움직일 수 없겠군.”

* * *

라온은 가주전을 나와서 뒤를 돌아보았다. 광풍대는 벌써 전투 태세에 들어간 것처럼 날카로운 눈빛과 기세를 두르고 있었다.

‘대단하네.’

벌써 마음의 준비를 끝낸 느낌이야.

-호오.

라스가 광풍대를 보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나쁘지 않구나. 무력은 여전히 벌레 수준이지만, 의지만큼은 제대로 느껴지느니라.

녀석은 광풍대도 조금씩 물건이 되어가는 것 같다며 입맛을 다셨다.

-나중에 무력이 좀 올라오면 본왕의 친위대로 써도 되겠느니라.

‘안 보이니까. 좀 비켜.’

-케엑!

낄낄거리는 라스의 뱃살을 쳐내고, 다시 광풍대를 보았다. 확실히 정신적으로 단단히 여문 것 같았다. 힘든 와중에 일부러 시간을 내서 수련시킨 보람이 있었다.

‘근데 여긴 어떻게 온 거지?’

도리안에게 비연회로 간다는 말은 했지만, 가주전으로 간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기에 처음 보았을 때부터 의문이 들었다.

“너희 내가 여기에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뻔하잖아.”

마르타가 그걸 왜 모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뻔하다고?”

“그래. 비연회에 가서 철전대 실종 정보를 들은 네가 뭘 하겠어.”

“가주전에 찾아가서 직접 수색하고 싶다고 허가를 받으려고 했겠지.”

버렌이 마르타의 말을 이어받으며 미소를 흘렸다.

“우리가 지금까지 널 봐온 게 있는데 고작 그걸 모를까.”

그는 너무 쉬운 문제였다며 도리안에게 사정을 듣자마자, 다 함께 가주전으로 찾아왔다고 말해주었다.

“라온이 가주전에 가는 건 구슬 아이스크림이 동그란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이야.”

루난이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그녀는 그걸 모르는 게 이상한 거라며 눈을 껌벅였다.

“사실 부대주님만큼 뻔한 사람이 없어요.”

“찾을 때도 연무장 아니면 별관이잖아요.”

“어떻게 움직일지 모르는 대주님이랑은 완전 다르지.”

“아, 수련할 때만큼은 못 읽는다. 그때는 아예 괴물이 되니까.”

광풍대 검사들 역시 당연히 가주전에 왔을 거라 생각했다며 웃었다.

“허….”

라온은 은은한 열기가 차오른 광풍대의 눈동자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파악 되었다라….’

기분이 참 애매하군.

성격이 파악된다는 건 암살자에게 사형선고나 마찬가지다.

전생에서는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었는데. 광풍대가 내가 어떤 인간인지를 알고 있다고 하니, 이상하게도 기분이 들뜨고, 가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조금은 가시는 건가.’

전생의 지옥 같은 흔적이 조금 옅어지는 것 같아서 자신도 모르게 작은 웃음이 나왔다.

“다 조용.”

라온이 다시 표정을 굳히며 광풍대 검사들의 시선을 모았다.

“지금부터 정오까지 출발 준비를 마치고, 5연무장에 집합하도록.”

“라온은?”

루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해야 할 일이 있어.”

“해야 할 일?”

“그래. 게으름뱅이라고 해도 대주는 대주니까. 보고는 해야지.”

일단 일부터 저질렀지만, 이제라도 리메르에게 이 일에 대해 알려야 했다.

“아, 맞다! 우리 대주 따로 있었지!”

“그러네. 너무 자연스러워서 잊고 있었어!”

“구슬 아이스크림의 수저 같은 존재.”

마르타와 버렌, 루난은 이제야 리메르의 존재를 떠올리고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허….”

라온은 감쪽같이 잊었다는 광풍대를 보며 헛바람을 흘렸다.

모른 척하는 게 아니라, 진짜 존재를 잊게 만들다니, 어떤 의미에선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말했듯이 정오야. 시간 내에 도착 못 하면 놓고 갈 테니, 빨리 준비해.”

광풍대를 먼저 보내고, 리메르가 머무는 숙소로 향했다.

끼이이익!

리메르가 머무는 방의 낡은 문을 열자, 바닥에서부터 먼지가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으윽!

라스가 먼지를 보며 인상을 구겼다.

-귀때기 이놈은 정말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느니라! 이리 더러운 곳에서 먹고 잔단 말이냐?

녀석은 이런 먼지를 마시면 입맛이 사라진다며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나도 신기해.’

환자라는 사람이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건지 모르겠다.

라온이 손부채질을 하며 리메르의 방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이불과 빨래 그리고 책과 쓰레기가 널브러져 있어서 쓰레기장 같은 모습이었다.

예전에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더러웠다.

“대주님.”

“응?”

중간의 빨래 더미에서 넝마의 성자보다 더 넝마가 된 리메르가 일어났다. 전신이 붕대로 가득했고, 눈동자는 흐리멍덩했다.

“웬일이야?”

리메르는 오랜만에 본다며 손을 흔들었다. 손에 힘이 없는 것을 보면 여전히 회복 중인 것 같았다.

“임무가 있습니다.”

“임무가 내려온 게 아니라, 있다고?”

그는 그 말의 차이를 느낀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가서 받았으니까요.”

“벌써? 야, 너 공을 세우고 싶더라도 좀 과해. 인마!”

“그런 게 아닙니다. 오늘 들은 건데 철전대가….”

라온은 오늘 있었던 일들을 모두 리메르에게 말해주었다.

“아, 그거 큰일이네. 근데….”

리메르가 시선을 내리며 콧잔등을 긁적였다.

“난 못 가는데?”

그가 붕대로 가득 찬 본인의 몸을 가리켰다.

“몸도 몸인데, 내상도 있어서.”

“내상이요?”

“정확히 말하면 내상만은 아니지만, 어쨌든 난 지금 못 움직여.”

리메르는 이런 일은 가야 하지만, 사정상 힘들다며 고개를 저었다.

“사실 기대도 안 해서.”

“야!”

“어쨌든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 저희만이라도 가겠습니다.”

“괜찮겠어? 층주가 둘인데? 혹은 더 있을 수도 있고.”

그는 위험할 텐데 정말 할 수 있겠냐며 서늘한 눈빛을 보내왔다.

“그런 게 두려웠다면 처음부터 검을 안 잡았을 겁니다.”

자신의 목표는 육황의 수장 데루스 로베르트다. 놈의 목에 검을 박아넣어야 하는데, 흑탑의 층주 따위는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크으, 너 무슨 대사 학원이라도 다니냐? 이럴 때마다 하는 말이 동화 속 영웅 같다니까.”

“대주님이 너무 경박하신 거죠.”

“끄응….”

리메르가 반박을 못 하고 고개를 내렸다.

“어쨌든 알겠어. 괜찮아지면 나도 도우러 갈게.”

그는 빨리 회복하고 합류하겠다며 손을 흔들었다.

“됐어요.”

라온이 들뜬 리메르의 눈을 보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또 마지막에 와서 똥폼 잡는 거 사양입니다.”

“엑….”

* * *

라온은 별관에서 짐을 챙긴 뒤 다시 5연무장으로 돌아갔다. 연무장에는 이미 광풍대 전원과 마크 괴튼이 정렬한 채 단상 앞에 서 있었다.

고오오오오!

모두는 준비를 갖추며 한층 더 마음을 다진 듯했다. 베일 것처럼 날카로운 검사들의 기세를 느끼며 단상 위로 올라갔다.

“준비는 모두 끝났나?”

“예!”

광풍대 검사들은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연무장이 흔들릴 정도의 대답을 내놓았다.

“비연회 정보원들에게 들었겠지만, 어려운 길이 될 거다.”

라온이 시선을 내려서 광풍단을 굽어보았다.

“혹시라도 분위기에 편승해서 지원했다면 지금이라도 물러나라. 마지막 기회다.”

혹여나 빠지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손을 들라 했지만, 당연히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그걸 질문이라고 해요?”

“무서운 건 사실이지만 가야죠!”

“가끔 바보 같다니까.”

“시간 없습니다! 빨리 출발하시죠!”

광풍대 검사들은 오히려 빨리 가자는 듯 손을 흔들었다.

“흑탑의 층주가 둘이고, 혹은 그보다 강한 괴물들이 있다고 해도?”

흑탑의 층주라는 말을 들었어도 검사들의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자신 이상으로 각오를 다진 표정이었다.

‘마음에 드는 눈빛이네.’

라온이 빙긋 웃었다. 광풍대에게 중요한 건 적이 누구인가가 아니라, 누구를 구해야 하는지였기에 조금도 두려움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지그하르트의 검사라….’

실비아가 보고 싶어 했던 진정한 무인은 자신 말고도 이곳에서 자라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럼….”

라온인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단상에서 내려왔다. 이제 출발하자고 말하려 할 때 연무장 문을 열고 채드가 들어왔다.

“부대주님!”

“비연회주님? 지금 가려고 했는데….”

“아뇨. 제가 와야죠.”

채드는 어색하게 웃으며 가지고 온 책자를 내밀었다.

“급히 정리한 내용이지만, 오류는 없을 겁니다.”

새벽에 일어난 사건을 바탕으로 정보를 조사했는데, 오류가 없다는 말을 하다니, 비연회주다운 굉장한 자신감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책을 펼치려고 할 때 채드가 한발 옆으로 다가왔다.

“조금 전에 들어온 소식인데, 흑탑의 층주들도 지금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말은….”

라온이 채드를 보며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그의 눈동자에서 시뻘건 불길이 번쩍였다.

“아직 싸우고 있다는 뜻이군요.”

* * *

채드가 미리 준비해준 덕분이 조금의 막힘도 없이 가장 빠른 루트를 통해 호피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시간과 정보가 많지 않았기에 그의 수완과 능력에 감탄이 나왔다.

라온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북쪽은 허옇고, 남쪽은 푸른 기묘한 지역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호피른도 오랜만이로군.’

호피른은 북과 중앙의 경계에 위치한 지역으로 북쪽으로 열 걸음을 걸으면 설원과 얼어붙은 호수가 있었고, 남쪽으로 열 걸음을 걸으면 울창한 숲과 맑은 호수를 볼 수 있는 특이한 곳이었다.

“허…”

버렌이 너무 극명하게 다른 지형을 보며 헛바람을 흘렸다.

“우측에는 눈이 쌓이고, 좌측에는 나비가 날아다니네. 뭐 이런 곳이 있지?”

그는 이 말도 안 되는 현상에 놀란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니까.”

마르타도 드물게 버렌의 말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길 하나 차이로 어떻게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지?”

그녀는 우측의 눈길을 보며 저쪽은 수색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중얼거렸다.

“흐음.”

루난은 우측으로 쪼로록 달려가 눈을 한번 찍어 먹고서 눈을 깜박였다.

“이거 진짜야.”

“놀러 온 게 아니니까. 집중해.”

라온이 손뼉을 쳐서 광풍대의 시선을 모았다.

“다시 한번 말한다. 우리의 최우선 목적은 전투가 아니라, 수색이자 구출이다. 싸움 이전에 철전대를 구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예!”

광풍대 검사들은 당연히 알고 있다며 한 사람이 된 듯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지그하르트를 건드린 놈들을 가만히 놔둘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제천검의 검병을 말아쥐며 입매를 비틀었다.

“내가 허락하면 눈앞에 보이는 놈들을 모조리 쓸어버리도록.”

“그거 마음에 드네!”

“물론입니다!”

검사들은 이전보다 훨씬 사나운 음성을 흘리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럼 출발한다.”

라온은 반쪽에서는 폭설이 내리고, 반쪽에서는 따스한 바람이 불어오는 괴이한 길을 나아가며 뒤로 손짓을 했다.

광풍대 검사들은 광기가 스며든 시퍼런 안광을 일으키며 그 뒤를 따랐다.

하나의 검으로 화한 듯 나아가는 광풍대의 매서운 기파에 호피른의 눈과 바람이 갈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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