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5화
라온은 심장이 폭발할 것처럼 거세게 뛰는 것을 느끼며 볼 안쪽 살을 씹었다. 고통 덕분에 조금이나마 긴장이 가셨다.
‘침착해야 해.’
조금만 어긋나도 다 망할 거야.
상대는 마계를 지배하는 질투의 군주. 말 한 번, 행동 하나 잘못했다간 라스에게 몸을 넘길 새도 없이 목이 날아갈 것이다. 자그마한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된다.
-네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냐!
바드득 이를 가는 라스를 힐끔 보았다.
‘질투의 군주 엔비라….’
라스에게 들었던 엔비에 대한 정보는 그리 많지 않았다.
‘다만 전부 중요한 정보였지.’
엔비는 부하들을 험하게 다루고, 양아치처럼 추잡하고 찌질하며, 무스턴과 비슷한 성격을 가졌다고 했었다. 셋뿐이지만, 충분히 도움이 되는 정보들이었다.
‘양아치처럼 찌질하고, 추잡하다고 했으니까. 이쪽의 전력이 압도적이라면 알아서 굽힐 거야.’
무스턴은 실컷 얻어맞은 이후에 질투의 감정 자체가 가라앉았다고 햇으니, 엔비도 비슷할 것이다.
라스와 슬로스가 한편이라고 믿게만 한다면 이 상황을 지배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 녀석만 일어났으면 이런 도박도 필요 없는데….’
라온이 슬로스를 향해 눈동자를 굴렸다. 아기 백곰은 어느새 입가에 침까지 흘리며 자고 있었다.
‘하긴 이젠 일어나도 늦었지.’
이미 슬로스가 라스의 휘하에 들어왔다고 말했기에 이젠 일어나도 문제다. 지금 집중해야 할 건 엔비를 완벽하게 속이는 일뿐이다.
“인간.”
엔비가 눈매를 가늘게 좁힌다. 뱀과 같은 눈동자로 노려보는데, 그 시선에 압도되어 심혼이 찢어질 것 같았다.
“다시 말해 봐. 지금 뭐라고 했지?”
“나태의 군주 슬로스는 라스 님의 휘하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라온은 조금 전에 했던 말을 담담하게 반복했다. 구역질이 나올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지만 억지로 짓눌러서 참아냈다.
-아니이이이이!
라스가 빽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본왕도 모르게 저 잠탱이가 왜 분노의 소속이 되는 건데! 거저 줘도 안 받을 것이니라!
‘지금은 이 방법뿐이야.’
슬로스가 라스의 수면 방해에 겁을 먹었다면, 엔비는 전력 그 자체로 겁을 주어야 했다.
“슬로스가 라스의 밑에 들어갔다고? ”
엔비가 비웃음을 흘리며 턱을 치켜들었다.
“그 말을 믿으라는 거냐?”
“안 믿으면 어쩔 거지?”
“어쩌기는 뭘 어째. 네 사지를 뜯어서 내 새로운 종에게 먹이로 줘야지.”
그녀가 뒤에서 멍하니 서 있는 무스턴을 가리켰다.
“네가 가진 재능과 명성은 모두 저 아이에게 돌아갈 거야.”
“내가 라스 님을 따르고, 모시는 분노의 그릇임을 알면서도 공격하겠다는 건가?”
라온은 오러를 운용하여 손끝이 떨리는 것을 막으며 엔비를 바라보았다.
-따르고 모셔? 지금도 대놓고 무시하면서?
라스가 개구리처럼 펄떡 튀어 올라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노오오옴! 하늘이 보고 있는데 어디서 그런… 켁!
손을 터는 척하면서 팔꿈치로 라스를 쳐냈다.
“나는 라스 님의 충실한 종이자, 그분의 영혼을 담을 그릇이다. 건드리면 후회하게 될 거야.”
-아, 아니다! 본왕이 종노릇을 하고 있느니라! 제발 구해다오!
라스는 엔비를 향해 손을 마구 흔들었지만, 당연히 엔비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후회?”
엔비가 붉은 입술을 길쭉하게 말아 올렸다.
“날 속이려면 조금 더 현명하게 움직였어야지. 그 손톱만한 분노로 라스의 그릇이라니, 너무 급했어.”
그녀는 볼 것도 없다는 듯 손을 들어 올렸다. 어린 외모와 말투처럼 충동적인 움직임. 손아귀에서 응집되는 강렬한 마기에 심장이 꽉 조여드는 느낌이 들었다.
-그거다!
라스가 강하게 손뼉을 쳤다.
-역시 멍청한 잠탱이와는 달라! 당장 공격해서 본왕을 강림시키게 만들어라.
녀석은 환희가 스며든 표정으로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후….”
라온은 제천검을 고쳐 쥐고, 진혼검을 뽑으며 낮은 숨을 뱉었다.
‘예상대로 움직여주시는군.’
엔비에게 의심의 싹을 틔우고, 꺾어버리기 위해서 일부러 분노를 많이 끌어 올리지 않았다.
지금 운용하는 분노는 고작 20. 저 찌질이가 의심할 수밖에 없는 낮은 수치였다.
“속일 사람을 잘못 골랐어.”
엔비의 손아귀에서 피어나던 마기가 빛살이 되어 쏘아진다. 우악스러운 진녹색 기운에 피부가 뜯겨나가고, 뼈가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콰아아아아아!
라온이 두 검을 교차로 세우며 만화공과 글래시아를 극성으로 운용했다.
촤아아아악!
엔비가 쏘아낸 질투의 마기가 눈앞으로 다가온 순간 다리가 땅에 박힐 정도로 힘을 주며 제천검을 위로, 진혼검을 아래로 뻗어냈다.
우우우웅!
단전에서 폭발한 만화공의 열기와 글래시아의 냉기가 양 손끝으로 모여들며 장대한 빛무리를 토했다. 청홍의 섬광. 상반되는 두 기운이 정심한 파동을 일으켰다.
붉게 물든 제천검의 칼날이 염화의 파도를 일으키고, 푸르게 젖은 진혼검의 검극이 새하얀 그림자를 피워냈다.
염해무결과 백영섬. 절세라 불러도 아깝지 않은 두 검격이 엔비의 마기에 정면으로 맞섰다.
찌지지지직!
무시무시한 기운들이 경합하며 강렬한 스파크가 하늘을 뒤덮고, 스터린 산 전체가 뭉개질 것처럼 뒤흔들렸다.
‘크으윽….’
역시 장난이 아니야.
엔비가 아주 약간 진심을 냈을 뿐인데, 조금 전과는 차원이 다른 압력이 들어왔다. 조금만 긴장을 풀었다간 몸의 절반 이상이 날아갈 것 같았다.
쿠구구구구!
염해무결도, 백영섬도 제 투로를 향하지 못하고, 마기에 막혀서 버둥거리고 있었다. 압도적인 무력의 차이였다.
“후욱….”
라온이 숨을 참으며 마기 사이로 엔비의 표정을 살폈다. 비웃음을 가득 담고 있는 눈동자. 거짓을 확신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지금이다!’
확신을 깨면 심리도 무너지는 법. 지금이 바로 엔비의 멘탈을 망가뜨릴 때였다.
고오오오!
입술을 깨물며 영혼 밑바닥에 달라붙어 있는 분노를 모조리 끌어 올렸다.
백을 한참 넘어선 분노의 기운이 단번에 폭발하며 두 자루의 칼날에 새로운 불길을 일으켰다.
콰아아아아아!
굳건한 벽에 막힌 듯 꼼짝도 못하던 진혼검과 제천검이 날카로운 청광을 두른 채 엔비의 마기를 거침없이 찢어발겼다.
촤아아아악!
마른 낙엽처럼 갈라지는 진녹색 마기 뒤로 엔비의 얼굴이 보였다. 비웃음을 흘리면 입매가 그대로 굳은 채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
라온은 담담한 눈빛으로 엔비를 굽어보았지만, 속으로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젠장….’
더럽게 아프네.
계획대로 된 건 좋았지만, 열기와 냉기를 동시에 일으키고, 분노까지 운용하자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에도 격통이 찾아왔다.
현기증이 나서 당장 자빠지고 싶었지만, 손톱으로 손바닥을 찌르며 버텼다.
“그, 그 분노는 라스의….”
엔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들어 올린 손을 부르르 떨었다.
“이제야 믿는 건가?”
라온이 미간을 찌푸리며 제천검과 진혼검을 아래로 내렸다.
“그 정도 분노를 가지고 있었으면서 왜 지금에서야 꺼내든 거지?”
엔비는 눈동자에 의문을 가득 담은 채 입술을 깨물었다.
“말했잖아. 나는 라스 님의 종이라고, 그분의 허락이 없었으니, 분노를 꺼내지 않았을 뿐이다.”
“그럼 아까 허가를 내렸다는 게….”
“그래. 라스 님이 분노를 사용해도 좋다고 허락하셨다.”
라온은 피어 나오려는 웃음을 내리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먹혔군.’
일부러 들으라고 던졌던 말을 기억해주어서 다행이다.
그 말과 이 상황이 어우러지며 엔비의 눈동자가 혼란이라는 호수에 빠진 듯 출렁였다.
“질투의 군주. 엔비여. 지금 분노의 군주께서 널 지켜보고 계신다.”
분노를 두른 목소리를 뱉으며 엔비를 노려보았다.
-그래. 보고 있지. 보고는 있는데! 본왕은 허가 따위 하지 않았느니라!
라스가 도톰한 주먹으로 본인의 가슴을 두드리며 악을 질렀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느니라! 답답해서 뒤지겠느니라!
“허튼수작을 부렸다가는 당장 강림하여 널 찢어 죽이신다고 하시는군.”
라온은 라스 쪽을 힐끔 보고서 아예 하지도 않은 말을 당당하게 외쳤다.
‘이것도 통하겠지.’
라스는 엔비보다 강하다고 말했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녀석의 특성상 무력적으로 우위에 있는 건 분명할 것이다.
“크윽, 괴식만 좋아하는 식충이가….”
엔비가 라스를 식충이라 부르며 이를 갈았다. 달려들지 못하는 것을 보니, 라스의 말은 역시나 사실이었다.
-시, 식충이? 저 추잡한 뱀 새끼가 감히 어디다 대고!
라스는 식충이 소리를 듣자마자, 발작하듯 몸을 세웠다. 아무래도 녀석의 별명은 마계에서도 식충이인 것 같았다.
‘여기서 더 흔들어야 해.’
라온은 내상으로 인해 목울대를 넘어온 핏물을 바닥에 뱉으며 나태의 기운을 일으켰다.
화아아아!
연기처럼 피어나는 검은 기류가 전신으로 퍼지며 마기로 인해서 찢어진 피부와 근육에 스며든다.
외부와 내부의 상처를 빠르게 치유하는 나태 고유의 재생력이었다.
“그, 그건!”
엔비의 눈동자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벌어졌다. 툭 건들며 튀어나올 정도였다.
“분노의 그릇이 왜 나태의 기운까지 가지고 있는 것이냐!”
“슬로스가 라스 님의 밑으로 들어간 증거다. 그를 관리하기 위해서 나태의 기운을 받아놨지.”
라온이 제천검과 진혼검을 털어내며 시선을 떨어뜨렸다. 칠부 능선 이상 넘어왔다. 이제 마지막 쐐기를 박을 때였다.
-왜 본왕도 모르는 사이에 저 잠탱이가 본왕의 소속이 된 거냐고! 이 마귀 같은 놈아!
라스가 울부짖으며 동그란 주먹으로 땅을 후려쳤다.
-마신이시여! 저놈 죽이고 천국 가겠습니다! 제발 육체를 주십시오!
“예? 아니….”
라온이 난동을 부리는 라스 쪽을 보며 눈매를 찌푸렸다.
“라스 님이 직접 말씀하실 필요는… 아, 알겠습니다.”
인상을 찌푸리며 허공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 정신 나간 놈이 또 뭘 하려고….
라스는 그 모습을 보며 불안한 듯 턱을 떨었다.
“후….”
라온이 엔비에게 한발 다가가며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부터 라스 님이 직접 말씀하실 것이다. 영광으로 알도록.”
엔비에게 그 말을 하자, 두 마왕이 동시에 발작을 일으켰다.
“이 건방진….”
-야이 또라이 자식아!
마왕 둘이 내뿜는 살의를 흘려넘기며 눈을 내리감았다 뜨며 분노의 마안을 개방했다.
붉은 눈동자 위로 푸른 분노의 불꽃이 타올랐다.
“마계를 기어 다니는 추잡한 뱀 따위가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온 것이냐.”
매일 같이 라스의 말을 원 없이 듣기에 그의 말투를 따라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라스….”
엔비가 어깨를 떨며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라스의 말투로 추잡한 뱀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자, 정말 녀석이 말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감히 본왕의 영역을 침범하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대, 대체 무슨 수를 썼지? 저 잠탱이가 왜 네놈의 밑에 들어간 건데!”
“본왕의 위대함을 알아본 것이지. 다른 이유가 있겠느냐.”
“크으….”
라스의 특기인 거만함을 드러내자, 엔비는 더욱 짜증이 돋아 오른 듯 이를 갈았다.
-아, 아니야!
라스가 엔비에게 다가가 손을 마구 휘저었다.
-믿으면 안 돼! 전부 거짓말이다! 요 사악한 마귀 놈이 구라를 치고 있다고!
엔비가 속기 시작하자, 라스는 당황하여 위엄 있는 말투를 가져다 버리고,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본왕의 정보를 또 이용하다니, 이 더러운 박쥐 놈이!
‘그래. 네 덕분이야. 고맙다.’
평소 라스의 수다를 한 귀로라도 들은 보람이 있었다. 정보도 주고, 연기 상대도 해주고 최고의 파트너였다.
-아아아아악!
“엔비.”
라온은 라스가 일으킨 분노의 외침을 무시하며 두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네놈은 두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
“실수라니….”
“첫 번째는 본왕의 영역을 침범했다는 점 그리고 두 번째는 본왕의 그릇이 될 이 육체를 두 번이나 공격했다는 점이다.”
라온이 분노를 외부로 개방했다. 분노의 기운이 어깨 위로 타오르며 스터린 산 전체를 짓눌렀다.
엔비가 진심으로 질투의 기운을 드러내면 훅 꺼져버릴 수준이지만, 그녀는 라스의 존재에 움직이질 못했다.
-속지 마! 본왕은 이놈을 죽여도 아무 상관도 하지 않을 것이니라! 요놈의 팔다리가 뜯겨나갈 때마다 탭댄스를 출 수 있다고! 제발 움직이란 말이다!
라스가 그저 허세일 뿐이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엔비의 표정은 노랗게 질려갔다.
“슬로스의 잠자리라면 네놈의 무덤이 되기에는 과분하겠지. 오라.”
“나, 나는….”
“걱정하지 마라. 슬로스에게는 길을 막으라 지시하고, 본왕이 직접 상대해줄 테니까.”
라온이 입매를 말아 올리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라스라면 둘이서 싸우겠다고 하지 않을 것 같아서 꺼낸 말인데, 이것도 제대로 통한 것 같았다. 이제 엔비의 표정에 의심 따위는 조금도 비치지 않았다.
-참지 말고, 그냥 조져! 이놈은 네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목이 날아갈 허수아비이니라! 제발 공격해!
라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분노를 폭발시켰다. 시퍼런 분노가 격류처럼 마나회로를 뚫고 들어왔다. 평소라면 글래시아나, 만화공으로 막겠지만, 일부러 분노가 퍼지도록 놔두었다.
콰아아아아아!
본래 가지고 있던 100이 넘는 분노와 라스의 터트린 분노가 하나의 불꽃처럼 맞물리며 엔비가 식은땀을 흘릴 정도로 거대한 기파를 일으켰다.
“나, 나는 너희가 함께 있을 줄은 몰랐어! 정말이야!”
엔비는 외형에서 보이는 소녀의 나이로 돌아간 듯 고개를 마구 휘저었다.
“이대로 갈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떠날 테니까! 제발 놔줘!”
“…….”
라온은 대답 없이 엔비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매, 맹세할게. 너희들의 동맹도, 슬로스가 이곳에 있는 것도, 네 그릇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을게!”
엔비는 이곳에서 본 일을 입 밖에 내지 않겠다며 두 손을 모았다.
“그럴 필요 없이 찌질하고, 추잡한 뱀 한 마리를 잡아 죽이는 게 훨씬 간단할 것 같은데?”
라온이 비웃음을 흘리며 두 검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검들이 땅에 박히며 서늘한 소리가 울렸다.
“선공의 기회를 주마. 강림에도 시간이 걸리니, 기회는 지금뿐이니라. 덤비거라.”
라온은 덤비라고 말을 한 뒤 눈매를 찡그렸다.
“라스 님! 지금 강림하시면 훗날이. 아니, 아무리 그래도… 하아, 알겠습니다. 바로 사용할 수 있게 준비하지요. 다만 슬로스도 깨우겠습니다. 무리하실 필요는 없으니까요.”
오른손에 분노의 기운을 응집시킨 후 냉기를 둥글게 휘감아 백은의 오로라를 펼칠 준비를 마쳤다.
왼손은 슬로스에게 가져다 대며 나태의 기운을 일으켰다.
“백은의 오로라….”
엔비는 백은의 오로라를 운용하는 오른손과 슬로스에게 향한 왼팔을 보고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미, 미안해! 다시는 여기에 얼씬도 안 할게! 한 번만 용서해줘!”
엔비가 손을 휘저으며 머리를 숙였다. 곧 울 것처럼 눈망울까지 흔들렸다.
‘여기까지는 완벽해.’
마왕 둘이라는 압도적인 전력을 드러내니, 엔비는 싸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먼저 숙이고 들어왔다.
라스에게 들었던 대로 찌질하고 추잡한 마왕다웠다.
-이런 쫌생이 같은 놈! 저딴 연기에 속다니! 마왕 때려치우거라! 넌 자격이 없어!
라스가 엔비에게 마왕의 자격이 없다고 떠들어댔지만, 그 말을 듣는 건 라온뿐이었다.
라온이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은 채 비웃음을 흘렸다.
“그 찌질한 꼬라지를 보니, 본왕이 손쓸 마음도 사라지는군.”
“아!”
엔비가 희망을 얻은 듯 고개를 들며 녹색 눈동자를 빛냈다.
“내가 한 말은 마왕의 이름을 걸고 지킨다고 맹세할 테니까. 그냥 보내주기만 하면….”
그녀는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었다.
“맹세에는 증거가 필요한 법이지.”
“즈, 증거?”
“본왕이 말했지. 네년에겐 잘못이 있다고, 그중에서도 본왕을 화나게 만든 건 이 육체를 공격한 일이다.”
“아….”
“본왕의 그릇에 네 권능을 넘겨라. 어…?”
라온은 그 말을 뱉자마자, 분노를 가라앉히며 고개를 마구 저었다.
“라스 님! 전 필요 없습니다! 그냥 여기서 엔비를 죽이는 게 훨씬 나은 일입니다! 재고해주십시오!”
-또! 또 시작됐어! 저 지랄 맞은 메소드 연기가!
라스가 돌고래처럼 펄쩍 뛰었다.
-이노오오오옴! 하늘이 무섭지도 않으냐!
‘하늘도 마족은 안 챙겨.’
-억울하고 비참해서 심장이 터질 것 같으니라! 본왕은, 본왕은!
녀석은 가슴을 두드리며 울부짖다가, 눈을 까뒤집고 뒤로 넘어갔다.
-꾸르르륵….
‘데자뷰?’
저 모습 어디서 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