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435화 (435/653)
  • 제435화

    “후….”

    글렌은 라온을 데리러 온 렉타르와 유아를 보며 갑갑한 한숨을 내쉬었다.

    ‘파티인가.’

    이야기를 들어보니, 오늘 광풍대 승급 축하 파티를 연다는 것 같았다. 크게 여는 게 아니라, 별관 식구들끼리 조촐하게 한다고 해도 할아버지인 자신 대신 렉타르가 그곳에 끼어있다는 게 속이 쓰렸다.

    ‘다만….’

    차마 내 입으로 함께하고 싶다는 말은 나오지 않는군.

    라온을 직접 가르치는 것까지는 용기를 낼 수 있었지만, 실비아가 있는 별관의 축하 파티에 참여하고 싶다는 말을 꺼내는 건 무리였다.

    절대 입이 열리지 않을 것이다.

    ‘한심하구나. 글렌.’

    북멸왕이니, 뇌신이니 불리지만, 사실은 딸과 손주의 어색한 시선이 두려워 손가락 하나 꼼짝 못 하는 겁쟁이에 불과했다.

    이 와중에도 별관에 가서 라온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싶다는 욕망이 들어 민망하면서도 답답해 헛웃음이 나왔다.

    글렌이 라온과 대화하는 렉타르를 보며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파티에는 당신이 가겠지만, 라온을 키우는 것만큼은 지지 않을 거요.’

    렉타르를 보며 의지를 다지고 있을 때 작은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라온이 하분성에서 데리고 온 특별한 재능을 지닌 유아라는 아이였다.

    “…….”

    유아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옆으로 다가와 멍하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이를 상대하는 건 어색하여 먼저 돌아가려고 할 때 유아가 작은 손을 뻗어서 자신의 손가락을 잡았다.

    “음?”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서 떼어놓으려고 할 때 아이의 말이 이어졌다.

    “가주님도 함께 가실래요?”

    유아는 잡은 손가락을 당기며 오늘 축하 파티에 가주님이 오시면 더 좋을 거라며 상큼하게 웃었다.

    “오늘 파티하는데!”

    “으음….”

    글렌은 새끼손가락에서 전해지는 따스함에 아이의 손을 떼어놓지 못했다. 이런 기분은 어린 라온을 몰래 안아주었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유아야!”

    라온이 다급하게 달려와서 유아를 잡았다.

    “죄송합니다. 아직 어려서 예의를 잘 모릅니다.”

    그는 어린아이의 실수라고 말하면서 한 번만 용서해달라고 사정했다.

    “이건….”

    글렌은 별일 아니었다고 고개를 저으려다 말고 멈춰 섰다. 라온의 눈동자를 보자, 리메르가 죽어가면서 던졌던 말이 떠올랐다.

    <평생 동굴에 박혀 있다가 라온이랑 술 한 잔도 못 하고 늙어 죽으십쇼!>

    ‘그래.’

    죽기 전에 손주와 술잔은 나눠야겠지. 철면피를 쓰더라도 한 번쯤은.

    시선을 들어 렉타르를 보았다. 그는 본인이 이겼다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 영감탱이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포기하고, 수긍했던 마음이 녹아내리며 새로운 불씨가 뜨겁게 타올랐다.

    “이리 오거라.”

    글렌이 라온의 뒤에서 빼꼼히 눈을 뜨고 있는 유아에게 손짓했다.

    “숙녀의 초대를 받았으면 거절하지 않는 게 예의겠지.”

    민망하고 부끄러워서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을 철사로 조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아이의 손을 잡고 옅게 웃어주었다.

    “그 파티. 나도 가도록 하마.”

    * * *

    라온이 테이블 위에 놓인 식기를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대체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거지?’

    분명 별관 식구들끼리 가볍게 승급 축하 파티를 열기로 했는데, 지금 이 자리에 불청객이 아닌, 불청객이 와 있었다.

    ‘이게 꿈은 아니겠지?’

    입술을 가늘게 떨며 우측으로 고개를 돌렸다.

    글렌이 살짝 상기된 얼굴로 상석 자리에 앉아 있었고, 그 옆에 있는 실비아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어깨를 떨고 있었다.

    “으….”

    “흐으윽….”

    식탁 뒤편에 선 헬렌과 시녀들 역시 곧 죽을 듯한 신음을 흘렸다. 지금 이 자리에서 여유 있는 사람은 글렌과 그를 불러온 유아뿐이었다.

    “흐음….”

    렉타르는 손님으로 참여한다며 스스로 테이블의 끝자리에 앉았는데, 질투와 흥미가 뒤섞인 눈으로 글렌을 바라보고 있었다.

    트득.

    라온이 손가락으로 가볍게 테이블을 두드리며 글렌을 살폈다.

    ‘진짜 오실 줄 몰랐는데….’

    유아가 글렌을 초대한 건 분명 예상외의 일이었지만, 아이의 실수라 생각하고 당연히 거절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숙녀의 제안을 거절하는 게 아니라며 술을 가지고 파티에 참석했다.

    별관의 문 앞에 선 글렌을 보았을 때 실비아와 헬렌의 표정은 고양이 앞에 선 쥐보다도 사색이 되어 있었다.

    “저어….”

    실비아가 눈가를 파르르 떨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오, 오늘은 라온과 유아, 율리우스가 속해 있는 광풍단이 광풍대로 승급한 걸 축하하기 위해서 다, 단단히 준비했으니까. 모두 즐겨주세요!”

    그녀는 글렌과 렉타르가 있기에 말을 높이며 손을 펼쳤다. 손가락에서 파르르 진동이 일어나는 게 안쓰러웠다.

    “그럼 시작해줘.”

    “아, 네!”

    "시, 식사 들어갑니다."

    실비아의 지시에 시녀들이 기다렸다는 듯 열심히 준비한 요리들을 가지고 식당에 들어왔다.

    자연스럽던 움직임들이 목각인형처럼 삐걱거린다. 큰 테이블이 흔들릴 정도였다.

    오죽하면 그 냉정한 주디엘마저 떨다가 포크 하나를 바닥에 떨어트렸을 정도였다.

    “…….”

    글렌은 시녀들이 실수해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맞은편에 앉은 렉타르를 바라보았다.

    렉타르 역시 글렌을 마주 보며 눈빛을 가라앉혔다. 두 사람의 시선 사이에서 불똥이 튀기는 듯 보였다.

    -한심하구나.

    라스가 글렌과 렉타르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이를 먹고, 강한 인간이라고 해도 유치한 건 어쩔 수 없느니라.

    ‘그러네.’

    연무장에 이어서 별관 식탁에서 눈싸움 2차전을 벌이는 영감님들을 보니,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글렌과 렉타르가 쓸데없는 안구 힘겨루기를 하는 동안, 어느새 식탁 위는 헬렌과 시녀들이 준비한 맛깔스러운 음식들로 가득 찼다. 지금 막 완성했기에 요리 위로 더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무얼 하는 것이냐!

    라스가 벌떡 몸을 세워서 동그란 손을 바둥거렸다.

    -저 노인네들에게 신경 끄고, 포크를 들어라! 본왕에게 이틀 연속으로 고무 빵을 먹였으니, 각오는 되어 있겠지?

    녀석은 오늘 배가 터져도 이 음식들을 모두 먹을 것이라며 입맛을 다셨다.

    라온이 눈이 뻘게진 라스를 밀어내고 글렌을 바라보았다.

    '기다려 봐.'

    본래 별관의 식사 예절은 각자 알아서 음식을 즐기는 것이지만, 가주인 글렌이 있을 때도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시녀들은 식사를 모두 차리고서 평소처럼 식탁에 앉는 게 아니라, 글렌의 눈치를 보며 뒤편에 정자세로 서 있었다.

    실비아는 본인만이 아니라, 시녀들에게도 피해가 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조용히 있었고, 렉타르도 지금 이곳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켜만 보았다.

    “음.”

    글렌은 음식들을 바라보다가 느긋하게 시선을 들어 올렸다.

    “왜들 서 있는 것이지? 내가 알기로 별관은 모두 함께 식사한다고 들었는데?”

    그는 차분한 음성으로 시녀들에게 의자에 앉으라 지시를 내렸다.

    “가, 가주님.”

    실비아가 글렌에게 고개를 홱 돌렸다.

    “저 아이들이 이곳에 앉는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녀는 글렌이 별관의 사정을 아는 게 신기한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크흠!”

    글렌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손가락을 까딱이다가 살짝 굳은 입술을 뗐다.

    “…리메르가 말해주었다.”

    “아, 그렇군요.”

    실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리메르는 돈이 떨어지면 별관에 밥을 얻어먹으러 자주 왔기에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여기는 듯했다.

    “가주님께서 허락하셨으니, 모두 앉으렴.”

    그녀는 어색하게 서 있는 시녀들에게 손짓해서 자리에 앉으라고 지시했다.

    “…네.”

    “가, 감사합니다.”

    시녀들은 글렌에게 고개를 숙인 뒤 각자의 자리에 앉았다. 다만 그들은 서 있을 때보다 더 파리해진 안색으로 어깨를 떨었다.

    “…….”

    글렌부터 실비아, 렉타르까지 모두가 침묵하고 있을 때 주방 쪽에서부터 작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다 끝났어요!”

    유아는 율리우스와 함께 가져온 큼지막한 피자를 테이블 중앙에 내려놓았다. 그녀의 할아버지가 한층 더 개선한 파인애플 피자였다.

    -크으윽!

    라스가 유아를 보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역시 파인애플 소녀이니라! 그 사이에 저 대작을 완성하다니, 역시 대단하느니라! 빨리 먹어보아라!

    ‘기다려 봐.’

    녀석은 빨리 피자를 먹으라고 재촉했지만, 글렌이 가만히 있으니, 손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

    두 번째 침묵이 시작되었다. 모두가 어색해하며 글렌과 렉타르의 눈치를 보고 있을 때였다.

    꼬르르륵.

    율리우스의 배에서 우렁찬 천둥이 울렸다.

    “죄, 죄송합니다!”

    녀석이 실례했다며 바로 고개를 꾸벅였지만, 타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긴장이 깨져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람이 많았다.

    “흠.”

    글렌이 먼저 스푼을 들어 올렸다.

    “식기 전에 들도록 하지.”

    그가 먼저 수프를 먹기 시작하자, 실비아와 헬렌, 시녀들이 기계가 된 것처럼 딱딱한 자세로 수프를 떠먹었다.

    후르륵.

    수프가 각자의 입에 들어가는 아주 작은 소음이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인형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주었다.

    -야아아아아!

    라온이 어색하게 식사하고 있을 때 라스가 머리 위에서 뒹굴기 시작했다.

    -수프는 됐으니, 다른 것 좀 먹어라! 소구이나, 양갈비, 피자도 있잖느냐!

    ‘지금 먹었다간 체할 거 같아서….’

    녀석이 이거저거를 먹으라고 외쳤지만, 글렌의 시선 때문에 쉽게 손이 나아가지 않았다.

    “…….”

    세 번째 침묵. 식탁 위는 첩보 전쟁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만 가득할 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후.”

    글렌이 무표정으로 스푼을 내려놓았을 때 유아가 팔짝 일어났다.

    “가주님! 이거 드셔 보세요! 라온 도련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거예요!”

    유아는 조금 전에 본인이 가져온 파인애플 피자 한 조각을 덜어서 글렌의 앞접시에 놓아주었다.

    “아흑!”

    “유, 유아야!”

    “허억!”

    “으어….”

    유아의 갑작스러운 돌발행동에 실비아와 헬렌, 시녀들의 눈동자가 튀어나올 정도로 커졌다.

    모두가 당황하여 제대로 말을 잇지도 못했다.

    다만 글렌은 인상 한번 찡그리지 않고, 유아가 덜어준 피자를 입에 넣었다. 그는 입을 다문 채 피자를 씹어 삼키고서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구나.”

    “그렇죠! 우리 할아버지가 만드신 레시피거든요!”

    유아는 글렌에게 할아버지를 자랑하며 헤헤 웃었다.

    “할아버지가 자랑스럽겠어.”

    글렌은 유아의 말에 대꾸해주며 피자를 한입 더 먹었다.

    “당연하죠! 하분성 제일의 요리사신 걸요!”

    유아가 당연하다는 듯 번쩍 손을 들어 올렸다.

    두 사람의 짧고 굵은 대화에 식탁 전체를 채우고 있던 긴장감이 확연하게 가셨다.

    “유아야. 이 할아버지에게도 줄 수 있겠느냐.”

    “네!”

    렉타르가 손짓을 하자, 유아가 상큼하게 웃으며 피자를 나누어주었다.

    “허어! 점장보다 더 나은데?”

    글렌과 렉타르가 만족스럽게 피자를 먹자, 떨림이 잦아든 실비아와 시녀들이 제대로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허….”

    라온은 방실거리며 식탁의 분위기를 따스하게 만드는 유아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리듬을 배웠기 때문인가.’

    유아는 식탁에 가득 차오른 긴장감과 무거운 분위기를 풀어내기 위해서 스스로 움직인 것 같았다.

    ‘아니, 그냥 즐거워서 그럴지도.’

    얼굴과 표정이 무서운 글렌이나 렉타르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는 것을 보면 천성이 저럴지도 몰랐다.

    ‘어쨌든 덕분에 살 것 같네.’

    -이 자식아….

    라온이 유아를 보며 미소를 지을 때 라스가 빽 소리를 질렀다.

    -음식이 다 사라지지 않느냐! 제발 좀 먹어달라고! 아직도 입에서 고무 맛이 난단 말이다!

    ‘알겠다. 알겠어.’

    라스의 고함에 고개를 끄덕이고서 유아의 피자를 먹어보았다.

    ‘와….’

    렉타르의 말대로 유아의 할아버지가 만든 피자 이상의 맛이었다.

    각종 고기와 채소 그리고 잘 구운 파인애플이 조화를 이뤄서 한입에 다양한 맛이 조화롭게 풀려나왔다. 글렌이 괜히 인정한 게 아니었다.

    -크으으으! 이거지! 드디어 혓바닥에 달라붙어 있던 고무가 떨어져 나갔느니라!

    라스는 나딘빵의 맛이 이제야 사라졌다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다음은 고기구이를 가져오너라! 양갈비도 필수이니라!

    ‘예이….’

    라온이 라스의 요구를 들어주며, 다른 음식들을 앞접시에 덜어 올 때 렉타르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가주님.”

    그는 글렌 앞에 놓여 있는 붉은 술병을 보며 테이블을 매만졌다.

    “그 술은 직접 가져오신 겁니까?”

    “그렇소.”

    글렌이 고개를 끄덕이며 술병을 앞으로 밀었다.

    “파티에 초대받았는데, 맨손으로 올 수는 없으니, 잡히는 것으로 가져왔소.”

    사실 이 술은 라온이 망혼귀를 베었을 때부터 준비해두었던 최고급 술이다.

    같은 무게의 백금보다도 훨씬 비싼 최고급 술이었지만, 일부러 커버를 떼어서 싸구려처럼 위장했다.

    ‘뭐, 술이 다 거기서 거기지.’

    라온이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식사하려 할 때 식탁 밑에서 누군가가 발을 건드렸다.

    이 방향에 있는 건 실비아뿐이라 고개를 들어 올리자, 그녀가 글렌을 향해 눈짓했다.

    ‘술을 따르라는 건가?’

    눈빛을 보니, 글렌에게 저 술을 따라주라는 뜻 같았다.

    ‘하긴 그게 예의겠지.’

    불편한 어른과 식사 자리를 갖는 게 처음이라, 몰랐지만, 실비아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가주님.”

    라온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글렌의 옆으로 다가갔다.

    “제가 따라드려도 되겠습니까?”

    “…뭐, 마음대로 해라.”

    글렌은 반대편을 보면서 술병을 밀어주었다.

    “감사합니다.”

    라온이 술병을 받아서 뚜껑을 열었다. 시원한 개방음과 함께 고급스러우면서도 달큰한 향이 부드럽게 피어났다.

    싸구려라는 말과 달리 최고급품이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음?’

    글렌의 잔에 술을 따르려는데, 그의 표정이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것처럼 변했다.

    눈동자는 가늘게 떨리고, 볼을 상기되었으며, 입꼬리가 바람맞은 갈대처럼 흔들렸다. 누가 보면 이미 거하게 취한 사람으로 볼 것 같았다.

    ‘술이 약하신 건가? 아니면 좋아하시는 건가.’

    주향만 맡고 취한 건지, 아니면 술맛이 기대되어서 저러는 건지 잘 모르겠다.

    라온은 살짝 고개를 저으며 글렌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그 정도면 되었다.”

    글렌은 술이 중간 정도 찼을 때 잔을 들어 올렸다.

    “다른 이들에게도 따라 주거라.”

    그는 그 말을 하면서 반대편에 앉은 렉타르에게 술잔을 들어 올렸다.

    조금 전 표현할 수 없을 때와 다르게 대놓고 자랑을 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끄으응….”

    웃긴 게 렉타르는 또 분한 듯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뭣들 하시는 건지.’

    라온은 참 이상한 영감님들이라고 생각하며 무스턴의 잔에도 술을 따라주었다.

    실비아와 헬렌을 비롯한 시녀들의 잔에도 술을 조금씩 따라주고 자리로 돌아왔다.

    실비아라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잔을 앞으로 내밀며 라온을 바라보았다.

    “라온, 유아, 율리우스! 승급 축하해! 앞으로도 기대할게!”

    그녀의 외침에 시녀들도 앞으로 잔을 내밀었다.

    “도련님! 축하드려요!”

    “축하합니다!”

    “유아, 율리우스도 축하해!”

    “무사히만 돌아와 주세요!”

    시녀들도 이번만큼은 글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축하의 인사를 보냈다.

    “축하한다.”

    글렌은 들릴락 말락 한 음성을 보내며 잔을 들어 올렸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굉장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럼 짠!”

    실비아가 먼저 잔을 부딪치는 소리를 낸 뒤 글렌을 바라보았다.

    “음….”

    글렌은 그 시선의 의미를 알아듣고 먼저 술을 들이켰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술을 마셨다.

    -꿱! 맛없느니라!

    라스는 술이 맛없다며 빨리 피자로 입가심을 하라고 떠들어댔다.

    ‘다른 것도 좀 먹자.’

    라온이 라스를 밀어내고, 스튜를 개인 그릇에 담아가며 글렌을 흘깃 보았다.

    그는 술잔 안의 금색 술을 황홀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아주 천천히 아껴서 마셨다.

    ‘역시 술을 좋아하시는 거였네.’

    조금 전 글렌의 얼굴이 밝아 보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글렌은 유아가 떠 준 피자와 자신이 따라준 술을 천천히 음미했다. 잔에 남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비운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 가주님?”

    실비아와 시녀들이 당황하며 동시에 일어났다.

    “이만 가보도록 하지.”

    글렌은 이 정도면 충분히 즐긴 것 같다며 고개를 저었다.

    “실비아.”

    “아, 네!”

    실비아가 마른침을 삼키며 벌떡 일어났다.

    “맛있었다.”

    글렌은 실비아와 라온을 지그시 바라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축하한다.”

    그는 그 말을 남기고, 주방 밖으로 향했다. 테이블 끝으로 가는 길에 렉타르를 향해 작게 중얼거렸다.

    “내가 먼저였소.”

    “윽….”

    렉타르가 인상을 확 구겼고, 글렌은 턱을 치켜들며 거만한 미소를 지었다.

    * * *

    “으하하함.”

    리메르는 숙소 침대에 드러누운 채로 입이 찢어질 정도로 크게 하품했다.

    “지루해 죽겠네.”

    글렌에게 너무 얻어맞아서 아직도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픈 것도 아픈 거지만, 아무것도 못 하니 심심해 죽을 것 같았다.

    “아, 파티한다고 했는데.”

    유아가 파티에 초대했는데, 움직이기 힘들어서 거절했다. 지금 생각하니, 억지로라도 참여할 걸 그랬다.

    “라온에게 데리러 오라고 할….”

    라온의 이름을 꺼낸 순간 숙소 문이 부서질 것처럼 거세게 열리고, 글렌이 들어왔다.

    “가, 가주님?”

    리메르가 입을 떡 벌리며 고개를 들었다.

    ‘이, 이 인간 진짜 뭐야? 라온 스토커야?’

    라온의 이야기를 꺼냈다고 바로 나타나다니, 이해가 안 되는 순발력이었다.

    “너.”

    “예?”

    “라온이랑 술 마실 때 그 아이가 술을 따라주었더냐?”

    “어….”

    리메르가 라온과 마셨던 술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술병만 던져주고 각자 마셨죠.”

    “그럼 도괴는?”

    “그때도 각자 퍼마셨던 것 같은데….”

    그가 도괴삼약을 떠올리며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군.”

    글렌이 허리를 쭉 펴고, 턱을 모로 튼 채 입꼬리를 길게 말아 올렸다.

    뭔지는 몰라도 본인이 이겼다는 재수 없는 표정이었다.

    “어….”

    너무도 얄미운 표정이라 리메르가 인상을 찡그렸다.

    ‘이 영감 오늘 왜 이러지?’

    평소와 너무 다른 모습이라 마른침을 삼키고 살짝 시선을 내렸다.

    “혹시 무슨 좋은 일 있으셨습니까?”

    “궁금한가?”

    “…구, 궁금하네요.”

    사실 별로 궁금하지는 않았지만, 들어주지 않으면 여기서 나가지 않을 것 같아서 물어보았다.

    “오늘 별관 파티에 초대되었는데.”

    “엑? 가, 가주님이 별관에 갔다구요?”

    “그래. 유아라는 아이가 초대해서 가게 되었지.”

    “크윽!”

    리메르가 유아의 양 갈래머리를 떠올리며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유아야! 네가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이뤘구나! 키운 보람이 있어!’

    실제로는 한순간도 키우지 않았지만, 일단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가서 무얼 하셨습니까?”

    “가볍게 식사했다. 그런데….”

    “그런데요?”

    “글쎄 라온이 내 잔에 가장 먼저 술을 따라주더구나. 누구보다도 먼저 내 잔에! 사실 누구와 먼저 술을 마시느냐는 중요한 게 아니야. 술을 누구에게 먼저 따라주었냐가 가장 중요한 요소….”

    “아….”

    리메르는 콧대가 천장을 뚫고 하늘에 올라간 글렌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그게 다야?’

    이 손주 바보야! 그걸 자랑이라고 하는 거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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