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434화 (434/653)
  • 제434화

    “렉타르 공. 당신의 시간은 끝났소. 상관하지 마시오.”

    “그건 수련에 관한 이야기일 때지요. 라온은 아침도 먹지 못했으니, 점심은 제대로 먹이는 게 옳은 일 아니겠습니까.”

    나딘빵을 가져온 글렌과 별관에 가서 점심을 먹어야 한다는 렉타르가 다시 한번 부딪쳤다.

    “저 아이는 아직 성장기 아닙니까.”

    “아이라….”

    글렌은 렉타르가 라온을 아이라 부르는 게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찡그렸다.

    “라온은 지그하르트의 식솔이요. 챙기는 것도 내가 챙기겠소.”

    “물론 알고 있습니다. 다만 지금이 전쟁 중도 아니고, 훈련이 다급한 상황도 아니니, 나딘빵보다는 잘 차려진 점심을 먹는 게 맞는 듯합니다.”

    렉타르가 라온의 손에 들린 나딘빵을 보며 입매를 굳혔다.

    “그렇게 잘 아는 사람이 아침도 굶기고 수련만 시킨 거요?”

    글렌은 렉타르를 채근하듯 턱을 치켜들었다.

    “으음, 그건….”

    렉타르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는지 시선을 내렸다.

    “어쨌든 저 고무 맛 나는 빵을 먹는 건 라온에게도 그리 좋은 일이 아니니, 식사 시간은 보장해 주십시오.”

    “무인에게 맛 따위는 중요하지 않소. 저 아이는 밥보다 수련을 선호하니, 시간을 아낄 수 있어서 오히려 좋아할 것이오.”

    글렌은 품에서 두 번째 나딘빵을 꺼내 본인이 직접 씹었다.

    고약한 고무 맛이 입안 가득 퍼지고 있을 게 분명함에도 그의 표정에는 자그마한 변화도 없었다. 솔선수범 그 자체였다.

    “거기다 나딘빵은 그저 배만 부르게 하는 용도가 아니오. 영양분도 충분하기에 수련자들의 필수품이라 불리는 것이지. 렉타르 공도 잘 알지 않소.”

    “당연히 저도 많이 먹어보았습니다. 그렇기에 막고 싶은 겁니다. 맛이 끔찍하지 않습니까. 수련에도 영향을 줄 겁니다.”

    글렌은 나딘빵을 먹고 바로 수련을 시작하자고 외쳤고, 렉타르는 조금이라도 영양과 맛이 있는 식사를 하자고 조언했다.

    두 사람은 이번에도 서로 물러서지 않은 채 논쟁을 시작했다.

    “음….”

    라온은 글렌과 렉타르의 다툼을 보며 혀로 입술을 축였다.

    ‘침이 바싹 마르네.’

    글렌과 렉타르가 새벽에 이어서 대낮에도 유치하게 말싸움을 하는 것을 보니, 어찌할 할 바를 모르겠다.

    “그대의 시간은 끝났소. 방해하지 말고 물러가시오.”

    “밥만 먹인다면 당연히 갈 겁니다. 별관에서 식사를 준비해 놓았을 텐데, 왜 빵으로 때우려고 하시는 겁니까.”

    두 사람은 칼을 들지만 않았을 뿐이지, 진심으로 화가 난 듯 표정을 빨갛게 굳혔다. 대체 어디서부터 일이 꼬인 건지 감이 오지 않았다.

    “후우….”

    라온이 글렌과 렉타르의 시선 중앙에서 튀겨나오는 스파크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둘 다 물러날 생각이 없는지 자그마한 기세가 피어나며 연무장 중앙에 거친 모래바람이 치솟기 시작했다.

    ‘사실 이번에는 가주님의 말이 맞는데.’

    나딘빵을 먹는 건 아무것도 아니니까.

    -맞기는 뭐가 맞아! 저 끔찍한 걸 먹다니! 역시 핏줄은 어디 안 가느니라! 혓바닥 괴물이니라!

    라스는 이번만큼은 혈연이 아니라, 인연을 따라야 한다며 어깨를 드럼처럼 두드렸다.

    “라온!”

    글렌과 렉타르가 동시에 이쪽을 돌아보았다.

    “너는 어쩌고 싶으냐. 바로 수련을 할 테냐. 아니면 밥을 먹으며 시간을 낭비할 셈이냐.”

    “새벽에도 굶었지 않느냐. 식사는 제대로 해야지.”

    두 사람은 어떻게든 상대를 이기고 싶은지 각자 식사와 훈련의 장단점을 퍼부었다.

    -밥! 당연히 밥이니라! 파인애플 소녀가 맛난 음식들을 깔아놓았을 텐데, 구경이라도 해야지!

    라스가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며 제발 밥을 먹으라고 비명을 질렀다.

    ‘미안하지만, 안 되겠어.’

    -에?

    ‘이번에는 가주님의 편을 들 차례라서.’

    식사와 나딘빵을 떠나서 오전에는 렉타르의 편을 들었으니, 이번에는 글렌 쪽에 서줄 차례였다.

    그에게 무학을 배워야 하는데, 기분 나쁘게 만들 필요는 없지 않은가.

    “저는 이걸 먹겠습니다.”

    라온은 손에 들고 있던 나딘빵을 한입에 삼켰다.

    -끄아아아아악!

    입안을 가득 채우는 눅진한 고무의 맛에 라스는 용사에게 퇴치당한 마왕처럼 비명을 지르고 쓰러졌다.

    ‘괜찮은데.’

    소시지가 들어간 짭짤한 빵을 먹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나딘빵을 천천히 씹어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수련 시작하시죠."

    그 말에 글렌의 얼굴에 시원한 미소가 흐르고, 렉타르의 미간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후….”

    라온은 극명한 대조를 이룬 글렌과 렉타르를 보며 탁한 한숨을 내쉬었다.

    ‘몸보다도 정신이 지치네….’

    * * *

    라온은 렉타르를 돌려보내고 승리의 미소를 지은 글렌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정말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어.’

    글렌이나, 렉타르가 서로 검을 가르쳐주겠다고 경쟁하는 이 상황이 여전히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런 여유로운 생각을 할 틈은 없었다.

    ‘다시 오기 힘든 기회니까.’

    북멸왕과 검귀 모두 분노의 군주인 라스가 인정할 정도의 무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1분 1초라도 아껴서 두 무인이 쌓은 정수를 얻어야 한다.

    “라온.”

    “예.”

    라온은 글렌의 부름을 듣고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내가 가르쳐야 할 검술이 변검과 유검, 연검이었나?”

    “그렇습니다.”

    “간단한 것들이로구나.”

    글렌은 세 검술 모두 그리 어려운 길이 아니라며 얼음장처럼 서늘한 눈빛을 쏘아냈다.

    ‘간단하지는 않은데….’

    글렌의 시선에 심장이 꽉 조여든다. 렉타르가 가르치는 검술들보다 깨닫는 게 느리면 땅에 묻어버릴 기세였다.

    “본래 계획은 네게 새로운 검술을 전수하려는 것이었지만, 그건 미루도록 하마. 일단 묘리부터 시작하지.”

    그가 손을 뻗자, 연무장 구석에 박혀 있던 수련검이 저절로 떠올라서 그의 손으로 날아왔다.

    차악.

    초절정에 오른 비검술을 역으로 펼친 것처럼 수련검은 부드럽게 글렌의 손아귀에 잡혔다.

    ‘그야말로 신기로군.’

    한참 멀리 떨어져 있는 물건을 바람을 탄 듯 자연스레 손으로 불러들이다니, 마나의 조율이 신의 경지에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후우웅.

    글렌은 수련검을 가볍게 휘돌린 뒤 라온과 마주 섰다.

    ‘시연을 해주시려는 건가.’

    놓쳐서는 안 돼.

    라온이 입술을 깨물며 불의 고리를 운용했다. 강한 적과 생사결을 치르는 것처럼 일곱 개의 고리를 전력으로 공명시켰다.

    그는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한 듯 느릿하게 수련검을 상단으로 들어 올렸다.

    “집중해서 보아라.”

    그 말과 함께 하늘을 찌르던 글렌의 수련검이 밑으로 떨어져 내린다.

    나뭇결이 그대로 보일 정도로 느리게 내려가는 칼날이 양쪽으로 비틀어진다. 돌을 던진 호수처럼 검날에서 파동이 번지며 헤아릴 수 없는 다채로운 검로가 눈앞을 가득 채웠다.

    렉타르가 보여주었던 환검과는 다르다. 검의 개수가 늘어나는 게 아니라, 검날에 화려하면서도 섬뜩한 변화가 얹어져 수백 개처럼 보이는 것이다. 저게 바로 변검의 극의인 것 같았다.

    ‘저 변화를 이루는 건 손목인가?’

    글렌이 운용하는 오러의 양은 익스퍼트 하급도 무리 없이 운용할 정도로 적았다. 그 작은 오러로 저런 변화를 만드는 건 그의 손목이 끝없이 움직이기 때문인 것 같았다.

    툭.

    글렌의 목검이 땅을 찍자, 허공을 가득 메운 검의 궤적들이 비에 씻긴 듯 사라졌다.

    “아….”

    변화의 극치에 이른 변검을 더 자세히 보지 못했다는 아쉬움에 자신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보았느냐?”

    글렌은 수련검의 검병을 살며시 잡으며 섬뜩한 눈빛을 쏘아냈다. 못 봤으면 죽일 기세였다.

    “다 보지는 못했습니다.”

    라온이 짧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네가 무엇을 보았는지 말해보거라.”

    “가주님의 손목입니다.”

    “손목?”

    “본래 변검을 펼칠 때는 손목을 많이 비트는데, 가주님의 손목은 미세한 각도로만 움직인 것에 반해 검에는 반대로 극심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불의 고리가 말해주는 건 오러가 아니라, 육체의 운용이었다. 글렌은 특별하지 않은 오러를 운용하며 손목을 적재적소에 비트는 것만으로 말도 안 되는 수준의 변화를 이뤄냈다.

    ‘이런 게 가능할 줄은 몰랐는데….’

    그랜드 마스터나, 초월자 급에 이르면 육체는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오러의 운용으로 무학의 수준이 결정된다고 생각했는데, 육체만으로도 이런 차이가 날 줄은 몰랐다. 개안을 한 듯한 기분이었다.

    “따라 할 수 있겠느냐?”

    “지금은 무리입니다.”

    라온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불의 고리가 있다고 해도, 현 상태에서 저것을 따라 하는 건 무리다. 현 육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다.

    “‘지금은’인가….”

    글렌은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래도 해보아라.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보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라온이 경쾌하게 제천검을 뽑았다. 시퍼런 칼날 사이로 담담한 글렌의 눈동자를 보며 검을 들어 올렸다.

    ‘검로가 변하는 방향과 가주님의 손목은 반대를 향했었지.’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미세한 변화였지만, 글렌은 손목과 검극을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아마 그 간극에 다채로운 변화의 비밀이 있을 것 같았다.

    ‘오러의 흐름은 파도처럼 거칠게.’

    머릿속에서 심상의 세계를 열었다. 글렌이 운용한 오러의 흐름과 그의 육체의 움직임을 그리며 제천검을 내리그었다.

    후우우웅!

    제천검이 잎이 뜬 찻물처럼 잔잔한 파동을 일으킨다. 푸른 월광처럼 이지러지는 칼날이 눈앞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조금 더….’

    글렌은 이보다 더 적은 오러로 훨씬 많은 변화를 이뤄냈다. 그 검을 봐놓고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라온은 제천검이 바닥을 향하는 그 순간까지 손목을 짧고, 굵게 비틀어서 최대한의 변화를 피워냈다.

    파아아앙!

    글렌과 달리 힘이 들어갔기에 제천검이 아래를 향하는 순간 거친 검풍이 폭발했다.

    글렌은 바닥에 내려선 제천검의 검극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보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치고 나쁘지 않구나.”

    그는 담담한 표정을 드러냈지만, 속으로는 두방망이질 치는 심장을 내리누르느라 바빴다.

    ‘이 아이는 진짜로군….’

    일부러 조금 난이도를 높여서 변검을 보여주었는데, 그 흐름을 잡을 줄은 몰랐다. 아직 한참 모자란 건 분명하지만, 재능의 수준은 천재라는 말로도 평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역시 너는 내 손자다!’

    당장 내뱉고 싶은 말을 꾹 참으며 입술을 살짝 씹었다.

    “흠.”

    글렌이 억지로 표정을 굳히며 검을 들어 올렸다.

    “다만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 처음이니 어쩔 수 없겠지.”

    그는 그 말과 함께 다시 변화를 담아낸 검을 내리쳤다.

    “다시 보아라.”

    “예.”

    라온이 눈동자에 불길을 태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우웅.

    옅은 바람과 함께 글렌의 수련검이 변화한다. 지금의 자신이 어떤 수를 써도 피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 칼날이 하늘에서 땅을 잇는 수백 개의 선을 이뤘다.

    난이도가 올랐는지 조금 전보다 더 빠른데, 더 깊은 변화가 심겨 있었다. 불의 고리를 운용했어도 반도 못 본 것 같았다.

    ‘재밌네.’

    하나씩 차분하게 알려주는 렉타르의 방식도 좋았지만, 이런 식으로 직접 시범을 보이고 따라오라고 말하는 글렌의 방식도 나쁘지 않았다.

    치이이잉.

    라온이 제천검에 타오른 적빛과 같은 색을 눈동자에 두르며 미소를 지었다.

    “다음 가겠습니다.”

    * * *

    렉타르는 글렌이 서 있던 북망산의 언덕 바로 옆 바위에 서서 5연무장을 내려다 보았다.

    “으음, 저런 수련이라니….”

    글렌의 가르침은 예상 이상으로 난해했다. 한 번 시연을 하고 그대로 따라 하라니, 일반적인 가르침과는 궤가 달랐다.

    ‘평범한 이들에게는 독이 될 수업이야. 하지만….’

    저 아이는 따라가는군.

    련주의 제자를 제외한 련 최고의 재능이라는 무스턴이라고 해도 저 수련을 시켰다면 어떤 의미도 없이 시간 낭비만 되었을 테지만, 라온은 글렌의 검술의 흐름을 이해하고, 따라서 검을 내치고 있었다.

    ‘미친 재능이라고밖에 표현이 안 돼.’

    관찰력이 좋은 건 알고 있었지만, 한번 본 무학의 흐름을 미약하게나마 따라 할 줄은 몰랐다. 절대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재능이었다.

    “후우….”

    렉타르가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답답함이 어린 한숨을 뱉었다.

    ‘에드가. 네 아들은 너보다 더 대단하구나.’

    아들의 재능도 놀라운 것이었지만, 손자는 그를 한참 뛰어넘었다. 차기대륙제일인이라 불린다고 하더니, 그 소문이 거짓이 아니었다.

    ‘조금 부럽군.’

    라온이 따라 할 거라 예상하고 검술 시범을 보이는 글렌과 그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대로 따라가는 라온을 보자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타올랐다.

    “후후.”

    렉타르가 뒷짐을 지며 허허로운 웃음을 흘렸다.

    ‘이거 무스턴에게 뭐라고 할 수만은 없겠군.’

    제자에게 라온을 질투하지 말고, 너 자신의 길을 걸으라고 조언을 해주었지만, 글렌과 라온의 모습을 보니 자연스레 뜨끈한 질투가 피어났다. 평생을 쌓아온 검력으로도 억제하기 어려줄 정도의 감정이었다.

    ‘그래도 괜찮겠지.’

    앞으로 쌓아나가면 되니까.

    과거에 함께하지 못한 시간은 미래에 함께하면 그만이다. 련을 나올 수만 있다면 남은 시간 모두를 며느리와 손주에게 바칠 생각이었다.

    렉타르는 퉁명스러운 척하며 라온을 가르치는 글렌을 보며 입매를 말아 올렸다.

    “지지 않을 것이오.”

    사돈.

    * * *

    라온은 다음날에도 새벽부터 점심까지는 렉타르의 차분한 수업을 들었고, 나딘빵을 먹은 뒤 점심부터 저녁까지는 글렌의 우악스러운 가르침을 받았다.

    하루종일 두 괴물 검사에게 시달리다 보니, 저녁이 되면 체력과 정신력이 쪽 빠져서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자신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알게 되는 느낌이었다.

    ‘거기다….’

    내가 강해지고 있는지 모르겠어.

    글렌과 렉타르 둘 모두 계속 부족하다고 하기 때문에 스스로 성장하고 있다는 실감이 들지 않았다.

    ‘이러다 죽겠는데….’

    글렌과 렉타르 모두 서로에게 지기 싫어서 전력을 다해 가르치다 보니, 압박이 굉장히 강하다. 두 사람이 쏘아내는 기세를 견디는 것만으로 정신력이 녹초가 될 지경이었다.

    암살자로 살아갈 때 이상의 지옥은 못 느낄 거라 생각했는데, 이 이틀은 그때와 비교해도 전혀 모자라지 않았다.

    -뿌드드득!

    라스는 이틀 연속으로 나딘빵을 먹인 글렌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미친개는 광견대만이 아니라, 이곳에도 있었다.

    쯧.

    글렌이 하루 일을 다 하고 가라앉는 태양을 보며 짧게 혀를 찼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감사합니다.”

    라온이 글렌에게 고개를 숙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도 지나갔군.’

    시간이 정해진 내기였기도 하지만 언덕 위에서 렉타르가 지켜보고 있기에 글렌은 바로 수업을 끝냈다.

    글렌과 렉타르는 가르침을 내린 이후에도 각자 할 일을 하지 않고, 멀리서 수업을 지켜보았다. 본래 훈련을 보지 않는 게 불문율인데, 이 둘은 그런 것을 따지지 않는 것 같았다.

    “라온.”

    라온이 녹초가 된 몸을 털어내고 있을 때 렉타르와 유아가 연무장으로 들어왔다.

    “도련님!”

    유아가 양손과 양 갈래머리를 팔랑이며 달려왔다.

    “오늘 승급 파티 한다고 했잖아요! 왜 아직도 여기 계시는 건데요!”

    그녀는 준비가 다 끝났는데 왜 안 왔냐며 콧잔등을 찌푸렸다.

    “미안.”

    라온이 피식 웃으며 손을 저었다.

    “음식 식어요. 도련님이 좋아하시는 파인애플 피자도 있는데!”

    “아, 난 그거 사실….”

    “아?”

    유아는 입을 삐죽 내밀다가 뒤편에 서 있던 글렌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녕하세요!”

    그녀는 가문 전체가 두려워하는 글렌에게 방실 웃으며 머리를 숙였다.

    “음, 그래.”

    유아가 너무 밝게 인사를 하다 보니, 글렌도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흠….’

    라온은 제천검을 검집에 넣으며 글렌을 보았다.

    ‘뭔가 평소와 분위기가 다르신데.’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았던 강철 같은 사람인데, 갑자기 가을바람이라도 쐰 듯 쓸쓸한 분위기가 풍겼다. 얼마 전 렉타르에게 느꼈던 것과 비슷했다.

    ‘함께 가자고 해볼까?’

    아니, 거절하시겠지.

    파티에 가자고 말해볼까 고민하다가 손을 내렸다.

    그가 이런 파티에 올 생각을 할 리가 없었다. 글렌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불편할 것 같으니, 아예 말을 꺼내지 않는 게 옳았다.

    “가주님. 오늘도 감사….”

    라온이 글렌에게 인사를 하고 별관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가주님도 함께 가실래요?”

    유아가 글렌의 손가락을 잡으며 방긋 웃었다.

    “오늘 파티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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