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8화
“하아.”
라온은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내렸다. 라스는 텅 비어버린 접시 위에서 오동통하게 부풀어 오른 배를 두드리며 헤죽 웃고 있었다.
-만선이니라!
‘파인애플 피자가 그렇게 좋냐?’
녀석이 파인애플 피자를 세 판이나 먹고서도 부족하다고 투덜대서 결국 파인애플 쿠키 10개까지 먹었다.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진다는 지옥의 아귀를 보는 듯했다.
‘배불러서 잠이 올 지경이네.’
나태의 수치가 늘었기 때문인지 식곤증이 몰려와서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그건 네놈의 정신이 허약해서 그런 것이니라. 이 정도의 미식은 어디에서도 찾기 힘드니, 먹을 수 있을 때 많이 먹어두어야 하느니라.
라스는 먹는 것이야말로 삶의 낙이자, 이유라며 이 정도는 먹어주어야 살아갈 수 있다고 중얼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분노의 군주가 아니라, 탐식의 군주가 할 말 같았다.
‘여기 와서 먹은 게 파인애플 피자뿐이잖아. 너 때문에 하루에 2판씩 먹었다고.’
라스는 오늘만이 아니라, 매일 파인애플 피자를 요구해서 하분성에 도착한 이후로 지금까지 하루에 한 번은 무조건 피자를 먹었다. 음식을 가리지는 않지만, 이젠 지칠 정도였다.
“와. 부단주님 그걸 다 비우셨네요?”
정찰대 정식을 주문한 도리안이 말끔하게 비워진 피자 그릇을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하긴 힘들 만하죠. 사람을 그렇게 팼으니까.”
그는 무스턴의 정신을 180도 바꿔놓을 정도로 팼으니, 배고플 만하다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진짜 신기하던데.”
버렌이 들고 있던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도리안의 말에 동의했다.
“그 고집불통 질투쟁이를 대체 어떻게 고친 거야?”
“뭘 물어. 매 앞에 장사 없는 거지.”
마르타가 꽉 말아쥔 주먹을 들어 올렸다.
“아무리 까불어도 죽을 만큼 얻어맞으면 다 기게 되어 있어.”
그녀는 어떻게 패는지 보지 못해서 아쉽다며 혀를 찼다.
“마르타는 힘도 약하지만, 마음이 더 약해서 안 돼.”
루난은 파인애플 쿠키를 오독 씹으며 고개를 저었다.
“뭐? 이게 진짜 미쳤냥!”
마르타가 루난을 향해 인상을 찌푸리다가 혀를 깨물었다.
“냥? 냥냥.”
루난은 고양이처럼 손을 동그랗게 만 채로 마르타에 손짓했다.
“크으윽! 너 일루와!”
“싫엉.”
마르타와 루난은 간식을 먹다 말고 일어나서 주점에서 꼬리잡기를 시작했다.
라온이 자매처럼 싸우는 마르타와 루난을 보며 픽 웃을 때 라스가 둥실 떠올라서 얼굴을 들이밀었다.
-네놈, 이번에 운이 좋았다는 거 알고 있겠지?’
‘알고 있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질투의 군주는 생각 이상으로 사악한 놈이었으니까.’
엔비의 성격은 찌질 그 자체였지만, 그녀가 무스턴에게 건 계약은 가시가 가득 박힌 목줄이었다.
만약 허세가 들켰다면 무스턴과 마찬가지로 평생 노예가 되어 바닥을 기어 다녔을지도 모른다.
여러 상황이 겹친 덕분에 얻은 행운이었기에 당연히 자만 따위는 하지 않았다.
-맞느니라. 그놈은 사악하지만, 찌질하고 추잡하지. 잘만 조절했으면 슬로스의 이름도 필요 없이 본왕의 힘만으로 물러나게 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만….
라스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배가 뽈록 튀어나와서 그리 진지해 보이지는 않았다.
-본왕의 이름이 통하지 않는 놈들이 있느니라.
‘통하지 않는 놈들?’
라온이 테이블을 가늘게 두드리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그렇느니라. 오만과 탐욕.
라스의 음성이 어둠이 녹아내린 것처럼 무거워졌다.
-그 두 놈에게 본왕이나, 슬로스의 이름을 팔면 좋다꾸나 하면서 덤벼들 것이니라. 절대 입을 털지 마라. 차라리 조용히 있는 게 도움이 될 것이니라.
‘조금 귀찮은 호구라는 건가?’
라온이 오만과 탐욕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마왕은 호구가 아니다! 네가 만난 슬로스와 엔비가 멍청한 거라고!
‘그 둘만이 아닌데….’
라온이 라스를 보며 눈동자를 가라앉혔다.
‘스스로가 가장 훌륭한 호구라는 것을 모르는 건가.’
라스는 본인이 호구 중의 왕이라는 것을 모르고, 다른 마왕들에게만 호구라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색욕은….
‘색욕은?’
-보자마자 도망가라. 절대 상대하지 말고, 쳐다도 보지 말고 도망가!
녀석은 절대 색욕을 상대하지 말고, 튀라고 소리쳤다. 다른 마왕은 들러리고, 색욕에게서 도망치라는 게 목적이었던 것 같다.
‘색욕은 도망친다 치고, 탐식은?’
-탐식은….
‘아. 탐식은 너지? 겸업하느라 바쁘겠어.’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라스의 통통한 배를 두드렸다.
‘그래서 탐식의 권능은 언제 줄 거야? 그건 먹을수록 강해지나?’
-아니라고! 그런 식충이 토끼랑 비교하지 마라!
‘식충이 토끼?’
저 먹보 입에서 식충이 소리가 나오다니, 대체 얼마나 먹는지 궁금해졌다.
정상적인 마왕이 없네….
* * *
검귀는 병실 바닥에 무릎 꿇은 무스턴의 눈을 보며 턱수염을 쓸어내렸다.
‘이 녀석이 왜 이러는 거지?’
제자의 눈동자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맑았다. 얼마 전까지 꽉 차올랐던 악의와 질투가 씻은 듯 사라지고 갓 태어난 아이처럼 투명한 눈망울이 보였다.
‘사람이 이렇게 빨리 변할 수가 있나?’
인성에 관한 조언을 할 때만 해도 무스턴의 눈동자에는 라온에 대한 강한 질시가 남아있었는데, 그 감정이 이 짧은 시간에 사라졌다는 게 이해되질 않았다.
‘예전으로 돌아간 듯하군.’
처음으로 스승님이라고 말할 때의 어린 무스턴을 보는 것 같아서 조금이지만 가슴이 따스해졌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무스턴은 그 어느 때보다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라온하고는 왜 같이 있었던 거지?”
“제가 길을 잃었을 때 그분이 도와주셨습니다.”
길이라는 단어가 이상하게도 두 가지 의미로 들리는 것 같았다.
‘거기다….’
그분이라는 표현. 무스턴은 라온을 그놈 혹은 그 자식이라고만 말했기에 혼란이 가중되었다.
“솔직하게 말해라.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냐.”
“생각이라고 하신다면….”
“마음을 고쳐먹은 척하고 다시 라온에게 덤벼드는 건 아니겠지?”
제자를 믿고 싶지만, 너무 급격하게 바뀌어서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절대 아닙니다! 제가 감히 어떻게 그분을 해하겠습니까!”
무스턴은 죽을죄를 진 사람처럼 머리를 땅에 박았다.
“그분은 제 하늘이기에 절대 범접할 수 없습니다. 그분을 해하느니, 차라리 제가 죽겠습니다!”
제자는 아예 신관이 된 것처럼 라온은 찬양하기 시작했다.
“허!”
이게 대체….
시선을 내려서 제자의 눈을 보았다. 깨끗하다. 누구도 들어가지 않은 개울을 보는 것처럼 맑아서 다른 속셈이 있다고는 보이지 않았다.
‘정말 변했단 말인가?’
라온의 이름을 부를 때도 악의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맑은 눈과 목소리를 들으니, 제자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라온.’
대체 무엇을 한 게냐.
라온이 무스턴을 추가로 패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 역시 땅에 떨어졌기 때문이지 누군가에게 맞은 흔적이 아니었다.
폭력을 가한 것도 아닌데, 어떤 수를 써서 사람을 이렇게 바꾸었는지 궁금해졌다.
“무스턴.”
“예! 스승님.”
라온이 무스턴을 보내기 전에 스승에게 공손하라고 말했는데, 그 때문인지 평소보다도 더 예의 바른 느낌이었다.
“네가 그리 말한다면 나도 마지막으로 널 믿어보마.”
“감사합니다!”
“오늘은 이만 쉬고, 내일 네가 피해를 준 사람들을 찾아가 인사를 드리도록 해라.”
“죄송하지만, 지금 쉴 수는 없습니다.”
무스턴이 고개를 저으며 일어섰다.
“뭐?”
“라온 님께서 앞으로는 쓸데없는 감정에 휩쓸리지 말고 무학 발전에나 힘쓰라고 하셨으니, 지금부터 수련해야 합니다.”
그는 진심이라는 듯 아직 멍이 올라와 있는 손으로 검을 움켜쥐었다.
“하….”
검귀는 진중한 눈빛을 두른 무스턴을 보며 헛바람을 흘렸다.
‘이 정도로 사람을 교정하다니….’
그 아이는 대체….
* * *
일주일 뒤.
라온과 광풍단은 떠날 채비를 마치고, 하분성의 성문으로 향했다.
성문 앞 중앙 대로에는 하분성의 무인들만이 아니라, 주민들까지 줄을 서 있었다.
“별일도 아닌데, 왜 다 나오신 겁니까.”
라온이 구름처럼 모여든 하분성 사람들을 보며 뺨을 긁적였다.
이전처럼 모두를 구한 게 아니라, 실컷 즐기다가 돌아가다 보니, 살짝 민망했다.
“사람의 기억이라는 건 그리 쉽게 잊혀지는 게 아니다.”
밀랜드가 픽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에 복구를 마친 성벽이 들어섰다.
“이 성에 있는 모두는 네 녀석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 그 기억은 절대 무너지지 않는 성벽이 되었으니, 자신을 가져라.”
그는 은혜는 잊지 않기에 은혜라며 미소를 지었다.
“성주님 말씀이 맞습니다!”
“저희는 그날을 잊지 않았어요!”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건강하게 지내십시오!”
“무운을 빌겠습니다!”
밀랜드의 뒤에 서 있는 하분성의 무인과 주민들이 한목소리를 터트리며 손을 흔들었다.
“저도. 아니,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라온이 옅게 웃으며 밀랜드와 하분성의 무인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리안 가문에서 저희를 구해주신 건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광풍단도 라온을 따라 하분성의 무인들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서로가 서로의 은인이라. 이거야말로 각자에게 도움이 되는 가장 좋은 관계지.”
밀랜드는 마음에 든다며 시원하게 턱을 끄덕였다.
“예전에도 말했지. 하분성은 네 뒤에 서 있다고. 앞으로도 부담가지지 말고 부르거라.”
그는 몬스터가 줄어들어서 할 일이 적어졌다며 언제라도 호출하라고 손을 들어 올렸다.
“저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분성이 위험하다면 자다가도 달려오겠습니다.”
라온이 밀랜드와 눈을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하함!”
리메르가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폈다.
“검사들이 왜 이리 인사가 길어! 빨랑 가자!”
그는 귀찮다는 듯 손을 까딱였다.
“왜 저리 못난 녀석이 되었는지….”
밀랜드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게요. 지그하르트에서 얄밉기로는 제일입니다.”
라온이 리메르의 뒤에 서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잠시만요!”
마지막으로 고개를 숙인 뒤 떠나려고 하는데, 유아의 할아버지가 달려와 큼지막한 바구니를 내밀었다.
“좋아하시는 피자와 쿠키를 싸놓았습니다. 지금 만든 거니까. 가시면서 드십시오.”
-우오오오!
지루한 듯 눈을 꿈뻑이던 라스가 벌떡 일어나 포효를 내질렀다.
-점장! 사람이 됐구만! 좋아! 오늘부터 점장도 본왕의 부하이니라!
또 한 번 라스의 억지 스카우트가 시작되었다.
‘설마… 윽.’
라온 바구니를 안을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파인애플 피자에 파인애플 쿠키….’
요 식충이 때문에 다 망했어.
다른 피자도 먹어보고 싶었는데, 라스 때문에 가는 날까지 파인애플 피자를 먹게 되었다.
아무래도 한동안 나딘 빵으로 기강을 잡아야 할 것 같았다.
“할아버지 나는!”
유아가 심통이 난듯 허리에 척 손을 올렸다.
“너는 이곳에 있는 동안 너무 먹어서 살이 쪘지 않느냐. 좀 굶거라.”
“엑….”
그 말대로 유아의 볼에는 포동포동 살이 찼지만, 그게 더 귀여워 보였다.
“감사합니다.”
라온이 바구니를 챙긴 뒤 점장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앞으로도 저 아이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점장은 물기가 차오른 눈으로 유아의 두 손을 꼭 잡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저보다 먼저 죽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 말을 속으로 삼키며 웃었다.
“성주님.”
라온이 천천히 시선을 돌려 밀랜드를 바라보았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그 인사가 맞느냐? 올 때는 조금 달랐던 거 같은데?”
밀랜드는 인사를 받지 않고 손을 휘휘 저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옅게 웃으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제서야 밀랜드와 다른 이들의 얼굴에 미소가 차올랐다.
“그래. 또 보자꾸나.”
라온은 사람들의 웃음을 더 따스하게 만드는 햇살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꼭 다시 오겠습니다.”
* * *
글렌은 깔끔하게 수리한 옥좌의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왜 안 오는 것이냐!’
금패와 보상 그리고 칭찬을 가득 준비해놨다. 대본까지 써서 달달 외웠는데, 라온과 광풍단은 도통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분성에 들린다고 하더니, 아예 거기서 살 생각인가?’
하분성에 들렀다가 온다는 리메르의 편지 이후 아무런 연락도 없기에 더욱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후우….”
예전 리메르가 보냈던 편지의 ‘와우’와 ‘뿅’을 보자, 다시 분노가 차올랐다.
‘무조건 죽여야겠어.’
옛 추억 때문에 살려둘까 고민해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될 것 같다. 필히 죽이기로 다짐했다.
툭. 툭. 뚜둑.
답답함에 두드리는 옥좌의 팔걸이가 또 부러질 것처럼 흔들릴 때 알현실의 문이 열리고 로엔이 들어왔다.
“가주님.”
로엔이 글렌에게 고개를 숙인 후 미소를 지었다.
“광풍단이 복귀하고 있다고 합니다.”
“정말인가?”
“예. 두 시간쯤 후면 정문에 도착할 거라고 합니다.”
“그래?”
글렌이 입매를 말아 올리며 일어나려다 말고 우뚝 멈췄다.
“커흠!”
그는 괜히 헛기침을 하고 옷매무새와 머리를 정돈한 뒤 다시 옥좌에 앉았다.
“내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야. 임무가 끝났으면 바로바로 복귀해야지. 이렇게 시간을 끌다니, 가문을 무엇으로 아는 건지!”
“그러셔야죠.”
“다만!”
글렌이 옥좌에 팔을 얹으며 눈동자를 슬쩍 내렸다.
“이번에 광풍단이 했던 일은 보통 위업이 아니었으니, 칭찬을 먼저 해주는 게 옳겠지. 로엔.”
“예!”
“바로 승급식을 진행하겠다. 간부들을 소집하라.”
“알겠습니다.”
로엔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알현실을 나섰다.
잠시 후 알현실로 직계와 방계를 비롯한 가문의 간부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그들은 광풍단의 소식을 들었는지 갑자기 불려왔음에도 아무런 불만 없이 조용히 열을 맞춰서 섰다.
글렌은 어느 때보다도 냉랭한 기운을 흘리며 시선을 내렸다.
그가 긴장을 감추기 위해서 옥좌의 팔걸이를 비틀려던 순간 알현실 밖에서 로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광풍단이 임무를 끝내고 복귀했다고 합니다!”
“들어오라 하라.”
낮은 음성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알현실의 문이 열리고 먼지를 가득 뒤집어쓴 광풍단이 안으로 들어왔다.
‘저 녀석….’
글렌은 가장 앞에서 문을 들어서는 라온을 보며 손끝을 떨었다.
‘그사이에 또 성장한 건가?’
망혼귀를 잡으며 깨달음을 얻었다고 여겼는데, 못 본 사이에 육체와 정신 그리고 무학 전부가 한 층 더 발전해 있었다.
‘정말이지 방심할 수가 없는 아이야.’
자신도 모르게 냉랭함을 지우려고 할 때 광풍단의 가장 뒤에서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올리니, 처음 보는 백발의 노인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자가….’
글렌은 말려 올라가던 입매를 꽉 잡아끌며 눈매를 좁혔다.
‘검귀인가?’
대륙 전체를 울리는 명성을 가진 무인이지만, 지금 떠오르는 건 그의 업적이 아니라, 리메르의 편지에 적혀 있던 내용이었다.
<검귀랑 라온이 꽤 친해졌네요. 이쪽이 진짜 할아버지인 줄?>
글렌은 겨우 고친 옥좌의 팔걸이를 뭉개며 입매를 비틀었다.
‘이쪽이 진짜 할아버지 같다고?’
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