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423화 (423/653)

제423화

라온은 두 팔을 빼고, 슬로스의 결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물에 잠수하는 듯한 감각. 방해 따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프리패스네.”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아보자, 라스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턱을 쩍 벌리고 있었다.

“그냥 ‘어서 오세요.’ 하는데?”

-이, 이게 왜 열려?

라스는 입술을 푸르르 떨며 결계를 주먹으로 두드렸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렇게 간단하게 열리는 결계가 어디 있냐고!

녀석은 크게 당황했는지 평소 사용하던 위엄 있는 말투도 가져다 버리고 징징거리기 시작했다.

-네놈! 또 무슨 사기를 친 것이냐! 왜 결계가 작동을 안 하는 건데!

“왜긴 왜겠어.”

라온이 손목에 차고 있는 검은색 꽃팔찌를 가리켰다.

“이 팔찌에도, 내 영혼 속에도 <나태>의 감정이 박혀 있으니까. 열린 거지.”

조금 전 검은 꽃팔찌와 영혼 속 <나태>가 슬로스의 결계와 호응하는 게 느껴졌다.

이 결계를 만든 건 슬로스고, 검은 꽃팔찌와 영혼 속 <나태>도 그의 힘이니, 결계가 밀어내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어….

라스가 도톰한 손을 떨며 결계를 자세히 살폈다. 가늘게 좁혀지던 녀석의 눈이 보름달처럼 커졌다.

-이 멍청한 잠탱이 놈! 무슨 결계를 이따위로 만들어!

“왜? 잘 만들었잖아.”

라온이 딸기맛 솜사탕처럼 얼굴이 붉어진 라스에게 손가락을 흔들었다.

“누구를 거부하고, 누구를 받아들이는지 제대로 잘 알고 있구만.”

결계를 다시 만져보았다. 자그마한 거부반응도 없다.

세상만사를 귀찮아하는 슬로스가 이런 결계를 만든 것을 보면, 예전에 주었던 고블린 왕의 마석이 마음에 들었으니 얼마든지 찾아오라는 뜻 같았다.

-끄으윽….

라스는 그게 마음에 안 드는 듯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본왕이 몸만 찾는다면 슬로스 놈이 평생 잘 수 없게 만들 것이니라!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니라!

“그건 나중에 마음대로 하시고….”

라온이 라스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줄 건 줘야지.”

-흐읍!

라스는 그 손을 보자마자 눈을 질끈 감았다.

“확실하지 않으면 승부를 걸지 말라는 말. 못 들어 봤어?”

-못 들어 봤다! 이 망할 사기꾼 자식아!

녀석은 다 이긴 내기라고 생각하다가 패했기 때문인지 평소보다 더욱 울분에 차 있었다.

“그럼 오늘 배웠으니 됐네. 수업료라 생각하고 착실하게 납부해.”

-수, 수업료….

“필요 없는 특성 말고, 제대로 된 걸로.”

-예전처럼 본왕이 결정하지 않을 것이니 그건 걱정하지 마라.

라스는 본인이 직접 결정하면 내기의 공정성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시스템의 선택에 맡긴다고 중얼거렸다.

‘신기한 놈이라니까.’

마왕이라면서 거짓말을 하지 않고, 속이지도 않는다. 가끔 튀어나오는 격렬한 분노만 제외하면 웬만한 사람보다 선한 녀석이었다.

“즐겁게 기다리고 있을게.”

분노에 차서 발발 떠는 라스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얼마 남지 않은 산을 올랐다.

슬로스의 결계 안에는 몬스터와 야생동물이 없었기에 정상까지 편하게 올라갈 수 있었다.

라온은 스터린 산의 정상에 서서 휘파람을 불었다.

“여기가 스터린 산의 정상인가.”

정상은 살짝 기울어진 평지였는데, 바닥 전체가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눈이 깔린 게 아니라, 한겨울의 호수처럼 물이 얼어 있었다.

내부가 비칠 정도로 투명하게 얼어붙은 땅과 옅게 내리쬐는 햇볕이 이 세상이 아닌 듯한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슬로스는 어디에 있는… 저기 있네.”

라온은 얼어붙은 대지의 중앙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대놓고 자고 있어.’

빙판의 중심에 자그마한 솜뭉치가 빨간 돌을 껴안은 채 누워 있었다. 볼 것도 없이 슬로스였다.

-저 멍청한 놈!

라스는 아직도 분노가 안 풀렸는지 동그란 햄주먹으로 슬로스를 후려쳤다. 당연하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네놈 때문에 본왕이 또 뜯겼느니라! 이 도움 안 되는 잠탱아!

라온은 라스가 터트리는 분노의 외침을 들으며 슬로스에게 다가갔다.

“아기 백곰?”

짧은 팔과 다리로 고블린 왕의 마석을 안고 있는 모습은 영락없는 아기곰이었다.

다만 일반적인 백곰과 조금 다르게 머리에 사탕만 한 뿔 두 개가 돋아나 있었고, 가슴에는 검은색 별이 새겨져 있었다.

‘얘가 슬로스 맞아?’

<나태>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지만, 전에 보았던 것과 너무 다른 외형이라서 정말 슬로스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이 얼빵한 표정을 보고도 모르는 것이냐! 잠탱이잖아!

라스가 행복하게 입맛을 다시는 슬로스를 가리키며 인상을 찡그렸다.

라온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느낌이 있기는 하네.’

라스의 말을 들으며 얼굴을 자세히 보니, 성벽 앞에서 만났던 슬로스의 표정과 겹쳐 보였다.

“슬로스.”

동그란 귀에 대로 이름을 불러봤지만, 슬로스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슬로스! 일어나 봐!”

계속 이름을 외쳐도 그는 잠꼬대조차 없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죽은 거 아니야?’

-이놈 한동안 안 일어날 것이니라.

라스가 슬로스에게서 손을 떼며 씩씩 숨을 몰아쉬었다.

‘왜?’

-본래 잠에는 얕은 수면과 깊은 수면 두 가지가 있느니라. 생물이 잠을 잘 때 그 두 수면을 반복하는데, 지금 이놈은 깊은 수면에 빠져 있는 상태이니라.

‘그럼 얕은 수면이 올 때까지 기다리면 되겠네. 그리 길지는 않을 거 아니야.’

-평범한 인간이나, 마족은 90분 간격으로 반복되겠지만, 요놈은….

녀석이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슬로스를 내려다보았다.

-그게 년 단위이니라.

“어…?”

라온이 입을 떡 벌렸다. 너무 당황해서 육성으로 말이 나왔다.

‘녀, 년 단위?’

-그렇느니라. 대충 보니, 내년쯤에 풀리겠군.

라스는 이 상태가 되면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라며 고개를 저었다.

-결계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결국 헛고생했구나.

녀석은 그나마 다행이라는 듯 입매를 말아 올렸다.

‘그 말 진짜야?’

-못 믿겠으면 흔들고, 때려보던가. 귀를 막아놔서 소리는 아무리 질러도 소용없을 것이니라.

‘그러다가 일어나서 난동을 부리면?’

-네놈의 허접한 무력으로는 절대 슬로스를 깨울 수 없느니라. 네놈의 공격보다 저놈의 회복이 더 빠르니까.

라스는 슬로스가 일어날 때는 공격당해서 생명의 위협을 느낄 때라며 깨울 수 없을 거라고 비웃었다.

‘이런….’

라스는 웬만해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저렇게 대놓고 말할 정도라면 사실이라는 뜻이었다.

-만약 천운이 생겨서 지금 슬로스를 깨워도 문제다. 깊은 잠에서 깬 놈은 너를 알아보지 못하고 폭주해서 밟아버릴 것이니라.

‘그럼 방법이 없어?’

-지금은 기다리는 것뿐이니라.

‘무슨 잠을 이따위로 자!’

잠을 자는 시간이 1년이 아니라, 깊은 잠과 얕은 잠을 오가는 구간이 년 단위라는 게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나태>이니라. 슬로스는 오직 잠을 자는 것만이 중요하지. 저 둔탱이는 꿀잠만 잘 수 있다면 다른 마족이 본인의 이름을 팔고 다녀도 신경 쓰지 않는 놈이니라.

라스는 예전 마계에서 슬로스의 이름을 파는 하위 마족들이 많았다고 떠들어댔다.

“하아….”

라온이 슬로스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일어나!”

“…….”

하지만 슬로스는 행복한 표정을 유지한 채 자그마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이걸 뺏어볼까?’

고블린 왕의 마석을 빼앗으려고 힘을 줬지만, 땅에 박힌 것처럼 뽑히지 않았다.

‘이 모습이라고 해도 마왕은 마왕인가?’

인간을 초월한 근력을 모두 사용하고 있는데도, 아기곰이 쥔 마석을 뺏을 수 없다니, 괜히 마왕 자리를 딴 건 아닌 모양이다.

“하아….”

라온이 한숨을 내쉬고, 슬로스를 내려놓았다.

‘진짜 때릴 수도 없고.’

라스는 괜찮다고 했지만, 부탁하러 와서 검을 내리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짓이었다.

-이건 아까 결계와 달리 불가능한 일이니라. 돌아가서 파인애플 피자나 먹는 게 어떠냐?

‘피자라….’

피자와 결계라는 말을 듣자, 하나 남은 방법이 떠올랐다.

‘혹시 몰라.’

조금 전 슬로스의 결계를 뚫었던 것처럼 나태를 이용해보기로 했다.

고오오오!

라스에게 받은 분노를 일으키듯 영혼의 밑바닥에 달라붙어 있는 나태의 기운을 끌어 올렸다.

<나태>의 감정이 영혼을 타고 올라오자, 전신이 나른해진다.

눈을 감으면 바로 잠에 빠질 듯한 은은한 감각과 함께 무엇도 하기 싫은 무력한 기분이 들었다. 이게 바로 나태의 순수한 힘 같았다.

나태를 끌어올린 손으로 슬로스의 어깨를 잡았다.

화아아아!

나태와 나태의 기운이 만나며 슬로스에게 작은 움직임이 일었다.

“어…?”

다만 그건 라온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헤….”

슬로스가 조금 더 도드라진 미소를 지으며 더 깊은 잠에 빠졌다. 행복에 겨운 표정이었다.

-크헤헤헤헤!

라스가 둥실한 배를 잡고 폭소를 터트렸다.

-나태에 나태를 더 하면 더한 나태가 될 뿐이지.

녀석은 세상이 다 네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며 콧방귀를 뀌었다.

‘모르겠다.’

라온이 어금니를 지그시 씹으며 투명한 빙판 위에 드러누웠다.

‘이놈 일어날 때까지 나도 잘 거야!’

-멍청한 놈. 여기서 일 년을 기다리는….

라스가 다시 비웃음을 흘리려고 할 때 메시지가 떠올랐다.

[<분노>와의 내기에서 승리하셨습니다.]

라온은 그 메시지를 보며 턱을 들어 올렸다.

‘이거 보면서 기다리면 되겠네.’

-이런 제기랄! 왜 지금 줘!

* * *

검귀가 무스턴의 이마에 손을 얹으며 눈을 내리감았다.

‘곧 일어나겠군.’

무스턴은 라온에게 일방적으로 얻어맞았던 정신적 충격이 컸는지 아직도 깨어나지 못했다.

다만 상급 영약을 먹이고, 오러를 이용하여 영약의 기운을 풀어주었기에 육체가 많이 회복되어서 곧 정신을 차릴 것 같았다.

‘다행히 후유증은 없겠어.’

이틀 내내 옆에서 간병한 보람이 있는지 무스턴의 육체에 후유증 같은 건 남지 않았다.

영약의 기운 덕분에 일어난다면 바로 움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정말 잘도 때렸군.’

차라리 죽이는 게 쉽지. 사람을 이 정도로 두드려 패고서 후유증을 남기지 않다니, 대단하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이젠 이 녀석도 정신을 좀 차렸겠지.’

한참 어린 라온에게 실컷 얻어맞았으니, 무스턴도 철이 좀 들었을 것이다.

“빨리 일어나거라.”

검귀가 오러를 운용하여 무스턴의 육체를 다시 한번 풀어주고 있을 때 작은 신음이 들려왔다.

“으음….”

무스턴이다. 그가 거북이처럼 천천히 눈을 떴다.

“여, 여기는….”

“병실이다.”

“스승님?”

“괜찮으냐?”

검귀가 무스턴의 이마에서 손을 떼며 그의 눈을 보았다. 다행히 정신 쪽에도 문제가 생긴 것 같지는 않았다.

“시, 심하게 아픈 곳은 없습니다.”

무스턴의 갈라진 목소리에 마음이 조금 아팠지만, 지금 해야 할 말이 있었다.

“네가 무엇을 했는지 기억하느냐?”

“아….”

무스턴은 라온에게 졌다는 것이 떠올랐는지 입을 벌렸다.

“죄, 죄송합니다. 또 졌습니다….”

그는 마른 입술을 깨물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스승님의 이름에 먹칠을 해서 정말 죄송….”

“그게 아니다.”

검귀가 고개를 저었다.

“너는 나를 스승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냐?”

“무, 물론입니다!”

“네가 나를 소중히 여기듯 라온에게 리메르도 소중한 존재일 것이다. 네 스승이 소중하면 다른 이의 스승도 소중한 법. 넌 해서는 안 될 말을 했어.”

“아….”

무스턴의 눈동자가 파도를 맞은 돛단배처럼 출렁였다.

“그들만큼 내게도 네가 소중했는데, 이끄는 방향이 잘못된 모양이다. 무력이 아니라, 먼저 인성을 챙겼어야 했는데, 내 실수다.”

“스, 스승님….”

“몸도 많이 회복되었고, 정신도 차렸으니, 일어나면 가장 먼저 라온과 리메르에게 사과하도록 해라. 나도 스승으로서 함께 가주마.”

검귀는 무스턴의 어깨를 두드려준 뒤 몸을 일으켰다.

“라온이 놓고 간 내상약이다. 아직 내상은 다 낫지 않았으니, 식사를 마치고 먹도록 해라.”

그는 라온이 놓고 간 목갑을 병상 머리맡에 내려놓았다.

“라온의 배려를 감사히 여기도록. 이번에 넌 정말 죽을 수도 있었으니까.”

“…….”

무스턴은 아무런 대답 없이 검귀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쉬거라.”

검귀는 몸조리 잘하라는 말을 남기고 병실을 나갔다.

“후우….”

그는 병실 앞의 벽에 등을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지만, 해야 할 말이었다.’

무스턴은 라온의 말은 꺼내지 말고, 그저 걱정만 해주기를 바랐겠지만, 그랬다간 또 같은 상황을 만들게 될 것이다.

제자의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서는 지금 확실하게 쐐기를 박아놔야 한다.

‘제자를 키우는 건 힘들군.’

숙적과 검을 휘두르고 말지, 제자를 키우는 일은 너무도 어려웠다.

더 어린 라온을 저리 훌륭하게 키운 리메르와 실비아 지그하르트가 존경스러울 지경이었다.

검귀가 의무대를 나서며 이마를 짚었다.

‘피곤하군.’

이틀 내내 오러를 운용하여 무스턴을 치료했기 때문인지, 제자에게 쓴소리를 했기 때문인지 살짝 현기증이 일었다.

‘조금 쉬어야겠어.’

그는 무스턴의 병실을 돌아본 뒤 숙소로 향했다.

* * *

무스턴은 검귀가 병실을 떠난 뒤 한 시간 넘게 멍하니 천장만을 바라보았다.

식사와 약이 들어왔지만, 거들떠보지도 않고 이만 갈았다.

‘라온. 또 라온. 깨어나자마자, 그것도 스승님께 그놈의 이름을 들어야 하는 건가.’

검귀가 먼저 했던 말은 ‘괜찮으냐.’였지만, 그는 그 걱정을 잊은 채 라온과 꾸중에 대해서만 떠올랐다.

까드드득.

무스턴은 쇠가 비틀리는 듯한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갈았다.

‘대체 왜….’

왜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스승이라면 일방적으로 맞고 깨어난 제자 걱정부터 해야지 왜 훈계와 타박이 먼저인지 모르겠다. 이해할 수 없는 처사였다.

‘그놈 때문에 변하셨어.’

본래 스승은 다른 사람은 신경 쓰지 않고, 자신만을 바라보았다.

누구보다 제자를 아끼던 스승이 라온을 먼저 챙기는 모습을 보니, 주먹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라온 지그하르트가 그리도 좋으신 겁니까.”

라온의 폭력과 공포에 짓눌려서 숨어버렸던 질투의 감정이 다시 살아난다. 이전보다 더욱 큰불을 일으키며 거세게 타올랐다.

‘선택받은 건 나란 말이다!’

련에서 두 번째 재능으로 인정받아 검귀의 제자가 될 수 있었는데, 이젠 그가 자신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속이 갑갑해져서 죽을 것 같았다.

“망할!”

무스턴이 몸을 일으켰다. 전신에 통증이 있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옷을 갈아입은 뒤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거리에 사람이 많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성벽 위에 올라갔다.

시꺼멓게 물든 듯한 속마음과 달리 백지처럼 새하얀 설원이 보인다.

“크윽!”

이를 악물고, 설원으로 뛰어내렸다. 뒤에서 정찰대와 기사가 불렀지만, 신경도 쓰지 않고 설원을 걸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질투가 난다.

세상 그 누구보다도 라온 지그하르트에게 질투가 났다.

대륙 전체에 이름을 떨친 것도, 소검귀와 백검룡이라는 이명을 가진 것도, 스승님의 진심 어린 관심을 받는 것까지. 모든 것이 질투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무스턴은 점점 더 끓어오르는 질투를 참지 못하고, 거세게 땅을 박찼다.

마른 나뭇가지처럼 매가리 없던 다리에 힘이 솟구치고, 말라비틀어졌던 폐에 숨이 가득 차오른다.

가슴 속에서 피어난 녹색 불꽃이 커질수록 전신에 힘이 샘솟는다.

라온과 싸우기 전과 같이. 아니, 그보다 더한 기운이 폭주하는 것 같았다.

쿠구구구!

내부에서 솟구치는 감정과 힘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 이대로 놔두었다간 몸이 터질 것 같아서 달리는데 정신을 집중했다.

얼마나 뛰었는지도 모르겠다. 하분성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달리고 있음에도 속을 달래기엔 아직 부족했다.

“젠장!”

라온 지그하르트에게 질투가 난다.

놈의 이름과 명성, 무력 그리고 스승의 관심까지 그 모든 것을 빼앗고 싶었다.

“네게 질투가 난다. 라온 지그하르트!”

무스턴이 처음으로 질투라는 단어를 입에 담았다.

“세상 그 모든 수를 써서라도 네가 가진 것을 빼앗을 것이다! 절대로 놓지 않는다!”

그 말을 외친 순간 목 위까지 차오르던 기운들이 폭발했다.

쿠우우웅!

통제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힘이 외부로 방출되기 시작했다.

“어…?”

하지만 이건 자신의 힘이 아니었다.

‘뭐지?’

눈앞에서 녹색 칼날 같은 것이 튀어나오며 공간을 비틀어 열었다.

찌지지지직!

녹광과 흑광이 어우러지는 차원 속에서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존재감이 솟구쳤다.

스승에게서도 느껴보지 못한 우악스러운 기척. 련주에게서나 맛볼 수 있는 웅대한 영혼의 파동이었다.

쿠구구구구!

무스턴이 덜덜 떨면서 걸음을 멈췄을 때 뜯겨 나간 공간에서 진녹색 안광이 번쩍였다.

“꽤 마음에 드는 <질투>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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