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0화
라온이 새롭게 떠오른 메시지를 보고 눈을 달덩이처럼 부릅떴다.
‘나태의 효과가 강화된다고?’
<나태>라는 특성은 잠을 자면서 능력치를 상승시키고, 체력과 오러의 회복 속도까지 높여주는 말도 안 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 사기 특성이 더 성장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끄으으윽!
라스도 나태의 능력이 강화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슬로스! 그 잠탱이 놈을 진즉에 죽였어야 했느니라! 본왕이 놈을 살려둔 게 실수….
‘다른 데 가서 놀아.’
테이블 위에서 난동부리는 라스를 쳐내고 새롭게 떠오른 메시지를 확인했다.
[<나태>의 감정이 30포인트 생성됩니다.]
[특성 <나태>의 능력치 성장 효과와 오러, 체력 회복 능력이 강화됩니다.]
라온이 자신도 모르게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쿵 내리쳤다.
“우웅….”
갑작스러운 소음에 루난이 느릿하게 일어난다. 그녀는 이쪽을 향해 고개를 꾸벅이고서 침대에 누워서 자기 시작했다.
‘쟤는 진짜 뭐지….’
루난은 광풍단에서. 아니, 지그하르트에서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장 의문인 녀석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 다시 메시지를 보려고 할 때 슬로스가 만들어 주었던 검은 꽃팔찌에서 돋아난 기운이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이건….’
하분성에 찾아왔던 슬로스가 두르고 있던 <나태>의 기운이 영혼에 스며드는 게 느껴졌다.
막을 수 있었지만, 라스의 <분노>와 달리 자그마한 악의도 느껴지지 않아서 그대로 놔두었다.
‘이게 나태의 감정인가.’
나른한 기분이 든다. 주말 오후 따사로운 햇살이 쏟아지는 침대에 누워서 낮잠을 청하는 기분이었다.
‘나쁘지 않군.’
<분노>와 달리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 정도라면 불의 고리를 운용하지 않고, 현재 가진 영혼의 격으로 가볍게 짓누를 수 있을 정도였다.
‘거기다….’
<나태>를 받는다고 몸을 빼앗길 일은 없으니까.
슬로스가 라스처럼 영혼이 붙어 있는 게 아니기에 <나태>의 감정 수치가 높아진다고 몸을 빼앗길 일이 없다.
이 능력을 제대로 이용만 하면 그만이다.
‘이 정도면 성장 속도가 2배는 빨라지겠어.’
나태의 효과를 계산해보니, 능력치 성장 효과는 이전에 비해 2배, 오러와 체력 회복 속도는 이전에 비해 3배는 빨라졌다.
이 상태라면 연공을 하지 않고, 잠만 자도 며칠 안으로 오러를 모두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제길….
라스는 나태의 효과가 올라간 것을 보고 난 후 더욱더 얼굴이 붉어졌다. 딸기 맛 솜사탕이었다.
-본왕이 육체를 가지는 대로 슬로스 그 호구를 죽이러 갈 것이니라!
‘…….’
라온은 부들부들 떠는 라스를 보며 짧게 혀를 찼다.
호구왕은 너잖아.
누구보다 강력한 호구의 기운을 타고난 주제에 다른 사람을 욕하는 라스에게 헛웃음이 나왔다.
‘나도 한 번 가보기는 해야 하는데.’
-네, 네놈이 그 잠탱이에게 왜 간다는 것이냐!
라스는 뭔가 불안한 듯 입술을 떨었다.
‘나태의 감정을 얻었으니까. 어떻게 사용하는지 물어봐야지.’
라온이 검은 꽃팔찌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자는 게 다가 아닐 테니까.’
라스와 비슷한 급 마왕의 감정이니, 잠을 자는 효과 말고 다른 능력도 있을 것이다.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슬로스를 찾아가 물어보는 게 옳았다.
-가, 갈 필요 없느니라.
라스가 검은 꽃팔찌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 잠탱이의 능력은 별거 없느니라!
녀석은 가도 마음에 안 들 거라며 살짝 떨리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유아 때문이라도 들려야 하니까.’
오랜만에 유아에게 할아버지와 지낼 시간을 주기 위해서 하분성에 갈 생각이었으니, 겸사겸사 다녀올 생각이었다.
-끄으윽! 흑우 슬로스!
라스는 막기 힘들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다시 슬로스의 욕을 하기 시작했다.
-절대 용서 안 할 것이니라!
‘마음대로 하셔.’
라온은 피식 웃으며 이마를 가린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건 그렇고….’
새로운 능력을 모두 확인하고 나니, 조금 전 웬디가 말해준 손님이 떠올랐다.
‘검귀 렉타르….’
그와는 나름 인연이 있지.
하분성에서 활약한 뒤 처음으로 얻은 이명이 하분성의 검귀 혹은 소검귀였기에 그와 인연이 닿아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일까.’
오대 검수의 수좌인 검귀의 무력이 대륙십천에 닿는다는 말은 들었지만, 실제로 본 적이 없어서 진짜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다.
검의 귀신이라는 그의 검술을 직접 느껴보고 싶었다.
-검귀고, 마귀고 됐으니, 약속이나 지켜라.
라스가 통통한 손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약속? 무슨 약속?’
-벌써 잊은 것이냐? 본왕이 원하는 음식을 모두 먹어주기로 하지 않았느냐.
‘아, 그거.’
라온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아공간 주머니에서 나딘 빵을 꺼냈다.
‘그럼 이 나딘 빵으로….’
-무, 무슨 짓이냐!
라스는 나딘 빵을 보자마자, 발작하듯 몸을 떨었다.
-당장 그 흉악한 거 치우거라!
녀석은 흉기를 본 것처럼 비명을 질렀다.
‘싫은데?’
-이 추잡한 놈! 약속해놓고 지키지 않는 것이냐!
‘네가 그 약속에 대해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게 있는데….
-무슨 헛소리냐! 본왕은 네놈이 한 말을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모두 기억하고 있느니라!
‘그럼 한 번 읊어봐.’
-좋다!
라스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아크 리치와 싸우기 전 이루어졌던 거래의 내용을 말했다.
-네놈은 ‘전쟁이 끝나고서만 아니라, 여기서 떠난 뒤에 가문에 돌아갈 때까지 먹고 싶은 거 다 먹을게.’라고 말하고, 아이스크림 소녀가 말한 아이스크림 신제품까지 먹겠다고 했느니라!
‘그 말 조금 이상하지 않아?’
-흥! 안 속는다!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하는 것이냐!
녀석은 맹수처럼 이쪽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먹고 싶은 거 다 먹을게.’처럼 간단한 문장에 무슨 이상한 점이 있다고…어?
라스는 말을 되짚다가 우뚝 멈춰 섰다. 이제야 그 거래의 이상함을 눈치챈 것 같았다.
‘이제 알았나 보네. 그 말에는 <누가> 먹는지가 없어.’
라온이 부르르 떠는 라스를 보며 입매를 말아 올렸다. 먹겠다고 말을 하기는 했지만, 그곳에 라스의 이름은 존재하지 않았다.
‘즉,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먹으면 되지. 이 나딘 빵처럼.’
-이, 이런 잡스러운 수를 쓰다니!
‘치사한 짓을 한 건 네가 먼저야.’
먼저 약속해놓고, 위급한 순간에 거래 내용을 바꾼 녀석이 할 말은 절대 아니었다.
치사한 수법에 더러운 수법으로 대응했을 뿐이라 양심의 가책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나한테 덤비려면 구슬 아이스크림 100년은 더 먹고 와라.’
-미, 미안하다! 본왕이 잘못했느니라!
라스가 테이블 위에 배를 깔고 누워서 두 손을 모았다.
-제발! 나딘 빵만큼은 참아다오!
녀석은 다시는 그런 흥정을 하지 않을 테니, 나딘 빵은 먹지 말아 달라고 빌었다.
‘응. 싫어.’
라온이 나딘 빵을 들어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돌아갈 때까지 매일매일 나딘 빵이야.’
물론 그럴 생각은 없다. 라스도 고생했으니, 내일은 녀석이 먹고 싶은 음식으로 배를 채울 생각이다. 대신 지금은 확실하게 기강을 잡아놔야 한다.
-안 돼애애애애애애!
라온은 라스의 비명을 들으며 고무 맛이 가득한 나딘 빵을 씹었다.
앞으로 처신 잘하라고.
* * *
라온이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눈을 떴다. 조금 나른하기는 하지만 어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몸 상태가 좋아졌다.
‘이게 진짜 나태의 힘인가.’
강화된 나태의 효과 덕분에 오러와 체력이 회복되는 속도와 능력치 상승효과가 훨씬 좋아졌다.
이제는 정말 잠만 자도 강해진다고 말해도 될 것 같았다.
‘라스는 아직 기절이네.’
라스는 나딘 빵의 고무 맛과 사기 거래의 충격이 컸는지 아직도 눈을 뒤집은 채 기절한 상태였다.
“음?”
녀석을 툭 치고 일어나려는데, 이불에 무언가가 걸렸다. 고개를 돌리니, 루난이 어제와 같은 자세로 침대에 엎드려서 자고 있었다.
‘뭐지?’
데자뷰인가?
어제 다른 방에 던져놓았는데, 왜 다시 이곳까지 와서 불편한 자세로 자고 있는지 모르겠다.
‘신기한 녀석이라니까.’
라온이 피식 웃으며 일어나는데, 문이 열리고 도리안이 들어왔다.
“어? 데자뷰?”
그는 몸을 일으키는 라온과 침대에 팔을 걸치고 자는 루난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거든.”
라온이 가볍게 손을 저었다.
“이제 몸은 좀 괜찮으세요?”
“그래. 훨씬 나아졌어.”
배도 채웠고, 오러와 체력, 정신력도 많이 회복되었다.
부상은 어쩔 수 없지만, 당장 전투를 치러도 될 정도로 몸 상태가 가벼웠다.
“그럼 함께 가실래요? 지금 단주님이 손님이 복귀 중이라고 하던데.”
“손님이면 렉타르 님?”
“어? 아시네요?”
도리안은 듣지도 않고 나가놓고 어떻게 알았냐고 중얼거렸다.
“웬디 님께 들었어.”
라온이 몸을 일으키고, 겉옷을 걸쳤다.
“가자. 도움을 받았으니, 인사는 해야겠지.”
간부들을 잡아 온 감사 인사도 해야 하지만, 그가 얼마나 강한 무인인지 한번 느껴보고 싶었다.
도리안을 따라 회복실을 벗어나 서쪽 성문으로 향하는데, 주변으로 아리안 가문의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은인?”
“일어나셨군요!”
“몸은 괜찮으십니까?”
“아리안을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가솔들은 정중하게 손을 모은 채 고개를 숙이며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주어서 고맙다고 외쳤다.
“가문의 쓰레기들을 처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온 님의 결단 덕분에 저희도 마음을 확실하게 다잡았습니다!”
“평생 지그하르트와 광풍단을 따르겠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어젯밤에 이루어진 피의 처형식에 대한 소문도 퍼졌는지 위겐과 간부들을 처치해서 고맙다고 소리치는 사람들도 많았다.
‘예상대로군.’
전쟁 전에는 몰락한 간부들을 그리워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놈들이 가문을 버리고 도망치면서 이미지가 완전히 망가졌다.
많은 사람 중에 이전 간부를 찾는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웬디 님이 움직이기 편해지겠어.’
이전 가주와 간부들의 평판이 바닥을 찍고 있으니, 새롭게 가주가 된 웬디는 적당히만 일해도 이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라온은 사람들의 인사를 받아주면서 서쪽 성문으로 향했다. 성벽이 보일 때쯤 성문이 열리고, 광풍단과 레인저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뭐야? 벌써 일어났어?”
버렌이 손을 들어 올리며 반가운 웃음을 흘렸다.
“싸우기만 하면 쓰러지던데 더 누워 있지?”
마르타는 걱정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미소를 흘렸다.
“부단주님! 괜찮으십니까?”
“너무 빨리 일어난 거 아니에요?”
“더 쉬시지 뭐하러 나오셨어요.”
“이제 괜찮아.”
라온이 광풍단과 눈을 마주치며 괜찮으니 걱정말라고 손짓을 했다.
“라온! 짜샤! 네가 기절해서 내가 저 먼 곳까지 다녀왔잖아!”
리메르가 좀비처럼 몸을 축 늘어뜨린 채 다가왔다. 유일하게 걱정이 아니라, 귀찮음을 피력하는 그의 모습에 한숨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왜 단주님이 나가신 겁니까?”
“마르타가 멱살을 쥐고 끌고 갔어. 손님이라고는 하지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면서.”
그가 기막을 펼쳐 소리를 죽인 뒤 뒤편을 가리켰다.
라온은 그 손짓을 따라 시선을 들어 올렸다.
산책 나온 듯 가벼운 백의를 입은 백발노인이 느릿하게 걸어온다. 키가 크고, 기골은 장대하며, 눈빛은 칼날을 갈아놓은 듯 날카로웠다.
‘저자가 검귀인가….’
검귀라는 서늘한 이명처럼 예리한 기운을 퍼뜨릴 줄 알았는데, 그에게선 어떠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기세 자체를 감지하지 못할 정도였나….’
-네 수준으로 감지하기는 힘들 것이니라.
라스가 검귀를 위아래로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구나. 이 시대에는 적당히 강한 인간들이 많아서 좋군.
‘그 정도야?’
세상을 무시하는 라스의 인정을 받다니, 아무래도 대륙십천에 칼이 닿는다는 소문은 진짜인 것 같았다.
“흐음.”
검귀도 이쪽을 발견했는지 시선을 고정한 채 다가왔다.
‘뭔가 신기하네.’
외모 자체는 선풍도골의 노인처럼 허허로운데, 눈빛은 칼날을 박아놓은 듯 섬뜩하다. 도인과 악귀가 한 몸에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검귀 렉타르 님을 뵙습니다.”
라온은 먼저 검귀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가문을 버리고 도망친 탈영병들을 잡아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별일 아니었네.”
검귀가 손을 저었다. 북해의 바람이 부는 듯한 차가운 음성. 목소리만큼은 예상과 비슷했다.
“지독한 죽음의 기운을 느끼고 이곳으로 오는 도중 산적 같은 놈들이 있어서 길 안내를 시켰을 뿐이야.”
그는 원래 그들을 죽이려고 했지만, 본인들이 아리안 가문의 간부라고 말해서 살려 데려왔다고 말했다.
“자네가 소검귀라 불리던 라온 지그하르트가 맞나?”
“예. 맞습니다.”
검귀는 백검룡이 아니라, 하분성에 있을 적에 얻은 이명을 말했다. 그도 이전부터 자신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때부터 궁금했네. 대체 어떤 검사가 내 이명을 얻었는지. 지금 자네가 만든 검흔을 살펴보고 오는데….”
검흔에 대해 말하며 한 발 더 다가오던 그가 갑자기 멈춰 섰다.
“음?”
검귀는 못 볼 것을 본 듯 부리부리한 눈동자를 떨며 라온의 얼굴만을 노려보았다.
“렉타르 님?”
라온은 인상을 찌푸렸다가 펴는 검귀를 보며 눈매를 가늘게 떴다.
‘뭐지?’
검의 귀신이라는 이명답게 검술을 물어볼 줄 알았는데, 그는 어떠한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의 얼굴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검귀 님?”
“아. 미안하네.”
검귀가 살짝 고개를 젓고서 다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음, 다음에 보도록 하지.”
그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고개를 젓고서 떠나갔다.
“사, 사부님!”
백의를 입은 청년은 검귀의 제자인지 사부라고 부르며 그를 따라갔다.
라온은 갑자기 기운이 처진 듯한 검귀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배가 고프겠지.
‘…….’
* * *
그날 저녁.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던 라온이 깨어났기에 아리안 가문은 미뤄두었던 축제를 열었다.
성 전체에 화려한 빛이 반짝이고, 지쳐 있던 사람들이 입가에는 더 찬란한 미소가 피어났다.
라온은 서쪽 성벽에 서서 환호와 웃음을 터트리는 사람들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게 가문이지.’
지그하르트에서 살아가게 되며 깨달은 점이 하나 있다.
‘가문은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는 곳이라는 것.’
가문의 식솔이 위기에 처했다면 어디에 있더라도 그들을 구해야 하고, 혹여나 죽임을 당한다면 그 누구라고 해도 복수를 해주어야 한다.
아리안 가문은 지금까지 그런 가문이 되지 못했지만, 웬디가 새로운 가주가 되며 식솔 전체를 지킬 수 있는 거대한 벽이 되어 줄 것이다.
‘나도 그래야 하고.’
아직도 지그하르트의 가주가 될 생각은 없지만, 광풍단 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나도 끝까지 지켜낼 것이다.
-그건 위에 서는 자가 가져야 할 당연한 마음가짐이니라.
라스가 사람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계에도 많은 가문과 성이 있지만, 끝까지 남는 것은 군주나 가주가 밑의 마족들과 생사를 함께 하는 곳뿐이니라.
녀석은 마족들도 하는 일을 인간들이 제대로 하지 못한다며 비웃음을 흘렸다.
-물론 아닌 놈들도 있지만.
‘아닌 놈?’
-부하 따위 신경도 쓰지 않고, 본인의 무력만 믿는데 잘나가는 놈도 있긴 하느니라.
‘슬로스 같은?’
-그 호구 놈은 그냥 게으름뱅이이니라. 그놈 말고 다른 마왕 중에…응?
라스는 다른 마왕의 이름을 말하려다 말고 아래를 보며 코를 킁킁거렸다.
-내, 냄새가 난다!
‘무슨 냄새?’
-농축되어있는 과즙이 열기에 녹아내린 달큰한 향이니라!
녀석은 한창 축제가 진행 중인 거리의 중앙을 노려보며 동그란 손을 들어 올렸다.
-저곳이다! 저곳에서 블루베리가 박힌 파이를 팔고 있느니라!
‘흐음….’
라온이 입맛을 다시며 품 안에 있는 아공간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오늘 저녁도 나딘 빵으로 때우려 했는데.’
-제발! 그만! 그것만큼은 참아다오!
라스는 제발 그 고무 좀 그만 먹으라고 빌기 시작했다.
‘글쎄….’
“라온.”
조금만 더 놀리려고 할 때 밑에서 루난이 손을 흔들었다.
“아이스크림 많아.”
그녀의 몇 가지 아이스크림이 담긴 그릇을 들어 올리며 발을 콩콩 굴렀다.
“거기서 똥폼 잡고 뭐하냐?”
마르타도 왜 거기에서 청승맞게 구냐며 콧잔등을 찌푸렸다.
“하여튼 분위기 못 맞춘다니까.”
버렌은 맥주잔을 든 채로 피식 웃었다.
“여기 자리도 준비했어요!”
도리안은 배 주머니에서 대형 테이블과 의자를 내려놓고 손짓을 했다.
-저, 저렇게 말하지 않느냐.
라스가 어색하게 웃으며 밑을 향해 턱짓했다.
라온이 물고기처럼 팔딱팔딱 뛰는 라스의 눈동자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정신 좀 차렸겠지.’
나딘 빵이라는 채찍으로 참교육을 했으니, 이제 당근으로 맛난 음식을 줘도 될 것 같았다.
성벽 아래로 내려가려고 할 때 다시 진흙이 차오른 늪지에서 무언가가 불쑥 올라왔다. 갑각류처럼 단단해 보이는 등껍질과 길쭉한 주둥이. 늪지 악어였다.
‘악어… 엉?’
라온이 입을 떡 벌렸다. 악어가 이쪽을 보며 짧뚱한 앞발을 흔들며 기괴한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과, 광녀다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