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429화 (429/653)
  • 제429화

    라온은 광풍단과 함께 알현실 중앙을 걸었다. 양옆으로 늘어선 간부들. 특히 직계들의 시선이 따가웠지만 무시하고 단상 앞에 섰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공허함보다 냉랭함이 묻어나는 글렌의 눈을 보며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일어나라.”

    글렌의 목소리 역시 평소보다 무거웠다. 알현실의 분위기까지 서늘한 것을 보니, 아무래도 좋지 않은 일이 있는 것 같았다.

    “예!”

    라온은 단주인 리메르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먼저 손님을 뵈어야겠군.”

    글렌의 시선이 광풍단을 넘어 끝에 선 검귀와 무스턴을 향했다.

    검귀는 본인을 말한다는 것을 알고 앞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북방의 주인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검사 렉타르라고 합니다.”

    그는 스스로를 낮추고, 글렌을 높이며 손님으로서의 예를 갖췄다.

    “북풍처럼 고고하게 불어오던 이름은 자주 들었소. 오대검수의 수좌를 만나다니 나 역시 개안을 하는 듯하오.”

    글렌 역시 상대가 상대인 만큼 어조에 존중이 담겨 있었다.

    라온은 인사를 나누는 두 검사를 보며 눈매를 찌푸렸다.

    ‘뭐지?’

    착각인가?

    분명 서로에게 향하는 인사말은 부드러운데, 눈빛에 날이 서 있는 느낌이었다.

    “렉타르 공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육황오마에 방문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그하르트에 오신 이유를 알 수 있겠소?”

    “음….”

    글렌의 눈동자가 탁하게 번들거렸다. 검귀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옆에 있는 라온을 바라보았다.

    “저는 여행을 좋아하여 대륙 전체를 돌아다닙니다. 많은 사람과 스치다 보니, 그만큼 많은 재능을 보게 되는데 라온 검사 같은 이는 처음이었습니다. 무력, 정신력, 재능 그리고 인성까지. 무엇 하나 부족한 점이 없더군요.”

    그의 날카로운 눈매에서 신기할 정도로 다정한 기운이 피어났다.

    반면 글렌의 가는 눈매에서는 더욱 차디찬 냉기가 타올랐다.

    “저도 제자를 키우는데, 실력은 나름 만족하지만 인성적인 면에서는 아직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대체 누가 이런 괴물을 키웠는지 알고 싶어서 이곳까지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흐음.”

    글렌은 라온을 향한 검귀의 칭찬을 들으며 입을 손으로 가렸다.

    ‘검귀에게 저런 칭찬을 듣다니….’

    검귀가 누구인가. 오대검수의 수좌에 오른 무인으로 육황오마의 주인들과 싸워도 밀리지 않는다는 소리를 듣는 초고수였다.

    그리고 오늘 실제로 본 그의 무력은 소문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거, 검귀가 저런 말을 한다고?”

    “가르침은 내려도 칭찬 같은 건 해주지 않는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그래. 냉정하다고 했었는데….”

    지그하르트의 간부들은 검귀의 입에서 나온 극찬을 들으며 마른침을 삼켰다.

    “흠….”

    글렌이 왼손으로 소매를 매만졌다. 대륙에 이름을 떨친 무인이 진심을 담아서 손주를 칭찬하자, 얼어붙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역시 리메르 녀석이 헛소리 한 거였어.’

    놈은 검귀가 진짜 할아버지 같다고 했지만, 지금 보니 검귀는 제자의 인성을 키워주기 위해서 라온을 따라 지그하르트에 온 게 분명했다.

    “커흠! 그렇구려.”

    올라가는 입꼬리를 가린 채 방문을 허가하려고 할 때 라온이 앞으로 나왔다.

    “렉타르 님께서는 저와 광풍단에게 많은 가르침을 내려주셨습니다. 매일 수련을 함께 해주신 덕분에 모두의 성취가 크게 성장했습니다.”

    라온은 검귀의 편을 들듯 그가 무엇을 해주었는지를 읊어주었다. 제자처럼 매일 검술을 봐줬다고 하니,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검술을 봐주었다?”

    “예. 검술을 알려주신 건 아니고, 검술 묘리에 대한 조언을 해주셨습니다.”

    “음.”

    글렌은 라온의 말을 들으며 손끝을 떨었다.

    ‘가르침을 줬다고? 그것도 매일?’

    검귀 정도의 무인이 이상한 가르침을 내릴 리 없으니, 기연이라고 봐도 좋았다.

    다만 다시 리메르의 편지 구절이 다시 떠오르며 체한 듯 속이 갑갑해졌다.

    ‘설마 제자로 삼으려는 건 아니겠지? 의손자나?’

    처음 보았을 때부터 검귀의 눈에 비치던 라온에 대한 따스한 감정이 노골적으로 보이는 것 같았다.

    라온 역시 검귀를 믿고 따르는 듯 그에게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이거 안 되겠어.’

    지금에 와서는 검귀의 방문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아무래도 미리 준비해둔 라온의 선물은 물리고 새로운 것을 준비해야 할 것만 같았다.

    “아이들이 신세를 졌군. 고맙소.”

    글렌은 속마음을 내리누르고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닙니다. 모두 재능 있는 아이들이라 즐거웠습니다.”

    검귀는 옅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그런 도움을 받았는데, 거절할 수는 없겠지. 렉타르 공의 방문을 환영하오.”

    글렌은 가슴이 꽉 조여드는 듯한 조급함을 감추며 검귀의 방문을 허가했다.

    “감사합니다.”

    검귀는 무스턴과 함께 허리를 굽힌 후 다시 뒤로 물러섰다.

    “음….”

    라온은 눈을 마주하는 글렌과 검귀를 보며 관자놀이를 긁적거렸다.

    ‘왜 더 분위기가 싸해진 것 같지?’

    검귀가 도움을 주었다는 걸 말했는데 왜 공기가 더 차가워진 것 같은지 잘 모르겠다.

    -배고픈가 보지.

    라스는 별 관심이 없는 듯 머리 위에서 하품했다.

    “광풍단.”

    글렌이 검귀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묵직한 기운이 실린 눈동자가 어깨를 짓누르는 듯했다.

    “임무가 빨리 끝난 것으로 아는데, 상당히 늦었구나.”

    “죄송합니다.”

    리메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에 라온이 대표로 고개를 숙였다.

    “다음부터는 늦으면 늦는다고 보고부터 하도록. 늦을 수는 있지만, 보고하지 않은 건 문제다.”

    “예? 단주님이 연락을 했다고 했는데….”

    “연락? 하분성에 간다는 말은 했어도 오래 걸린다는 소식은 오지 않았다.”

    “아! 까먹었다!”

    리메르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헤헤 웃었다.

    “하분성이 의외로 먹고 놀기 좋더라구요. 편지 보내는 걸 잊었네.”

    그는 살다 보면 그럴 수 있지라고 중얼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

    너무 어이가 없기 때문일까. 수많은 사람이 있는 알현실이 고요해졌다.

    ‘저 망할 단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이 그 말을 하면 안 되지!

    라온은 이마에 힘줄이 돋아난 글렌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다음부터는 조심하도록.”

    다만 그는 화를 내지 않고, 낮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리메르도 그런 반응이 나올 줄은 몰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라온은 오른 주먹으로 턱을 괴고 있는 글렌을 보며 손끝을 매만졌다.

    ‘평소와 다르셔.’

    검귀라는 손님 때문인지 글렌은 리메르에게 호통을 치거나, 벼락을 쏟아내지 않고, 조용히 숨을 골랐다.

    “늦은 이유는 알았으니, 넘어가마. 지금부터는 광풍단이 아리안 가문에서 해온 일을 보고하도록.”

    “예. 처음 저희가 아리안 가문에 도착했을 때….”

    라온은 아리안 가문의 간부들이 얼마나 썩었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는지부터 갑작스레 터진 늪의 해일과 망혼귀와의 전투를 말해주었다.

    아리안 가문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모두 읊었을 때 알현실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망혼귀를 잡았다고? 그 망혼귀를?”

    “그, 그랜드 마스터급이잖아!”

    “그러게. 아무리 방심했다고 해도 에덴의 상급 간부를 광풍단이 이길 수 있나?”

    “거기다 이상한 사기의 구슬까지 사용했다는데….”

    “여러모로 이상하군.”

    카룬과 발데르를 시작으로 직계들이 의심을 시작하자, 간부들도 쉽게 믿지 못하고 설왕설래했다.

    “비연회주.”

    “예!”

    글렌의 부름에 비연회주 채드가 앞으로 나왔다.

    “광풍부단주의 말이 사실인가?”

    “비연회의 정보를 대조해 본 결과 100% 사실입니다.”

    채드는 볼 것도 없다는 듯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

    “비연회주가 인정하다니….”

    “그럼 진짜라는 거잖아!”

    “그랜드 마스터들도 망혼귀를 놓쳤는데….”

    “대가 되는 정도가 아니라, 대박을 치고 왔군.”

    “광풍이 아니라, 광견이라 불린다더니, 이해가 돼.”

    알현실 좌우로 늘어선 간부들은 놀람을 감추지 못한 채 입을 떡 벌렸다. 바로 앞에 글렌이 앉아 있음에도 자기들끼리 계속 속닥거렸다.

    많은 간부가 대단하다고 말하며 감탄했지만, 웃지 못하는 이들도 많았다.

    “쯧.”

    “젠장….”

    “그게 뭐 별거라고.”

    카룬과 발데르를 비롯한 직계들은 더러운 소리를 들은 것처럼 귀를 후비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들은 무얼 해도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냉랭한 시선을 보내왔다.

    글렌이 느릿하게 손을 들자, 웅성거리던 알현실이 도서관이라도 된 듯 조용해졌다.

    “광풍단.”

    “예.”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표로 대답했다.

    “본래 내가 광풍단에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썩어버린 아리안 가문의 구제입니다.”

    아리안 가문에 가서 깨달았던 바를 그대로 이야기했다.

    “그럼 임무가 무엇인지는 기억하느냐?”

    “죽음의 늪에 가서 언데드의 개체가 늘어난 원인을 파악하고 해결하는 임무였습니다.”

    “내가 주었던 임무와 네가 해결한 일이 다른가?”

    “아뇨. 같습니다.”

    여러 일이 있었지만, 결국 아리안 가문 주변에 가득했던 언데드와 나태한 간부들이 사라졌으니, 임무를 그대로 이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맞다. 아리안 가문을 더럽히던 폐수를 버리고, 맑은 물을 담아 새로운 우물을 파주었으니, 임무는 완수했다고 봐야겠지.”

    글렌이 느릿하게 눈을 내리감았다가 떴다.

    “그게 바로 대의 임무다. 체계적이며, 구체적인 단의 임무와 다르게 대는 여러 정보를 파악해서 스스로 판단을 내려야 하지. 광풍단은 이번 임무를 통해 대의 임무를 충분히 수행할 수 있다는 자격을 증명했다. 따라서!”

    그가 단상 위에서 몸을 일으키며 손을 뻗었다.

    “지금 이 시간부로 광풍단을 광풍대로 승격한다!”

    “우와아아아아!”

    “광풍대! 축하한다!”

    “경쟁자가 하나 늘었군.”

    “앞으로도 열심히 달리기를 기대하마!”

    “꼭 쫓아가겠습니다!”

    방계 출신 간부들과 극소수의 직계 간부들이 환호와 박수를 보내주었다. 철전대는 임무를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광풍단은 글렌과 간부들에게 차례로 고개를 숙였다.

    “잠시 말씀 좀 드려도 되겠습니까?”

    라온은 고개를 숙였다가 일어나며 단상 쪽으로 한발 다가갔다.

    “무력대의 명칭을 바꿀 수 있습니까?”

    “광풍단의 이름을 바꾸겠다는 건가?”

    “예. 광풍이 아니라, 광견… 커헉!”

    말을 이어가려고 하는데, 뒤에서 버렌, 마르타가 입을 막고, 허리를 꾹 찔렀다. 다른 광풍단원들도 다가와서 허벅지나 팔을 꼬집었다.

    “시끄러워!”

    “광견이라는 거 붙으면 나 진짜 나간다! 광견단의 나찰녀라고 불리는 건 절대 싫다고!”

    “혼자 미치세요! 제발!”

    광풍단 검사들은 하나 같이 광견만큼은 싫다며 고개를 빠르게 흔들었다.

    “광견 좋은데?”

    루난 홀로 마음에 든다고 중얼거렸다.

    “흠.”

    글렌이 턱을 긁적이며 고개를 저었다.

    “이름은 홀로 결정하는 게 아니지, 제대로 의견을 나누고 다시 말하거라.”

    “아, 네….”

    라온이 꼬집힌 곳들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은 그렇다 치고, 대주는 어떻게 할 것이냐. 이대로 갈 것이냐?”

    글렌은 건들거리는 리메르를 내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음….”

    라온은 글렌의 시선을 따라 리메르를 보며 낮은 가벼운 미소를 그렸다.

    “솔직히 저희 단주는 미덥지 못한 모습을 많이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게으르고, 도박과 돈을 좋아하며, 주인공 병에 단단히 걸린 사람이죠.”

    “에엥?”

    여기서 욕을 할 줄 몰랐다는 듯 눈을 부릅뜨는 리메르를 보며 옛 기억을 떠올렸다.

    훈련생 시절 리메르가 베고 자던 노트에는 백이 넘는 훈련생들의 장점과 약점 그리고 보완할 방식이 모두 적혀 있었다.

    그것을 보았기에 그는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최고의 스승이자, 단주였다.

    “다만 광풍대에는 리메르 님이 대주로 필요합니다. 아직 배워야 할 게 많거든요.”

    “맞습니다. 마음에는 안 들지만, 저 사람이 대주여야 저희가 편합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아직은 바꾸고 싶지 않습니다.”

    라온만이 아니라, 다른 광풍대의 검사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리메르가 대주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런가.”

    글렌은 조금 아쉬운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원들이 그리 원하니, 대주직은 리메르가 그대로 계승하는 것으로 하겠다.”

    “캬아!”

    리메르가 광풍대를 돌아보며 탄성을 내뱉었다. 기분이 좋은지 입꼬리가 바르르 떨렸다.

    “너희가 날 이렇게 좋아하는지 몰랐다! 좋아! 앞으로 일주일 중에 3일은 훈련장에 가주마!”

    그는 얻어맞을 소리를 외치며 히죽였지만, 글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동자를 돌렸다.

    “다음으로 넘어가도록 하지.”

    글렌의 시선이 다시 라온을 향했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별자리처럼 반짝이는 것처럼 보였다.

    “조금 전에 말했듯이 광풍단은 승급 시험에서 모두가 제 역할 이상을 해냈다. 너희가 아니었다면 아리안 가문은 멸망했고, 에덴이 끼어들었다는 사실도 늪에 묻혔겠지. 큰 공을 세웠으니, 그에 합당한 상을 내리려 한다.”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허공에 금빛 불꽃이 타오르며 작은 책장이 솟구쳤다.

    “이쪽도 준비되었습니다.”

    로엔이 검은 비단에 덮여 있는 판을 들고 글렌의 옆에 섰다.

    “먼저 광풍대 1조의 조장. 마르타 지그하르트. 앞으로.”

    “예!”

    마르타가 고개를 숙인 후 단상 위로 올라갔다.

    “네 성급함이 위험을 불러올 때가 있지만, 많은 이들에게 용기가 되어주었을 것이다. 고생했다.”

    글렌은 판에 놓여 있는 은패와 책장에 꽂혀 있는 황색 무학서를 꺼내 마르타에게 건네주었다.

    “네 성향과 맞는 검술이다. 확인해보고 익히도록.”

    “감사합니당!”

    마르타는 기쁜 마음에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다가 혀를 깨물었다. 그녀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뻘게졌다.

    '루난이 놀릴 게 하나 늘었군.'

    라온이 옅게 웃을 때 간부 쪽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마르타 귀엽다!”

    그녀의 아버지이자, 글렌의 셋째 아들 데니어 지그하르트였다. 직계 중에 박수를 보내준 몇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저 딸이 이쁜 듯 활짝 웃었다.

    “다음 루난 슬리온.”

    글렌의 부름에도 루난의 맹한 눈을 풀지 않았다. 그녀는 평온한 자세로 단상 위로 올라갔다.

    “네 온화한 분위기가 다른 이들의 마음을 풀어주었을 것 같구나. 잘했다.”

    그는 루난의 어깨를 두드리며 은패와 무학서를 내밀었다.

    “네 성격과 반대되는 험한 검술이다. 가끔은 다른 존재가 되는 것도 좋으니, 익히면 도움이 될 게다.”

    “감사합니다.”

    루난은 은패와 무학서를 받은 뒤 담담하게 고개를 꾸벅이고서 단상 아래로 내려왔다.

    “우리 딸이 제일 이뻐!”

    로칸 슬리온이 주먹을 들어 올리며 우렁차게 외쳤다.

    “3조장 버렌 지그하르트.”

    “예엡!”

    버렌은 알현실이 흔들릴 정도로 우렁찬 대답을 터트리고서 단상 위로 올라갔다.

    “네 침착함과 판단력이 광풍대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들었다. 네가 또 다른 부대주라 생각하며 앞으로도 모두를 챙겨주기를 바라마.”

    글렌은 만족스럽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버렌에게도 은패와 무학서를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버렌은 이번에도 목청이 터질 정도로 소리를 질렀다. 그는 아버지인 카룬과 잠시 눈을 마주친 후 단상 아래로 내려왔다.

    조장들을 시작으로 조원들까지 모두 글렌이 준비한 은패와 무학서를 받고, 단상 아래로 내려왔다.

    “마지막으로 라온 지그하르트.”

    “예.”

    라온이 나지막하게 대답하고서 단상 위로 올라갔다.

    “광풍대주를 대신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임무를 수행하고, 전쟁을 치르느라 고생했다.”

    그간 훌륭했다나 대단했다는 말은 들었어도 고생했다는 말은 처음이기 때문인지 가슴이 살짝 울렁거렸다.

    “아리안 가문을 구하고, 끝내 망혼귀를 벤 일은 위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새로운 위업을 달성한 라온 지그하르트에게 금패를 수여하겠다.”

    금패라는 말에 알현실이 다시 시끄러워졌다.

    “그, 금패….”

    “또 금패인가?”

    “이게 벌써 몇 개째지?”

    “금패까지는 아닌 거 같은데.”

    “아니, 받을 만한 성취다.. 그 망혼귀를 잡았으니까.”

    “맞아. 대주들도 못한 일을 해냈잖아.”

    몇몇 간부들이 라온에게 너무 많은 금패가 몰리는 게 아니냐고 중얼거렸지만, 카룬과 발데르 같은 직계도 입을 다물었기에 대놓고 따지는 사람은 없었다.

    “음….”

    글렌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은 지 입꼬리를 가늘게 떨며 금패를 건네주었다.

    그는 단상 아래에 있는 검귀쪽을 힐끔거리며 입매를 꾹 다물었다. 무언가 단단히 결심한 표정이었다.

    “음….”

    라온은 글렌의 옆에 있는 책장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왜 무학서를 안 주시는 거지?’

    아직 책장에 무학서가 세 권이나 남아있었다. 다른 이들처럼 무학서를 준비하신 것 같은데, 주지 않는 이유를 모르겠다.

    “네 부상은 나중에 주도록 하마.”

    글렌은 손가락을 튕겨 책장을 돌려보낸 후 고개를 저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보상에 관한 생각이 바뀐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예전에도 이와 비슷했던 적이 있었기에 라온은 고개를 숙이고 단상 아래로 내려섰다.

    글렌이 단상 위에서 일어나 광풍대와 간부들을 쭉 살폈다.

    “최근 대륙에 새로운 세력들이 떠오르고 있다는 건 들었을 것이다. 신주오령이라 불리는 이들은 육황오마의 틈을 비집고 자신들의 세력을 넓히고 있다.”

    그가 갑작스럽게 대륙의 정세에 대해서 말했지만, 모두는 그를 바라보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육황은 각자 더 큰 무력을 키우려 하고, 오마는 어둠 속에서 발호하고 있지. 난세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은 시기다. 앞으로는 임무에 나가서 예상치 못한 적과 싸우게 될 가능성이 높으니, 이번 광풍대처럼 냉철하게 생각해서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판단하도록.”

    “알겠습니다!”

    글렌은 가르침에 간부들과 광풍대가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오늘 승급식은 이걸로 마치겠다.”

    그는 할 말이 모두 끝났다는 듯 손을 저었다.

    간부들이 먼저 알현실을 나섰고, 라온과 광풍단은 마지막으로 고개를 숙인 뒤 알현실을 떠났다.

    “저기이….”

    리메르는 광풍대와 함께 떠나지 않았다. 그는 손을 비비며 글렌의 옥좌가 있는 단상 앞으로 다가갔다.

    “저는 안 주시나요? 저도 이번에 꽤 활약을 했는데?”

    그는 망혼귀가 광풍대를 조지려고 할 때 멋지게 등장하여 모두를 구했다고 떠들었다.

    “그렇군.”

    글렌이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이번에 큰 활약을 했다지.”

    “예! 제가 아니었다면 라온이고, 광풍대고 다 죽었을 겁니다.”

    리메르는 옳다구나! 라고 생각한 듯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뭐 금패 같은 건 관심 없고, 돈이면 되는데.”

    그는 엄지와 검지로 원을 만들며 히죽 웃었다.

    “걱정하지 마라. 네 너를 위해 단단히 준비한 게 있으니.”

    글렌은 따라오라고 말하면 먼저 알현실을 나섰다.

    “우와! 웬일이래?”

    리메르는 히죽 웃으며 로엔에게 눈짓을 했다.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요?”

    “허허허.”

    로엔은 담백한 표정으로 평소의 웃음을 흘렸다.

    “아, 가주님도 이제 정신을 차린 모양이네. 챙겨야 할 사람이 누군지 깨달았나 봐요.”

    “허허허, 일단 가시죠.”

    “아, 그러네요.”

    리메르가 고개를 끄덕이고 글렌을 따라갔다. 그는 가주전을 나가서 뒤편에 있는 가주 전용 연무장으로 향했다.

    “연무장? 여긴 왜요?”

    리메르가 깔끔하게 닦여있는 연무장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돈을 준다는 사람이 왜 연무장으로 왔는지 모르겠다.

    “여기가 자리다.”

    글렌이 손목을 빙글 돌리며 연무장 바닥을 가리켰다.

    “무슨 자리죠? 돈은 안 보이는데?”

    리메르가 입맛을 다시며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금화는커녕 은화나 동화도 보이지 않았다.

    빠지지지직!

    글렌이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허공에 자욱한 연기가 피어나며 거대한 뇌전의 구체가 사위로 번졌다.

    “어?”

    리메르가 피하거나, 막을 새도 없이 시뻘건 벼락이 무수한 줄기가 되어 쏟아져 내렸다.

    콰과과과광!

    웅대한 폭음과 폭발이 일어났고, 말끔했던 연무장은 폭풍을 맞은 듯 시꺼멓게 파여 있었다.

    치이이익!

    폐허처럼 뭉개진 연무장 중앙에 처박힌 붉은 머리 엘프가 입에서 김을 뿜어내며 전신을 떨었다.

    “무, 무슨 자리가 이런….”

    글렌이 두 번째 벼락 줄기를 준비하며 입술을 뗐다.

    “네 묫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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