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0화
라온은 검귀와 함께 별관을 향하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벌써 시작했나?’
하늘 전체를 뒤흔드는 듯한 우레와 아주 가늘게 흘러온 리메르의 비명을 들으니, 글렌의 매타작이 시작된 것 같았다.
‘가만히 둘 리가 없지.’
상황을 알아보니, 리메르가 아주 대놓고 까불었던데, 글렌이 그 꼴을 그냥 볼 리가 없었다.
지금 맞는 것도 검귀가 온 덕분에 늦게 시작했다고 봐야 했다.
'명복을 빕니다. 단주님. 아니, 대주님.’
라온은 가늘게 눈을 감아서 대주가 되자마자, 죽었을지도 모르는 리메르의 명복을 빌었다.
‘그래도 오늘은 좀 강하게 패시네.’
전에도 글렌이 리메르에게 벼락을 내리치는 모습을 보았지만, 이 정도로 강한 뇌기를 쏟아낼 줄은 몰랐다. 거의 원수에게 검을 내리치는 것 같았다.
‘확실히 조금 이상하셨어.’
리메르는 이상하지 않은 적이 없는 엘프지만, 글렌도 오늘은 조금 특이했다.
‘질투였었지?’
-맞느니라.
라스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 영감한테도, 저 영감한테도 가늘지만, 질투의 감정이 느껴졌느니라.
‘역시 잘못 느낀 게 아니네.’
조금 전 알현실에서 글렌과 검귀를 서로에게 질투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미약했지만 그건 분명히 질투의 감정이었다.
라온이 콧잔등을 찌푸렸다.
‘이해가 안 돼.’
검귀나, 글렌이나 어디 가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무학을 가지고 있는데, 서로의 무엇을 보고 부러워하는 건지 조금도 모르겠다.
저 정도로 완성된 검사들에게도 부러움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사람이란 참 특이하다니까.’
라온이 옆에 있는 검귀를 곁눈질했다. 그 역시 글렌의 벼락을 느낀 듯 뒤를 돌아보며 헛바람을 흘렸다.
“대단하군. 제 실력을 드러낸 것도 아닌데, 저런 기운이라니, 예전에 뇌신이라 불렸던 이유가 있어.”
검귀는 사그라드는 뇌기를 느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지?’
라온이 검귀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지금은 질투가 없지?’
알현실에서 만났을 때는 질투를 드러내다가 직접 무위를 느낀 지금은 감탄만 가득하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다.
‘사람의 감정이란 참 어렵네.’
-네놈이 인간을 벗어나서 그런 것이니라.
라스가 너는 평생이 지나도 인간의 감정을 모를 거라고 중얼거렸다.
-본왕을 따라 마계나 갈 생각해라. 열 받기는 하지만 네놈에게 어울리는 곳은 인간계가 아니니라.
‘너나 돌아가.’
달라붙는 라스를 밀어내고 다시 별관으로 앞장서고 있을 때 검귀가 옆으로 다가왔다.
“자네 혹시 북멸왕께 무학을 배운 적이 있나?”
“조언을 듣기는 했어도 정식으로 배우지는 않았습니다.”
라온이 정면을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태화보에 관해서 말해줄 필요는 없겠지.’
검귀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지만, 혹시 모르기 때문에 글렌에게 직접 태화보를 전수 받은 건 말하지 않았다.
“그렇군.”
검귀의 얼굴이 햇살을 정면에서 받은 듯 밝아 보였다. 그는 입가에 미소까지 건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생각해보니 더 어이가 없군. 북멸왕께 사사 받지 않았음에도 그 무력이라니….”
그는 이해할 수가 없는 경지라며 눈썹을 가늘게 내렸다.
“여러모로 운이 좋았습니다.”
라온이 눈동자를 우측으로 돌렸다. 별관의 밥을 먹고 싶어서 허우적대는 솜사탕을 보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정말 운이 좋았지.’
겸업 마왕이 옆에 붙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지금의 경지에 오르려면 10년은 더 걸렸을 것이다. 운이 좋았다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운이라. 분명 운도 끼어 있겠지. 하지만….”
검귀가 푸른 눈동자를 내리며 턱수염을 쓸어내렸다.
“내가 본 자네는 누구보다도 노력하는 무인이었네. 일행 중 가장 빨리 일어나 본인의 수련을 끝마치고, 다른 이들의 훈련까지 도와줘 놓고 운이라고? 겸손이 과해.”
그는 자신을 가지라며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맞습니다. 저도 라온 님을 따라 더 정진하겠습니다!”
무스턴이 눈동자에 열기를 담은 채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그의 과거를 알고 있기에 아직도 저 맑은 눈이 어색했다. 솔직히 말하면 손가락으로 찌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자네에게 제안을 하나 하고 싶은데.”
검귀가 무스턴을 보며 입맛을 다시다가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제안이라고 하신다면….”
“이곳에 머무는 동안 내가 자네의 검술을 봐주어도 되겠나?”
그는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무스턴을 가르치며 가벼운 조언을 하고 싶다며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그리해주신다면 저야 감사드릴 뿐입니다.”
라온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검귀의 가르침은 알아듣기 쉽고, 빠르게 적응할 수 있어서 편했다.
초고수가 직접 가르침을 내리겠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저도! 저도요!”
유아가 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수련에 참여하고 싶다고 외쳤다.
“그래. 유아도 함께 오려무나.”
검귀가 유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쟤가 하면 나도 해야 하는데….”
율리우스는 고개를 숙인 채 눈동자를 굴려 검귀를 살폈다.
“너도 와도 된다. 율리우스.”
“감사합니다!”
검귀는 그런 율리우스가 아이답게 귀엽다고 생각한 지 얇게 입매를 말아 올렸다.
“무스턴. 괜찮겠지?”
“물론입니다! 모두 라온 님의 수족들이니 상관없습니다!”
무스턴은 그게 뭐가 문제냐며 오히려 본인도 도와주겠다고 외쳤다.
‘음….’
라온이 구김 없이 웃는 무스턴을 보며 눈매를 찡그렸다.
‘진짜 적응 안 되네.’
질투의 감정이 사라지고, 주종관계가 성립된 무스턴은 더러워진 의복을 빤 것처럼 아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성격이 시원하면서도, 주변을 잘 챙겨서 두 아이가 잘 따랐다.
무엇보다도 내 말이라면 해가 서쪽에서 뜬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신뢰하는 통에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편하게 생각해라.
라스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 별관을 보며 침을 뚝 흘렸다.
-노예가 거북하면 말 잘 듣는 부하라고 생각해. 네가 이용해 먹을 생각만 안 하면 되지 않느냐.
‘그래. 그게 좋겠지.’
라온이 무스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은 도움이 된다니까.’
미소를 지으며 먹을 생각만 하는 라스의 포동포동한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검귀와 두 아이의 대화를 들으며 걷다 보니, 어느새 별관의 정원에 들어섰다.
“와아아아아!”
유아가 바람처럼 경쾌하게 달려가 별관의 문을 열었다.
“마님! 언니들!”
그녀의 외침에 별관 전체가 흔들리며 실비아와 헬렌, 시녀들이 우르르 튀어나왔다.
“유아야!”
“아이고, 우리 유아! 못 본 사이에 얼굴이 반쪽이 됐네!”
“너무 늦었잖아!”
“중간에 연락했어야지!”
시녀들은 이쪽은 보지도 않고, 유아를 훑으며 다친 곳은 있나, 아픈 곳은 없나 살폈다.
“율리우스!”
“다친 곳은 없지?”
“얘 그사이에 키 큰 것 좀 봐!”
“역시 성장기네. 밥은 잘 먹었어?”
다음으로 챙기는 건 율리우스였다. 율리우스도 별관이 그리웠는지 눈동자를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라온이 유아와 율리우스를 둘러싼 시녀들을 보며 뺨을 긁적거렸다.
‘이거 좀 애매한데….’
예전에는 저런 반응이 귀찮았는데, 막상 두 아이에게만 관심을 주고 이쪽은 보지도 않으니 조금 섭섭했다.
-하여튼 귀찮은 녀석이라니까.
라스는 놀아주기 어려운 놈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그렇다고.’
라온이 혀 안쪽의 씁쓸한 맛을 느끼고 있을 때 유아의 뺨을 주무르던 실비아가 일어섰다.
“라온! 고생했어! 유아랑 율리우스는 잘… 어?”
실비아가 웃으며 다가오다가 우뚝 멈춰 섰다. 그녀는 우측에 서 있는 검귀를 보고 못 볼 것을 본 듯 눈썹을 떨었다.
“아….”
실비아에게서 처음 보는 표정이다. 흔들리는 붉은 눈동자에 어떤 감정이 깃들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
검귀 역시 실비아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한 발 앞으로 다가갔다.
“처음 뵙겠습니다. 검사 렉타르라 합니다.”
그는 먼저 실비아에게 고개를 숙이고, 예상외로 말까지 높였다.
“렉타르? 검귀!”
실비아도 렉타르의 이름을 알고 있었는지 눈을 부릅떴다.
“아, 죄송해요. 너무 놀라서.”
그녀는 당황하여 얼굴이 붉어졌음에도 허리를 굽혀 빠르게 사과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검귀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오대검수께서 여기는 어쩐 일로….”
실비아는 검귀가 이곳에 온 게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쭈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왔습니다.”
“저한테요?”
“예.”
검귀가 고개를 끄덕이며 실비아와 마주 보았다.
“실례가 분명하겠지만….”
그의 눈빛에도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쓸쓸함이 묻어나왔다.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 * *
발데르는 중무전 응접실에 앉아 맞은편에 있는 카룬을 노려보았다.
“그놈 이대로 놔둘 거야?”
그가 카룬의 뒤에 있는 검을 든 조각상을 보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 망할 잡것 때문에 방계와 외부에서 굴러온 놈들이 점점 설치고 있는데, 가만히 있을 거냐고!”
“놔두지 않으면?”
카룬이 투명한 술잔을 들어 올리며 되물었다.
“현재 지그하르트에서. 아니, 대륙에서 가장 주목하고 있는 놈을 어떻게 하자는 것이냐. 가문 내에서 습격이라도 하자고?
“주목은 무슨! 그냥 꼬맹이에 불과하잖아!”
발데르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이를 갈았다.
“꼬맹이라서 더 문제다.”
카룬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탁한 숨을 뱉었다.
“무가나 기사단에서 대놓고 자랑할 수 있는 게 뭔지 알고 있나?”
“당연히 최고수 아니야?”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늙은이들이 강한 건 당연한 법이지. 그들을 대놓고 자랑하는 건 추한 짓이다.”
“그러면….”
“그래. 가문의 미래들. 언젠가 가문 최강으로 올라설 어린놈들이야말로 드러내고 자랑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그가 빈 술잔에 거칠게 위스키를 따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지금 그 미래 중 최강이라 불리는 게 라온 지그하르트다. 30살에 들어가도 천재이라 불릴 경지를 20살에 올랐으니, 대륙 전체가 주목할 수밖에 없지. 아버지까지도.”
“으음….”
“본래 세상은 악을 깨부수는 젊은 영웅에게 환호를 하는 법이다. 이번 망혼귀의 일까지 소문이 번진다면 더더욱 놈의 이름이 대륙에 울려 퍼지겠지. 그런 놈을 가문에서 처리하자는 거냐?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땅에 처박을 일 있어?”
카룬이 발데르를 보며 정신 좀 차리라고 노려보았다.
“거기다 너나, 나나 그놈을 어설프게 노리다가 망신을 당했다. 함부로 움직여서 꼬리가 잡혔다간 전주 자리를 박탈당할 수도 있어.”
그는 지금은 손을 쓸 때가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이대로 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거야? 놈이 직계의 영역을 계속 침범하는 걸 참으라고?”
“뭘 착각하는군. 난 한 번도 놈을 놔둔다고 한 적이 없다.”
카룬은 단상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던 버렌의 눈을 떠올리며 입매를 비틀었다.
‘건방진 놈….’
네가 타고 있는 배를 믿나 본데, 용골이 썩은 배가 어떻게 무너지는지 알려주마.
먼저 손을 내밀어 주었건만, 그걸 걷어차고 제 길을 걷기 시작한 막내아들의 당당한 표정이 생각나서 속이 거북해졌다.
“우리가 아니라도, 라온을 위해 움직여줄 곳은 많다. 광풍대는 적을 너무 많이 만들었으니까.”
“오마?”
“그래. 가문 내에도 놈들을 증오하는 이들이 많지만, 진짜는 오마다. 다섯 중 넷이 놈의 목을 노리고 있으니까.”
에덴, 백혈교, 남북맹 그리고 흑탑까지. 하나하고만 척 져도 평생 도망쳐야 할 오마 중 넷과 문제가 났으니, 라온은 살아도 산목숨이 아니었다.
“그, 그래도 놈들을 부르는 건 조금 그런데….”
발데르는 지그하르트의 소속으로서 오마를 부르는 건 좀 그렇지 않냐며 마른침을 삼켰다.
“난 부른다고 한 적이 없는데?”
“어?”
“왜 오마 따위와 대화를 해야 하는 거지? 우리는 그저 정보를 조금 뿌리면 그만이다. 라온이 어디에 있는지, 무력 수위가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무엇을 배웠는지.”
카룬은 대화를 하다가 남들이 들으면 어쩔 수 없는 거 아니냐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아!”
발데르는 카룬의 계략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리고 손가락을 튕겼다.
“하지만 놈의 정보를 알기는 어려워. 맨날 별관이랑 5연무장에만 박혀 있잖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카룬은 샛노란 술이 든 잔을 들어 올리며 서슬 퍼런 눈동자를 빛냈다.
“오랜 기간 박아둔 가시를 꺼낼 때가 되었으니까.”
* * *
라온은 검귀와 함께 정원의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실비아와 시녀들이 잘 가꾸었기 때문인지 정원은 여전히 따스한 분위기가 살아있었다.
“오래 기다리셨죠.”
실비아는 직접 차와 과자를 들고 정원으로 걸어왔다.
“제가 할게요.”
라온은 실비아가 가져온 쟁반을 받아서 테이블에 차와 과자를 내려놓았다.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정원이로군요.”
검귀는 정원을 쭉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인지 그의 눈에 자그마한 감탄이 어린 듯했다.
“모두 함께 가꾸고 있거든요.”
실비아는 검귀에게 칭찬을 들은 게 기쁜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다만 그녀는 이상하리만큼 검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각자 차를 마시고,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졌을 때 실비아의 시선이 올라갔다.
“제게 알고 싶다는 게 뭐죠? 렉타르 님께 답을 해 드릴 수 있는 게 있을지….”
그녀는 검귀가 무슨 질문을 할지 모르겠다며 짧게 입맛을 다셨다.
“오직 실비아 님만 말씀해주실 수 있는 답입니다.”
검귀는 라스의 재촉에 마지못해 과자를 씹는 라온을 보며 눈빛을 가라앉혔다.
“라온 검사를 보고 여러 가지로 감탄했습니다.”
“감탄이요?”
실비아는 라온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상체를 테이블 쪽으로 내밀었다.
“그렇습니다. 본래 어린 무인들은 무력을 갖추더라도 정신력과 인성 둘 중 하나가 부족하기 마련인데, 이 친구는 무엇 하나 모자라지 않더군요.”
검귀는 글렌에게 했던 말들을 반복했다. 준비한 것처럼 칭찬이 유수처럼 이어졌다.
“으음….”
“그, 그런가요?”
라온은 민망하여 머리를 긁적거렸지만, 실비아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제가 제자를 키우기 때문에 알고 있습니다. 인성과 무력을 모두 갖춘 아이를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를.”
검귀는 유아와 호수를 구경하는 무스턴을 보며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실비아 님을 찾아온 겁니다. 라온 검사를 어떻게 키웠는지 알고 싶어서.”
검귀는 부탁한다면서 실비아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우! 이러지 마세요!"
실비아는 의자에서 일어나서 손사래를 쳤다. 그녀는 억지로 검귀를 일으켜 세운 뒤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알려달라고 하시지만, 솔직히 말해서 라온은 자기가 알아서 컸어요.”
“광풍대주에게도 들은 말이군요.”
“그게 정말이에요. 어렸을 때 조금 아팠던 것만 제외하면 정말 스스로 할 일을 찾았거든요.”
“음….”
라온이 입매를 꾹 다물었다. 아이가 아니라, 어른을 키우는 것 같았다는 실비아의 말이 뜨끔해서 시선까지 돌렸다.
“아팠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어릴 때 혹한의 저주라는 체질을 앓았거든요. 지금은 다 나았지만.”
실비아는 어린 시절 앓았던 혹한의 저주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혹한의 저주….”
검귀가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가늘게 떨었다.
“괜찮으시다면 라온 검사가 어떻게 성장했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저야 좋죠! 얼마든지요!”
실비아는 입이 근질근질했는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이만 쉬러 가보겠….”
“어딜!”
라온은 손발이 오그라들기 전에 도망치려고 했지만, 실비아가 팔을 움켜쥐고 놓아주질 않았다.
“손님이 오셨는데, 어딜 도망가려고! 오랜만에 엄마랑 시간도 보내야지!”
“아….”
“먼저 아기 때부터 시작할게요, 요 녀석은 태어났을 때도 울지를 않아서….”
실비아는 팔짱을 낀 채로 방실 웃으며 옛이야기를 시작했다.
-본왕도 궁금했느니라!
라스도 테이블 위로 올라가서 턱을 괸 채로 드러누웠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인간이 마귀가 되었는지 알고 싶었느니라!
녀석은 무조건 들어서 약점을 찾겠다고 떠들어댔다.
“너무 성숙해서 제가 아이를 놀아주는 게 아니라, 라온이 저하고 놀아주는 느낌도 받았어요.”
“허, 역시 어렸을 때부터 남달랐군요.”
-그럴만하지. 저놈은 꼬맹이 때 본왕을 이겼으니까!
두 사람과 마왕의 대화가 안 이어질 듯 이어졌고, 라온은 고개를 푹 숙인 채 한숨을 내쉬었다.
‘쉬고 싶다. 절실하게 쉬고 싶어.’
* * *
아들 자랑을 하고 싶은 어머니와 제자를 바르게 키우고 싶은 스승이 만났기 때문인지 실비아와 검귀의 대화는 저녁이 될 때까지 이어졌다.
특히 검귀는 라온의 성장기를 조금도 지루해하지 않고, 맞장구를 치거나, 미소를 지으며 들어주었다. 너무 진심이라 옆에서 보고 있는 사람이 민망해질 정도였다.
“…그렇게 되어서 지금 저 아이가 있는 거예요.”
실비아가 미소를 지으며 라온의 머리를 쓸어 내렸다.
“냉정해 보이지만, 사람을 챙길 줄 알게 되었더라구요. 제일 걱정했던 부분인데 스스로 깨달아서 다행이에요.”
그녀는 왜인지는 모르지만, 라온이 의협심을 가지게 된 게 가장 기쁘다며 활짝 웃었다.
“왜인지 모르기는.”
라온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가 해준 말이 있었으니까. 달라진 거죠.”
“내가?”
실비아는 무슨 말을 하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옛 지그하르트 검사들처럼 그리고 아버지처럼 다른 사람을 위해 검을 드는 무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잖아요. 사람 냄새가 나는 검사가 되라고도 하셨고.”
라온은 예전 실비아가 지금의 자신보다 더 키가 클 때 해주었던 말들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그래. 그 말 덕분이었지.’
지금의 내가 있는 것도, 지금의 광풍대가 있는 것도 모두 그녀의 그 한마디 때문이었다.
진심이 담겨 있는 그 말 덕분에 자신은 버려진 사냥개에서 인간 라온 지그하르트가 될 수 있었다.
“좋은 말이로군.”
검귀가 실비아에게 시선을 고정 시킨 채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 그랬지.”
실비아는 본인의 칭찬을 듣자, 민망한 듯 얼굴이 붉어졌다. 남 일은 하루종일 떠들고도 담담하더니, 본인은 칭찬 한 번 들었다고 저렇게 되는 게 신기했다.
“사실 그게 엄마만의 생각은 아니라, 네 아버지에게서 깨달은 바였어서.”
그녀는 라온의 아버지에게 사람 냄새가 나는 검사가 무엇인지를 배웠다며 웃었다.
“…….”
검귀는 아버지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입술을 깨물며 상체를 살짝 기울였다.
“남편분이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겠소?”
그는 긴장이 되는 것처럼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재미없으실 텐데요. 워낙에 바르기만 한 사람이었고, 이름이 알려진 무인도 아니라서.”
실비아는 지루한 이야기가 될 거라고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진 검사는 흔치 않으니까요.”
검귀의 목소리가 새끼손가락 끝으로 튕긴 하프 줄처럼 아주 가늘게 떨렸다.
“음….”
실비아는 검귀의 얼굴을 한참동안 지그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럼….”
그녀의 입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나온 순간 검귀의 눈동자가 시꺼멓게 굳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