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6화
글렌의 자랑은 붉은 달이 엄지손톱만큼 이동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본래 술이란 누구와 먹느냐가 가장 중요한 법인데, 나는 라온이 처음으로 따라준 술을 마신 사람이니, 더더욱 맛있을 수밖에 없었지. 그건 술이라기보다 신의 물방울….”
“아, 잠깐!”
리메르가 관자놀이를 움켜쥐며 고개를 까딱 들어 올렸다.
“지금 가주님이 30분째 이야기하고 있는 게 라온이 술을 따라줬다는 거뿐이거든요? 다른 건 없어요?”
“다른 거?”
“네. 술만 따라준 게 다가 아닐 거 아니에요.”
기껏 별관에 초대되어 막내딸과 손주와 함께 시간을 보낼 기회였는데, 고작 술 한 잔만 받고 돌아왔을 리 없다는 생각을 하며 손을 까딱거렸다.
“잔을 부딪쳤다던가, 음식을 덜어주었다던가. 깊은 대화를 나눴다던가. 다른 일도 있었을 거 아니에요!”
“그게 다인데?”
글렌은 술을 따라주었으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하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끄으윽!”
리메르가 손바닥으로 이마를 쳤다. 통증 때문에 전신이 아렸지만, 답답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지? 저 사람이 정말 내가 따르던 그 괴물이 맞나?’
글렌은 지금도 기분이 좋은지 뺨을 붉게 물들인 채 미소를 짓고 있었다.
육황오마의 수장 앞에서도 압도적인 위압감을 뿜어내는 무적의 검사가 왜 손자 앞에만 가면 저리 작아지는 건지 모르겠다.
“일단 그만 좀 웃으세요.”
“안 웃었다.”
“거울 좀 봐요! 입꼬리가 천장을 찌르고 있구만!”
리메르가 벽에 삐딱하게 걸려있는 거울을 가리켰다.
“커흠!”
글렌은 거울로 본인의 얼굴을 보고서 춤추던 입매를 억지로 가라앉혔다.
“어쨌든 지금 고작 술 한 잔 얻어먹고 왔다는 거죠?”
“피자도 먹었다. 유아가 주었지.”
글렌은 그 아이에게 요리의 재능도 있을 줄은 몰랐다며 탄성을 흘렸다.
“아니, 좀!”
리메르가 악을 지르며 손을 쭉 뻗었다.
“다 됐고! 다음에 이런 기회가 있으면 절대 술만 얻어먹고 오지 말라구요! 라온이랑 실비아한테 말도 좀 걸고, 친근하게 대해줘야 가까워지지!”
오늘 같은 기회가 쉽게 오지는 않겠지만, 유아가 있으니 또 모른다. 다음에는 조금 더 확실하게 관계를 회복시키고 싶었다.
“음, 사람 관계는 무학과도 비슷하다. 차분히 계단을 밟지 않으면 어딘가에 문제가 생기는….”
“그러다가 늙어 죽는다고! 이건 그냥 무아지경에 열 번 연속으로 빠진 것처럼 진도를 빼야 한다구요!”
리메르가 악을 지르며 멍이 든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며칠은 더 앓아야 할지도 모르지만, 말을 하지 않으면 속이 꽉 막혀서 죽을 것 같았다.
“라온 그놈도 이상하게 사람 관계 쪽은 둔해서 직접 말을 안 하면 소용없어요!”
라온은 적의 심리를 파악하는 데 누구보다 능하지만, 가족이나 친구 관계는 이상할 정도로 멍청하다.
느려터진 할아버지와 둔해 빠진 손자가 만났으니, 진도가 안 나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으음, 알겠다. 생각해보지.”
글렌은 다음에 오늘 같은 일이 있다면 조금 더 대화를 나누고 오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가서 알게 된 것들이 있다. 라온은 파인애플 피자를 좋아하더군. 아무래도 파인애플을 좀 들여와야겠어. 한 십 톤 정도?”
“시, 십 톤….”
“소고기와 양갈비도 좋아하는 듯 보이니, 가주전의 구이 담당 셰프를 광풍대 식당 쪽으로 보내도록 하마.”
“후우….”
리메르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걸 좀 밝히라고!’
이 인간아!
손주를 위해서 본인 요리사를 보내고, 파인애플 십 톤이라는 말도 안 되는 주문을 하려는 걸 밝히기만 해도 관계가 다림질하듯이 부드럽게 펴질 텐데, 직접 말을 안 하는 게 답답했다.
“요즘 여아들은 무얼 좋아하느냐? 유아라는 아이에게 보답을 해야 할 거 같은데, 내가 아이들에 대해 아는 게 없잖느냐. 몰래 금패라도 주어야 하는 건지….”
리메르가 눈을 질끈 감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이제 좀 가요!”
피곤해 죽겠어!
* * *
실비아가 팔꿈치를 식탁 위로 올렸다.
“하아아….”
그녀는 지쳤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괜찮으세요?”
라온은 아직도 떨리고 있는 실비아의 손을 보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응. 괜찮아.”
실비아가 손을 내리며 고개를 저었다.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지만, 눈가에 물기가 맺힌 듯 보였다.
“이건 힘들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그녀의 시선이 글렌이 앉아 있었던 상석으로 향했다. 가라앉은 눈빛. 여러 감정이 음식의 향처럼 피어나는 듯 했다.
“기뻐서 그러는 거야.”
“기쁘다니….”
“어릴 때 이후로 가주님과 함께 밥을 먹은 게 처음이거든.”
실비아는 식탁에서 글렌을 보는 건 유아 나이 이후 처음이라며 달빛처럼 은은하게 웃었다.
“음….”
라온은 글렌이 주고 간 술로 입술을 축이는 실비아를 보며 손가락을 매만졌다.
‘그렇게 좋으신 건가.’
암살자로 살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아버지의 존재에 대해 모르기 때문인지 실비아의 감정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기뻐하니, 자신 역시 술에 취한 것처럼 가슴이 뜨거워졌다.
-쯧쯧.
라스가 두둑해진 배를 두드리며 짧게 혀를 찼다.
-적의 심리만 파악할 줄 알지, 사람의 감정을 이리 모르다니, 역시 네놈에겐 마계가 어울리느니라.
녀석은 배워야 할 게 많다며 한심하다는 듯한 시선을 내렸다.
-본왕과 함께 마계에 가면 네놈에게도 인간의 마음이….
‘배부르니 또 말이 많아지네.’
라온은 살이 투실하니 오른 라스를 밀어내고 입맛을 다셨다.
‘공을 몇 번 더 세우면 되려나.’
글렌이 다시 이곳에 오기는 힘들겠지만, 언젠가 그런 일이 일어나서 실비아와 다시 한번 밥을 먹어주었으면 좋겠다.
“준비를 단단히 해 놔서 다행이었어.”
실비아가 방긋 웃으며 시녀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수고했고, 고마워.”
“아닙니다.”
헬렌이 다 안다는 듯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희도 준비하면서 즐거웠어요!”
“가주님이 맛있게 드셔 주셔서 감사할 뿐이에요!”
시녀들은 이마 위에 맺힌 식은땀을 닦으며 옅게 웃었다.
“그치만 가주님이 계실 때는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몰랐어요."
“나도 그랬어. 맛을 모르겠더라고….”
“가주님이랑 한 식탁에서 밥을 먹다니, 아무도 안 믿을 거야.”
“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들은 힘이 다 빠진 것 같다며 의자에 등을 기댄 채 흐느적거렸다.
“렉타르 님과 무스턴 님도 분위기를 맞춰주셔서 감사해요.”
실비아가 일어나서 렉타르와 무스턴에게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손님이니 당연한 일 아니겠소.”
렉타르는 즐거운 시간이었다며 담담하게 턱을 주억거렸다.
“라온 님의 어머님이시니, 무얼 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아직도 딱딱한 주종관계가 박혀 있는 무스턴은 본인을 써먹었어도 괜찮았다며 식탁에 머리를 박았다.
“아, 네….”
실비아는 당황하며 눈을 빠르게 꿈뻑였다. 그녀는 대체 저 사람에게 무얼 했냐는 듯 라온에게 매서운 시선을 쏘아냈다.
“하아….”
라온이 흔들리는 식탁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쟤도 교육 좀 시켜야겠어.’
주종이 아니라, 친구처럼 생각하게 교육시켜놔야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워 질 것 같았다.
“가주님은 잘 즐기셨는지 모르겠네.”
실비아는 글렌이 앉아 있던 의자를 가볍게 쓸어내렸다.
“만족하셨을 거예요.”
라온이 담담한 눈동자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주님은 거짓말을 하는 성격이 아니시잖아요. 잘 드셨다고 하셨던 건 진심일 거예요.”
“그건 그래.”
실비아가 빙긋 웃으며 과일을 오물거리며 씹고 있는 유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유아야.”
“네!”
유아가 활기 넘치게 손을 들어 올렸다.
“어떻게 가주님을 모셔올 생각을 한 거야? 무섭지는 않았어?”
실비아의 질문에 식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유아에게 향했다. 모두가 왜 글렌을 데리고 오려고 한 건지 궁금했던 것이다.
“마님이 항상 말씀하셨잖아요! 밥은 함께 먹어야 맛있다고! 그리고….”
유아가 옅게 웃으며 파인애플이 찍힌 포크를 들어 올렸다.
“가주님은 무섭지 않아요. 다정하신 분이에요.”
녀석은 파인애플을 한입에 삼키며 구김 없이 웃었다.
“외로워하실 것 같으니, 앞으로도 함께 놀아주세요!”
* * *
렉타르는 글렌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라온과 실비아를 보며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이게 혈육이라는 건가.’
글렌이 실비아와 라온을 어떻게 대했는지는 대충 알고 있다.
실비아와 라온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그리고 글렌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모두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다만 글렌과 이들 사이에는 갈라진 절벽이 있어서 그 거리를 좁히기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아무리 딸과 아버지라고 해도 너무 다른 길을 걸어와 쉽게 가까워지기는 힘들 거라 여겼다.
‘하지만 아니었어.'
단 한 번의 식사자리. 밥을 함께 먹은 것만으로 실비아와 글렌 그리고 라온은 이전보다 확연히 거리를 좁힌 것처럼 보였다.
지금까지는 크게 신경을 쓰고 살지 않았지만, 왜들 그렇게 핏줄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 것 같았다.
“후….”
렉타르가 글렌이 가져온 술을 들이키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반은 내 핏줄이거늘….’
그 말을 할 수가 없구나.
속마음을 밝힐 수 없는 게, 정체를 말하지 못하는 게 너무 답답하여 체한 듯 속이 무거워졌다.
‘참으로 거짓말 같은 관계야.’
당장 모든 사실을 말하고, 마음 편히 며느리와 손자를 안아보고 싶었지만, 저 둘을 위해서라도 지금은 정체를 밝힐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앞으로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라온과 실비아에게 정체를 밝히기 위해서는 련을 떠나야 하는데, 련주의 마지막 부탁이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험난하겠지. 다만….’
이곳으로 돌아와야 해. 무조건.
힘겹게 살아온 며느리와 손주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그 어떤 일이라도 해야 한다.
테이블 아래에서 주먹을 말아 쥐며 마음을 다졌다.
렉타르가 술이 얼마 남지 않은 잔을 들어 올렸다. 찰랑이는 붉은빛 술 뒤로 옅은 미소를 짓는 라온과 실비아가 비쳤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희 둘만큼은 책임지겠다.
잔에 담긴 술을 반 정도 들이켠 뒤 텅 비어 있는 글렌의 자리를 향해 잔을 들어올렸다.
‘사돈. 이번에는 라온이 당신의 잔을 먼저 따랐지만, 다음에는 지지 않겠소. 그때는 친할아버지가 먼저야!’
렉타르는 피식 웃으며 한 모금도 되지 않는 술을 비웠다. 웃기게도 술맛은 가장 좋았다.
‘나중에 또 한잔합시다.’
* * *
라온은 이른 새벽에 5연무장으로 나와 몸을 풀었다.
어제 글렌과 렉타르에게 배운 가르침을 몸과 정신에 새기기 위해서는 개인 훈련 시간이 더 필요했기에 일찍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고로롱….
너무 일렀는지 라스는 아직 깨어나지 못했다. 얼음 꽃팔찌에서는 녀석이 코를 고는 소리만 들려왔다.
‘하여튼.’
피식 웃으며 제천검을 뽑았다. 글렌과 렉타르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광아검을 내리쳤다.
장인이 깎은 명검처럼 날카로움만 가득했던 검술이 손목의 비틀림을 이어가며 섬세한 변화를 피워냈다.
제천검의 검신이 민들레 씨처럼 흩어지며 검의 물결을 불러온다. 끝없이 출렁이는 검파가 연무장 바닥에 수십 개의 상흔을 그어 내렸다.
변화의 극의는 아니더라도, 이전에 비하면 많은 차이가 나는 성취였다.
‘다음.’
라온은 전력으로 변검을 펼친 후에도 제천검을 내리지 않았다. 다시 광아검의 첫 번째 초식으로 돌아가서 환검의 묘리를 휘감았다.
화아아아아!
거대한 붓으로 그림을 그리듯 제천검이 번지며 허공에 자욱한 검의 안개를 펼쳐냈다.
변검처럼 다채로운 검로는 아니지만, 환상으로 그린 검에는 진검과 같은 살기가 깃들어 있었다.
“후우….”
라온은 광아검을 연달아 여섯 번 펼치고서 탁기를 뱉어냈다.
‘잘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
글렌과 렉타르 모두 칭찬을 해주지 않고, 계속 모자람만 지적하기에 제대로 성취가 쌓여가는 건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발전한다는 느낌은 드는데 그게 어느 정도 수준인지 모르겠다.
‘검의 길이란 멀고도 깊네.’
강검, 쾌검, 중검만큼은 아니지만, 변검과 환검도 꾸준히 익혀왔는데, 계속 부족한 점만 지적당하니, 민망할 지경이다.
리메르에게 들었던 대로, 무학에 끝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치이이잉.
라온이 제천검을 중단에 세웠다.
‘그럼 그걸 써볼까.’
변검과 환검의 극치라 불려도 과언이 아닌, 만화공의 검술. 화령. 변검과 환검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제천검에 만화공의 열기를 두르려고 할 때 연무장의 문이 열리고, 렉타르가 들어왔다.
“오셨습니까.”
라온은 다시 제천검을 아래로 내리고 렉타르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래. 잘 잤나?”
“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휴가도 끝나가는 것으로 아는데, 무리하지 말고.”
“알고 있습니다.”
“그럼 바로 시작하도록 하지. 오늘도 환검부터 시작하겠다.”
“예.”
“잠깐!”
라온이 자세를 잡고, 제천검에 환검의 묘리를 담으려고 할 때 렉타르가 손을 저었다.
“오늘은 내가 먼저 시범을 보이마. 그대로 따라 하거라.”
렉타르는 대답조차 듣지 않고, 눈앞에서 검을 들어 올렸다. 그의 검이 떠오르는 햇살처럼 번지며 수백 개의 검의 환영을 그렸다.
“어떠냐.”
그는 어딘가 글렌과 비슷한 미소를 지으며 이대로 따라 하라고 지시했다.
“어….”
라온은 하나씩 사라지는 검영이 아니라, 턱을 치켜드는 렉타르를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 표정 역시 글렌과 비슷했다.
‘이제 겨우 적응이 끝났는데.’
왜 방식이 바뀌는 거야….
* * *
“음?”
버렌은 5연무장 정문 앞에 모여 있는 광풍대 검사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녀석들도 수련하러 온 건가?’
휴가가 얼마 남지 않아서 몸 좀 풀려고 왔는데, 저들 역시 가볍게 수련을 하려고 나온 것 같았다.
‘근데 왜 안 들어가고 문 앞에 서 있는 거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검사들에게 손짓을 했다.
“너희 뭐하냐?”
“쉿!”
“입 닫아!”
“조용히 하세요!”
루난과 마르타, 도리안이 고개를 흔들며 입을 다물라는 제스처를 보내왔다.
“음?”
버렌이 어벙하게 서 있을 때 뒤에 있던 크레인이 손짓을 했다.
“소리 내지 말고 이쪽으로 오세요.”
“아, 어….”
고개를 끄덕이고 모두의 옆으로 다가갔다.
“저기 한번 보세요.”
크레인의 손짓을 따라 문틈으로 연무장 내부를 살펴보았다.
“라온하고… 어? 가주님?”
버렌이 깜짝 놀라서 입을 떡 벌렸다.
“가주님이 라온을 가르치시는 거야?”
“맞아요. 오전에는 검귀 님이 가르치셨대요.”
크레인은 비밀을 밝히듯 작게 속삭였다.
‘가주님이 왜 라온을?’
렉타르는 광풍대 모두의 검술을 봐주었으니 이해를 하겠지만, 글렌이 라온을 가르치는 이유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 건지….’
최근에는 아버지를 포함한 전주들도 글렌에게 배우질 못했다고 들었는데,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다.
“아!”
크레인이 연무장 안을 살피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알현실에서 가주님이 부대주님한테만 부상을 안 주셨잖아요. 그걸 대신해서 직접 가르쳐주시는 거 아닐까요?”
“아, 그거네!”
마르타가 문틈에서 고개를 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짜증나지만, 받을 만도 해. 아리안 가문의 전쟁도 저 녀석이 8할은 끝냈으니까.”
아리안 가문에서 광풍대 전체가 죽을힘을 썼지만, 가장 고생한 건 라온이었다.
녀석이 어떻게 싸웠는지를 알고 있기에 질투의 감정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래도 부럽기는 하지만.”
마르타가 입술을 꾹 깨물 때 루난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마르탕 부러웡?”
루난은 손에 든 구슬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그거 하지 말라고 했지!”
“냥냥 하지 말라고 했는데?”
“아니, 그 말투 자체를 하지 말라고!”
“싫엉.”
“이게에에!”
마르타가 달려들고 루난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도망쳤다. 이젠 익숙한 일이라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와, 부대주님이 지치는 모습도 다보네.”
도리안이 무릎을 잡고 숨을 몰아쉬는 라온을 보며 배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나도 저 인간이 수련에서 저렇게 힘들어 할 줄은 몰랐어. 근데….”
크레인이 동의한다며 크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뭔가 속이 좀 시원하지 않아요? 난 이상하게 기분이 좋네.”
그는 항상 멀쩡한 상태로 수련을 시키는 모습을 보다가 고생하는 모습을 보니, 속이 시원하다고 중얼거렸다.
“나만 이러는 거 아니죠?”
“나도 솔직히 시원하기는 해.”
버렌이 픽 웃으며 뺨을 긁적였다. 땀 한 방울 안 흘리던 녀석이 지쳐서 헥헥거리는 모습을 보니, 낮에 먹었던 음식이 전부 소화가 된 듯 속이 가벼워졌다.
“마찬가지야.”
마르타가 차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녀석도 당하는 입장을 좀 겪어봐야지.”
그녀는 라온이 한참 더 고생을 해야 한다고 중얼거렸다.
“동의.”
루난이 마르타에게서 한발자국 떨어져서 손을 들어올렸다.
“이번만큼은 나찰녀의 말에 동의.”
“네가 이번에는 뭘 좀 아는. 나찰녀라고 하지 말라고!”
마르타는 웃다 말고 악귀의 얼굴이 되어 루난에게 달려들었고, 둘은 또 술래잡기를 시작했다.
“부대주님도 수련이 힘들다는 걸 좀 알아야 해.”
“맞아. 그래야 우리한테 함부로 안 하지.”
“저렇게 당하면 부대주님도 깨달았을 거야. 눈높이가 다른 훈련이 힘들다는 걸.”
“앞으로는 수련이 좀 편해지겠는데.”
광풍대 검사들도 지금까지 고생한 것을 떠올리며 세차게 고개를 끄덕일 때 연무장 문이 쾅 소리와 함께 열렸다.
후우웅.
거친 모래바람이 멎고, 연무장 내부가 보인다. 글렌은 이미 연무장을 떠났고, 라온은 짐승처럼 허리를 굽힌 채 눈동자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왔으면 들어오지 거기서 뭐해?”
“아….”
“그, 그게….”
라온의 입에서 뿜어지는 검은 김에 광풍대 검사들은 오한이 든 듯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내가 이번에 직접 겪어보고 깨달은 게 있어.”
그가 부드럽게 입매를 말아 올렸지만, 그 미소에서는 사악한 기질이 번들거렸다.
“철을 두드리면 단단해지듯이 사람은 고생할수록 더 강해지더라고. 내가 그동안 너희에게 너무 물렀던 것 같다.”
그가 더욱 짙고 섬뜩한 웃음을 흘리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너희가 더 단단한 철이 될 수 있도록 내가 도와줄게.”
라온의 유연한 손짓이 꼭 피가 묻은 사신의 낫처럼 보였다.
“우리는 처, 철이 아닌데?”
“으응! 아직 휴가도 안 끝났엉!”
“…조, 졸려.”
버렌과 마르타, 루난은 라온의 눈동자에 번들거리는 광기를 보고 턱을 덜덜 떨었다.
‘아아….’
‘마, 망했다….’
‘고생을 덜 시키는 게 아니라, 더 시킨다고?’
‘저, 저 인간 잘못된 방향으로 깨달았어!’
광풍대 검사들도 하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괘, 괜찮아요! 오늘은 돌아갈게요.”
“맞아요. 지금 집에 환자가 있어서….”
“난 부모님하고 약속이… 허억!”
“으아아악!”
“뒤, 뒤야! 뒤에 있어!”
모두가 뒷걸음질을 쳤지만, 어느새 뒤로 이동한 라온이 길목을 막고 있었다.
“괜찮아.”
라온이 광풍대 검사들의 목덜미를 꽉 움켜쥔 채 광기 어린 눈동자를 빛냈다.
“첫날이니까.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그리고 나만 당할 수는 없잖아.”
“지, 지금 나만 당할 수는 없다고… 켁!”
“시끄러.”
그는 크레인의 입을 치고서 목덜미를 잡은 광풍대 검사들을 연무장으로 던져버렸다.
“시작해보자고.”
라온이 오싹함을 두른 웃음과 함께 제천검을 뽑았다.
“끝없는 검술 지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