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417화 (417/653)

제417화

라온은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어둑한 새벽에 연무장 문을 열었다.

모두가 리메르의 사비로 연 두 번째 축제를 실컷 즐겼기 때문인지 연무장은 텅 비어 있었다.

‘이런 기분은 오랜만이네.’

지그하르트에 있을 때는 매일 같이 보았던 풍경이지만, 아리안 가문에 온 이후로 많은 사건이 일어나서 이렇게 새벽 연무장에 혼자 있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많은 일이 있었지.’

가벼운 임무라고 생각하고 왔지만, 실제 임무는 몬스터를 제거하는 게 아니라, 이 가문의 어둠을 걷어내는 것이었다.

다만 어둠을 걷어냈더니, 진짜 껌껌한 놈들이 쳐들어와서 이 땅 전체가 무너질 뻔했다.

하분성과 오웬, 발카르, 철전대와 지각쟁이 리메르의 지원 덕분에 망혼귀를 몰아낼 수 있었지만, 실제로는 한 끗 차이로 살아남은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위험했어.’

라온이 바다 빛을 띤 새벽하늘을 올려보며 제천검의 검집을 꽉 말아쥐었다.

‘내가 약했기 때문에.’

20살에 마스터 최상급. 대륙 제일의 재능이라 불리고 있지만, 그것뿐이다.

‘실전에서는 어리다고 봐주지 않으니까.’

대련할 때 어리면 배려를 해주지만, 실전에서 어리고 미숙하면 그 약점을 찔러온다.

강해질수록 적으로 만나는 상대도 강할 수밖에 없는 법. 더 높은 격을 지닌 괴물들과 싸우기 위해서는 시간을 초월한 무위를 가져야 한다.

‘이젠 나한테 집중해야겠어.’

이번 전쟁을 겪으며 광풍단 전원은 익스퍼트 상급이상이 되었고, 최상급에 오른 이들도 다수다.

버렌과 마르타, 루난은 마스터의 벽 바로 앞에 섰고, 도리안도 벽에 닿기까지 그리 멀지 않았다.

이젠 광풍단원들에게 개인적인 수련을 지시하고, 스스로의 발전에 힘을 쓸 때였다.

-끄으응….

라스가 팔찌 위로 올라오며 신음을 흘렸다. 요즘 잘 먹어서 그런지 뭉게구름처럼 포동포동한 솜사탕이 되어 있었다.

-요즘 조용해서 좋았는데, 또 새벽부터 지루한 칼질을 해대겠구나.

녀석은 좋은 시절은 다 갔다고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조언이나 해주던가.’

-헹! 본왕이 뭣 하러 적을 키운단 말이냐!

라스는 적에게 도움 따위는 주지 않는다고 중얼거리고서 다시 팔찌로 들어갔다.

뱃살이 쪄서 그런지 들어가는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새벽부터 지루한 칼질이라….’

그리운 말이네.

라스의 조잘거림을 듣자, 예전 훈련생 시절로 돌아간 듯 기분이 들떴다.

‘수련은 바뀐 게 없지만.’

그때도 지금도 훈련의 시작은 기본 검술이었다. 기본 단련을 위해 제천검을 뽑으려고 할 때 연무장 문이 열렸다.

‘누가….’

기감으로 느끼지 못해서 이상하다고 생각할 때 검귀가 모습을 드러냈다.

“렉타르 님?”

“몸을 풀러 나왔을 뿐이니, 신경 쓰지 말고 수련하게나.”

검귀는 손을 휘휘 젓고서 멀찍이 떨어졌다.

‘허….’

라온은 검귀를 보며 헛바람을 흘렸다.

‘저 경지에서도 새벽 수련을 하시는 건가?’

아니, 저래서 저 경지에 올랐겠지.

대륙십천에게도 밀리지 않는 무인이 이런 새벽부터 수련하려는 모습을 보니, 열심히 해야겠다는 다짐이 깊어졌다.

바로 제천검을 뽑았다. 검을 들어 올려 머리 위에 세웠다. 상단세에서 그대로 떨어지는 칼날에 태산 같은 무게가 실렸다.

라온은 수직 베기와 수평 베기, 사선 베기 그리고 찌르기로 몸을 푼 뒤 제천검을 내렸다.

‘확연히 달라졌군.’

기본 검술만 펼쳐보아도 느낌이 온다. 검귀와의 대련 이후 모든 검술 경지가 몰라보게 성장한 것 같았다.

라온이 다시 제천검을 들어 올려 중단에 두었다.

‘이번에는 광아검.’

적의 빈틈을 비집어 여는 광아검의 초식을 차례로 펼쳐냈다.

광아검 역시 맹수의 이빨을 더 두껍게 세운 듯한 강렬한 검격을 뿌렸다.

광아검을 한 차례 펼치고, 두 번째 초식 회전에 들어가려고 할 때 뒤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험험!”

검귀였다. 멀리 떨어져 있던 그가 어느새 등 뒤까지 다가와 있었다.

“조금만 힘을 빼면 좋을 텐데….”

그는 제천검을 슬쩍 보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예?”

라온이 광아검의 흐름을 멈추고, 뒤를 돌았다.

“아, 혼잣말이었는데, 들렸나 보군.”

“혼잣말이요?”

요즘 혼잣말은 귀에 대고 하는 건가?

검귀는 바로 뒤에서 똑 부러지게 말을 해놓고 혼잣말이라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근데 힘을 빼라는 건 어떤 뜻인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지금 나한테 물어본 건가?”

“예? 아, 네.”

“그럼 뭐 답해줄 수밖에 없겠군.”

그는 냉큼 고개를 끄덕이고서 옆으로 다가왔다.

“자네가 펼친 감각검의 이름이 뭐지?”

“광아검이라고 합니다.”

“광아검은 감각검이기 때문에 본신의 실력을 정확하게 아는 게 중요하네.”

검귀가 시범을 보이듯 검을 뽑아서 아래로 내리그었다. 광아검의 첫 번째 초식과 거의 흡사했다.

“자네는 마스터 최상급이라는 벽을 눈 깜짝할 사이에 넘었기 때문에 성장한 검술 묘리에 아직 적응하지 못한 상태네.”

그는 광아검의 두 번째 초식과 비슷한 검격을 펼치며 말을 이었다.

“육체의 힘과 오러가 강해져 검술도 위력적으로 보이지만, 상대하기에는 이전보다 더 쉬운 상태야. 오러는 그대로 두고, 무학의 묘리에 집중하여 검술의 완성도를 높여보게.”

“아….”

검귀는 아직 성장한 검술의 묘리를 전부 끌어내지 못하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어깨에 가득 차오른 힘과 오러를 빼고, 자네가 깨달은 무학의 묘리를 더 깊게 담아보게. 이전보다 사나우면서도 현묘한 일격이 만들어질 테니까.”

“조언에 감사드립니다.”

라온이 검을 내리고, 허리를 숙였다.

‘역시 오대검수의 수좌인가.’

기본 검술과 광아검을 한 번 본 것으로 문제점을 파악하다니, 대단하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검귀라는 이명을 괜히 달고 있는 게 아니었다.

라온은 검귀의 조언을 떠올리며 다시 광아검을 펼쳐냈다.

우우우웅!

검의 중심에 뭉쳐 있던 힘이 검신 전체로 퍼지고, 새롭게 다듬은 무학의 묘리들이 휘감기며 조금 전과는 격이 달라진 광아검이 사나운 울음을 터트렸다.

“커흠, 거기서 중검과 정검의 묘리를 조금만 짙게 하면 더 좋을 거 같기도 하고.”

검귀는 옆으로 지나가며 이번에도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어….”

“아, 이것도 들린 건가? 미안하네. 늙으니 혼잣말이 많아져.”

그는 허허 웃으며 손을 저었다.

라온은 미묘한 미소를 짓는 검귀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이 아저씨 왜 이러시지?

* * *

리메르는 성벽 위에서 연무장을 내려보며 턱을 긁적였다.

그의 눈동자에는 라온에게 조언을 하는 검귀의 모습이 박혀 있었다.

‘제자 욕심이 나는 건가?’

라온의 재능을 바로 앞에서 보았으니, 그를 제자로 삼고 싶은 게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라온이 받아들이지 않을 테니, 상관없지. 다만….’

저 닮은 외모가 걸린단 말이야.

라온과 검귀가 나란히 서 있으니, 더 비슷하게 보인다. 솔직히 말해서 혈육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지그하르트까지 온다는 것도 이상하고.’

라온은 검귀와 그의 제자가 지그하르트에 손님으로 온다고 말해주었다.

한 번도 북쪽으로 오지 않은 검귀가 라온을 보자마자, 지그하르트에 온다는 것을 보니, 무언가가 있는 게 분명했다.

‘만약에 정말 혈육이면 재밌어지겠는데.’

외가는 육황 글렌 지그하르트, 친가는 오대검수의 수좌 검귀. 연극으로 짜도 욕먹을 정도로 사기 핏줄이었다.

‘이러면 가주님도 가만히 못 있겠지?’

글렌은 본인이 라온의 유일한 할아버지라고 생각하며 본심을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그 사이에 검귀가 끼어든다면 이제 그런 여유를 부리지 못할 것이다.

‘제발 내 생각이 착각이 아니기를!’

지그하르트에 더욱더 재밌는 일이 벌어지기를 바라며 들뜬 미소를 지었다.

‘재신이시여. 앞으로도 나에게 꿀잼 상황을… 음?’

그는 기도를 올리다 말고, 성 중앙에 있는 첨탑을 바라보았다. 검귀의 제자인 무스턴이 탑 위로 올라와서 라온을 노려보고 있었다.

‘쟤는 왜 저기에 있대?’

검귀가 반대편 연무장에서 수련을 시키고 나오는 것을 봤는데, 수련하다 말고 왜 저기서 라온을 째려보는 건지 모르겠다.

‘스승이 다른 놈을 챙기니 화가 날 수는 있지만, 저 표정은 좀 아니지.’

질투로 가득 찬 표정. 검귀의 제자인 무스턴은 나이에 맞지 않게 인간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검술은 잘해도 제자를 키우는 재주는 없는 모양이었다.

리메르가 검귀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내리며 히죽 웃었다.

“제자 대결은 내가 이겼네.”

* * *

라온은 해가 중천에 뜨고 나서 제천검을 내렸다.

그는 이마에서 흐르는 땀만큼이나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대단하시네.’

검귀는 정말 귀신이라도 된 것처럼 움직임에서 부족한 부분을 파악하고 어떻게 하면 더 좋은 검술을 펼칠 수 있는지를 알려주었다.

‘이렇게 빨리 적응할 줄은 몰랐어.’

검귀가 계속 조언해준 덕분에 오전 수련만 했음에도 성장한 무학에 알맞게 검술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

“렉타르 님.”

라온이 제천검을 검집에 넣은 뒤 어색하게 몸을 푸는 검귀에게 다가갔다.

“덕분에 성장한 무력을 제대로 체화를 한 듯합니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체화는 아직 멀었네. 꾸준히 수련하도록 하게.”

검귀는 지금에 만족하지 말고 더 나아가라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라온이 뒤통수를 매만지며 눈동자를 굴렸다.

“제자분이 계속 이곳을 보고 있는듯한데 괜찮으십니까?”

어제 교육이 제대로 먹히지 않았는지 무스턴은 살벌한 눈으로 이곳을 노려보고 있었다.

-본래 질투에 눈이 멀면 저렇게 추해지느니라.

라스가 불쌍하다는 듯 혀를 찼다.

-네게 조금 도움을 준다고 스승이 바뀌는 것도 아닌데, 저렇게 시간 낭비를 하다니, 한심 하느니라.

녀석은 그럴 시간에 맛난 밥을 먹겠다며 인상을 찌푸렸다.

“괜찮네.”

검귀가 첨탑 위로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와 눈을 마주친 무스턴이 다급하게 아래로 내려갔다.

“저 아이는 자네보다 연장자지만 아직 세상 경험이 극히 적네.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면 본인도 깨닫는 게 있을 걸세. 물론 계속 교육을 해주어야겠지.”

그는 제자 걱정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를 흘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자네에게도 비슷한 사람이 있는 듯한데.”

검귀가 서쪽 성벽으로 눈동자를 돌렸다.

“내 제자 이상으로 이쪽에 관심이 많아 보이네.”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라온이 리메르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희 단주님은 원래부터 관음증이 있거든요.”

그 말대로 그는 들켰다는 것을 알자, 당당하게 손을 흔들었다.

“주인공 병에 단단히 걸려서 숨어서 지켜보다 위기의 순간에만 나타납니다.”

“서로 힘든 점이 많군.”

“그러네요.”

라온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검귀 역시 미소를 지었다.

“…….”

웃음이 그친 후 잠시간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음….”

검귀는 뒷짐을 진 채로 물러섰다.

“이만 가보도록 하겠네. 수련 계속하도록 하게나.”

“오늘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별거 아닐세.”

그는 손을 휘젓고서 연무장을 떠났다.

라온은 검귀에게 인사를 한 뒤 다시 제천검을 들었다.

후우우웅!

설풍검결을 펼치며 서리의 바람을 일으키는데, 연무장 문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결의 방향을 조금만 더 위로 향하면 좋을 거 같은데.”

안 갔어?

* * *

아리안 가문의 동쪽 성문 앞.

광풍단, 하분성, 오웬, 철전대의 검사들과 모렐의 마법사들이 전열을 갖추듯 모여 있었다. 그들 모두는 떠날 준비를 마친 듯 갑주와 전투복을 입은 채 말에 올라타 있었다.

아리안의 가주를 증명하는 푸른 바람 문양이 새겨진 전포를 입은 웬디가 모두의 앞으로 다가왔다.

“아리안은 은인들의 도움을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그녀는 소매를 곱게 접은 뒤 예를 갖춰 허리를 굽혔다.

“구명의 은에 감사드립니다.”

“감사드립니다!”

웬디의 뒤에 서 있던 아리안 가문의 사람들이 그녀와 같은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라온은 아리안 가문 전체의 인사를 받으며 옆을 보았다. 밀랜드와 보리니 키튼, 트레빈 그리고 모렐이 보드라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불온한 일들이 모두 지나갔으니, 번창하여 천 년 전의 명성을 되찾기를 바랍니다.”

아리안 가문 사람들의 감사 인사를 받아들이며 고개를 숙였다.

“인사가 끝났으면 우리는 먼저 가도록 하지.”

모렐이 먼저 뒤를 돌았다.

“이런 자리에 있으면 닭살이 돋아오르는 타입이라.”

“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자네 때문이 아니라, 망나니 왕녀 때문이니 신경 쓰지 말게.”

그는 귀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그래도 진심으로 도와주셨지 않습니까. 후에 도움이 필요하시면 말해주십시오.”

“그럴 일은 없어. 그래도 다음에 또 보도록 하지.”

모렐은 또 보자고 말한 뒤 마법사들과 함께 빛이 되어서 사라졌다.

“어이.”

트레빈이 옆으로 다가오며 어깨를 툭 쳤다.

“광풍단은 하분성에 들린다고 했으니, 먼저 출발하겠다.”

“예. 돌아가서 찾아뵙겠습니다.”

“바로 임무에 나갈 것 같으니, 찾아도 없을 거야. 복귀하면 오랜만에 한 번 붙어보도록 하지.”

“저희야 언제라도 환영입니다.”

“그럼 올해가 지나기 전에.”

그와 철전대는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성문을 나섰다.

“라온 님.”

보리니 키튼이 고개를 꾸벅였다. 그는 즐거운 시간이었다며 활짝 핀 미소를 흘렸다.

“덕분에 좋은 경험과 인맥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와주셔서 정말 든든했습니다.”

라온이 보리니 키튼에게 마주 인사를 하고 삼왕자를 보았다.

“어….”

삼왕자는 좀비처럼 흐린 눈으로 살짝 고개를 꾸벅였다. 눈자위에 푸르딩딩한 멍이 든 것을 보니 리메르에게 받은 마르타에 관한 정보가 아무 소용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그때는 대련 한번 하시죠.”

보리니 키튼은 넋이 나간 삼왕자를 질질 끌고, 성문을 나갔다.

“그럼 우리도 준비하자.”

버렌이 뒤를 돌아서 광풍단 검사들에게 출발 준비를 지시했다.

“아, 짱나.”

마르타는 진심으로 열이 뻗친 듯 인상을 구겼다. 상태를 보니, 삼왕자는 비호감만 산 것 같았다.

“아, 포장 많이 못 했어….”

루난은 이곳에서만 먹었던 블루베리 아이스크림을 손에 꼭 쥔 채 입술을 깨물었다. 맹한 눈동자에 아쉬움이 가득 얹혀 있었다.

“도리안.”

라온이 도리안에게 다가가서 손을 내밀었다.

“그것 좀 줄래?”

“그거라고 하면 제가 어떻게 알아요!”

도리안은 본인은 독심술사가 아니라고 중얼거리면서 배 주머니에서 큼지막한 종이봉투를 꺼냈다.

“잘만 꺼내네.”

그가 준 봉투를 가지고 웬디 아리안에게 다가갔다.

“전에 저한테 부탁하신 거 있죠?”

“네? 부탁이라니….”

그녀는 무슨 말이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라온은 들고 있던 종이봉투와 함께 웬디의 앞에 섰다.

봉투가 가득 차서 위에 얹어있던 물건 몇 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빨갛고, 노란 막대 사탕들이었다.

“이건….”

웬디는 바닥에 떨어진 사탕 두 개를 주우며 라온의 봉투를 보았다. 커다란 봉투 안에는 가지각색의 사탕이 가득 차 있었다.

“그냥 한 말이었는데….”

그녀는 사탕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추억은 새로운 기억으로 잊는 법이죠. 당신을 믿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힘 내주세요.”

라온이 미소를 지으며 사탕 봉투를 내밀었다.

“…그래야죠.”

웬디는 떨리는 숨을 내쉬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이 가문의 가장이니까요.”

그녀는 어릴 적 위겐과의 추억이 라온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행복한 기억으로 덮이는 듯한 환상을 느끼며 미소를 지었다.

“그럼 저희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라온은 웬디의 웃음을 보고서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떠나기 위해서 몸을 돌리려고 할 때 뒤에서 옷자락이 바닥에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와 아리안 가문은 주군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부름을 기다리겠습니다!”

웬디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검병을 움켜쥐었다. 그녀를 따라 다른 아리안 가문의 검사들 역시 같은 자세로 기다리겠다고 외쳤다.

아리안 가문 전체가 주군이라 외치며 따르겠다는 말을 듣자, 가슴이 터질 것처럼 요동쳤다.

라온은 무릎을 꿇은 채 가슴에 손을 얹은 아리안의 사람들을 보며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저도 아리안을 다시 부르는 날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진심이 담긴 미소와 미소를 마주하고 등을 돌렸다.

놀람과 어벙함 그리고 당당함이 깃든 광풍단의 눈동자를 보며 이곳에 왔을 때와 달리 활짝 열린 성문으로 향했다.

“가시죠.”

라온이 흑룡포를 쳐내며 선두에 섰고, 그 뒤를 광풍단과 하분성의 검사들이 따랐다.

-라온.

라스가 뒤를 힐끔 돌아보고서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표정이 요상한 것을 보니, 녀석도 지금 상황에 감동한 것 같았다.

‘왜?’

-혹시 말인데….

라스가 입맛을 다시며 뒤를 힐끔 보았다. 어지간히 감동이었나 하고 뿌듯해하는데 녀석의 말에 뜨거운 감정이 뚝 끊어졌다.

-사탕 남는 것 없느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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