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9화
“정말 너무하신 거 아니야?”
율리우스가 입을 삐죽하게 내밀며 바닥에 박힌 돌멩이를 걷어찼다.
“제대로 인사할 시간도 안 주고, 떠나시면 어떻게 하냐고!”
너무 늦게 알려서 말 그대로 인사만 하고 가버린 렉타르와 무스턴을 떠올리며 인상을 구겼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두 사람과 정이 들었기 때문인지 섭섭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야.”
율리우스는 수련을 끝내고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유아에게 손짓했다.
“넌 왜 그렇게 조용해. 렉타르 님이 떠난 게 아쉽지도 않아?”
“아쉬워.”
유아가 나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사정이 있으실 거야. 나쁜 거짓말을 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거든.”
“나쁜 거짓말을 하는 소리?”
“응. 심장 소리가 자근거리면서도 고요하셨어.”
그녀는 사정이 있는 것만큼은 확실하다며 어쩔 수 없었을 거라고 말해주었다.
“나도 두 분이 거짓말했다는 건 아니야. 그냥 아쉽다는 거지….”
율리우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에 할아버지가 떠올랐으니까.’
렉타르와 친해질수록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함께 검술을 수련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에 빠른 이별이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나도 그래. 그래도 다음에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참아야지.”
유아가 방긋 웃으며 별관의 정원 쪽으로 걸어갔다.
“어디가?”
“저녁 시간인데, 도련님이 안 오시잖아. 모시러 가려고.”
율리우스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말한 뒤에 별관 밖으로 뛰었다.
‘직접 찾아가질 않으면 매번 밥을 거르시니.’
라온은 수련에 집중하면 밥을 먹어야 한다는 것도 잊어버리는 사람이다.
배가 고프지도 않은지 이대로 놔둔다면 또 밤까지 수련만 하고 있을 것이다.
“정말 손이 많이 간다니까… 응?”
유아가 정원을 빠져나가서 5연무장이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돌릴 때 하늘에서 주머니 하나가 툭 떨어졌다.
성인 남성의 손바닥만 한 크기에 주홍빛을 두른 고급스러운 주머니였다.
“이게 뭐야?”
땅에 떨어진 주머니를 주우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선을 들어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주변에 건물이나, 나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바람이 부는 것도 아닌데 대체 어디서 이 주머니가 떨어졌는지 모르겠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주홍색 주머니를 열어보았다.
주머니 안에는 작게 압축된 검과 갑옷, 장갑과 부츠, 다양한 책과 요리 도구 그리고 파인애플 수십 개가 들어차 있었다.
평범한 주머니가 아니라 아공간 주머니였다.
“음….”
유아는 주머니를 닫으며 입매를 꾹 다물었다.
‘이건 주인을 찾아줘야 해.’
텅텅 비어 있는 평범한 주머니라면 모를까. 아공간 주머니. 그것도 안이 꽉 차 있는 주머니라면 분명 주인이 찾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라온에게 말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더 속도를 높여서 5연무장으로 달려갔다.
끼이익
유아가 연무장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라온은 연무장 중앙에 서서 뭔지 모를 책을 읽고 있었다.
“도련님!”
“아, 유아야.”
라온이 유아를 보고서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왔어?”
“무슨 일이긴요! 또 식사 거르실까 봐 왔죠!”
유아가 허리춤에 손을 척 올리며 콧잔등을 찌푸렸다.
“마님도 꼭 모시고 오라고 하셨다구요!”
“하….”
라온은 턱을 쭉 내민 유아를 보며 가벼운 미소를 흘렸다.
“왜 웃어요!”
“미안. 귀여워서.”
유아가 인상을 구기는 모습을 오랜만에 보다 보니, 귀여워서 자연스레 웃음이 나왔다.
빠르게 사과를 하고 창궁검의 무학서를 품에 넣었다.
-크흐윽….
주변을 정리하는데, 라스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올리며 코를 훌쩍였다.
-역시 파인애플 소녀야. 본왕을 챙기는 건 저 아이밖에 없느니라!
라스는 유아가 아니었다면 또 저녁을 굶었을 거라며 이를 갈았다.
‘네가 아니라, 날 챙기는 건데?’
-시끄럽고. 저게 바로 다정하다는 것이니라! 너희 영감탱이 말고!
녀석은 다정의 뜻을 제대로 알라며 도톰한 손을 휘적였다.
‘나한테는 밥보다 무학서를 주는 사람이 더 다정해.’
라온은 손등으로 라스의 뱃살을 쳐내고 위풍당당하게 선 유아에게 다가갔다.
“그래. 가자. 네 말을 들으니, 나도 배가 고파져서….”
별관으로 돌아가자고 말하려는데, 유아가 손에 쥐고 있는 고급스러운 주머니가 보였다.
“그건 뭐야?”
“아, 이거 누가 잃어버렸나 봐요.”
“잃어버렸다고?”
“네. 조금 전에 이곳에 오다가 주웠는데….”
유아는 라온에게 이 주머니를 어떻게 주웠는지 말해주었다.
“잠시만 줘볼래?”
“네! 주인 찾아주세요!”
“할 수 있다면.”
라온이 유아에게 주머니를 받아서 살펴보았다.
‘역시 아공간 주머니네.’
주머니 안쪽을 보니, 다양한 물건들이 가득 차 있었다.
그것도 유아에게 딱 맞을 듯한 옷이나, 갑옷 그리고 검 같은 무구들과 조리도구 그리고 파인애플까지 있었다.
‘꼭 유아를 위한 물건들 같네. 그런데 왜 주머니 외부에서도 마나가 느껴지는 거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주머니에 약간의 오러를 담아보았다.
화아아아.
주머니 외부에서 옅은 금빛이 피어나며 유아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어? 내 이름?”
“아무래도 네가 주인인가 본데.”
“네? 전 이런 거 받은 적이 없는데….”
“네 머리 위에서 떨어졌다는 걸 보면 네 것이 맞아.”
“아….”
유아는 본인의 주머니라고는 생각도 못 한 듯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내 생각인데….”
라온이 유아에게 주머니를 돌려주며 옅게 웃었다.
“정이 많은 분이 주고 가신 모양이야.”
* * *
라온이 식사를 마치고 방에서 쉬고 있을 때 두 번의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문밖에서 느껴지는 기척으로 누구인지 알았기에 바로 들어오라고 말했다.
문이 부드럽게 열리고, 실비아가 작은 목갑을 가지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잠시 들어가도 되지?”
“이미 들어오셨는데요?”
“응. 혹시나 해서 물어봤어.”
실비아가 싱긋 웃으며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가지고 온 목갑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네 방은 정말 변하질 않네.”
그녀는 방을 쭉 둘러보고 나서 한숨을 폭 내쉬었다.
“변화가 없다니?”
“네가 아기 때 엄마가 꾸며준 그대로잖아. 어렸을 때와 아무런 차이도 없다고. 넌 방을 꾸며보고 싶지도 않아?”
“흠….”
라온이 입맛을 다시며 방을 훑어보았다.
햇살이라 불렸던 시기가 있었고, 라온이라는 이름 때문인지 방은 자신의 성향과 달리 조금 과하게 밝았지만 딱히 나쁘지는 않았다.
“별로요. 방 꾸미기라니, 귀찮기만 하지.”
“하아, 재미없는 아들이라 엄마는 너무 슬퍼. 유아랑 율리우스가 있어서 다행이지.”
실비아는 가끔은 좀 맞춰달라며 인상을 찌푸렸다.
“알겠어요.”
라온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식사 시간에 말씀 안 하시고.”
“이게 뭔지 알아?”
실비아가 테이블 위에 놓인 목갑을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영약인가요?”
저런 목갑에 들어 있는 건 대부분 영약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쪽으로 생각되었다.
“맞아. 그것도 보통 영약이 아니지.”
실비아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서 목갑의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작은 유리병 두 개가 들어 있었는데, 그 안에 반투명한 우윳빛 액체가 담겨 있었다.
“음….”
유리병의 뚜껑을 열었다. 몽롱할 정도로 달달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우윳빛 액체에 달큰한 향? 이거 설마….”
라온이 다시 유리병을 보며 턱을 떨었다.
“맞아. 페어리의 눈물이야.”
“역시….”
예상대로였다. 이런 색에, 이런 향을 지닌 영약은 페어리의 눈물뿐이었다.
‘페어리의 눈물을 실제로 보게 되다니.’
페어리의 눈물은 이름과 달리 요정과 관계가 없었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동굴 깊숙한 곳에서 천지의 기운이 모여들어 액체로 응집되는데, 한 방울만 먹어도 무병장수할 수 있다는 최상급 영약이었다.
“어머니가 이걸 왜 가지고 계신 거예요?”
“렉타르 님이 놓고 가신 거야.”
“예?”
라온이 되물으며 눈을 부릅떴다. 솔직히 목갑에서 페어리의 눈물이 나왔을 때보다 더 놀랐다.
“헬렌이 렉타르 님의 방을 정리하다가 구석에 놓여 있는 걸 발견했어. 돌려드리고 싶었지만, 이미 떠나셔서….”
실비아는 너무 과한 선물을 두고 갔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편지 같은 건 없었어요?”
“있었어. 특별한 건 아니고, 즐거운 시간을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그녀가 작은 쪽지를 보여주었다. 그 말대로 짧게 즐거웠다고 적혀 있었다.
“즐거운 건 우리도 마찬가지였는데….”
실비아는 오히려 많은 것을 받은 건 이쪽이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말대로네요.”
라온이 입술을 깨문 실비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 말대로 우리가 훨씬 많이 받았지.’
렉타르는 광풍대 모두에게 검술을 가르쳐주었고, 글렌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해주었으며, 실비아와 아이들의 얼굴에도 웃음을 그리게 해주었다.
준 것보다 받은 게 훨씬 많았기 때문에 페어리의 눈물은 부담스러운 선물이었다.
“라온.”
실비아가 목갑을 매만지며 목소리를 낮췄다.
“네?”
“이건 내 생각인데….”
그녀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결심한 듯 천천히 입술을 뗐다.
“렉타르 님이랑 너희 아빠가 관계가 있을지도 몰라.”
실비아가 손가락으로 마른 입술을 매만졌다.
“너도 관계없다는 말을 들었겠지만, 그건 거짓말 같아. 렉타르 님을 볼 때마다 네 아빠가 떠오르거든.”
“아빠가 떠오른다구요?”
“사실 맨 처음 그분을 봤을 때부터 그 생각을 했어. 네 아빠가 살아서 나이를 먹고 돌아온 게 아닌가 하고.”
그녀가 헛웃음을 흘렸다. 어이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진심이라고 속삭였다.
‘그러고 보니….’
처음 실비아가 렉타르의 얼굴을 보고 한참 멍하니 있던 게 떠올랐다.
“페어리의 눈물로 확실해졌어. 렉타르 님과 네 아빠는 관계가 있을 거야.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지만, 가족이나, 친척일 가능성이 높겠지.”
실비아는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귀한 영약을 놓고 갈 리가 없다며 눈매를 찡그렸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라온이 실비아와 눈을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떤 관계인지는 다시 오시면 직접 말해주실 거예요.”
“그럴까? 말씀 안 하실 거 같은데….”
“아뇨. 알려주실 겁니다.”
렉타르의 눈빛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직접 설명하겠다고 했으니,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서 모든 사실을 말해줄 것이다.
“조금만 기다려봐요.”
-라온.
라온이 옅게 웃으며 실비아를 안심시킬 때 라스가 진중한 눈빛을 일으켰다.
‘음?’
솜사탕이 이런 표정을 하는 건 드물었다.
‘무슨 일인데?’
렉타르에 관한 정보가 나올 것 같아서 긴장하며 시선을 내렸다.
-저 액체 말이다.
라스가 페어리의 눈물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어….’
-달큰하면서도 갈증이 해소될 것 같은데, 지금 당장 입에 넣어보거라!
‘….’
내가 단단히 착각했네.
식충이가 진지해질 때는 식충이 짓을 할 때뿐인데….
* * *
다음날 오전.
라온은 밤새 창궁검의 무학서를 모두 외운 뒤에 5연무장으로 나왔다.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검술이야.’
글렌이 왜 직접 가르칠 생각을 했는지 알겠다.
창궁검은 단순한 상급 검술이 아니라, 깨달음을 동반한 초상승의 검술이었다. 아무래도 글렌은 자신이 창궁검을 완성하여 그랜드 마스터에 오르기를 바랐던 것 같았다.
‘그 큰 기대에 감사드릴 뿐이로군.’
직접 검술 묘리를 가르쳐주는 것에 이어서 이 정도로 뛰어난 검술서까지 내어주다니, 고맙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보답할 길은 그가 실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서 창궁검을 익히는 것뿐이었다.
스르르릉.
라온이 제천검을 뽑았다. 아기가 걸음마를 하듯 천천히 창궁검의 스물여섯 초식을 모두 펼쳐보았다. 불의 고리 덕분에 검형 자체는 따라하기 어렵지 않았지만, 그 안에 창궁검의 진의를 담는 건 당연히 불가능했다.
‘하늘을 담으라고 하셨지.’
그것도 내가 생각하는 하늘을.
‘하늘이라….’
생각해보면 전생에서는 답답함을 꺼뜨리기 위해 하늘을 많이 보았던 것 같다. 데루스 로베르트에게 목줄이 잡혀 있었기 때문에 자유 그 자체를 담고 있는 하늘을 보며 갈증을 해소했다.
반면 지금의 삶을 살면서 본 하늘은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 어디에서 보아도 그대로인 굳건한 하늘을 보며 저리 되어야겠다고 다짐을 했었다.
‘광활한 자유로움과 변하지 않는 묵직함이라.’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만, 지금의 자신을 솔직하게 표현하기에는 이만한 것이 없었다.
라온이 눈을 내리감으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자유와 무거움 둘 모두를 담아야겠어.’
상승의 무학을 익힐 때 중요한 건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이다. 전생의 삶과 현생의 삶 모두 나 자신이었기 때문에 둘 중 하나가 아니라, 둘 모두를 가져가는 게 정답 같았다.
‘두 분 덕분에 참 많은 것을 알게 되네.’
글렌과 렉타르의 가르침을 통해 시야를 넓힐 수 있었기에 창궁검을 어떻게 익혀야 할지 감이 오기 시작했다.
라온이 다시 창궁검의 수련을 시작하려 할 때 연무장 문이 다급하게 열렸다. 조장들일까 생각했지만, 연무장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예상과 달리 도리안이었다.
“부대주님! 큰일 났어요!”
도리안은 과자를 먹다가 왔는지 입에 과자 가루를 잔뜩 묻힌 채 거친 숨을 내뱉었다. 급한 일이라고 하지만, 저 모습을 보니 믿음이 가지 않았다.
“무슨 일인데. 너 또 보급품 짝수로 맞추려고 수 쓰는 거면….”
“철전대가….”
라온이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며 다시 수련하려 했지만, 도리안의 이어지는 말에 팔이 굳어버렸다.
“철전대가 실종됐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