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8화
렉타르가 무스턴이 가지온 편지를 받으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우리가 지그하르트에 있다는 걸 알고 있던 건가?”
련에 지그하르트로 간다는 보고를 하지 않았고, 소문을 내면서 이동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빨리 연락이 올 줄은 몰랐다.
“그건 아닌 듯합니다.”
무스턴이 편지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제게 바로 편지가 날아온 것을 보면, 지그하르트와는 상관없을 듯합니다.”
그는 장소가 아니라, 사람에게 따라붙는 일회용 아티팩트라면서 아직 련은 모를 것이라 말했다.
“아니,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렉타르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련주는 그저 강하기만 한 자가 아니다. 문을 닫고 있다고 해도 우리가 이곳에 있다는 것쯤은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야.”
련주는 무서운 사람이다. 그를 어설프게 판단했다가는 큰코다치게 될 테니, 생각의 범위를 넓혀 두는 게 옳았다.
“일단 보도록 하지.”
렉타르가 편지를 펼쳐보았다.
‘역시 예상대로군.’
특별한 내용은 적혀 있지 않았다. 여행을 잘 즐겼으면 이제 돌아오라는 글귀만 적혀 있었다. 검으로 긁어내린 듯 용사비등한 필체. 련주가 직접 쓴 편지였다.
“련주가 직접 귀환 명령을 내렸군. 갈 수밖에 없겠어.”
다른 이들이 불렀다면 무시했겠지만, 련주의 부름이었기에 거절할 수가 없었다.
쯥.
렉타르가 짧게 입맛을 다셨다.
‘아쉽군.’
라온, 실비아와 함께 하는 시간은 즐거웠고, 글렌과도 나름 친분을 쌓아 이곳의 삶에 적응하고 있는데, 돌아가야 한다는 아쉬움에 탄식이 나왔다.
화아아악!
렉타르는 련주의 편지를 태워버린 뒤 눈동자가 설원처럼 맑아진 제자를 바라보았다.
“무스턴.”
“예!”
무스턴은 유아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기운차게 목소리를 놓였다.
“만약에 내가 련을 나간다면 넌 어떻게 할 것이냐.”
“려, 련을 나가신다구요?”
그는 생각도 못 한 질문인 듯 입을 떡 벌렸다.
“그래.”
렉타르가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내겐 검을 찬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생겼다. 이제 내 길과 련은 이어지지 않을 듯하구나.”
복귀하면 련을 나올 것이라 말하며 당황한 제자를 바라보았다.
‘무스턴에겐 솔직해야겠지.’
예전처럼 무스턴의 눈이 질투로 가득 찼을 때라면 모를까. 성실하고, 성격이 밝아진 제자를 속일 수는 없었다.
“음….”
무스턴은 잠시 턱을 긁적이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스승님과 련주의 맹약은 아직 남아 있지 않습니까?”
“남았지.”
렉타르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의 부탁을 더 들어주어야 이 관계를 끝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는 무릎 위에 올려둔 두 손으로 주먹을 말아쥐며 진중한 눈빛을 일으켰다.
“그 어떤 부탁이라고 해도 완수한 후 내 발로 련을 나갈 것이야.”
“그럼 저도 나오겠습니다.”
무스턴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고민한 뒤 바로 답을 내렸다.
“허….”
렉타르는 단호할 정도로 똑 부러진 무스턴을 보며 화등잔만 하게 눈을 떴다.
“넌 련에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었을 텐데?”
“아뇨. 제 길은 라온 님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무스턴은 라온과 함께 걷는 게 목표라며 시원하게 고개를 저었다.
“련에 남는다면 봉문이 풀리는 순간 라온 님과는 적이 될 수밖에 없겠죠. 저도 스승님과 함께 련을 나가겠습니다.”
무스턴은 시원하게 고개를 저으며 라온을 배신할 수는 없다고 외쳤다. 정심한 눈빛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라온이 대체 무엇을 했기에 네가 그렇게 변하게 됐는지 여전히 모르겠구나.”
“그분은 무엇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존재만으로 제가 따라야 할 분이죠.”
무스턴은 민망하지도 않은지 어이가 없는 말을 잘도 주절거렸다.
“그러냐.”
렉타르가 헛웃음을 흘렸다. 제자 홀로 우뚝 서면 더 좋겠지만, 손주를 따르겠다고 하는 게 그리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그럼 내일 바로 떠나는 것으로 하지.”
“내일은 너무 빠르지 않나요?”
“다시 못 볼 것도 아닌데, 시간을 끌 필요는 없다. 준비하거라.”
“음, 알겠습니다.”
무스턴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서 방을 나섰다.
“후우….”
렉타르가 답답함 스며든 한숨을 내뱉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상현달이 꼭 맹수의 눈동자처럼 일그러진 채 세상을 굽어보고 있었다.
‘쉽지는 않겠지.’
련주가 평범한 임무를 지시할 리가 없으니, 련을 나오기 위해서는 가시밭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며느리와 손주의 행복을 찾아주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곳으로 돌아와야 한다.
렉타르는 검병을 말아쥐며 두 눈을 내리감았다.
‘어떻게 해서든….’
* * *
라온은 오후 훈련을 끝낸 뒤 그대로 주저앉아서 어두워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점점 힘들어지네.’
글렌과 렉타르가 가까워지며 서로의 가르침에서 장점을 뽑고, 단점을 죽이는 덕분에 오전과 오후 훈련 모두 숨 쉴 틈도 없이 검을 휘둘러야만 했다.
이전에 비해 검술을 더 많이, 더 집중하여 펼치다 보니, 오후 훈련이 끝날 때가 되면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 힘들 정도로 지쳐서 지금처럼 자연스레 주저앉게 되었다.
“흐음, 렉타르 공은 조금 더 가볍게 했던가….”
글렌은 훈련에서 개선할 점을 찾은 건지 이마를 매만지며 렉타르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하아….”
라온이 글렌을 보며 헛바람을 흘렸다.
‘왜 그렇게 친해진 건데….’
글렌과 렉타르가 처음 연무장에서 마주쳤을 때는 싸울 것처럼 서로를 향해 기세를 뿜어냈는데, 이제는 죽마고우처럼 친근한 대화를 나누며 서로에게 여러 가지 영향을 주고 있었다.
‘훈련하는 건 좋지만, 난도가 너무 빠르게 올라가잖아.’
강해질 수 있도록 훈련을 시켜주는 건 분명 감사한 일이지만, 점차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훈련이 빡세지고 있어서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다.
‘뭐, 그래도 좋은 점이 있긴 하지.’
광풍대도 함께 키울 수 있으니까.
글렌과 렉타르의 훈련을 통해서 검사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빠르게 성장시킬 수 있는지를 깨달았다.
두 사람의 가르침 덕분에 광풍대의 검술 성취도 이전에 비해 확연하게 발전해 있었다.
-추잡한 놈….
라스가 참으로 찌질하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가?’
-혼자 당하기 싫다고 남들까지 끌어들이다니, 정말이지 더러움이 극에 달했느니라!
‘무슨 헛소리야.’
라온이 라스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나 혼자 강해지는 게 아니라, 모두와 함께 강해지고 싶은 이타적인 마음을 모르겠어?’
앞으로의 임무는 지금까지와 차원이 다를 정도로 어려워질 것이기에 기회가 있을 때 광풍대를 성장시켜놔야 한다. 스트레스를 풀고 싶은 마음은 고작 5할밖에 되지 않는다.
-5할이면 절반이잖아!
‘절반밖에 안 되는 거지.’
라온은 별거 아니라고 중얼거리며 웃었다.
-후우, 네놈이랑 입씨름할 생각은 없다. 빨리 가서 저녁이나 먹어라. 너희 영감탱이 때문에 혓바닥이 마비되는 것 같으니라!
라스는 아직도 혓바닥에 고무가 붙어 있는 것 같다며 인상을 구겼다.
‘그럴까.’
수련을 너무 열심히 해서 그런지 점심에 나딘빵을 먹었음에도 배에서 천둥이 울렸다. 별관에 가서 밥을 먹고 다시 와야 할 것 같았다.
“가주님. 오늘도 감사 드립…음?”
라온이 글렌에게 인사를 하려고 할 때 연무장 문이 열리고 렉타르와 무스턴이 들어왔다.
“렉타르 님?”
두 사람은 수련복이 아니라, 처음 만났을 때처럼 여행객 차림을 하고 있었다. 복장을 보니, 지그하르트를 떠나려는 것 같았다.
‘왜 갑자기….’
오전 훈련을 진행할 때만 해도 아무 말도 안 했기에 갑자기 떠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가는 것이오?”
글렌도 렉타르가 떠나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친구 녀석이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해서 가봐야 할 듯합니다.”
렉타르는 친한 친구가 다급하게 연락을 해와서 미리 말할 시간이 없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심각한 일이오?”
글렌이 뒷짐을 진 채로 시선을 내렸다.
“필요하다면 도와줄 수도 있소.”
“막상 가면 술이나 마시자고 할 수도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음만 감사하게 받겠습니다.”
렉타르는 글렌의 도와준다는 말을 예상하지 못한 듯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그가 이쪽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흘렸다.
“이번 내기는 제 패배로 해야 할 듯합니다. 이기겠다고 호언장담을 해놓고 이리되어서 죄송합니다. 라온, 네게도 미안하구나.”
렉타르는 자신 있게 말한 것과 달리 제대로 가르친 게 없어서 미안하다고 읊조렸다.
“일을 끝내고 다시 올 테니, 그때는 전심전력을 다해서 네 검술을 봐주마.”
“그건 아니지.”
라온이 말을 하기 전에 글렌이 먼저 앞으로 나섰다.
“가주님?”
“내기를 이런 식으로 끝내겠다? 이건 못 받소.”
“으음, 제가 패배를 인정했으니, 전에 말했던 대로 라온을 가르치는 건 가주님이 주도하시면 되는….”
“그 말이 아니오.”
글렌이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기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 렉타르 공이 없는 소리를 할 사람도 아니니, 우리의 내기는 미루는 게 좋겠소.”
그는 오랜만에 흥미가 동한 내기를 이렇게 쉽게 끝내고 싶지 않다며 입매를 말아 올렸다.
“렉타르 공이 돌아올 때까지 내기는 연기하도록 하겠소.”
“…진심이십니까?”
“그렇소. 라온. 너는 어떠냐.”
“저도 좋습니다.”
라온이 글렌과 렉타르를 차례로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면도 없던 두 사람이 자신을 가르치며 친분을 쌓은 것을 보고 있자, 자연스레 웃음이 나왔다.
“나참.”
렉타르가 헛웃음을 흘리며 소매를 매만졌다.
“나중에 후회하실 겁니다. 전 이제 라온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알게 되었으니까.”
“그거 기대되는군. 나도 이 녀석을 더 써먹을 방법을 찾았는데.”
글렌과 렉타르는 서로를 마주 보며 미소를 그렸다. 등 뒤로 저무는 주홍빛 석양이 두 사람의 웃음을 더 따스하게 매만졌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렉타르가 글렌에게 고개를 숙인 뒤 라온을 바라보았다.
“별관 식구들에게는 이미 말해놓았다. 곧 다시 보게 될 테니, 수련에 힘쓰거라.”
“알겠습니다.”
라온이 자세를 바로 하고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라온 님. 다음에 뵙겠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무학과 정신 수양 모두 노력하겠습니다!”
무스턴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맑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손을 흔들었다.
“아, 네….”
라온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배웅은 하지 않겠소.”
글렌은 빨리 가라는 듯 손을 탁 털었다.
“그건 좀 섭섭하네요. 대신….”
렉타르는 연한 미소를 지으며 라온의 어깨를 잡았다.
“라온을 좀 빌려 가겠습니다.”
“흠, 이번만이오.”
“감사드립니다.”
그는 빨리 가자는 듯 어깨를 두드렸다.
“두 분을 모셔다드리고 오겠습니다.”
“그리하거라.”
글렌은 실례하지 말고, 예를 다해서 안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알겠습니다.”
라온은 글렌에게 눈인사를 한 뒤 렉타르와 무스턴의 앞에 섰다.
“따라오십시오.”
연무장의 문을 열며 낮은 한숨을 내뱉었다.
‘이렇게 갑자기 가신다니, 아쉽군.’
만검 수련을 못 해서가 아니다. 이제 정이 들었는데 너무 갑작스럽게 떠난다는 게 안타까웠다.
말없이 안내하다 보니, 어느새 가문의 정문에 도착해 있었다.
“후….”
라온은 천천히 열리는 지그하르트의 정문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렇게 아쉬워할 필요 없다.”
렉타르는 이쪽의 표정을 읽은 듯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법이지. 곧 다시 만나게 될 테니, 내가 실망하지 않게 훈련에나 집중하거라.”
“알겠습니다.”
라온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렉타르 역시 글렌처럼 말한 것은 지키는 사람이니, 정말 다시 만나게 될 것 같았다.
“다음에 뵈었을 때 렉타르 님이 놀라실 수 있게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기대되는군. 그리고….”
렉타르가 턱수염을 쓸어내리다가 손을 내렸다. 그의 표정이 새벽처럼 어둑하게 번졌다.
“다음에 만날 때는 네 질문에 답을 해주마.”
“답….”
이전에 아버지와 아는 사이냐고 물어보았던 질문에 대한 답을 말하는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라온은 기다리겠다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보도록 하겠네.”
“라온 님! 또 뵙겠습니다!”
렉타르가 등을 돌렸고, 무스턴이 시원한 웃음을 흘렸다.
라온은 받은 것 없이 주기만 한 렉타르의 등을 향해 깊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했습니다.”
* * *
라온이 렉타르와 무스턴을 바래다주고 다시 5연무장으로 돌아왔을 때도 글렌은 가주전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아직 안 가셨습니까?”
꺼뭇해지는 하늘을 바라보던 글렌에게 다가갔을 때 그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속을 알 수 없는 고요한 붉은 눈을 마주한 순간 머리털이 쭈뼛 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네게 줄 게 있어서 기다리고 있었다.”
글렌은 가르침의 내기는 미뤄졌지만, 아직 계산은 끝나지 않았다며 고개를 저었다.
“계산이라고 하신다면….”
“내가 본래 네게 무학을 가르치려고 했다는 것을 기억하느냐.”
“아, 네.”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글렌은 맨 처음 렉타르와 마주쳤을 때도 원래 무학을 가르치려 했다고 말했었다.
“그 계산대로 내가 가르치는 게 옳겠지만, 지금 내가 네 무학에 손을 댄다면 약속을 깨어지니, 알아서 익히거라.”
글렌이 손가락을 튕기자, 허공에서 붉은 스파크가 튀기더니 한 권의 책이 튀어나왔다. 손가락 한 마디 되는 얇은 책자에 창궁검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창궁검은 말 그대로 맑은 하늘을 담은 검이다. 다만….”
그 말과 함께 글렌이 등을 돌렸다. 그의 손에서 어둑해진 하늘과 같은 흑검이 피어났다.
화아아아!
흑검은 하늘 그 자체를 담은 듯 장대한 기운을 떨치며 어스름을 가로질렀다.
검이 흐르는 곳마다 묵직한 파동이 이어지며 막대한 검력을 퍼져나왔다. 격이 다른 영역. 5연무장이. 아니, 이 지그하르트 전체가 글렌의 손아귀에 들어온 것처럼 보였다.
“나의 하늘은 어둡다.”
글렌이 다시 뒤를 돌아본 순간 그의 손아귀에 잡혀 있던 흑검이 물거품이 된 것처럼 사라졌다.
“너는 네 하늘을 담아서 창궁검을 익혀보아라.”
그는 그 말을 남기고, 비틀어져 떨어지는 어둠과 함께 사라졌다.
라온은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는 창궁검의 무학서를 잡으며 이전에 유아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다정하신 분이라….”
그 말이 진짜일지도 모르겠군.
-그게 말이 되느냐!
라스가 고개를 맹렬하게 휘저었다.
-다정한 인간이라면 나딘빵을 안 멕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