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4화
캬앙!
무스턴이 반토막 난 검을 떨어뜨리는 순간 넋이 나갔던 관객들의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이, 일검?”
“검귀의 제자가 일검에 깨졌다고?”
“미쳤어….”
“이, 이게 말이 돼? 검귀의 제자인 걸 떠나서 마스터가 같은 마스터를 일검에 꺾을 수가 있나?”
“눈앞에서 봤는데도 안 믿겨….”
“조, 조금 허무하지 않나?”
“많이 허무하지.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다지만, 이건 심하네….”
관객들은 고대하던 라온과 무스턴의 대련이 일합에 끝난 허망한 상황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무스턴이 턱을 부르르 떨며 반토막 난 검을 보았다. 검신의 중간이 깔끔하게 잘려 나갔고, 부러진 칼날은 대련장에 박혀 있었다.
‘이게 뭐지?’
스승님의 검술을 썼는데 졌다고?
검귀 렉타르의 진신 무학이 저 어린놈의 일검에 깨졌다는 것이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현실이 아니라,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말이 안 돼.’
라온 지그하르트는 젊은 무인 중 최강이라는 검룡의 이명을 받았으니, 질 수도 있다.
하지만 단 일검에. 그것도 그리 대단하지 않은 발검술에 스승의 검이 깨졌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이, 이건 아니야!”
무스턴이 부러진 검을 들어 올려 라온에게 겨누었다.
“난 아직 지지 않았어! 인정할 수 없단 말이다!”
그는 이 패배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이를 바득 갈았다.
쯧.
라온은 악을 지르는 무스턴을 보며 짧게 혀를 찼다.
-한심하군.
라스는 벌레를 보는 듯 차가운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약한 것보다 더 추한 놈이니라.
‘그러게.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질 않네.’
단 일검이라고 해도 승부는 승부. 실전이라면 목숨을 빼앗겼을 상황이다.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고 어거지로 우기다니, 실력을 떠나 검귀의 제자라는 게 아까운 인성이었다.
“그럼 뭘 어쩌자는 거지?”
“다시 붙어! 난 이대로라도 상관없으니까!”
무스턴은 이대로 싸워보자며 반 토막 난 칼날 위로 강기를 불태웠다.
‘조금 귀찮지만….’
여기서 확실하게 짓밟아버리는 게 좋겠지.
무스턴이 본 실력을 발휘한다면 제압하기 힘들 테지만, 그는 조금 전보다 더 흥분한 채로 오기를 부리고 있기에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무스턴.”
라온이 다시 제천검을 들어 올리려고 할 때 대련장으로 검귀가 올라왔다.
저벅.
그의 걸음 소리는 가늘었음에도 시끄러운 관객석의 소음을 뚫고 귓가에 나직하게 내려앉았다.
“스, 스승님.”
무스턴은 차갑게 가라앉은 검귀의 눈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건 대련이자, 결투다.”
검귀가 손을 들어 올리자, 대련장에 박혀 있던 검날이 뽑혀 그의 손아귀에 내려앉았다.
“일검에 졌다고 해도, 방심을 했다고 해도 패배는 패배. 내려오거라.”
“끄윽….”
무스턴은 피나도록 입술을 씹으며 대련장을 내려갔다.
다만 절대 잊지 않겠다는 듯 핏발 선 눈동자로 이쪽을 노려보았다.
“내가 사과하지.”
검귀가 앞으로 다가와 눈을 내리감았다.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예의가 없네. 자네가 이해해주게나.”
그의 손 위에 올라가 있던 부러진 칼날이 쇳가루가 되어 흩날린다. 이걸 사과라고 해야 할지 협박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괜찮습니다.”
라온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렉타르 님과 대련은….”
“자네에게도 휴식이 필요할 테니, 잠시 후에 시작하도록 하지.”
검귀는 연공을 하고 오라고 말한 뒤 대련장을 내려갔다.
“음….”
라온은 검귀의 등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더 잘 싸울 수 있는 기회를 주는데, 마다할 필요는 없겠지.’
고개를 끄덕이고, 대련장 바로 아래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너 진짜 뭐 하는 놈이냐?”
“뭐긴 뭐야. 미친놈이지!”
버렌이 헛바람을 흘리고, 마르타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라온. 대존잘.”
루난은 잘했다는 듯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연공할 테니까. 호법 좀 부탁해.”
라온은 세 사람에게 호위를 부탁한 뒤 눈을 내리감았다.
‘무스턴이 보여주었던 검술은 검귀의 무학이겠지.’
무스턴의 검술에서 조금이라도 빼먹을 수 있는 부분을 떠올리며 눈을 내리감았다.
* * *
“죄송합니다!”
무스턴은 검귀가 대련장을 내려오자마자 무릎을 꿇었다.
“이 못난 놈이 스승님의 명성을 땅에 처박았습니다!”
그는 머리를 땅에 박으며 비명 같은 소리를 질렀다.
“다만!”
무스턴이 피가 흐르는 이마를 들어 올렸다. 그의 눈동자가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정말 방심했을 뿐입니다. 전력을 다했다면 제가 이길 수….”
“무스턴.”
검귀가 무스턴을 굽어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방심하지 않았다면 이길 수 있다고 말했느냐?”
“그렇습니다! 놈이 이긴 건 우연이 겹쳤을 뿐입니다! 다시 싸울 기회만 주신다면 명예를 회복하고 돌아오겠습니다!”
“상대를 보지도 않고서 이길 수 있다는 말이냐?”
“예?”
무스턴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입을 네모꼴로 벌렸다.
“네 검은 저 아이를 향하지 않고, 나를 향했다. 네 의식은 라온이 아니라 나와 대련하고 있었지.”
검귀는 서늘한 눈동자로 제자의 떨리는 어깨를 바라보았다.
“눈앞에 있는 상대에게 전력을 다하지 않고, 뒤에 있는 내게 상승 검술을 보여줄 생각만 가득했던 게 아니었나? 그 상태로 검룡이라 불리는 아이를 이기겠다고?”
“그, 그게….”
무스턴은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뚝 떨궜다.
‘맞아….’
내가 검술을 보여주고 싶었던 사람은 저 라온이 아니라, 스승님이었어.
검귀의 제자에 어울리는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아직 완벽하게 익히지 못한 만검을 사용했다가 일검에 당한 것이다.
‘빌어먹을!’
이제야 알았다. 상대에 집중하지 않은 채 어설픈 검술만 보여주었으니, 전력을 다한 라온에게 패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구나.”
검귀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내 검을 따라 하지 않고, 처음부터 제 실력을 발휘했다면 저 아이와 좋은 승부를 겨룰 수 있었을 것이다.”
“크윽….”
무스턴이 입술을 깨문 채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오늘의 패배는 너를 더 높은 곳으로 올려줄 것이니, 평생 잊지 말거라. 그리고….”
검귀가 무스턴에게 한 발 더 다가갔다.
“네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을 알려주마.”
“예?”
무스턴이 멍하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널 제자로 받았던 게 내 선택은 아니었지만, 그 일을 물릴 생각은 없다. 내 제자는 너 하나뿐이니 쓸데없는 생각은 말고, 수련에 집중하거라.”
검귀는 그 말을 남기고 뒤를 돌았다.
‘이 정도로 말해주었다면 충분하겠지.’
무스턴은 자신이 직접 선택한 제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늘 마음에 걸려 했기 때문인지 처음부터 자존감이 낮고, 쉽게 흥분했다.
본의와 상관없이 맺은 사제의 연이라고 해도 한 번 받은 제자를 물릴 생각 따위는 없다. 이번 대련을 통해 제자의 단점들이 고쳐지기를 바랐다.
“후우….”
검귀는 눈을 감은 채 연공을 하는 라온을 보며 입술을 가늘게 씹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군.’
닮지 않았는데, 닮았어.
라온 지그하르트를 보고 있으면 그 아이가 떠오른다.
화려한 금발적안과는 다른 머리 색과 눈동자를 가졌지만, 이목구비의 조화는 기이할 정도로 비슷했다.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게 만드는군.’
검귀가 라온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을 때 무스턴도 라온을 노려보며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 * *
첫 번째 대결이 싱겁게 끝난 후 정신을 차린 도박꾼들은 리메르의 가판대로 달려갔다.
“지그하르트의 광거어어어어엄!”
“야이! 사기꾼 자식아!”
“내 돈 돌려줘!”
“저런 비루한 놈이 사도랑 층주를 죽였다고? 개소리 마!”
“그냥 허접이잖아!”
“내가 엘프를 믿는 게 아니었는데!”
도박꾼들은 가판대를 부술 것처럼 달려들어 리메르의 멱살을 잡았다. 너무도 쉽게 돈이 날아갔기 때문에 모두의 눈동자에 광기가 가득 차올랐다.
“히이이익!”
도리안은 사람들의 뻘건 눈동자를 보며 입술을 부들부들 떨었다.
“자자, 여러분 진정하세요.”
리메르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채 손을 저어 사람들의 흥분을 가라앉혔다.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법! 일검에 이겼지만, 라온도 꽤 피해가 있었습니다. 저기 보다시피 연공하고 있잖아요.”
그가 눈을 감고 오러 연공을 하는 라온을 가리키자, 도박꾼들의 절규가 잠시 그쳤다.
“여러분. 사람에겐 세 번의 기회가 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첫 번째 기회는 이 대결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 대결에 돈을 걸 수 있었다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기회는 한 번의 판때기가 더 있다는 점입니다!”
리메르의 외침에 돈을 딴 사람도, 돈을 잃은 사람도 모두 입을 떡 벌렸다.
“기, 기회?”
“한 번의 기회가 더 있다고?”
“그게 무슨 말이지?”
“일단 이것 좀 놓고 다들 한 발씩 물러나세요.”
관객들은 리메르의 멱살을 놓고 뒤로 물러섰다.
“알고 계시겠지만, 잠시 후에 라온과 검귀의 대련이 시작됩니다. 뭐, 대련이라기보다는 약간의 가르침이겠지만, 상황이 달라졌죠.”
리메르가 검귀를 가리키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아끼는 제자를 일검에 날려버린 라온을 검귀가 그냥 두겠습니까? 거기 당신!”
그가 조금 전에 본인의 멱살을 잡았던 도박꾼을 가리켰다.
“만약 손님이 검귀라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나, 나라면 똑같이 일검에 깨부수겠지.”
“맞아요! 검귀도 사람이고, 팔은 안으로 굽으니, 제자에게 망신을 준 라온이 더럽게 미울 겁니다. 당연히 딱 일검으로 라온을 눌러버리겠죠. 여기서!”
리메르가 테이블을 쿵 치며 몸을 일으켰다.
“우리의 세 번째 기회가 시작됩니다! 라온이 그 검귀의 일검을 막을 수 있을지, 없을지! 지금부터 판을 새로 열겠습니다!”
그는 바로 배팅을 시작하자며 새로운 도박을 개시했다.
“미, 미친….”
“그게 내기가 되나?”
“맞아. 아무리 라온 님이라고 해도 검귀의 검은 못 견디지.”
“그래. 이건 내기가 안 되는 일이라고!”
“헛소리 말고 돈을….”
사람들은 바보도 아니고, 누가 라온에게 돈을 걸겠냐고 비웃음을 흘렸다.
모두가 돈을 걸지 않고, 리메르를 노려볼 때 삼왕자가 인파를 헤치고 테이블 앞에 섰다.
“딴 돈과 원금을 모두 라온 검사가 일검을 견딘다에 걸겠소.”
삼왕자는 딴 돈을 돌려줄 필요 없이 전부 라온에게 배팅하겠다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리메르가 웃으며 고개를 숙일 때 삼왕자에게서 오러 메시지가 들려왔다.
[마르타 양이 좋아하는 걸 알려주신다는 약속은 지키시겠죠?]
[아, 물론이죠. 다 끝나면 그 녀석이 제일 좋아하는 걸 말해줄게요.]
그는 삼왕자를 보며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걔가 좋아하는 건 싸움이랑 욕이지. 뭐, 다른 게 있겠냐고.’
마르타가 삼왕자에게 넘어갈 일은 절대 없으니, 대충 좋아하는 것을 불러주고 넘어가면 그만이었다.
“도리안. 잘 적어둬라.”
“예!”
도리안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장부에 삼왕자가 배팅한 내용을 적었다.
“자, 잠깐만 아까 왕자님이 금화 500개 걸지 않았어?”
“그랬지. 그게 지금 1,000개가 되었을 텐데….”
“그걸 다 건다고?”
“세상에나….”
“무슨 강심장이지?”
사람들은 시원하게 돈을 건 삼왕자를 보며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나, 나는 검귀 쪽으로!”
“나도!”
“이런 젠장! 비상금 다 턴다!”
“세 번째 기회! 맞아! 다른 건 몰라도 세 번째 기회는 잡아야지!”
“카멜룬 갈끄니까아아아아아!”
돈을 딴 사람도, 잃은 사람도 재투자하며 테이블이 돈으로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리메르는 그림자를 만드는 돈더미를 보며 히죽 웃었다.
그는 연공을 끝내고 눈을 뜬 라온에게 두 손 모아 고개를 숙이며 열렬한 기도를 올렸다.
오, 나의 재신이시여!
* * *
라온은 다시 난리가 난 리메르의 도박장을 보며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저 인간은 어딜 가든 굶어 죽지 않을 거야.’
위기의 순간을 이용하다니, 저 얍실함만큼은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저 길쭉한 귀를 뽑고 싶으니라!
라스는 열받는다면서 허공에 동그란 주먹을 휘둘렀다.
‘그래. 보고 있으면 짜증이 나지.’
라온이 피식 웃으며 대련장으로 올라갔다. 몸도 풀렸고, 연공으로 오러를 채워 조금 무스턴과 싸울 때보다 더 상태가 좋았다.
이쪽을 보고 있던 검귀가 고개를 끄덕이고서 대련장을 걸어 올라왔다.
“준비는 되었나?”
“예.”
라온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자에게 깨달음을 주어서 고맙네.”
검귀가 무스턴을 돌아보고서 눈을 가늘게 떴다.
“경험이 많지 않아 모자람이 많은 아이네. 자네의 가르침 덕분에 더 높은 곳으로 오를 수 있겠지.”
“그건 다행이군요.”
라온은 검귀의 말과 달리 아직도 살벌한 안광을 드러내는 무스턴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자네가 일검으로 제자에게 깨우침을 주었으니, 나도 일검으로 자네와의 대련을 끝내려 하네. 받아보겠나?”
“영광입니다.”
천천히 숨을 고른 뒤 제천검을 뽑았다.
“그럼 가도록 하지.”
검귀는 열 걸음 이상 떨어진 거리에서 검을 뽑았다.
살짝 붉은 빛이 깃든 칼날이 하늘 위에 섰다. 상단세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검형에서 웅대한 패기가 느껴졌다.
고오오오오!
그의 검이 천천히 내려선다. 어린아이도 웃으며 피할 수 있을 정도로 느리디느린 검일 뿐인데, 심장이 터질 것처럼 꽉 조여들었다.
‘이건 뭐야….’
너무 느려서 하품이 나올 정도의 속도에, 강기는커녕 검기조차 두르지 않은 검을 어떻게 해야 막을 수 있을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크으윽!”
피하면 죽고, 막아도 죽어.
온 세상이 담긴 듯한 검의 압력에 몸이 짓눌린다.
뼈가 비명을 지르고, 숨을 쉴 수조차 없다. 어떻게 인간이 이런 검술을 운용할 수 있는지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재밌는 교육이로구나.
라스는 흥미롭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녀석의 목소리에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들었다.
‘이대로 당할 수는 없어.’
어떻게든 방법을….
굳어버린 것 같은 심장을 자극하여 불의 고리를 운용했다.
천천히 회전하는 고리들이 공명하며 쇠사슬에 감긴 듯한 육체의 압박을 풀어냈다.
다만 불의 고리를 공명시켰음에도 여전히 검을 막을 길은 보이지 않았다. 피할 방법은 딱 하나 무릎을 꿇고 굽히는 것뿐이었다.
‘제자를 망신시킨 대가를 받겠다는 건가.’
눈앞에서 보는 검귀의 검은 절대의 검이었지만, 옆에서 볼 때는 장난치는 것처럼 느리게 보일 뿐이다.
아무래도 제자가 당한 망신을 그 이상으로 갚아주고 싶은 모양이다.
‘진심이라면 조금 추잡한데….’
그 이름 높은 검귀가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기에 속이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라온이 피나도록 입술을 꽉 깨물며 제천검을 말아쥐었다.
‘지금까지의 검으로는 안 돼.’
여태까지 익히고, 배우고, 만들었던 그 어떤 검술로도 검귀의 검을 막을 수는 없다.
‘기존의 경지로 안 된다면….’
더 나아가면 돼.
검귀의 검을 눈에 담으며 불의 고리를 극성으로 운용했다.
치이이잉!
고리의 공명이 아직 다 열리지 않은 상단전을 자극한다. 뇌리가 타버릴 것처럼 달아오르며 새로운 시야가 열렸다.
느리게 내려오는 검귀의 검이 오히려 빠르게 보이며 그 안에 깃든 검술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이 검은….’
무스턴이 보여주었던 것과 같은 검술이지만, 완성도가 차원이 달랐다.
수많은 검술 묘리를 담은 만검의 위용이 세상을 향해 포효하고 있었다.
완성된 만검 뒤로 보이는 검귀의 눈동자는 건조했다. 벌레를 짓눌러 죽이는 듯 감흥 없는 표정이었다.
저 검의 정체를 알고, 무시를 담은 검귀의 눈빛을 보자 이대로 무너지고 싶지 않았다.
우우우웅!
일곱 개의 불의 고리가 하나처럼 응집되며 몸에 깃든 마나가 자연으로 화한 듯 온 세상의 기운이 그대로 느껴졌다.
빠르고, 느리고, 무겁고, 가볍고, 강맹하고, 부드럽고, 유연하고, 굳건하고, 다채롭고, 환상적인 검귀의 검.
상반되어 어우러질 수 없는 검술 묘리들이 저 하나의 검에 응집되어 있었다.
‘처음이라면 절대 막지 못했을 거야. 하지만….’
난 저보다 대단한 검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봤어.
흐름이 다르지만, 세상의 모든 무리을 하나로 엮은 무인의 검을 등 뒤에서 본 적 있었다.
글렌 지그하르트.
그의 등을 본 대가는 비싸다.
북멸왕의 검을 보았기에 정면에서 내려서는 만검을 보고도 굽히지 않고, 이를 드러낼 수 있었다.
나아간다.
한 발 그리고 두 발.
백혈교주와 타천을 일검에 밀어냈던 초월자의 검을 뇌리에 그렸다.
극한으로 회전하는 불의 고리가 깨질 것처럼 비틀리며 거대한 울림을 일으켰다.
심상의 세계.
검의 새싹만이 가득했던 그 백색 공간에 천천히 검의 줄기가 돋아난다.
뇌리가 바싹 타버릴 듯한 통증을 즐기며 제천검을 고쳐잡았다.
고오오오!
만화공의 열기와 글래시아의 냉기가 동시에 운용하며 왼발을 내디뎠다.
쿠우웅!
만근의 무게가 실린 족적이 대련장에 거대한 균열을 일으켰다.
그 웅장하기 그지없는 힘을 허리에 이어받으며 그간 쌓아 올린 무학들을 떠올렸다.
모든 것을 담을 수는 없어.
무스턴이 보여주지 않았던가. 응집시키지 못한 검은 하나만도 못하다는 것을.
지금까지 끝없이 단련해온 검술만을 내 안에 담았다.
빠르고, 강하고, 다채롭고, 정확한 라온 지그하르트의 검이 장대한 휘광과 함께 솟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