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6화
하늘이 검게 물들어 있어 달은커녕 작은 별빛 하나 보이지 않았고, 땅에서는 개울처럼 얕은 황록색 늪이 찰랑거렸다.
후욱하고 숨을 들이켜자, 조금 전과는 다른 공기가 느껴졌다.
죽음의 기운으로 가득 찬 텁텁하고 끈적한 공기가 아니라, 선선하면서도, 따스한 열기가 담긴 기분 좋은 바람이었다.
마음을 가라앉히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자, 한 남자의 등이 보인다. 은색 갑옷과 대비되는 찬란한 금발이 인상적인 검사. 지그하르트의 초대 가주였다.
역시 저 사람의 흔적이었나.
기둥에 그어진 검흔을 보자마자,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예상했던 대로 초대 가주가 남긴 검흔이었던 모양이다.
조금 젊은데?
이전에 보았을 때와 달리 짧게 자른 머리가 인상적이다. 얼굴은 여전히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던전이나, 중무전의 동굴에서 보았을 때보다 어려 보이는 느낌이다.
지그하르트의 선조를 확인한 후 그 옆을 보았다. 황색 제복을 입은 청발의 검사가 양손으로 검을 잡고 있었다.
그럼 이쪽이 아리안 가문의 초대 가주겠군.
웬디 아리안과 같은 바다색 청발에 가느다란 눈매가 비슷하다. 외모가 닮았기에 그녀에게 아리안 가문의 정신이 이어졌을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시선을 하늘로 올렸다.
밤하늘 같은 시꺼먼 로브를 두르고, 새까맣게 젖은 구슬이 박힌 지팡이를 들고 있는 아크 리치가 두 사람을 굽어보고 있었다.
놈의 밑에 있는 서른이 넘는 데스나이트와 밴시가 지그하르트 선조와 아리안 선조를 향해 짙은 살기를 드러냈다.
이건 그 상황이군.
주디엘에게 들었던, 지그하르트 가문의 초대 가주와 아리안 가문의 초대 가주가 죽음의 늪에서 일어난 아크 리치를 죽였다는 바로 그 전투였다.
아크 리치가 지팡이를 들어 올리자, 하늘과 땅 위로 수없이 많은 흑마법진이 돋아난다. 마법진에서 튀어나온 거뭇한 마법들이 두 무인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지그하르트 가문의 선조는 붉은 족적을 남기는 보법을 밟으며 나아가 벼락처럼 검을 뽑아냈다. 칼날 위로 타오른 화염이 데스나이트와 밴시를 가볍게 불태웠다.
아리안 가문의 선조는 녹색 검으로 푸른 폭풍을 불러와 아크 리치가 일으킨 마법과 마법진을 갈라버렸다.
아크 리치가 당황하며 뒤로 물러섰다. 놈의 등이 죽음의 기운이 타오르는 검은 신전에 닿았다.
내가 본 기둥은 저 신전의 잔해였군.
늪에 박혀 있던 세 개의 기둥이 너무 커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아크 리치가 마신을 모셨던 신전의 기둥이었던 것 같다.
아크 리치는 지팡이와 신전의 힘을 이용하여 데스나이트를 빠르게 재소환하고, 더 강한 흑마법을 쏘아냈지만, 두 무인은 몸이 풀린 듯 조금 전보다 더 빠르게 언데드와 마법을 지워버렸다.
지그하르트 선조는 마지막으로 남은 데스나이트를 베자마자, 늪지를 부수며 도약해 아크 리치에게 쇄도했다.
아크 리치가 망혼귀처럼 죽음의 기운을 그대로 운용하여 검은 방어막을 만들었지만, 지그하르트 선조의 검에 깃든 불꽃을 막지 못하고 종잇장처럼 갈라졌다.
지그하르트의 선조는 멈추지 않고 나아가 아크 리치의 가슴을 갈랐고, 아리안의 선조는 푸른 바람이 실린 강기를 쏘아내 아크 리치의 목을 베었다.
완벽한 승리. 두 무인은 어떠한 대화나, 몸짓도 없이 정교한 합격술을 이뤄냈다. 수없이 두드려준 덕분에 눈빛만 봐도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는 광풍단을 보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지그하르트의 선조와 아리안의 선조는 검을 내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목과 가슴이 갈라졌음에도 허공에 떠 있는 아크 리치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크 리치는 지팡이의 구슬과 신전에 깃든 죽음의 기운을 끌어모아 본인의 육체를 매개체로 거대한 사기의 구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자폭. 이곳에 있는 모든 사기를 터트려서라도 두 무인을 죽이겠다는 의지였다.
지그하르트 가문의 선조가 구체를 향해 검을 내지른다. 검신의 중심에서 뻗어나가는 화염의 숨결 만화공 염룡결이다. 다만 화룡의 포효도 사기가 응집된 구체를 뚫지 못하고 허무하게 흩어져 버렸다.
아리안 가문의 선조도 낫을 형상화한 예리한 바람의 강기를 연달아 쏘아냈지만, 점점 더 커지는 사기의 구체를 가르지 못했다.
아크 리치의 떨어진 목이 낄낄거리며 두 사람을 비웃었다.
지그하르트 가문의 선조와 아리안 가문의 선조가 처음으로 대화를 나누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안 가문의 선조가 두 손으로 검을 잡고, 주변에 퍼진 바람을 끌어들인다. 검로를 따라 나아가는 바람이 점점 짙어지며 죽음의 기운을 가르고, 검은 구체로 향하는 길을 열었다.
지그하르트 가문의 선조는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듯 중단세를 취하며 보법을 밟았다. 설원처럼 새하얀 검신에서 매끄러운 적색 강기가 타오른다.
그가 왼발로 대지를 짓누르며 검을 앞으로 내질렀다. 하나의 칼날에서 수십 개의 붉은 빛무리가 치솟아 검은 구체를 찌른다.
삼십육. 일검에 서른여섯 개의 방위를 제압하는 불길이 검은 구체를 휘감았다.
빠지지지직!
검은 구체가 반항하듯 어떻게든 몸집을 부풀리려고 했지만, 지그하르트의 선조가 만들어낸 서른여섯 개의 불길은 뒤에서 전해지는 바다색 바람의 힘을 받고 검은 구체를 짓눌렀다.
쿠오아아아아앙!
쇠사슬에 휘감긴 호박이 찌그러지는 것처럼 검은 구체는 화염과 바람의 힘에 뭉개지다가 허공에서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뒤편으로 뻗어나간 충격파가 죽음의 신전마저 무너뜨렸다.
지그하르트의 선조는 추락하는 아크 리치를 향해 사선으로 검을 그어내렸다. 놈은 비명조차 남기지 못하고 재가 되어 사그러들었다.
그가 살짝 고개를 돌린다. 화염이 타오르는 듯한 붉은 눈동자를 마주하자, 머리가 타버리는 듯한 통증과 함께 조금 전에 보았던 검술의 묘리가 그려졌다.
역시 만화공의 검술이었어.
다만 그 검술 하나만 얻은 건 아니다. 그 검로를 이룰 수 있는 검술 묘리들이 한층 더 성장했단는 게 피부에 와닿았다.
지그하르트 가문의 선조가 살짝 고개를 끄덕인다. 이쪽을 보고 하는 게 아니라, 아리안 가문의 선조에게 하는 몸짓이겠지만, 나에게 할 수 있는지를 묻는 듯했다.
물론입니다.
할 수 있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조금 전보다 거뭇한 어둠이 눈을 비추고, 귓가에 왱왱거리는 소음이 들려왔다.
“…온.”
“라온!”
눈을 깜빡이자, 리메르가 손짓하는 게 보였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 거야! 한시가 급하다고!”
그는 더 늦기 전에 빨리 처리해야 한다며 검은 구체를 가리켰다.
“으음….”
라온이 리메르의 손을 따라 고개를 들어 올렸다. 무아지경에 빠진 지 10초도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사기의 구체는 어느새 하늘을 가릴 것처럼 부풀어 있었다.
-네놈.
입술을 깨물 때 라스가 튀어나와 얼굴을 들이밀었다.
-또 어디 갔다 온 것이냐!
‘뭐?’
-어디서 무얼 처먹었길래 또 강해져서 왔냐고 묻는 것이니라!
라스가 라온을 보며 이를 바득 갈았다.
‘대체 이놈은 뭐냔 말이다!’
쉴새 없이 무아지경에 빠지는 것도 짜증 나는데, 가끔은 영혼 채로 사라졌다가 더 강한 격을 일으키며 나타난다. 이 망할 애송이 10초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성장해서 돌아왔다.
-또 어떤 호구가 퍼주는 건데!
‘호구라….’
라온이 손으로 하늘 위를 갈키며 옅게 웃었다.
‘하늘 위에 계신 분이 내가 이쁜지 자꾸 퍼주시네.’
-서, 설마 네놈 천계의 위선자들까지 벗겨 먹고 잇는 것이냐! 그건….
‘그건?’
-좋은 일인데?
라스는 갑자기 그런 놈들은 탈탈 털어먹어도 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
예상과는 다른 라스의 반응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때 리메르가 다가왔다.
“체임버 님이 주신 반지 있지?”
“네.”
“그거 쓰자. 지금은 그 방법이…아니. 와 있을 것도 같은데.”
리메르는 반지를 가리키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어이! 할 일 없는 영감 있죠! 빨리 나와서 도와주쇼!”
그가 오러를 잔뜩 실은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지만, 누구도 나타나지 않았다.
“뭐 하시는 겁니까?”
“아씨! 분명 왔다고 생각했는데, 어쩔 수 없네. 반지를….”
“됐습니다. 제가 처리 할 테니, 도와만 주시죠.”
라온은 고개를 저으며 숨을 고르며 불의 고리를 회전시켰다. 심장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고리의 울림이 정신을 일깨웠다.
“네, 네가 처리한다고?
“예. 제가 벨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도움이 좀 필요해요.”
이곳을 지켜보고 있는 웬디 아리안에게 손짓을 했다.
“웬디 님!”
“엑?”
웬디는 본인이 불릴 줄은 생각도 못했는지 화들짝 놀라서 눈을 토끼처럼 떴다.
“이쪽으로 와주십시오!”
“아, 네!”
그녀는 곧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임에도 머뭇거리지 않고 이쪽으로 달려왔다.
“혹시 아리안 가문의 검술 중에 바람으로 기운 사이를 가르는 무학이 있습니까?”
“바, 바람의 길이라는 초식이 있어요. 근데 그걸 라온 님이 어떻게….”
그녀는 공격형 검술도 아니고, 라온 앞에서 쓴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알았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검술로 저 사기의 구체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십시오. 그리고….”
라온이 리메르를 향해 손짓했다.
“단주님은 웬디 님을 도와주세요. 충분히 하실 수 있을 겁니다.”
“으음….”
리메르가 턱으로 흘러내리는 땀을 손등을 훔치며 입맛을 다셨다.
“나 지금 좀 힘든데….”
그는 너무 싸워서 지쳤다며 고개를 저었다.
“얼마나 싸웠다고 벌써 지쳐서 강아지처럼 헥헥대시는 겁니까. 돌아가면 체력 수련 좀 해야겠네요.”
“에에? 검계현신이 얼마나 많은 체력과 오러를….”
“전 모르겠으니까. 이것도 못하실 거면 돌아가서 애들이랑 함께 절벽 오를 준비나 하세요.”
“끄으윽!”
라온이 리메르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자, 그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지독한 놈….”
“절 이렇게 키운 건 단주님입니다.”
그는 손을 휘젓고 앞으로 나아가 검은 구체 앞에 섰다.
“음….”
웬디는 라온의 등을 보며 입술을 떨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나 따위가?
라온이 부탁한다고 말했지만, 제대로 바람의 길을 열 자신이 없었다. 수련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한 끗만 실수해도 모두가 죽을지도 모르는 이런 중요한 순간에 나서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못할 거 같아….’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심장이 거칠게 두방망이질 친다. 바람의 길은커녕 어떻게 검을 휘두르는지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머리가 텅 빈 기분이다.
라온에게 못할 것 같다고 말하려 할 때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천 년 전. 이 자리에서 나와 당신의 선조가 어둠을 갈랐습니다. 이제 우리 차례에요.”
그는 긴장한 마음을 모두 알고 있다는 듯 부드럽게 웃었다.
“웬디 아리안. 당신은 아리안 가문에서 선조의 의지를 이은 유일한 사람입니다. 할 수 있어요.”
라온은 웬디의 대답조차 듣지 않고, 다시 앞을 보았다. 흔들리지 않는 등이 신뢰를 말하고 있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웬디의 떨림이 조금씩 가라앉을 때 옆으로 리메르가 다가왔다.
“저 건방진 부하 놈이 할 수 있다고 했으면 무조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부담가지지 말고, 평소대로만 해보세요.”
그는 긴장을 풀라며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아….”
백검룡이라 불리는 희대의 천재가 자신을 믿어준다고 생각하니, 가슴을 옥죄이던 두꺼운 밧줄이 끊어진 듯 마음이 편해졌다. 모든 떨림이 가라앉지는 않았지만, 실수할 것 같은 느낌은 확연히 가라앉았다.
“시, 시작할게요.”
웬디는 입술을 꾹 깨물며 발검하듯 검을 힘차게 내질렀다. 은빛 칼날에서 피어난 광풍이 검은 구체로 향하는 바다색 길을 만들어냈다.
찌지직!
하지만 웬디의 부족한 무력 때문에 그 길은 완성되지 않고, 뭉개질 것처럼 뒤틀렸다. 푸른 바람이 죽음의 기운에 밀려나려 할 때 녹풍이 불어와 그 뒤를 받쳤다.
후우우우웅!
리메르다. 그가 이를 악물며 녹풍을 휘감은 검으로 사기의 흐름을 갈랐다. 검신에 깃든 가느다란 녹풍이 용오름처럼 치솟으며 웬디가 일으킨 바람의 길을 파고들었다.
치이이잉!
두 종류의 바람이 꼬이며 검은 구체로 향하는 완만한 바람의 길을 열었다.
“단주님은 오랜 누워 계셨으니, 등골 좀 빠져도 됩니다.”
라온은 검은 구체로 다가가며 눈을 내리감았다. 머릿속에 그리는 건 조금 전에 보았던 지그하르트 초대 가주의 검. 서른여섯 개의 방위를 동시에 점하는 절대의 무학이었다.
‘내가 그대로 따라하기는 무리야.’
오늘 본 가주도 지금의 나보다 강하니까.
아니, 강하고 약하고를 떠나서 오늘 처음 본 절대의 무학을 어떠한 연습도 없이 완벽하게 행하는 건 불의 고리가 있어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기에….’
너도 도와주어야 해.
왼손의 진혼검을 고쳐 잡으며 미소를 지었다.
우우우웅!
라온은 진혼검의 기분 좋은 울음을 들으며 검은 구체 앞에 섰다.
“건방진 부하 놈아! 지금부터 진짜로 간다!”
“아아아아!”
리메르와 웬디의 기합과 함께 죽음의 기운이 완벽하게 밀려나며 검은 구체로 향하는 에메랄드빛 바람의 길이 열렸다.
투우웅!
라온이 대지가 울릴 정도의 진각을 밟으며 단전에 남아 있는 만화공의 기운을 모조리 끌어냈다. 마나회로가 타버릴 듯한 격통을 참으며 무아지경 속에서 보았던 초대 가주의 기수식을 취했다.
과함도, 모자람도 없는 완벽한 중단세. 단전 앞에 놓아둔 두 자루의 검을 동시에 쏘아냈다. 빛살이 되어 나아간 제천검과 진혼검 위로 불꽃의 호흡이 깃든다.
만화공 백화.
적섬삼십육결.
칼날 위를 적신 매끄러운 불길이 각기 열여덟 개씩 뻗어나가 사기가 응집된 구체를 휘감았다.
쿠구구구국!
밤하늘을 달리는 혜성처럼 서른여섯 개의 불꽃 줄기가 검은 구체를 둘러싸며 어마어마한 압력을 일으켰다.
찌지지직!
하지만 검은 구체에 담겨 있는 사기가 워낙에 거대하여 쉽게 녹아내리지 않았다.
‘아직이야.’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다. 심장과 단전이 아려올 정도로 만화공과 불의 고리를 운용하며 남은 기운을 모조리 쏟아부었다.
뿌드드득!
코와 입에서 피가 흐르고, 뼈와 피부가 으깨질 것처럼 따끔거렸지만 입술을 깨물며 한발 더 나아갔다.
화아아아악!
웬디 아리안과 리메르가 일으키는 바람도 한층 더 강해진다. 등을 밀어주는 따스한 바람이었다.
불을 키우는 건 바람.
붉은 화염과 푸른 바람이 톱니바퀴 맞물리듯 어우러지며 적섬삼십육결의 피워낸 불길의 선이 두껍게 돋아났다.
쿠구구구구궁!
거대한 불꽃이 사기의 구체를 짓누르며 그 안에 깃든 죽음의 기운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
라온이 근육과 오러를 마지막 한 톨까지 짜내며 검은 구체를 최대한 녹여버린 뒤 하늘 위로 내던졌다.
쿠와아아아아앙!
검은 기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아진 불꽃의 구체가 터지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하아아….”
라온은 벚꽃처럼 쏟아지는 검붉은 기운들을 보고 나서야 검을 내렸다.
‘끝났다….’
모든 힘을 다 쏟아부은 덕분에 구체를 말끔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거대한 힘의 여파 때문인지 깨달음을 주었던 세 개의 기둥이 먼지가 되어 바스러졌다.
‘감사합니다.’
지그하르트의 선조와 아리안의 선조를 떠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후우….”
한숨을 쉬고 일어났을 때 리메르가 달려왔다.
“그 검술은 또 뭐야! 아예 처음 보는데?”
그는 또 검술을 만든 거냐며 어깨를 들썩였다.
“감사합니다. 단주님.”
라온은 리메르의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보며 눈을 내리감았다. 건들거리지만, 그도 죽을힘을 다해 도와준 게 분명했다.
“에이, 단주로서 이 정도는 해야지. 대신 이제 정말 힘이 없거든. 네가 날 업고, 아리안 가문까지 가라.”
“아, 그러고 보니, 왜 늦었….”
리메르에게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말하려는데, 시야가 흐릿해진다. 푸른 화면이 보이는 것을 보니, 메시지가 떠오르는 것 같은데 볼 정신이 없었다.
“냐고. 자식아….”
라온은 리메르의 지각을 따지다가 정신을 잃고, 뒤로 넘어갔다.
“헉!”
리메르는 바닥을 뭉개며 달려가 쓰러지던 라온을 붙잡았다.
‘탈진했군.’
라온은 체력과 오러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전부 사용하여 기절한 상태였다.
“수고 많았다.”
리메르가 라온의 등을 부드럽게 두드려주었다. 이젠 잡기 버거울 정도로 큰 제자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네 덕분에 모두가 살았어.”
진심이다. 조금 전 라온이 아니었다면 이곳에 있는 모두가 위험했을 것이다.
녀석은 장담했던 대로 죽음의 기운을 완벽하게 막아냈다. 언제 보아도 믿음직스러운 제자였다.
“네 덕분에 정말 오랜만에 마음껏 검을 휘둘러봤다. 즐겁더구나. 과거로 돌아간 느낌이었어.”
리메르는 따스함을 담은 눈으로 라온에게 작게 목례를 취했다.
“고맙다.”
나의 어린 왕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