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424화 (424/653)

제424화

무스턴이 진녹색으로 일그러진 공간을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게 뭐지?’

태어나서 처음 보는 구조의 차원문이다. 마법도, 주술도 아닌 사이한 기운. 흑탑의 마인들이 사용하는 마기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야.’

저 차원의 틈 속에 머무는 괴인의 존재감이 무시무시했다. 자그마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데, 그저 존재감만으로 숨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나 정도는 손톱으로도 죽일 수 있어….’

고양의 앞의 쥐처럼 움직일 수가 없다.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서 석상처럼 굳어 있을 때 차원 안쪽에서 두 번째 음성이 들려왔다.

“요즘 질투를 그렇게 솔직하게 말하는 아이는 흔치 않지.”

흥이 오른 듯한 어린 여성의 목소리에 등골 사이로 오싹한 소름이 돋아올랐다.

“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무스턴이 손으로 목을 감싸 쥐고, 억지로 혀를 움직였다. 죽고 싶지 않아서일까. 본능적으로 존댓말이 튀어나왔다.

“네가 불렀잖아.”

차원 속에 떠오른 마름모꼴 눈동자에서 연녹색 빛이 반짝였다.

“제가 불렀다니, 그게 무슨….”

“네 입으로 ‘질투가 난다고. 세상 그 모든 수를 써서라도 네가 가진 것을 빼앗을 것이라고. 절대 놓치지 않는다고.’ 외쳤던 걸 벌써 잊은 거야?”

“흐읍….”

무스턴이 스스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 말을 들었다고?’

가슴이 터질 것 같아서 외쳤을 뿐인데, 그 말을 듣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 부끄러움에 얼굴과 목에 뜨거운 열이 올라왔다.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차원 속에서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가 흘러내렸다.

“<질투>는 지혜로운 현자도, 만인지상의 황제도, 천하제일의 무인도 가지고 있는 필수적인 감정이야.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뱀을 키운다는 말도 있으니까.”

“뱀….”

“너는 속마음을 감추고 가면을 쓴 위선자들과 달리 네 마음을 솔직하게 밝혔지. 그것만으로도 표리부동한 쓰레기들보다 훨씬 나아.”

“아….”

자신보다 훨씬 어리게 느껴지는 여성의 음성임에도 심장에 큰 울림이 일었다.

‘내가 낫다고?’

라온을 만난 이후 그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했다.

모두가 라온의 이름만을 외쳤고, 스승조차도 자신을 보지 않았는데, 오랜만에 남에게 인정받자 머리털이 쭈뼛 설 정도로 감정이 벅차올랐다.

“감정은 드러내야 의미가 있지. 너는 남들보다 한발 앞서 있어.”

폭발할 것처럼 요동치던 몸속의 기운이 천천히 가라앉는다. 바닷가를 휩쓸던 거센 폭풍이 멎고, 구름이 가신 맑은 하늘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 그럼 제게 힘을 줄 수 있다는 겁니까?”

“물론이지. 난 그걸 위해서 이곳에 왔으니까. 네가 질투하던 인간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이 네게로 향할 거야.”

차원 속에서 붉은 입술이 가느다란 미소를 지었다. 아름다운 웃음에서 이해할 수 없는 불길함이 돋아났지만, 힘을 준다고 하니 물러날 수가 없었다.

“그놈의 명성과 재능 그리고 사람들의 인정까지 제 것이 된다는 게 가능한 겁니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야.”

여성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즉답했다.

‘말이 안 되는 일이야.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대체 누구지?’

너무 놀랐기 때문일까. 첫 번째 질문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는 게 떠올랐다.

“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무스턴이 다시 한번 차원 속 여성에게 정체를 물었다.

“나는 마계의 다섯 번째 마왕. 질투의 군주. 엔비(envy)야.”

갈라진 차원 속에서 해를 한 번도 보지 못한 듯한 새하얀 손이 나왔다.

“내 손을 잡는다면 네가 질투하던 인간의 모든 것을 너에게 넘겨주마.”

“아….”

무스턴이 엔비의 손을 보며 턱을 부르르 떨었다.

‘마왕이었다고?’

아니, 마왕이어야 말이 돼.

이제야 저 거대한 존재감이 이해가 간다. 어떠한 기운도 없이 기척만으로 사람을 압도하는 건 종을 초월한 자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이건 기회인가, 아니면….’

마왕. 아니, 마족들이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고, 혼을 가져간다는 속설이 떠올랐다.

“그, 그럼 전 당신에게 무엇을 드려야 하는 겁니까? 영혼입니까?”

“나와 함께 하는 거야.”

“함께 한다는 건….”

“나의 권속에 들어오게 되는 거지?”

“부하가 된다는 뜻입니까?”

“그래.”

엔비는 솔직하게 무엇을 원하는지 말해주었다.

‘부하 정도라면 괜찮지 않나?’

어차피 지금은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니까.

스승의 관심이 라온에게 옮겨갔고, 놈의 편만 들고 있어서 이대로 있다간 말라 죽을 판이다.

영혼을 빼앗기는 게 아니라면 충분히 받을 수 있는 조건이었다.

“음….”

무스턴이 엔비의 손에 팔을 뻗으려다가 멈춰 섰다. 바닥에 깔린 눈을 보자, 백발을 말끔하게 넘긴 스승의 얼굴이 떠올랐다.

‘스승님께 한 번 물어보기라도 할까.’

엔비의 존재감에 정신이 들었기 때문일까. 다시 한번 렉타르에게 찾아가서 자신과 라온의 가치에 대해 묻고 싶었다.

“자, 잠시만 시간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만나고 싶은 사람이….”

“이미 늦었어.”

일단 거절하려고 할 때 엔비의 손이 튀어나와 자신의 손을 꽉 말아쥐었다.

“네가 날 불렀을 때 이미 계약이 이루어지기 시작했으니까.”

그 말이 끝나자마자, 손등 위로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지독한 마기가 흘러들어온다.

쿠구구구!

진녹색 마기는 순식간에 오러를 밀어내고, 마나회로를 장악한 뒤 영혼의 밑바닥까지 파고들었다.

찌지지직!

무스턴은 불에 달군 인두로 영혼을 지지는 듯한 격통에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아악!”

“조금만 참으면 된단다. 조금만 참는다면 네가 바라던… 아?”

엔비가 외부로 나와 계약을 끝마치려다 말고, 스터린 산 정상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슬로스.”

그녀의 붉은 입술이 가늘게 떨리며 말려 올라갔다.

“거기에 있었어?”

* * *

라온은 떠오르는 메시지들을 보며 고개를 빼 올렸다.

[모든 능력치가 12포인트 상승합니다.]

[연승의 효과로 6포인트가 추가 상승합니다.]

모든 능력치가 18포인트 상승하며 전신의 근육과 마나회로가 약동하는 희열이 느껴졌다.

정신 역시 고양되어 피로가 모조리 사라진 기분이었다.

‘역시 제대로 주네.’

라스가 말했던 대로 시스템은 내기의 수준에 맞게 높은 보상을 보내주었다.

-아니, 이거 너무 많이 주잖아!

라스가 메시지를 보며 입을 쫙 벌렸다.

-본왕은 파인애플 피자 다섯 판을 요구했을 뿐인데 왜 능력치가 18개나 오르는 건데!

녀석은 사기 계약이라며 빽 소리를 질렀다.

‘네가 맡긴 시스템이 아주 공정하게 처리해준 건데 뭐가 그리 불만이야.’

-공정은 개뿔! 본왕이 돌아가면 무조건 저것부터 부수고 다시 만들 것이니라.

‘그러시던가.’

라온은 어깨를 으쓱인 뒤 능력치 다음에 떠오른 메시지를 확인했다.

[특성 <설화의 마갑>이 생성됩니다.]

이번에도 설화의 이름이 붙은 특성이었다. 어울리지 않게 꽃을 참 좋아하는 녀석이다.

‘이건 뭐지?’

-마, 마갑을 준다고? 이게 정말 미쳤나!

라스가 분노의 춤을 추는 것을 보니, 꽤 좋은 특성 같았다.

<설화의 마갑>

글래시아의 냉기를 운용하여 육체의 내부와 외부를 굳건하게 만든다.

내용이 간단해서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설화의 마갑은 내상과 외상을 줄여주는 방어형 특성이었다.

‘나쁘지 않네.’

냉기와 분노를 운용하는 방식이라 어렵지 않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늘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호갱님.’

라온이 라스를 놀리듯 고개를 크게 까딱였다.

-네놈은 천벌을 받을 것이니라!

‘마족이 말하는 천벌이라니, 하늘이 잘도 내리겠다.“

-끄으윽, 정말이니라, 본왕은… 어?

라스가 바드득 이를 갈다 말고, 산 아래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저 찌질이가 여기에? 설마 진짜 그렇게 된 건가?

녀석이 눈을 부릅뜨며 고성을 터트렸다.

‘뭔데. 갑자기 왜….’

라스의 시선을 따라가 봤지만, 느껴지는 건 슬로스의 숨소리뿐이었다.

-도망치는 건 무리인가.

라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어깨 위로 올라갔다.

-일어나라. 그리고 준비해. 곧 올 것이니라!

‘뭐가 오는지는 말을 해줘야지!’

라온이 누군지를 묻기 위해 라스를 보려고 하는데, 머리 위에서 하늘 그 자체인 듯한 거대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이건….’

턱을 떨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키가 큰 소녀가 허공에 떠 있었다.

이 장소와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소녀와 눈을 마주치자, 영혼의 그릇이 산산조각으로 깨지는 듯한 충격이 일어났다.

‘설마….’

이 정도 영혼의 울림을 일으킨 건 두 번. 라스와 슬로스를 만났을 때였다. 저 여자 역시 그 둘과 같은 마계의 군주인 것 같았다.

눈동자를 떨며 소녀를 자세히 살폈다.

어려 보이는 외모와 달리 체형은 꽃줄기처럼 가늘고 길었다. 손목과 발목에 착용한 금빛 장신구들 때문일까. 몽환과 신비로움이 동시에 느껴지는 분위기를 둘렀다.

아릿하게 흘러내리는 진녹색 눈동자에서 강렬한 감정의 격류가 느껴졌다. 개인이 아니라, 이 세계 전체를 향하는 질투의 감정. 그 깊고 짙은 감정의 골을 마주하자 심장이 터질 듯 조여들었다.

‘…저게 엔비야?’

저 여성의 눈에 담긴 감정을 보고 떠올릴 수 있는 인물은 질투의 군주 엔비뿐이었다.

-그렇느니라.

라스가 미간을 깊게 구겼다.

-아무래도 그 멍청한 질투쟁이 놈이 사고를 친 모양이다.

그 말에 다시 엔비를 보았다. 그녀의 뒤편에 넋이 나간 듯한 무스턴이 떠 있었다.

‘저놈이 소환했다고?’

-전에 말했듯이 놈은 경계를 넘기 직전이었다. 네놈에게 맞고 감정이 가라앉았을 텐데, 놈이 깨어난 후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으니라.

‘제기랄….’

더 확실하게 조졌어야 했다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이미 늦었다. 지금은 어떻게 해서든 이곳을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고오오오!

엔비가 천천히 하강하자, 슬로스가 설치한 결계가 치솟으며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슬로스가 결계라니, 잘못 느낀 줄 알았다니까.”

엔비는 라스처럼 슬로스의 결계를 느낀 듯 당황하지 않고 손을 뻗었다.

빠지지지직!

그녀의 손에서 피어난 진녹색 기운이 뱀처럼 나아가자, 검은 기류로 이루어진 슬로스의 결계가 사선으로 비틀어졌다.

“하?”

가볍게 정상에 내려선 엔비는 슬로스 옆에 서 있는 라온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인간 따위가 이곳에 있는 거지?”

그녀의 눈동자가 뱀의 혓바닥처럼 라온의 전신을 훑어내렸다.

“질투가 전혀 안 느껴지는 쓰레기네. 다만 어디서 봤는데….”

엔비가 눈매를 좁히다가 가볍게 손뼉을 쳤다.

“아!”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달큰한 미소를 흘렸다.

“너로구나. 이 아이의 질투를 받은 게.”

엔비가 뒤에 있는 무스턴을 가리키며 입맛을 다셨다.

“적당히 욕심만 채워주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이렇게 만나다니, 참 운도 없지.”

“크윽….”

라온이 입술을 깨물며 자세를 낮췄다.

‘살기?’

엔비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10대 소녀의 장난기 어린 웃음이 살기를 두른 전장의 악마처럼 일그러졌다.

기운을 일으킨 것도 아니다. 그저 감정의 변화를 일으킨 것만으로 뇌리에 지끈거리는 통증이 일었다.

‘어떻게든 견뎌야 해.’

불의 고리와 만화공을 운용하며 눈동자를 굴렸다. 슬로스는 이 상황에서도 일어나지 않고, 푹 자고 있었다.

‘저거 왜 안 일어나. 위험한 상황이잖아!’

-엔비라고 해도 슬로스를 일격에 죽일 수는 없다. 아직 위험하지 않다는 뜻이니라.

라스는 슬로스를 이해하려고 하지 말라며 고개를 저었다.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해.”

엔비가 낭랑한 목소리를 흘리며 손을 저었다. 파리를 쫓는 듯한 가벼운 움직임에서 웅대한 힘의 파동이 느껴졌다.

고오오오!

하늘이 전신을 짓누르는 듯한 감각. 한 줌 핏물이 되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될 것 같은 공포가 밀려왔다.

‘그런데 이 느낌….’

겪어본 적이 있어.

얼마 전 검귀가 만검을 두른 검격을 내리칠 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라온이 불의 고리를 극성으로 운용했다. 일곱 개의 고리가 지금까지 중 가장 정심한 회전을 일으키며 초집중의 세계로 이끌었다.

-멍청한 놈아. 막고 싶으면 분노를 일으켜라!

라스가 지금 수준으로는 저 공격을 무사히 막을 수 없을 거라며 분노를 일으키라고 외쳤다. 같은 마왕의 감정이니 상쇄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아니야.’

라온이 피나도록 입술을 씹었다.

‘지금 써서는 안 돼.’

살기 위해서는 비장의 수를 아껴두어야 한다. 지금은 분노와 나태를 드러낼 때가 아니었다.

“크으….”

성장한 무력을 믿고, 진각을 밟으며 제천검을 뽑았다.

‘쳐내거나, 흘리기엔 늦었어.’

바로 공격이 들어올 줄 몰랐기에 초집중의 세계에 있음에도 시간이 부족했다. 지금은 막는 방법밖에 없었다.

제천검의 검병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아래에서부터 위로 쳐올렸다.

콰아아아아!

만화공 최강의 방어 초식 염주벽이 칼등을 타고 시뻘건 불길을 토해냈다. 파괴적인 화기가 아니라, 주인을 지키기 위한 수호의 불꽃이 요동치며 웅대한 화염의 방패를 제련했다.

우우우우웅!

라온은 염주벽을 일으키고도 멈추지 않았다. 솟아오른 불길의 방패에 중검과 절검의 묘리를 담았다. 부드러움과 유려함은 버리고 오직 방어에만 초점을 맞추는 한 수였다.

쿠와아아아아아앙!

엔비의 진녹색 기운과 염주벽의 불꽃이 맞부딪치며 스터린 산 전체가 뒤흔들렸다. 산 전체에 가득 찬 눈이 모조리 녹아버리는 듯한 열기가 사위로 번졌다.

‘크으으윽!’

단전의 오러를 모조리 끌어 올리고 있음에도 어깨가 뭉개질 것 같았다.

어떠한 기술도 없이 그저 힘으로 짓누르는데, 이 정도 충격이라니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였다.

-멍청한 놈! 분노를 쓰라니까!

‘아직 안 돼.’

아직 위기가 아니야.

꺾일 것 같은 다리에 힘을 주며 만화공의 열기를 모조리 뽑아냈다. 마나 회로가 타버릴 듯한 통증을 참으며 진녹색 기운을 밀어냈다.

쿠와아아앙!

스터린 산 정상의 빙판이 거미줄처럼 박살 나며 엔비의 기운이 염주벽을 열기를 넘지 못하고 녹아내렸다.

“하?”

엔비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비스듬히 틀었다. 짜증이 돋은 듯 눈매를 찌푸렸다.

“그걸 막아?”

그녀는 손아귀에서 조금 전과는 격이 다를 정도로 아찔한 기운이 모여들었다.

-저걸 그냥 막겠다고? 네놈 정말 개죽음을 당하고 싶은 것이냐!

라스가 라온의 얼굴 앞으로 날아올라 입술을 떨었다.

-엔비가 노리는 건 슬로스다. 만약 슬로스가 지금 일어난다고 해도 널 구해주지 않을 것이다. 폭주하면서 네놈부터 짓밟을 거라고!

‘그래서 어쩌자고.’

-지금 여기서 네놈이 살아남을 방법은 딱 하나. 본왕에게 몸을 넘기는 것뿐이니라!

녀석은 웃음인지, 미소인지 모를 표정으로 입매를 끌어 올렸다.

-엔비는 생각하기 귀찮아하는 슬로스와 달라. 이전처럼 말빨로 넘어갈 수는 없을 것이니라!

라스는 슬로스처럼 일이 잘 풀릴 수는 없다고 말하며 빨리 몸을 넘기라고 재촉했다.

‘너도 내 몸에 들어오면 폭주하잖아. 그럼 마왕 셋이 부딪친다는 건데, 하분성은 어떻게 되지?’

-그 영감이 있으니, 아주 잠깐은 버티겠지만, 꽤 많이 죽겠지.

녀석은 힘의 여파가 너무 커져서 막기 힘들 거라고 말했다.

-그래도 본왕이 최대한 빨리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해보겠다. 그곳에 본왕의 부하들이 있으니까.

‘하나만 더.’

라온이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하분성에 인간과 몬스터의 피로 이루어진 천연의 결계가 있다고 했는데, 그것도 무너지는 건가?’

-당연히 깨진다. 아마 도마뱀들까지 튀어나와 난리가 나겠지.

라스는 지금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안 돼.’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하분성에 있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절대 그런 결과가 일어나서는 안 된다.

-이 멍청한 놈! 엔비는 추잡하고 찌질할지언정 바보가 아니라니까! 네놈의 주둥아리가 안 통한다고! 빨리 몸을 내놔!

라스는 시간이 없다며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주둥아리… 아!’

이전에 슬로스를 공략했던 방법과 라스를 통해서 들었던 엔비에 대한 정보들이 톱니바퀴처럼 짜 맞춰지며 지금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떠올랐다.

“질투도 없는 쓰레기가 두 번 움직이게 만들다니.”

엔비가 두 번째 손짓을 날리려고 할 때 오히려 그녀의 앞으로 한발 다가갔다.

“거기까지 하지.”

“벌레 같은 놈이 지금 뭐라고….”

“이제야 허가를 내려주셨다.”

라온은 죽을 위기에서도 꺼내지 않았던 분노를 일으켰다.

고오오오!

시퍼런 악의로 똘똘 뭉친 분노가 영혼을 휘감으며 엔비에게 날카로운 이를 드러냈다.

“부, 분노? 네가 왜 분노를….”

“질투의 군주. 엔비여. 나는 분노의 군주님을 모시는 그릇이다.”

그 말에 나아가려던 엔비의 손에 우뚝 멈췄다.

-이 멍청한 놈! 그거 안 통한다고!

‘여기서 멈출 생각 없어.’

라온은 목울대까지 올라온 핏물을 되삼키며 눈빛을 가라앉혔다.

“분노의 그릇? 라스의 하인 따위가 왜 슬로스의 영역에 있는 거지?”

“이 땅은 라스 님의 것이니까.”

“정신이 나갔군. 슬로스가 떡하니 있는데!”

“그 역시 라스 님의 소속이다.”

“그게 무슨….”

-뭐어어어?

엔비와 라스가 동시에 눈을 부릅떴다.

“나태의 군주. 슬로스는 이미 라스 님의 휘하에 들어왔다.”

라온의 눈동자에 질투를 녹이는 시뻘건 기광이 번쩍였다.

-이 사기꾼 자식! 이번엔 또 무슨 짓을 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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