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405화 (405/653)
  • 제405화

    지독한 사기 때문에 구름 한 점 없던 죽음의 땅에 바람이 불어오고, 벼락이 쏟아진다.

    리메르는 언데드 몬스터가 가루가 되어 바스러지고, 망혼귀가 기겁하며 물러서는 폭풍 속에서 고요하게 서 있었다.

    라온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검계가 변했어.’

    이전에 리메르가 사용했던 검계의 이름은 <폭풍의 눈>이었다. 일정한 공간을 무풍지대로 만들어 상대의 무력은 약화하고, 본인의 무력은 강화하는 방식의 검계였다.

    하지만 지금 리메르가 사용한 검계는 그와 달랐다. 이름부터가 <바람과 벼락의 노래>였고, 실제로 리메르의 주변에는 광풍이 불어닥치고 뇌전이 마구잡이로 떨어지고 있었다.

    ‘검계라는 건 변할 수 있던 거였나.’

    아니, 변하는 게 맞아.

    리메르는 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각자가 가진 심상의 세계라고 말했다. 그 세계는 본인의 성장과 경험에 따라 변하기에 검계가 바뀌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맞느니라.

    라스가 리메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본왕이 항상 말했듯 모든 무학과 마법, 기예에 있어서 중요한 건 이미지이니라. 저 귀때기의 머릿속 이미지가 변했기에 저 검계도 변한 것이니라.

    녀석은 리메르가 꽤 재밌는 변화를 이뤄냈다며 입매를 살짝 끌어 올렸다.

    리메르는 잘 보라는 듯 가볍게 손짓을 하고서 헬 필그림에게 다가갔다.

    라온은 망혼귀가 더러운 술수를 부리지 못하도록 기감을 끌어 올리며 리메르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크으으으!

    헬 필그림은 지금 상황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 자세를 낮추고, 죽음의 기운을 끌어 올렸다. 놈의 장검 위로 그림자가 타고 오르는 듯한 매끄러운 흑색의 강기가 타올랐다.

    ‘역시 나랑 싸울 때는 진심이 아니었군.’

    지금 헬 필그림이 드러내는 기세는 이전과는 격이 달랐다. 리메르의 검계현신에 위기를 느끼고 가지고 있던 모든 기운을 드러낸 것 같았다.

    “잘 생각했어.”

    리메르가 헬 필그림과 마주 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여유로운 몸짓과 함께 미소를 그렸다.

    “제대로 안 했다간 바로 끝날 테니까.”

    크아아아아!

    헬 필그림은 모욕받았다고 생각했는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검을 내리쳤다.

    쿠구구구!

    얇은 장검임에도 중병을 다루는 듯한 묵직하면서도 강대한 기파가 공간을 에워싸며 떨어져 내리는 찰나 리메르의 모습이 사라졌다.

    빠지지직!

    헬 필그림의 녹색 스파크만 남은 허공을 베었고, 리메르는 어느새 우측으로 이동해 있었다.

    ‘보법에 뇌기와 바람을 담은 건가?’

    보고 있음에도 믿기 힘든 속도. 보법이라기보다 블링크 같은 마법을 사용한 듯한 모습이었다.

    리메르는 왼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비단처럼 풀려나오는 검에 바람과 뇌전이 함께 했다.

    쩌어어엉!

    헬 필그림은 기감을 열어놓은 듯 바로 뒤를 돌며 장검을 들어 올렸지만, 바람과 뇌전이 깃든 검격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하고 뒤로 다섯 걸음이나 밀려났다.

    “아직 멀었어.”

    리메르가 차가운 미소를 그리며 정면으로 돌진했다. 바람이 깃든 칼날로 공간을 긁어 내려가며 헬 필그림의 목을 노렸다.

    크르르르….

    헬 필그림이 거친 숨을 내뱉으며 검은 불길이 타오르는 장검을 내뻗었다.

    치아아아앙!

    창칼처럼 날카로운 리메르의 검과 전투 도끼처럼 묵직한 헬 필그림의 검이 정면에서 맞부딪쳤다.

    콰아아아앙!

    검과 검이 부딪치는데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소리 이후에 폭발하는 충격파가 공간을 휩쓸었다.

    찌지지지직!

    리메르와 헬 필그림이 서로의 목을 향해 검을 밀어내고 있을 때 허공에서 벼락과 바람이 쏟아진다.

    콰르르릉!

    벼락과 바람은 누군가가 조종하는 듯 요동치며 헬 필그림의 어깨와 허리에 내리꽂혔다.

    크르르륵!

    헬 필그림은 당황한 듯 신음을 흘리며 리메르를 밀어붙이던 검을 물리고, 뒤쪽으로 보법을 밟았다.

    빠지지직!

    하지만 벼락과 바람은 헬 필그림을 따라붙으며 거센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

    리메르는 미소를 지은 채 헬 필그림의 좌측으로 쇄도했다. 진각과 함께 뻗어나가는 검이 빛살이 된 듯 번쩍였다.

    쩌어어엉!

    헬 필그림은 사선으로 비틀어져 올라가는 검격으로 리메르를 밀어냈지만, 그 짧은 순간에 떨어진 벼락이 놈의 허벅지를 꿰뚫었다.

    크르르르!

    헬 필그림이 뒤로 훌쩍 물러서며 갑옷을 입듯 전신에 막대한 양의 사기를 둘렀다. 이 공간에 있는 바람과 벼락이 평범한 자연현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제 느낌이 오지?”

    리메르가 손가락을 흔들며 혀를 찼다.

    “이 벼락도, 바람도 모두 내 검과 다를 바가 없어.”

    그는 미소를 지으며 헬 필그림에게 검을 겨누었다.

    “바람과 벼락 속에서 춤추다 죽어라.”

    리메르가 한 줄기 벼락이 되어 나아가 오른 손목을 회전시켰다.

    저물어가는 달빛처럼 꺾여서 떨어지는 칼날이 헬 필그림의 핵이 있는 오른쪽 가슴을 노렸다.

    크르르르!

    헬 필그림은 짐승처럼 으르렁대면서 태산의 무게가 어린 듯한 중검을 밀어냈다.

    쿠와아앙!

    압도적으로 무거운 검격에 리메르는 밀려났지만, 그가 다루는 바람과 뇌전의 칼날은 멈추지 않고 떨어져 내렸다.

    콰르르륵!

    헬 필그림이 만들어낸 사기의 갑옷은 바람과 뇌전을 견뎌냈지만, 아예 충격이 없는 건 아닌지 놈의 육체가 휘청거렸다.

    파지지지직!

    리메르가 물러서며 손짓하자, 벼락과 바람이 더욱 거칠게 헬 필그림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놈의 몸을 보호하는 사기가 지워질 것처럼 출렁였다.

    크어어어어!

    헬 필그림이 견디지 못하고, 괴성을 지르며 달려든다. 놈의 검에 담겨 있는 건 무거움만이 아니다. 패검. 모든 것을 깨부수는 힘이 그 안에 어려 있었다.

    “제법인데?”

    리메르는 이전처럼 가볍게 받아낸 생각을 하지 않고, 바람이 깃든 보법을 밟았다. 그의 몸이 산들바람을 탄 종이처럼 펄럭이며 헬 필그림의 검격을 흘려냈다.

    “이제 내 차례지?”

    그는 회피에서 멈추지 않고 헬 필그림의 오른팔을 향해 뇌전의 기운이 담긴 검을 찔러넣었다.

    캬아아앙!

    헬 필그림이 빠르게 장검을 회수하여 막으려 했지만, 머리 위에서 떨어진 벼락에 놈의 움직임이 일순간 멈췄다.

    리메르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사기의 갑옷을 뚫고 헬 필그림의 팔을 갈랐다.

    치이이익!

    헬 필그림의 갈라진 팔뚝에서 놈을 구성하고 있는 죽음의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크으으으!

    헬 필그림이 입에서 고통이 담긴 신음이 흘러나왔다.

    “자잘한 벼락 따위는 무시하고, 일단 그 결계부터 깨란 말이다!”

    망혼귀가 참지 못하고, 구슬을 움직였다. 사기로 응집된 무수한 숫자의 구체가 떠올랐다.

    ‘어딜!’

    라온이 몸을 돌리며 진혼검을 역수로 쳐올렸다. 밑에서부터 솟구치는 붉은 칼날에 샛노란 꽃봉오리가 피어난다.

    화아아아!

    원망으로 피어난 열기의 조각들이 흩날리며 퍼져나가 망혼귀가 일으킨 사기와 충돌했다.

    쿠와아아앙!

    요기가 깃든 불꽃과 죽음의 기운이 맞물리며 무수한 폭발이 터져 나왔다.

    “라온!”

    리메르가 잘했다는 듯 한쪽 눈을 깜빡였다.

    ‘땀?’

    그의 이마와 손등에서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여유 있는 척하지만, 검계를 유지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 보였다.

    “끝까지 방해를!”

    망혼귀가 이쪽을 보며 바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갈았다.

    다만 그의 지시는 제대로 먹혔는지 헬 필그림은 쓸데없는 움직임을 취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기운을 끌어 올렸다.

    쿠오오오오!

    머리 위로 들어 올린 장검 위로 거대한 기운이 피어난다. 이 검계를 일검에 갈라버리려는 듯 사기가 끝도 없이 타올랐다.

    “일검 승부라….”

    리메르는 오싹할 정도로 거대해진 사기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받아주지.”

    그가 미소를 지으며 검을 옆으로 뻗어냈다. 검계를 이루던 벼락과 바람이 그의 칼날로 모여들었다.

    라온이 두 눈을 가늘게 좁혔다.

    ‘이전과 같아.’

    벼락과 바람이 응집되는 검은 리메르가 이전에 사용했던 <폭풍의 눈>과 같았다. 주변의 속성력을 검에 끌어모아 싸우는 방식이었다.

    쿠와아아아아!

    헬 필그림은 본인이 가지고 있는 죽음의 기운만이 아니라, 이 땅의 사기마저 끌어내 검에 휘감았다.

    화아아아!

    놈의 검에서 타오르는 흑화가 어둑한 하늘에 닿을 정도로 치솟았다.

    빠지지직!

    리메르의 검에 깃든 기운도 강대했지만, 헬 필그림이 끌어낸 웅장한 크기의 흑염에는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단주….”

    “괜찮으니 보고 있어.”

    라온이 도와주려고 했지만, 리메르는 평소와 같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끝내버려!”

    망혼귀의 외침과 함께 헬 필그림의 양손에 힘이 들어간다.

    중검과 패검의 묘리가 깃든 검격이 쏟아지며 공간이 터질 것처럼 짓눌렸다.

    쿠구구구구!

    검계 자체가 무너지려 할 때 리메르가 한 발 앞으로 걸었다.

    “바람도 벼락도 모두 나의 검이니.”

    단순한 말이 아니다. 의념이 깃든 목소리가 유려한 운율과 함께 세계를 울렸다.

    “그 무엇도 베지 못할 것이 없다.”

    검계로 이루어진 공간이 요동치며 리메르의 검 위로 지금까지와 격이 다른 빛줄기가 솟구쳤다.

    크아아아아아!

    죽음의 위기를 느낀 헬 필그림이 사기의 검을 더욱 불태울 때 리메르의 손이 질풍처럼 나아갔다.

    쩌어어억!

    진녹색 벼락과 바람이 시꺼멓게 물든 칼날을 가르고, 헬 필그림의 육체까지 베어냈다.

    크으으….

    헬 필그림은 반 토막 난 검과 함께 무릎을 꿇었고, 피를 칠한 듯한 갑옷부터 가루가 되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치이이익.

    리메르의 검에서 명멸하던 빛과 함께 검계가 사그라들었다.

    라온이 두방망이질 치는 왼쪽 가슴을 움켜쥐었다.

    ‘이래서 <바람과 벼락의 노래>였나?’

    왜 노래가 붙었나 했더니, 마지막에 검격을 증폭시킨 힘은 리메르의 의념을 담은 노래였다.

    음률의 힘을 아는 엘프의 특성까지 이용한 특별한 검계였다.

    ‘조금은 알 것 같아.’

    리메르의 새로운 검계를 보자, 속성과 검술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느낌이 왔다.

    많은 검이 박혀 있는 심상의 세계에 옅은 불꽃과 검 한 자루가 더 돋아난 기분이었다.

    “단주님.”

    리메르에게 다가가려는데 그의 몸이 흔들렸다. 아무래도 지금 검계로 가진 힘을 모두 쏟아부은 것 같았다.

    “빌어먹을!”

    망혼귀는 헬 필그림이 이렇게 쉽게 당할 줄은 몰랐는지 푸른 화안이 파도를 맞은 듯 출렁였다.

    “내가 직접 죽여주마!”

    다만 놈도 리메르의 힘이 빠진 것을 알아차린 듯 검은 구슬을 운용하여 거대한 사기의 폭풍을 만들어냈다.

    ‘지금 단주님은 못 움직여!’

    라온이 태화보를 밟으며 리메르의 앞에 섰다.

    “꺼져라!”

    “날 죽이러 왔잖아. 한눈팔면 안 되지.”

    진혼검으로 염해무결을 일으켰다. 바닥에서부터 차오른 화염의 해일이 위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사기의 폭풍과 맞부딪쳤다.

    쿠와아아아아앙!

    불꽃과 사기가 맞물리며 존재하는 모든 것을 지워버릴 때 라온은 그 맹렬한 폭풍을 가르고 망혼귀에게 쇄도했다.

    “이놈….”

    폭풍을 뚫고 올 줄은 몰랐는지 망혼귀가 당황하며 몸을 뒤로 뺐다.

    하지만 땅을 뭉개면서 밟은 태화이보는 망혼귀의 인식보다 더 빠르게 놈에게 다가갈 기회를 주었다.

    치리리링!

    라온의 손에 은빛 냉기가 깃든다. 뽑아내는 칼날에 휘감긴 서리가 망혼귀의 심장을 향해 나아갔다.

    “크윽!”

    망혼귀는 마법사답게 그 짧은 순간에 몸이 아니라, 사기를 운용하여 시꺼먼 방어막을 만들어냈다.

    캬아아아앙!

    서리연의 첫 번째 칼날과 두 번째 칼날 모두 망혼귀가 만들어낸 검은 막을 부수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라온은 허공에서 몸을 가누지 못한 채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약해졌구나.”

    망혼귀의 음성에 비웃음이 흘러내렸다.

    “네놈도, 저 엘프도, 네가 데리고 온 버러지들도 모두 죽여주마.”

    그가 검은 구슬을 앞으로 내민다. 구슬 위로 사기로 가득 찬 구체가 떠오르며 강렬한 스파크를 일으켰다.

    쿠구구구!

    완성되지 않았음에도 심장이 쿵 내려앉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기운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라온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몸을 휘돌리며 망혼귀를 노려보는 그의 눈동자에 붉은 뇌전이 튀었다.

    ‘제대로 먹혔어.’

    조금 전 망혼귀의 보호막을 깨지 않은 건 일부러였다. 힘이 약해졌다는 것을 한 번 더 드러내서 놈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라온이 품에 손을 넣어 천살비를 움켜쥐었다.

    ‘지금이다.’

    가라앉혀 두었던 글래시아의 냉기와 어둠에서 피어난 신성력을 천살비에 담았다.

    무결비 절기.

    빙향탈혼.

    극한의 예기를 두른 천살비가 은빛 섬광이 되어 망혼귀를 향해 쇄도했다.

    “쓸데없는 짓을!”

    망혼귀는 두 번이나 검격을 막아냈기에 라온을 무시하며 방어막을 유지한 채 검은 구슬의 응집을 가속했다.

    하지만.

    빠지지직!

    심혼을 꿰뚫는 빙향탈혼의 구결과 신성력이 함께한 천살비는 단숨에 방어막을 가르고, 검은 구슬과 망혼귀의 심장을 동시에 꿰뚫었다.

    캬아아아앙!

    라온이 등으로 땅에 떨어졌을 때 검은 구슬이 박살 나고, 망혼귀가 피를 토하며 추락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끄아아아아악!”

    망혼귀는 리메르의 검에 베였을 때와 달리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구멍이 난 가슴을 움켜쥐었다.

    놈의 손을 뚫고, 붉은 핏물과 검은 사기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쿠구구구!

    하지만 구슬이 깨지면서 터져나간 죽음의 기운은 망혼귀가 만들던 사기의 구체에 모여들며 더욱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머, 멍청한 놈….”

    망혼귀가 어깨를 덜덜 떨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점점 커지는 검은 구체를 보며 살벌한 웃음을 흘렸다.

    “이제 저건 누구도 통제할 수가 없다. 천 년 동안 모은 사기가 한순간에 터질 테니, 네놈만이 아니라, 저 인간들까지 모두 죽을 것이다.”

    놈은 멀리 떨어진 채 이쪽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이죽거렸다.

    “구슬은 아깝지만, 너희 모두를 죽인다면 그리 손해는 아니야. 나는 어차피 다시….”

    “입 닥쳐.”

    라온이 하나 남은 천살비를 날려 망혼귀의 머리에 박아넣었다.

    “이 망할 놈이….”

    망혼귀는 분하다는 듯한 신음을 흘리며 뒤로 넘어갔다. 놈은 진짜 언데드라도 된 것처럼 시체도 남기지 않고 가루가 되어 바스러졌다.

    “후우.”

    라온이 숨을 고르며 점점 더 커지는 검은 구체를 향해 다가갔다.

    “이거….”

    리메르가 그 구체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망한 거 같은데?”

    그는 지금 저걸 막을 힘은 없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라온이 입술을 깨물었다. 잠깐 쉰 덕분에 전력을 발휘할 힘과 정신은 있지만, 저 거대한 사기의 구체를 어떻게 지워야 할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고민하면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처음 이곳에 왔을 때부터 존재하던 세 개의 기둥이 눈에 들어왔다.

    전과 달리 늪지가 사라지며 숨어 있던 기둥의 아랫부분까지 보이고 있었다.

    “음?”

    라온은 그 밑부분을 보며 입술을 축였다.

    ‘저건….’

    기둥에 파여나간 흔적들이 어딘가 익숙했다. 상흔에 정신을 집중하자, 불의 고리와 만화공이 살아 있는 것처럼 저절로 일어났다.

    눈앞으로 치솟는 금색 불꽃과 함께 세상이 바뀌었다.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