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418화 (418/653)

제418화

자줏빛 저녁 하늘 아래.

광풍단과 하분성의 기사들은 야영지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도란도란 담소를 나누었다.

라온은 도리안이 디저트로 꺼낸 늪지 포도를 뜯어 먹고 입술을 매만졌다.

‘확실히 맛있네.’

늪지 포도는 일반적인 포도보다 씨알이 굵고, 잘 익은 사과처럼 색이 뻘게 먹음직스러웠으며, 씨가 없어 먹기도 편했다.

이 포도로 만든 포도주에 왜 그렇게 열광하는지 이해가 가는 맛이었다.

-크흑….

라온의 머리 위에 배를 깔고 누워 있던 라스가 늪지 포도를 내려다보며 훌쩍였다.

‘왜 울어? 그리고 내 머리에서 내려와라.’

-이제 늪지 포도가 얼마 없잖느냐. 저 맛을 못 즐기고 살아야 하다니, 인생의 손해이니라!

라스는 블루베리는 이미 다 먹었고, 이젠 포도도 얼마 남지 않았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아니, 너 마족이잖아.’

인생이라는 말 좀 그만 쓰라고. 머리에서 좀 내려오고.

-즐거운 시간은 왜 이렇게 빨리 끝난다는 말이냐.

라스는 이쪽의 말을 듣지도 않은 채 천천히 줄어드는 포도를 보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내려와.’

-꿰엑!

라온이 머리에서 뒹구는 라스를 손등으로 쳐내고, 몸을 일으켰다.

짜악!

크게 손뼉을 쳐서 놀고 있는 광풍단의 시선을 모았다.

“이 황금 같은 저녁 시간을 그냥 보낼 생각은 아니겠지?”

“어, 음.”

“그게….”

“이대로도 좋을 것 같기는 한데….”

광풍단은 손뼉 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입술을 떨었다.

“단주님!”

“좀 도와주세요!”

“아리안 가문을 떠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시작이야!”

검사들이 리메르를 찾았지만, 그는 이번에 잃은 어마어마한 금화에 멘탈이 나가서 아직 제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다.

“헤에….”

리메르는 침을 질질 흘리며 포도를 한입에 뜯어먹었다.

-저렇게 아까운 짓을!

라스는 그 모습을 보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하나하나 음미하면서 먹어야 하는데, 저게 무슨 짓이냐! 당장 뺏어라!

‘네가 막든가.’

라온은 라스를 리메르에게 던져버리고, 광풍단에게 시선을 돌렸다.

“내가 직접 시켜줄까? 아니면 알아서 할래?”

라온이 당황하는 광풍단을 굽어보며 입매를 말아 올렸다.

“당연히 직접 해야지. 네가 말 안 해도 수련하려고 했다.”

버렌이 가장 먼저 일어나서 검집을 툭 쳤다.

“이번 전투에서 내 부족함을 뼈저리게 깨달았으니까.”

그는 다시는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다며 열기가 차오른 눈동자를 빛냈다.

“오랜만에 맞는 말 했네.”

마르타가 이마를 가린 머리를 쓸어 올리며 허리를 폈다.

“더럽게 짜증 나지만, 이번에 큰 도움이 안 된 건 사실이니까.”

그녀는 버렌의 어깨를 밀어버리고, 먼저 숲속으로 들어갔다.

“해야지.”

루난이 고개를 꾸벅이고 애검 설화를 말아쥐었다.

“나도 이제 뒤에만 있는 거 싫어.”

그녀는 먹고 있던 아이스크림까지 놔두고, 마르타가 사라진 숲 반대편으로 들어갔다.

세 명의 조장들은 이번 전쟁을 통해 마스터에 오를 수 있는 벽 앞에 섰음에도, 스스로를 부족하다고 생각하며 수련을 시작했다.

“부단주님.”

마크 괴튼이 다가와서 고개를 숙였다.

“저도 가보겠습니다.”

그 역시 마스터 중급에 닿기 직전이었기에 벽을 깨기 위해서 이동하는 중에서도 수련에 열중했다.

“나도 갈래!”

유아는 개구리처럼 팔딱 뛰어 바로 옆에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곧 할아버지를 만나기 때문인지 활력이 넘쳤다.

“네가 하면 나도 한다!”

율리우스는 바로 유아의 옆으로 따라붙어서 검을 뽑았다. 그는 지지 않겠다는 듯 평소보다 2배 빠르게 검을 내리쳤다.

“이러면….”

“어쩔 수 없네. 우리도 가자.”

“하긴 소화는 시켜야지.”

“나도 보호받는 건 그만하고 싶어.”

광풍단은 조장들과 마크 괴튼의 열기에 감화된 듯 얼굴을 굳히고, 숲 이곳저곳으로 흩어졌다.

“흐음….”

밀랜드가 먹던 포도를 내려놓고,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듯 어색한 표정의 기사와 검사들을 바라보았다.

“가만히 있을 건가?”

그의 눈동자에서 저녁 바람보다 쌀쌀한 한기가 피어났다.

“너희보다 어림에도, 더 강한 광풍단이 수련을 하러 갔는데, 포도가 입에 들어가는 것이냐?”

“으윽!”

“아닙니다!”

“가겠습니다!”

기사와 검사들은 벌떡 일어나서 숲속으로 달려갔다.

후우우우웅!

고요하던 숲속에서 검사들의 기합 소리로 이루어진 작은 오케스트라가 열렸다.

“저도 몸 좀 풀러 가보겠습니다.”

라온이 밀랜드에게 고개를 숙였다.

“예전이랑 달라진 게 하나도 없군.”

밀랜드가 모닥불에 장작을 던지며 미소를 지었다.

“하분성에 있을 때도 네 녀석이 연무장을 거의 독점하지 않았느냐.”

“사람이 달라지면 죽는 법이랍니다.”

“그래. 그게 너답지.”

그는 다녀오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라온은 옅은 미소로 고개를 끄덕이고서 아직 아무도 가지 않은 뒤편의 숲으로 향했다.

제천검을 뽑으려는데, 뒤에서 검귀와 그의 제자 무스턴이 나타났다.

“자네가 수련하는 것을 좀 봐도 되겠나?”

검귀가 나지막하게 운을 뗐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기본 검술과 보여도 상관없는 광아검, 설풍검결을 수련할 생각이었고, 검귀가 많은 도움을 주었기에 상관없었다.

“제대로 봐두거라.”

검귀가 무스턴을 옆으로 부르며 라온을 가리켰다.

“너는 아직 견문이 좁아서 다양한 검술을 볼 필요가 있다. 저 아이는 너와 같은 길을 더 앞에서 걷고 있으니, 좋은 공부가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무스턴은 검귀의 말이 마음에 안 드는 듯 가자미 눈깔이 되어 이쪽을 노려보았다.

‘뭐, 상관없지.’

이미 넘어선 상대니까.

라온이 제천검을 뽑았다. 중검과 쾌검 그리고 강검의 흐름을 담아 수직으로 검을 내리쳤다.

후우우웅!

오러를 운용하지 않았음에도 묵직한 바람이 피어나 저녁 공기를 갈랐다.

“기본 검술이라고 해도 어떤 묘리를 깃들게 하느냐에 따라 위력과 속도가 달라지는 법이다. 매번 다른 방식으로 검술을 운용해서 네게 적합한 방식을 찾도록 해라.”

검귀는 무스턴에게 조언을 하면서 그의 부족한 점을 지적했다.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표정이 아니네.’

무스턴의 얼굴에 가득 찬 질투의 감정이 그대로 보이는 것을 보니, 검귀의 말을 한 귀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는 것 같았다.

‘지 손해지.’

검귀의 가르침은 쉬우면서도 핵심을 찌른다. 저런 복을 알아서 걷어차다니 비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럼 다음으로….’

라온이 기본 검술을 끝내고 광아검을 펼쳤다. 검으로 십자를 그리는 세 번째 초식을 운용하는데, 뒤에서 검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 저기서 왼발을 조금만 더 내밀고, 검의 궤도를 우측으로 5도만 꺾으면 좋을 거 같은데.”

이번에는 무스턴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혼잣말이라고 우기는 그 나름의 조언이었다.

“이번에는 무게 중심을 1할만 내리고, 중검의 묘리에 집중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그는 다섯 번째 초식을 펼칠 때도 부족한 점을 혼잣말로 지적해주었다.

‘또 시작이시군.’

라온은 그의 지적을 들은 대로 광아검을 고쳐서 운용해보았다.

‘훨씬 낫네.’

세 번째 초식은 더 빠르고 강맹해졌고, 네 번째 초식은 적의 공간을 막는 오러의 벽이 두꺼워졌다.

“보아라. 검술이란 작은 차이로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무학이다. 항상 더 나은 방식을 추구하도록 노력하거라.”

“예….”

무스턴은 검귀에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날카로운 칼을 박아놓은 듯한 눈을 희번득였다.

당연히 자신에게 조언하는 것보다 제자에게 가르침을 내리는 게 훨씬 많았지만, 무스턴의 표정은 점점 악귀가 되어갔다.

‘친해지기를 바라시는 건가?’

아무래도 힘들 텐데.

검귀는 무스턴과 친하기 지내기를 원하는 것 같은데, 절대 불가능해 보였다.

‘에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설풍검결을 이어가는데, 이번에도 검귀의 조언이 들려왔다.

“저기서 발목의 각도를 조금만 더 크면 완벽할 거 같은데.”

“으윽….”

라온은 무스턴의 신음을 들으며 입맛을 다셨다.

‘고맙기는 한데.’

여기서 왜 이러시는 거예요….

* * *

무스턴이 피나도록 입술을 씹었다.

‘제자는 나뿐이라고 해놓고….’

왜 저놈을 가르치시는 건데!

스승님은 분명 다른 제자를 받을 생각이 없다고 말해놓고, 라온에게 검술 조언을 해주었다.

자신에게도 가르침을 내려주고 있기는 하지만, 언젠가 적이 될 수도 있는 놈의 검술을 봐주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사정이 있다고? 그 사정이 대체 뭔데!’

스승에게 직접 왜 라온에게 가르침을 내리냐고 물었지만, 그는 사정이 있다고 말했다.

확실해지면 네게 가장 먼저 알려주겠다고 말했지만, 그 말이 믿기지 않았다.

‘빌어먹을….’

좋다고 조언을 받아들이는 라온도, 놈에게 계속 가르침을 내려주는 스승도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슴이 끓어오르는 듯 뜨거워져 검귀가 하는 말도 잘 들리지 않았다.

‘지그하르트까지 찾아간다는데, 어떻게 의심을 안 하겠냐고!’

놈을 제자로 받을 생각이잖아!

련에서 가장 주의해야 하는 세력으로 꼽는 게 바로 지그하르트 가문이다.

그곳에 제 발로 찾아가는 이유를 알 것 같아서 심장이 꽉 조여들었다.

‘이건 전부 다….’

저놈 때문이야.

련에서 재능을 인정받아 렉타르의 제자가 되었고, 이젠 그의 검을 이어 최강이 될 일만 남았는데, 저 라온이라는 놈 때문에 모든 것이 어그러져 버렸다.

당장 놈에게 달려들어 검을 날리고 싶었다.

“무스턴. 저 검술은 상대의 빈틈을 비집어서 여는 감각검이다. 그저 강한 묘리를 담는 게 아니라, 그 상황에 적절한 무학을 담아내는 것이 감각검을 사용하는 진짜 방법이다. 저 정도 급으로 감각검을 사용하면 초식을 보인다고 해도 약점이 잡히지 않지.”

“…알겠습니다.”

무스턴은 손톱이 손바닥에 박힐 정도로 강하게 주먹을 말아쥐었다. 질시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며 라온을 노려보았다.

‘네놈에게만큼은 절대 지지 않는다.’

그는 라온을 짓밟고, 스승의 관심을 다시 가져오기 위해서 눈앞에서 펼쳐지는 검술을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 * *

지그하르트 가주전.

옥좌에 등을 기댄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글렌이 단상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준비는 끝났나?”

“예.”

그의 물음에 좌측에 서 있던 로엔이 고개를 숙였다.

“라온 도련님을 위해 준비한 금패와 다른 도련님들께 드릴 은패를 아예 새로 제작해 놓았습니다.”

로엔은 큼지막한 나무 상자를 가지고, 글렌의 앞으로 걸어갔다.

“확인해 보십시오.”

그는 상자를 열자, 찬란한 빛을 뿜어내는 상패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흐음….”

글렌은 상자 안에 박혀 있는 금패를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금패의 검 문양이 살짝 비틀어진 것 같은데….”

“지그하르트의 문양을 강조하기 위해 색을 진하게 다듬어서 그리 보이는 듯합니다.”

로엔은 아니라는 듯 금패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라온 님을 위해서 지금까지 제작한 금패 중 최고로 신경을 썼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거기다 겉만 금이고, 내부는 백금이죠.”

“나쁘지 않군.”

글렌은 라온을 위해 특별히 신경 썼다는 말이 나오자,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주님.”

셰릴이 입매를 살짝 말아 올리는 글렌의 앞으로 다가갔다.

“라온 성격이라면 가주님이 직접 금패를 내려주시는 것만으로 기뻐할 거예요. 걱정마세요.”

“크흠!”

글렌이 헛기침을 하며 손을 저었다.

“그 녀석이 날 어찌 생각하든 상관없다. 가문의 문양이 잘못 그려지면 상을 주는 사람으로서 위신이 손상되니까. 그러는 것이지. 특별 대우를 할 생각은….”

그는 고개를 저으며 비루한 변명을 중얼거렸다.

셰릴은 얼굴이 살짝 붉어진 글렌을 보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귀여우시다니까.’

그는 언제 라온이 올지 몰라서 가문에 돌아오자마자, 금패를 새로 제작하라 명했고, 선물을 줄 보고의 정리까지 끝냈으며, 라온과 함께 마시고 싶은 술의 목록까지 적어두었다.

대놓고 손주를 아끼면서 겉으로는 드러내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셰릴과 로엔은 그런 글렌이 귀엽다는 듯 서로 눈을 마주치며 웃을 때 묵직한 노크와 함께 비연회주 채드가 알현실로 들어왔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채드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뒤 앞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지?”

“광풍단주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는 품에서 노란색 봉투를 꺼냈다.

“내용을 보았나?”

“아뇨. 받자마자 바로 가져왔습니다.”

“읽어보도록.”

“알겠습니다.”

채드가 고개를 끄덕이고서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얇은 종이 한 창이 들어 있었다.

“어….”

그는 눈으로 편지를 읽고서 턱을 부르르 떨었다.

“비연회주?”

“아, 예!”

“쓸데없이 덧붙이지 말고, 그대로 읽어보게.”

“아, 알겠습니다.”

채드는 혀로 입술을 축이고 다시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라, 라온이 망혼귀를 잡았네요. 와우….”

그는 와우를 말할 때 목에 경련이 온 듯 목소리를 떨었다. 글렌을 슬쩍 보았다. 그의 이마에 굵은 힘줄이 돋아난 것처럼 보였다.

“검귀가 아리안 가문에 찾아왔는데, 라온이랑 쿵짝이 잘 맞네요. 이쪽이 지, 진짜 할아버지인 줄….

하늘이 무너진 듯한 묵직한 공기에 어깨가 짓눌리는 것 같았다. 등 뒤에서 식은땀의 폭포가 쏟아지는 게 느껴졌다.

“우, 우리는 하분성에서 놀다 옵니다. 언제 올지는 몰라요. 뾰, 뿅….”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편지지를 내렸다. 피부에 동상을 입을 듯한 서늘한 냉기에 더이상 입이 열리지 않았다.

“미친놈이네. 그냥 제대로 돌았어.”

셰릴이 헛바람을 흘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우우웅!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을 하는데, 편지지가 저절로 떠올라 글렌에게 날아갔다.

글렌은 정말 그렇게 적혀 있는지 편지지를 확인한 후 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종이를 태워버렸다.

“이쪽이 진짜 할아버지 같다라….”

그의 입매가 가늘게 올라간다. 보고만 있어도 심장이 멈출 듯한 섬뜩한 미소였다.

“로엔, 셰릴.”

글렌은 옥좌의 팔걸이를 종잇장처럼 우그러뜨리며 이를 드러냈다.

“광풍단주의 장례식을 준비하도록.”

진심이라는 듯 그의 주변으로 시뻘건 스파크가 명멸했다.

“죽고 싶다면 죽여줘야지.”

“예!”

“허허허.”

셰릴이 주먹을 말아쥐며 고개를 끄덕였고, 로엔은 평소의 웃음을 흘렸다.

채드는 머리털이 쭈뼛 서는 기세를 흘리는 세 사람을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광풍단주.’

명복을 빕니다.

* * *

라온은 새하얀 눈밭으로 가득 찬 언덕을 오른 뒤 시선을 들었다.

말라붙은 핏자국과 누런 때가 가득 차 있는 높다란 성벽이 보였다.

검사가 되기 위한 마지막 시험을 치르고, 처음으로 이명을 얻었던 하분성의 모습은 예전과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이 냄새도 오랜만이네.”

그리운 피비린내에 작은 미소가 지어졌다.

“으아아악! 이 냄새는 그대로야!”

도리안이 돼지 멱 따는 듯한 소리를 터트리며 얼굴을 구겼다. 예전처럼 헛구역질은 안 해서 다행이었다.

여전히 전투의 흔적이 남아 있는 하분성을 보자, 이곳에서 지냈던 시간이 떠올랐다. 수많은 전투를 겪고, 지금의 자신이 될 수 있는 토대가 된 곳이었기에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게 느껴졌다.

“사령관님께서 돌아오신다! 개문!”

“개문!”

하분성의 성문이 대지를 비트는 듯한 굉음과 함께 열렸다.

밀랜드는 설산의 은빛을 드러내며 열리는 성문을 바라보다가 뒤를 돌았다.

“처음에 왔을 때는 환영 받지 못하는 초짜 용병이었지.”

그는 짙은 미소를 흘리며 왼쪽 흉갑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함께 여행한 지인이 아니라, 이 성의 주인으로 돌아간 듯 강렬한 눈빛이었다.

“하분성주 밀랜드 브라이던의 이름으로 은인 라온 지그하르트의 귀환을 환영한다!”

“우와아아아아아!”

밀랜드의 외침과 함께 성 안쪽에서 거대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랜스처럼 묵직한 하분성의 군기에 등골에 오싹한 소름이 돋아올랐다.

‘귀환이라….’

이들이 아직도 자신을 성의 일원으로 생각한다는 것에 심장이 두방망이 질 쳤다.

라온은 손을 흔드는 기사와 정찰대를 바라보며 주먹으로 왼쪽 가슴을 쳤다.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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