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419화 (419/653)
  • 제419화

    -크으으….

    라스가 하분성의 누런 성벽을 올려보며 아릿한 신음을 흘렸다.

    -본왕에게 더러운 기억을 남긴 곳이로구나.

    라온 놈이 자신의 이름을 팔아서 슬로스를 역으로 압박했던 마생 최악의 순간이 떠올랐다.

    ‘젠장….’

    이 꼬라지가 된 이후 맛난 음식을 먹을 때 빼고는 마음에 드는 순간이 없었지만, 그때만큼 목소리를 낼 수 없는 게 아쉬웠던 적이 없었다.

    라온이 라스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입맛을 다셨다.

    ‘그래? 난 최고의 기억이었는데.’

    하분성에 온 덕분에 좋은 인맥을 쌓았고, 유아를 구해냈으며, 수많은 보상. 특히 나태를 얻을 수 있었다.

    라스와 달리 자신에게 하분성은 행운의 땅이었다.

    라온은 햇볕처럼 쏟아지는 기사와 정찰대의 환호를 받으며 하분성의 성문을 넘었다.

    “와아아아아아!”

    “오랜만입니다!”

    “이제 소검귀라고도 못 부르겠네! 백검룡 환영합니다!”

    “키가 더 크셨네!”

    “라온 님의 소문은 계속 듣고 있었어요!”

    성문 안쪽에 있던 정찰대원들이 반가움이 깃든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유아도 있다!”

    “유아야!”

    “왜 이제 왔어!”

    “네가 만드는 음식들이 그리웠다고!”

    “다들 잘 있었어요?”

    유아는 그녀를 보고 방방 뛰는 레인저들에게 환한 웃음을 보냈다.

    ‘전부 아는 얼굴이네.’

    처음 하분성에 왔을 때 정찰대로 시작했기 때문인지 저들 모두의 얼굴이 눈에 익었다.

    “오랜만입니다.”

    라온은 작게 고개를 숙여 그들의 환호에 답했다.

    자신이 돌아왔다는 소문이 퍼졌는지, 정찰대와 기사들 뒤로 하분성에 살고 있는 주민들까지 뛰어나왔다.

    수많은 사람이 동시에 터트리는 함성에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이야….”

    버렌은 모여든 사람들을 보며 파리가 들어가도 될 정도로 입을 크게 벌렸다.

    “대체 뭘 했길래 사람들이 이렇게 좋아하는 거냐?”

    그는 무슨 영웅의 귀환을 보는 것 같다며 혀를 내둘렀다.

    “누구는 나찰녀를 만들어놓고, 지는 어딜 가든 영웅이네.”

    마르타는 귀를 막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냥 여기서 살지 그러냐? 하분성이 네 고향 같은데.”

    그녀는 이곳에 오기 전에 나찰녀 소리를 들었기 때문인지 뿔이 단단히 나 있었다.

    ‘네가 나찰녀라 불리는 건 네 성격 때문인데….’

    마르타의 이명이 나찰녀가 된 건 결투 대련에서 보여준 성질머리와 독기 때문이다. 본인 행동의 결과인데 왜 맨날 따지는 건지 모르겠다.

    “북쪽. 추위.”

    루난은 반딱거리는 눈동자로 주변을 홱홱 돌아보았다.

    “아이스크림!”

    그녀는 이곳에 훌륭한 아이스크림 매장이 있을 게 분명하다고 중얼거리며 사람들을 넘어 건물들을 살폈다.

    물론 아쉽게도 이 안에 아이스크림 매장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저렇게 활력 넘치는 모습은 일 년에 한 번도 보기 힘든 희귀한 장면이라 그냥 놔두었다.

    “다 특이하다니까.”

    라온이 헛바람을 흘리며 앞으로 나아갈 때 우측에서 이마에 두건을 두른 익숙한 얼굴의 노인이 다가왔다. 주점 <서리의 가지>의 점장이자, 유아의 할아버지였다.

    “우와아! 할아버지!”

    유아는 보법까지 쓰고 달려 점장에게 뛰어들었다.

    “읏차!”

    점장은 무릎을 굽혀 돌진해오는 유아는 부드럽게 안아 들었다.

    “허허! 이 녀석 이젠 커서 안기도 힘들구나!”

    그는 유아를 꼭 끌어안은 채 주름진 인상을 곧게 폈다.

    “보고 싶었어요!”

    유아는 점장의 가슴에 뺨을 비비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나도 마찬가지다. 잘 왔어.”

    점장은 훌쩍이는 유아의 등을 두드리며 온기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크흐흥!”

    율리우스는 유아와 할아버지의 재회가 감동이었는지 고개를 돌린 채 입을 틀어막았다.

    점장은 유아와 짧은 대화를 나누고 라온에게 다가왔다.

    “저 말괄량이를 잘 맡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뭐라 말하기도 전에 고개를 숙였다.

    “이러지 마세요.”

    라온이 점장을 일으켜 세우며 고개를 저었다.

    “워낙에 활기가 넘치는 아이라, 저희가 오히려 많은 힘을 받고 있습니다.”

    진심이다. 유아는 밝으면서도 선한 성향이라, 실비아처럼 어딜 가든 따스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별관도 유아가 온 이후 이전보다 웃음이 많아졌다.

    “유아야. 먼저 가서 할아버지랑 쉬고 있어.”

    “그래도 돼요?”

    “그래. 우리는 나중에 서리의 가지로 갈게.”

    “네! 맛난 거 준비해놓을게요!”

    유아는 오랜만에 매출을 확 땡겨야겠다며 점장의 팔짱을 끼고서 서리의 가지로 향했다.

    ‘흐음.’

    라온은 어깨 위에 늘어진 라스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웬일이냐?’

    -무슨 소리냐.

    ‘평소의 너라면 [무얼 하느냐 당장 가서 점장의 파인애플 피자를 주문하거라!]라고 할 텐데, 왜 가만히 있냐고.’

    -저 둘에게도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필요할 텐데, 본왕이 왜 방해하겠느냐.

    라스는 오랜만에 만났으니, 조손간 대화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콧방귀를 뀌었다.

    ‘진짜 모를 녀석이라니까.’

    평소에는 애 같다가도 가끔 이런 진지한 모습을 보여줘서 미워할 수가 없었다.

    -본왕은 식충이가 아니니라!

    ‘아, 식충이는 맞아. 그건 확실해.’

    -뭐라!

    라온은 달려드는 라스의 콧잔등을 툭 밀며 미소를 지었다.

    그와 분노의 마왕이 서로의 코를 때리고 있을 때 도리안은 불안한 듯 눈동자를 떨었다.

    도리안이 라온의 이름이 끝없이 울리는 하분성을 둘러보며 배 주머니를 문질렀다.

    ‘이게 뭐야….’

    나도 함께 싸웠는데, 이 대우 차이는 대체 뭐냐고!

    하분성이 지옥이 되었을 때 라온과 똑같이 잠도 못 자고 끝까지 싸웠다.

    그냥 칼만 휘두른 게 다가 아니라, 통나무도 굴리고, 바위도 쏟아냈으며, 보급품까지 뿌렸는데 이렇게 없는 사람 취급당할 줄은 몰랐다.

    ‘부단주님이 대단한 건 인정해. 당연히 인정하지. 그런데….’

    한 명도 날 안 찾는 건 심하잖아!

    광풍단을 둘러싼 수많은 사람 중에 라온이 아니라, 도리안의 이름을 외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하분성에서 시험을 끝내고 가문에 복귀했을 때 무시당했던 트라우마가 떠올라 눈가에 습기가 차올랐다.

    ‘이건 정말 너무한 거 아니냐고!’

    끓어오르는 분노에 주먹을 부르르 떨고 있는데, 어디선가 작은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소리가 들려왔다.

    “도리안!”

    “어?”

    착각이 아니었다. 자신을 찾는 사람이 있는 게 분명했다.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하얀색 바람막이를 입은 중년인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처음 하분성에 왔을 때 전입했던 3번 정찰대의 대장 라딘이었다.

    “라딘 님!”

    도리안이 활짝 웃으며 라딘에게 달려갔다. 처음으로 반겨주는 사람을 만나자, 가슴이 크게 두방망이질 쳤다.

    “오랜만이다! 도리안!”

    “역시 대장님밖에 없네요.”

    콧잔등이 찡해져 오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넌 여전하네. 변한 게 별로 없어 보인다.”

    “없긴요. 저도 많이 변했어요!”

    변해서 못 알아봤다면 이해라도 하지, 그대로라고 하니까 더 슬퍼졌다.

    “근데….”

    “네?”

    “너 혹시 예전에 우리한테 나눠줬던 노란 사과 있냐? 몇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더라고….”

    라딘은 노란 사과가 너무 맛있어서 계속 생각났다며 입맛을 다셨다.

    ‘그럼 날 알아본 게 아니라, 사과 때문에?’

    도리안의 이마 위로 힘줄이 뚜둑 돋아났다. 어쩐지 저 능글맞은 인간이 아는 척하는 게 이상하다 싶었다.

    “사과? 당연히 있죠.”

    참던 분노를 개방하며 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사과를 상자째 꺼내서 라딘의 머리통에 내리찍었다.

    빠아아악!

    사과 상자가 가루가 되어 바스러지고, 라딘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갔다.

    “꾸엑….”

    “다 먹어!”

    * * *

    쿵! 쿵!

    레폰 로베르트가 데루스 로베르트의 집무실 문을 거세게 두드렸다.

    “아버지! 아버지!”

    그는 연달아 문을 치며 안에 있는 데루스를 불렀다.

    “들어오거라.”

    잠시 후 방안에서 따스함이 깃든 음성이 흘러나왔다.

    “예!”

    레폰 로베르트는 옷매무새를 다듬고,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레폰.”

    데루스 로베르트가 들고 있던 펜을 책상에 내려놓고 시선을 들었다. 그의 눈동자에서 인자한 열기가 묻어나왔다.

    “네가 이리 다급하게 달려온 것을 보니, 라온 검사에 관한 일이겠구나.”

    “맞아요!”

    레폰 로베르트가 큼지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육황 결투 대련 이후로 라온을 더욱 존경하게 되어서 그가 라온을 좋아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이 가문에 아무도 없었다.

    “이번에는 라온 검사가 어떤 활약을 했기에 그리 얼굴이 달아오른 것이냐?”

    “아리안 가문이라고 하세요?”

    “알다마다.”

    “라온 님이 그 아리안 가문에 가서 가문을 망치는 부패한 간부들을 처단하고, 가문을 공격하려던 망혼귀까지….”

    그는 라온이 아리안 가문을 구하고, 망혼귀와 언데드들을 몰아냈다는 소문을 모두 말해주었다.

    “그렇군. 역시 대단한 친구라니까.”

    데루스는 막내아들이 가져온 라온에 관한 이야기를 경청한 뒤 나지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넌 이젠 그의 진짜 팬이 되었구나.”

    “예전부터 진짜 팬이었어요! 사인받은 제복은 아직도 벽에 걸려 있다구요!”

    레폰은 헤죽 웃으며 라온에게 사인을 받은 제복의 먼지를 하루에 한 번씩 턴다고 말하며 웃었다.

    “라온 님의 무력도 존경스럽지만, 위기의 순간에 그분을 구하기 위해서 여러 세력이 움직였다는 게 너무 놀라워요. 가슴이 웅장해진다고 해야 할까….”

    “가슴이 웅장해져?”

    “네! 딱 그렇게밖에 표현이 안 돼요!”

    그는 들뜬 표정으로 심장이 있는 왼쪽 가슴에 손을 얹었다.

    “라온 님은 제 목표에요. 꼭 따라가서 언젠가 그분과 같은 전장에 서고 싶어요.”

    “전에도 한번 말한 거 같은데….”

    데루스 로베르트가 빙긋 웃으며 레폰에게 손짓을 했다.

    “라온 검사처럼 되려면 지금 여기에 있으면 안 될 텐데?”

    “아….”

    “또 수련 안 하고, 밖에 다녀왔지!”

    “다, 당장 갈게요!”

    레폰은 고개를 꾸벅이고서 빠르게 집무실을 나섰다.

    타악.

    집무실 문이 닫히는 순간 아들 바보처럼 웃던 데루스 로베르트의 눈동자가 얼음장처럼 굳었다.

    “시리스.”

    그의 부름에 바닥에서 검은 그림자가 돋아났다. 파도처럼 출렁이던 그림자가 솟구치며 검은 장발이 인상적인 미청년의 모습으로 조형되었다.

    “부르셨습니까?”

    시리스라 불린 남성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라온 지그하르트와 광풍단에 관한 정보 수집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지?”

    “머리카락 한 올도 남기지 않고 모두 수집하고 있습니다. 이번 사건을 통해 그의 뒤에 하분성과 오웬, 철전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큰 수확이죠.”

    “발카르는?”

    “발카르의 마법사 쪽은 제이나 왕녀의 부탁 때문에 왔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모렐이 아니라, 제이나 왕녀와 관계가 있는 듯합니다.”

    “좋은 관계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데루스가 오웬에서 보았던 라온과 제이나를 떠올리며 눈매를 찌푸렸다.

    “암시장 측에 문의해보았는데, 라온에 관한 중요 정보를 은폐하는 것 같더군요.”

    “라온에게 받은 게 있으니, 그럴만하지. 전에 말했던 대로 암시장의 정보는 무조건 신뢰하지 말고, 의심부터 해보도록.”

    “그리하겠습니다.”

    시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찌직.

    데루스가 검은 가죽 장갑을 벗었다. 손등에서 흘러내린 끈적한 핏물이 장갑과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었다.

    그는 핏물을 손아귀로 말아쥐며 섬뜩한 미소를 흘렸다.

    “망혼귀를 잡았다라….”

    “진짜는 아니겠죠?”

    “리메르가 도왔겠지. 성장했다고 해도 마스터 상급 수준일 테니까.”

    “스무 살에 마스터 상급이라니, 세상 혼자 사는 천재군요.”

    시리스가 휘파람을 부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놈은 천재가 아니라, 괴물이다. 인간의 이해를 벗어났지. 다만 이젠 우리가 직접 나설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데루스는 계속 핏물을 흘리는 손등을 보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제 생각도 비슷합니다.”

    시리스가 입맛을 다시며 말을 이어갔다.

    “라온 지그하르트는 오마 중 넷과 척을 졌습니다. 나머지 하나도 지그하르트와 사이가 좋지 않으니, 오마 모두에게 노려지고 있다고 봐도 되겠죠. 놈들을 이용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맞는 말이다.”

    데루스는 시리스의 판단이 마음에 든다는 듯 가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넌 어디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지?”

    “당연히 에덴이나, 백혈교입니다. 흑탑이 움직였다고 하지만 그 둘에 비하면 원한이 많이 모자라죠.”

    “아쉽게도 아니다.”

    그는 아니라는 듯 눈을 내리감았다.

    “에덴은 환원에, 백혈교는 교리에 미친 놈들이라 동료 의식이 크지 않아. 이미 잊고 다른 계획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봐야 할 건 남북맹이다.”

    “하지만 그들은 상납금이나 받으며 멈춰 있는데….”

    “남북맹 본체가 아니라, 원로원의 부원주 시란.”

    데루스가 남북맹에 속한 한 사람의 이름을 꺼냈다.”

    “하나뿐인 손자를 잃은 그가 가만히 있을까? 난 아니라고 보는데.”

    시란의 손자인 틸러는 청루족의 삶을 가지고 놀다가 라온에게 찢겨 죽었다.

    다른 오마와 달리 남북맹은 인간성이 남아 있기에 혈육에 대한 복수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시란과 원로원이 무얼 하는지 알아보고, 조심스럽게 접근해보도록.”

    “알겠습니다.”

    시리스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처음 나타났을 때처럼 그림자가 되어 사라졌다.

    “지금 많이 즐겨두거라.”

    데루스는 손등의 상처를 짓눌러 피를 억지로 쥐어짜며 아찔한 미소를 지었다.

    “네게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을 테니까.”

    * * *

    광풍단과 기사들은 하분성 중앙에 세워진 성주의 저택 앞에서 멈춰섰다.

    밀랜드는 기사와 검사들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간 고생 많았다. 일주일 동안 휴가를 줄 테니, 푹 쉬도록!”

    “우와아아아아!”

    그의 지시에 기사들이 투구를 벗으며 환호를 질렀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이제 정신을 차린 리메르가 손을 들어 올렸다.

    “고생했으니, 휴가라 생각하고 놀고 먹어라!”

    “쉬, 쉴 수 있어요? 라온이 난리를 칠 텐데?”

    “그러게.”

    “부단주님 좀 막아주시던가.”

    “커험….”

    광풍단 검사들은 리메르에게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그는 헛기침하며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저 바지 단주….”

    “제대로 하는 게 아무것도 없어.”

    “주인공 병 걸린 도박쟁이 엘프.”

    “랄라….”

    리메르는 광풍단이 뭐라 떠들든 신경 쓰지 않고 콧노래를 불렀다.

    “렉타르 님. 가시죠. 제게 괜찮은 술이 있습니다.”

    밀랜드가 저택을 가리키며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성주님께 신세 좀 져야겠군요.”

    검귀가 연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나이가 비슷했기에 여행을 하며 꽤 친분이 쌓여 있었다.

    “으음….”

    그가 밀랜드를 따라 저택으로 들어가려다가 멈춰서 라온을 보았다.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는가?”

    “말씀하십시오.”

    “이 녀석이 워낙에 숫기가 없으니, 데리고 가서 하분성을 안내해 줄 수 있나?”

    검귀는 옆에 있던 무스턴을 앞으로 밀었다.

    “스승님!”

    “나와 성주님이 술자리를 가지는데, 네가 거기서 무얼 하겠느냐.”

    “그건….”

    “이렇게 피와 전투의 냄새가 가득 한 곳은 몇 없다. 돌아보며 이곳에서 어떤 전투가 있었고, 너라면 어떻게 막을지를 생각해 보거라.”

    그는 이것도 좋은 경험이 될 거라고 생각한 듯 무스턴에게 이곳에서 배울 점을 찾으라 말했다.

    “알겠습니다.”

    무스턴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검귀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고,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같이 가요!”

    리메르가 히죽 웃으며 검귀와 밀랜드의 뒤로 붙었다.

    “진짜 이대로 간다고?”

    “야이 도박쟁이야!”

    “게으름뱅이 엘프!”

    광풍단이 리메르에게 소리를 질렀지만, 그는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오히려 더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오늘은….”

    라온이 광풍단의 앞에 서서 눈을 지그시 떴다. 오늘이라고만 말했는데, 모두의 눈동자에 공포가 차올랐다.

    “휴식이다.”

    “휴식?”

    “정말?”

    “웬일이야?”

    광풍단은 의외의 상황에 눈을 부릅떴다. 정말이냐는 듯 계속 되물었다.

    “그간 고생했으니까. 모레까지 쉬어.”

    슬로스에게 갈 시간이 필요하기에 처음부터 휴식을 줄 생각이었다.

    “숙소는 아까 도리안에게 상자로 찍힌 정찰대장이 알려줄 거야.”

    머리를 부여잡은 채 사과를 먹고 있는 라딘을 가리키고 등을 돌렸다.

    “끝났으니, 가자.”

    무스턴에게 손짓을 했다.

    “너도 귀찮을 테니, 빠르게 끝내줄게.”

    “…….”

    무스턴은 입매를 비틀면서도 뒤로 따라붙었다. 그래도 스승의 말이라고 따르려는 것 같았다.

    라온은 기억을 더듬으며 하분성의 이곳저곳을 무스턴에게 소개해주었다.

    처음에는 억지로 참는 것 같았는데, 오랜만에 만나는 주민들이 반갑게 인사를 해올 때마다 놈의 안색이 개울에 사는 메기처럼 시꺼멓게 가라앉았다.

    ‘귀찮네.’

    검귀는 제자와 친해지기를 바라며 이런 부탁을 한 거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찌질한 놈과 가까워지는 건 무리다.

    빨리 끝내기 위해서 대충 성을 돈 뒤에 성벽에 올라갔다.

    “여기가 하분성의 성벽이다. 연초에는 처들어오는 수천 마리의 몬스터를 막기 위해서 아비규환이 일어나는 곳이지. 너 정도라면 이 땅에 박혀 있는 혈향을 맡을 수 있을 거다.”

    “…….”

    무스턴은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핏자국이 남아 있는 설원을 보며 눈매를 찡그릴 뿐이다.

    “이게 마지막이다. 다 보여줬으니, 이제 네 마음대로 해라.”

    “라온 지그하르트.”

    라온이 손을 젓고 등을 돌리는데, 처음으로 무스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 이상 스승님께 접근하지 마라.”

    질시가 가득 들어찬 음성. 돌아보지 않아도 표정이 예상이 가는 목소리였다.

    “후….”

    라온이 짧게 한숨을 내쉬고 뒤를 돌았다. 생각보다 더 일그러진 얼굴을 한 무스턴이 탁한 입김을 내뿜었다.

    “네놈 때문에 스승님이 변하셨다. 본래 저런 분이 아니셨어!”

    “말은 바로 하지? 내가 렉타르 님께 접근한 게 아니라, 렉타르 님이 이쪽으로 온 거다.”

    “타인의 검술에 관심을 가져도 나만 보시던 분인데, 네놈이. 네놈이 감히….”

    무스턴은 검귀가 본래 본인에게만 친절했다며 너 때문에 모든 것이 망가졌다고 소리를 질렀다.

    “가르침을 내릴 때도 네게는 검술에 관한 조언을 하고, 내게는 다 뜯어먹은 생선 뼈다귀를 주지 않느냐!”

    “멍청한 놈.”

    개소리다.

    검귀는 자신에게 검술에 관한 조언을 해준 뒤 무스턴에게 왜 조언을 해주었고, 그 조언으로 인해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를 가르쳤다.

    가르침에 대한 농도도, 횟수도 비교할 수 없는데, 말도 안 되는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라온이 무스턴과 눈을 마주쳤다.

    기울어진 시선에서 뻗어오는 질투의 감정이 피부에 닿는 것 같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대단하네.’

    전생과 현생을 살며 꽤 다양한 인물들을 봐왔지만, 이 정도로 질투에 먹힌 인간은 처음이었다.

    라스가 뱀심이라 말한 대로 눈알 자체가 파충류처럼 세로 동공으로 보였다.

    “그만하자.”

    면상을 후려 패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슬로스에게 찾아가야 하고, 검귀가 알아서 할 일이기에 손을 저었다.

    “네놈 스승이 머저리라고, 남의 스승을 넘보지 마라!”

    “…….”

    떠나려는 걸음을 멈췄다.

    “다시 싸워보고 싶다고 했던가?”

    “뭐?”

    “기회를 주마.”

    라온의 붉은 눈동자 위로 질투를 압도하는 시퍼런 분노의 냉기가 명멸했다.

    “넌 좀 처맞아야겠다.”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