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0화
“쉬라고 해놓고, 갑자기 뭔 대련이야!”
마르타가 설원으로 내려가는 라온과 무스턴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도 한번 개처바른 놈하고 왜 싸워?”
그녀는 쓸데없는 짓이라고 중얼거리며 혀를 찼다.
“저 늙은이 애가 뭔가를 저질렀나 보지.”
버렌이 무스턴에게 시선을 보내며 눈매를 좁혔다.
“늙은이 애? 애늙은이가 아니라?”
“우리보다 나이는 많이 먹었는데, 하는 짓이 애 같잖아.”
“아, 그거 맞아. 딱 징징대는 꼬마 느낌이지.”
마르타가 하는 짓이 유치해서 못 보겠다며 픽 웃었다.
“으으.”
루난은 대련에 관심 없는 듯 성벽에 팔을 걸친 채 입을 삐죽 내밀고 있었다.
“아이스크림 가게 없어….”
“이 멍청아! 여긴 1년 내내 겨울이고, 전쟁터인데 아이스크림을 팔겠냐!”
“마르타 나찰녀.”
지금 상황과 전혀 관계가 없는 놀림이었지만, 마르타의 이마에 힘줄이 뚜둑 돋아났다.
“이 잠탱이가!”
“마르타 약해. 맨날 울고 쓰러져.”
“오냐! 죽고 싶다면 죽여주마!”
마르타가 개구리처럼 뛰어 루난에게 달려들었다.
“오오!”
“1조장이랑 2조장이랑 싸운다!”
“이쪽도 재밌겠는데!”
광풍단은 이를 드러내며 힘겨루기를 시작하는 루난과 마르타를 보며 주먹을 흔들었다.
곧 라온과 무스턴의 대련이 시작됨에도 긴장 따위는 보이지 않는 얼굴. 본인들의 부단주를 전적으로 믿고 있다는 뜻이었다.
라온은 광풍단의 무조건적인 신뢰를 받으며 설원 위에 섰다.
반대편에서 다가오는 무스턴이 살기등등한 눈동자를 굴렸다.
‘누가 보면 내가 잘못한 줄 알겠네.’
먼저 시비를 걸어놓고, 저런 눈빛을 보내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질투가 심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저 정도로 미쳤을 줄은 몰랐다.
‘웬만하면 참으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선을 넘었어.’
검귀에게 많은 것을 받았기에 적당한 시비는 넘어가려 했지만, 리메르를 조롱하는 것을 듣고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네 말대로다. 우리 단주님이 머저리인 건 맞아.”
라온이 제천검의 검병에 손을 올리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말을 할 수 있는 건 광풍단뿐이다. 까도 우리가 까. 네놈은 그 말을 뱉을 자격이 없어.”
그의 가벼운 미소에서 차디찬 한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렉타르 님이 하지 못한 주둥이 교육은 내가 대신해주마.”
“스승님의 이름을 말하지 말라고 했잖아!”
무스턴이 괴성을 지르며 검을 뽑았다. 이쪽을 향해 겨누는 칼날에서 지독한 기세가 일어났다.
“좋아. 준비 운동 따위는 필요 없겠지.”
라온이 입매를 비틀며 제천검을 뽑았을 때 라스가 팔찌 위로 튀어나왔다.
-저거 살짝 위험하군.
라스는 무스턴을 훑어보며 짧게 입맛을 다셨다.
‘뭐가 위험해?’
-저놈에게 씌인 질투의 감정이 꽤나 독해졌느니라.
‘독하다고?’
-분노, 나태, 질투 같은 감정은 인간 그리고 악마의 원초적 힘과도 연관되어 있는데, 저놈의 감정 수위는 그 원초적인 부분에 닿기 직전이니라.
라스는 무스턴의 대가리가 처음부터 문제 있었을 거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상관없어.’
라온이 제천검으로 무스턴을 겨누며 입매를 말아 올렸다.
‘맞으면 고쳐지니까.’
-뭐?
‘예상대로 안 되는 일이 있다면 매가 부족한지 생각해보라는 말이 있거든.’
-세상에 그런 말이 있어?
라스가 어벙하게 고개를 갸웃거릴 때 무스턴이 먼저 움직였다.
터엉!
무스턴은 기합성도 내지 않고 거세게 땅을 박찼다. 쾌속의 보법. 놈은 찰나의 순간에 코앞으로 쇄도해 검을 들어 올렸다.
‘빠르네. 다만….’
빠르기만 해.
무스턴은 속도에 치중하느라, 검술에 힘을 싣지 못했다.
라온은 벼락처럼 떨어지는 무스턴의 검을 향해 제천검을 들어 올렸다. 휘두를 필요도 없다.
중검의 구결을 두른 채 그 자리에 놓아두는 것만으로 두터운 벽이 되었으니까.
쩌어어어엉!
무스턴의 검은 힘을 받지 못한 것처럼 제천검의 앞에서 막힌 채 나아가지 못했다.
“흥!”
그는 막힐 거라는 것을 예상한 듯 검을 뒤로 빼내며 허리를 틀어 아래에서부터 검격을 쳐올렸다. 검날에 일렁이는 푸른 강기가 거대한 파동을 일으켰다.
‘이게 본래 익혔다는 검술인가.’
뻗어 나오는 강렬한 빛을 보니, 검귀의 상승 검술 중 하나인 명홍검결인 것 같았다.
녀석이 휘두르는 빛의 칼날 속에 예검과 강검, 쾌검, 절검이 깃들어 있었다.
쿠웅!
라온이 왼발 진각을 밟으며 광아검의 구결을 읊조렸다.
대퇴근에서부터 올라오는 폭발적인 근력과 마나회로를 질주하는 만화공의 열기를 담아 제천검을 뻗어냈다.
쩌어어엉!
묵직한 힘이 깃든 제천검이 무스턴의 검을 단번에 쳐냈다. 그의 손목이 파도를 얻어맞은 돛단배처럼 기울었다.
라온은 입을 떡 벌린 무스턴을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이거 생각 이상으로 약한데?’
아니, 내가 강해진 건가.
마스터 최강급에 오르고, 검귀의 조언을 받아 검술의 성취까지 성장했기에 이전과는 격이 다른 차이가 벌어진 것 같았다.
“마, 말도 안 돼!”
무스턴이 바득 이를 갈며 흔들리는 손목에 힘을 주었다. 떨림을 억지로 멈춘 뒤 두터운 강기가 실린 검격을 쏟아냈다.
‘이번에는 그 검술을 끊어주지.’
무스턴에게 한발 다가가며 글래시아를 일으켰다. 손끝에서 피어나는 서리의 기운에 바람을 실어 방출했다.
캬아아앙!
설풍검결에 담긴 절검의 묘리가 무스턴의 투로를 흩어버리고, 막대한 충격파를 일으켰다.
“크윽!”
무스턴이 튕겨 나간 검을 보며 눈을 부릅뜰 때 왼 주먹으로 놈의 복부를 후려쳤다.
뻐어어억!
북이 터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무스턴이 거칠게 튕겨 나가 바닥을 굴렀다.
‘반응은 빠르네.’
괜히 검귀의 제자가 아닌지 무스턴은 주먹을 맞는 순간 복부 앞에 오러를 벽을 만들어 방어했다.
“끄으윽!”
배를 얻어맞은 충격이 심했는지 무스턴은 어깨를 떨면서도 내색을 하지 않은 채 이를 갈았다.
“어, 어떻게….”
“뭐가 어떻게야. 네가 약해서지.”
라온이 왼 주먹을 가볍게 털며 무스턴에게 다가갔다.
“엄살떨지 말고 일어나. 아직 시작도 안 했으니까.”
오른발로 땅을 밀었다. 유려하게 나아가는 태화보. 대지가 움푹 파이며 어느새 당황한 무스턴의 눈이 보였다.
치리리링!
거칠게 떨어지는 제천검의 칼날에 광아검의 구결을 얹었다. 한층 더 날카로워진 맹수의 어금니가 흉폭한 살기를 드러냈다.
“크윽!”
무스턴이 급히 뒤로 물러서며 검격을 내뻗는다. 다급한 와중에도 놈의 검격에는 제대로 된 힘이 실려있었다.
다만 놈의 수준에서의 제대로 된 검.
광아검에 쾌검의 묘리를 휘감았다. 속도가 붙은 시뻘건 칼날이 무스턴의 검을 거세게 밀어붙였다.
쿠아아앙!
힘과 힘의 격돌이지만, 그 결과는 너무도 쉽게 나타났다.
뜨드드득!
무스턴의 검격이 파탄을 드러내며 벽에 부딪힌 듯 튕겨 나갔고, 제천검은 거칠 것이 없이 뻗어나갔다.
뻐어어어억!
라온은 제천검이 무스턴의 목을 베려는 찰나 칼날을 눕혀 놈의 어깨를 갈겼다.
콰아아앙!
무스턴은 고무공처럼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땅에 거대한 구멍이 파이고, 바닥에 깔린 눈들이 허공으로 휘날렸다.
파아악!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무스턴의 머리를 무처럼 뽑아 들었다.
“끄으윽….”
“벌써 끝은 아니겠지?”
라온이 무스턴을 돌멩이처럼 던지자, 그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다, 당연히!”
무스턴이 자세를 낮추고, 오러를 전력으로 끌어올린다.
쿠구구구!
타오르는 강기의 파동에 설원이 녹아내리고, 대기의 흐름이 비틀리기 시작했다.
‘오러 하나는 대단하군.’
검귀의 제자답게 영약을 물처럼 먹었는지, 어마어마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런데 네가 힘을 끌어 올릴 때까지 기다려준다고는 안 했거든.”
태화이보를 밟아서 단숨에 무스턴의 공간을 파고들었다.
“이 야비한 놈이!”
“실전에서 야비를 외치다간 목 날아간다.”
상체를 비틀어서 무스턴이 내리치는 검격을 흘려낸 뒤 제천검의 검면으로 놈의 이마를 강타했다.
“커허헉!”
무스턴은 끈이 떨어진 인형처럼 그 자리에서 뒤로 꼬꾸라졌다. 충격이 심했는지 입에서 시뻘건 피가 튀어나왔다.
찌지지직.
라온이 쓰러진 무스턴에게 다가갔다. 걸음마다 바닥이 파이며 살점이 뜯어진 피부 같은 형상이 되었다.
“입에서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는 법이지.”
무스턴을 굽어보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네가 입을 턴 만큼 딱 100대만 맞자.”
“왜, 왜 100대를….”
“내 맘이야.”
그가 따지려고 할 때 검을 쥐고 있는 주먹으로 얼굴 중앙을 내리찍었다.
뻐어어어억!
라온은 바닥에 처박힌 무스턴을 보며 검지를 들어 올렸다.
“이제 한 대.”
“끄아윽!”
무스턴이 얼굴을 감싸 쥔 채 전신을 떨었다.
“이, 이미 네 대를 때렸는데….”
“내가 산수를 못 하거든.”
라온이 서슬 퍼런 눈동자를 빛내며 턱을 치켜들었다.
“뒤지기 싫으면 맞을 때마다 세던가.”
* * *
밀랜드와 검귀는 위스키가 든 잔을 부딪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두 아이가 부딪치는 모양입니다.”
밀랜드가 위스키로 입을 축인 뒤 옅게 웃었다.
“후우….”
검귀가 잔을 내려놓으며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되니 입맛이 쓰군요.”
“본래 제자를 키우는 게 쉬운 일이 아니지요. 이해합니다.”
밀랜드는 후계자이자, 아들인 테리안을 키울 때 여러모로 힘들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힘들다고요?”
리메르가 안주로 나온 닭구이를 통째로 뜯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라온이는 알아서 잘하던데? 지가 알아서 강해지고, 지가 알아서 공을 세워 오더라구요. 허허허!”
그는 제자 같은 건 알아서 잘 크는 거 아니냐며 헤죽 웃었다.
“저, 저….”
밀랜드는 분한 듯 술잔을 든 손을 떨었지만 반박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라온은 이곳에서도 알아서 움직이고, 성장했으니까.
“어떻게 저런 망나니에게 라온 같은 녀석이 갔는지, 하늘도 무심하시지. 안 그렇습니까?”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검귀를 보았는데, 이상하게도 그는 기쁜 듯이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렉타르 님?”
“아, 미안합니다.”
검귀가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라온은 대단한 아이지만, 저는 제 제자가 가장 좋습니다.”
그는 무스턴이 속이 좁을 뿐 나쁜 인간까지는 아니라고 말했다.
“그런데 싸우면 누가 이기려나?”
리메르는 노란 사과를 먹으며 어깨춤을 췄다. 누가 보아도 알면서 물어보는 능글맞음이 그의 눈동자에 어려 있었다.
“알면서 물어보다니, 제자와 달리 성격이 나쁘군. 당연히 라온이네.”
검귀가 단호하게 답을 말한 뒤 위스키를 들이켰다.
“아리안 가문에 있을 때라면 둘이 좋은 승부를 냈겠지만, 지금은 큰 차이가 벌어졌지. 지금의 무스턴은 라온을 넘을 수 없네.”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그냥 놔두려고요?”
“내 제자는 한 번 제대로 당할 필요가 있으니까.”
“그건 맞네요. 다른 데 가서 칼 안 맞으려면 지금 정신 좀 차려놔야 하니까.”
리메르가 낄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라온을 믿겠다는 뜻입니까?”
“그렇소. 그 아이의 성정상 무스턴을 거칠게 다룰지언정 후유증이 남을 상처를 만들지는 않을 거라 믿소.”
무스턴은 라온의 성정은 따스하면서도 밝아서 당연히 믿는다고 말했다.
“우리 애가 그렇게 따스한 애가 아닌데?”
리메르는 예전에 라온에게 얻어맞은 눈두덩이를 매만지며 턱을 떨었다.
“스승도 패는 놈인데….”
* * *
무스턴이 검을 쥔 두 손을 떨며 입술을 깨물었다. 천천히 다가오는 라온이 명계의 사신처럼 보였다.
‘뭐야?’
대체 왜 못 막는 건데!
자신의 검격은 종잇장처럼 찢어졌지만, 라온의 검격은 날카롭게 갈린 송곳처럼 강기를 뚫고 들어왔다.
분명히 비슷한 경지인데, 왜 이렇게 차이가 벌어진 건지 모르겠다.
‘빌어먹을….’
벌써 서른 대 이상을 얻어맞아서 몸이 만신창이다. 이 이상 충격을 받는다면 검을 휘두르기도 힘들 것이다.
‘모르겠어.’
분명 저놈의 검술을 모두 익혀두었는데, 왜 밀리는 거지?
스승님과 함께 라온의 검술을 보며 흐름과 투로를 모두 익혀두었는데, 왜 놈을 이길 수 없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네.”
라온이 앞으로 다가오며 검을 들어 올렸다.
“모르겠으면 계속 몸으로 느껴.”
그 말과 함께 놈의 검이 아래로 뚝 떨어진다. 광아검이라는 감각검. 초식과 오러의 흐름을 모두 파악한 검술이었다.
‘막을 수 있어.’
쾌와 강, 중이 어우러진 초식이니, 절검과 유검을 운용하여 쳐내려고 했다.
쩌어어엉!
분명 중간에 멈추거나, 흘려내야 하지만 놈의 검술은 멧돼지처럼 안쪽으로 밀고 들어왔다.
분명 흐름과 형은 같았지만, 그 안에 담긴 무학의 기질 자체가 달라져 있었다.
“설마….”
무스턴의 눈동자가 비에 젖은 나비의 날개처럼 떨렸다.
“스승님의 가르침에서 한발 더 나아간 거냐?”
라온은 스승님이 알려주었던 조언을 밑거름 삼아 본인의 검술을 한층 더 발전시켰던 것 같다.
그게 아니고서는 지금 상황이 말이 되지 않았다.
“이제 알아차렸나 보네.”
라온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렉타르 님이 너에게 말해줬잖아. 감각검은 상황에 따라 여러 무학을 이용할 수 있다고. 지금까지 난 네 약점을 찌를 수 있는 검술 묘리들만 사용했다.”
“아….”
무스턴이 입술을 깨물었다. 라온의 말을 들으니, 옆에서 스승님이 해주었던 조언들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넌 네 스승이 아니라, 내 검에만 집중했으니, 그 모양 그 꼴이 된 거다. 스승님께 접근하지 말라고 하더니, 넌 네 스승의 조언도 제대로 듣지 않는 모양이네.”
“입 닥쳐라!”
속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을 폭발시키며 땅을 박찼다.
‘지금 어떻게서든 끝을 봐야 해!’
오러를 모조리 끌어 올리며 명홍검결의 절기 광찬탈혼을 펼쳤다.
피아아아앙!
광찬탈혼은 빛과 같은 찌르기의 초식. 예리함과 빠름, 정확성을 극한으로 다듬은 초상승의 검격이었다.
뻔쩍.
광찬탈혼이 다가오는 순간 라온의 두 눈에 기광이 어렸다.
‘이건 꽤 괜찮네.’
지금까지 보았던 무스턴의 검술 중 가장 위력적인 초식이었다.
만약 마스터 상급에 머물러 있었다면 막을 방법을 생각하느라 꽤 고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라온이 푸른빛이 명멸하는 검극을 향해 나아가며 제천검을 내질렀다.
화아아아아!
칼날에서 타오른 화룡의 숨결이 날카로운 청광을 휩쓸었다.
까드드드득!
무스턴의 검에 깃든 휘황찬란한 강기가 녹아내리고, 얇은 칼날이 나뭇가지처럼 똑 부러졌다.
“아….”
“아직 안 끝났어.”
라온은 무릎을 세워 넋이 나간 무스턴의 턱을 후려 찼다.
뻐어어억!
무스턴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바닥에 처박혔다.
“끄아아아악!”
입을 부여잡은 채 비명을 지르는 무스턴을 굽어보며 검지와 중지를 들어 올렸다.
“이제 두 대인가? 아직 아흔여덟 대가 남았네.”
“무, 무슨 헛소리냐! 이미 서른 대는 넘게 쳤….”
“내가 말했잖아. 잘 세라고. 맞을 때마다 몇 대라고 말했어야지.”
라온이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제천검을 휘돌렸다.
“평생 죽 먹기 싫으면 이 꽉 물어라.”
그래도 뽑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