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4화
촤아아아악!
리메르는 검을 한 번 내리치는 것으로 끝내지 않았다. 허공에서 신체의 균형을 잡은 채 검격을 쏟아내 망혼귀의 몸을 조각 수준으로 잘라냈다.
파아아앙!
라온은 손과 발을 묶고 있던 검은손이 풀리자마자, 태화보를 밟아서 떨어지는 유아와 율리우스를 안아 들었다.
“하아….”
두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무사해.’
다행히 유아와 율리우스는 기절하여 잠이 든 것 말고는 어떠한 문제도 없었다.
우우우웅.
만화공의 열기로 망혼귀가 두 아이를 재울 때 사용한 죽음의 기운을 말끔하게 지워버렸다.
“웃차!”
리메르가 바닥으로 내려서며 검을 어깨에 걸쳤다. 입매가 한껏 올라가 있는 것을 보니, 영웅심에 도취되어 있는 것 같았다.
“단주….”
“아아!”
말을 걸려고 하는데 그가 손을 앞으로 뻗으며 고개를 저었다.
“고맙다는 말은 필요 없어! 너희를 보호하는 게 내가 해야 할 일이니까!”
리메르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진해진다. 솟구친 콧대는 아주 구름을 뚫고 하늘에 닳을 듯했다.
“광풍단의 단주라고? 그럼 저 엘프가 지그하르트의 광검인가?”
“대, 대단해. 난 있는 줄도 몰랐어!”
“굉장한 쾌검이로군. 왜 광검인지 알 것 같아.”
“망혼귀를 저리 찢어버리다니….”
“큰 부상을 입었다고 들었는데, 아직 건재하군.”
“역시 지그하르트인가….”
망혼귀의 사기에 짓눌려 있던 검사와 마법사들은 리메르의 검술에 감탄하며 탄성을 흘렸다.
“크허험! 뭘 그 정도까지야.”
리메르는 헛기침을 하면서 턱을 치켜들었다. 거만함이 가득 차오른 표정이었다.
“후우….”
라온이 짜증이 어린 숨을 뱉으며 리메르에게 다가갔다.
‘구해준 건 고맙지만, 그전에….’
왜 지금 왔냐고.
저 인간이 잘난 척하는 것을 보니, 6일 동안 개고생을 했던 일들이 떠올라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왜 지금 오신 겁니까?”
“지가 주인공이야 뭐야! 뭐 하다가 이제야 기어 와!”
“어디서 낮잠이라도 자다 온 거 같은데?”
“지각쟁이.”
라온에 이어 마르타, 버렌, 루난도 리메르를 노려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확실히 타이밍이 너무 좋았어.”
“딱 영웅이 되는 순간이잖아.”
“싸우기 귀찮아서 나무 위에서 자다가 굴러온 거 아니야?”
광풍단 검사들도 워낙에 당한 게 많았기에 먼저 의심의 눈초리를 쏘아냈다.
“어…?”
리메르는 이런 반응이 돌아올 줄은 몰랐는지 입을 떡 벌렸다.
“이, 일단 내가 단주고, 너희를 구했잖….”
“단주면 단주답게 처음부터 제 역할을 하셔야죠. 폐관 끝내고 바로 오신 거 아니죠?”
“그, 그건 그런데….”
라온의 물음에 리메르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까지 뭐 하시다가…어.”
-아직 안 끝났다.
‘나도 느꼈어.’
고개를 끄덕이며 허공을 올려보았다. 조금 전 리메르의 검에 의해 가루가 되었던 망혼귀의 로브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놈이 아직 살아있다는 뜻이었다.
“버렌! 도리안!”
라온은 뒤에 있는 버렌과 도리안에게 안고 있던 유아와 율리우스를 던졌다.
“헉!”
“어어?”
두 사람은 놀란 와중에도 두 아이를 부드럽게 안아 들었다.
“애들 데리고 나가! 마스터를 제외하고 모두 이 땅을 벗어나!”
“갑자기… 헉!”
“저, 저게….”
이유를 물으려던 사람들은 허공에서 재생되는 망혼귀의 로브를 보고 턱을 떨었다.
“아직 안 죽었던 건가!”
“모두 이 땅에서 벗어나라!”
밀랜드와 모렐이 데리고 온 검사와 마법사들에게 후퇴 명령을 내렸다.
“왕자님! 기사들과 함께 물러나십시오!”
“너희는 감당할 수 없다!”
보리니 키튼과 트레빈도 데리고 온 기사와 검사들을 모두 뒤로 물렸다.
“어라?”
리메르는 제 모습을 찾기 시작하는 망혼귀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활하는 건 알고 있지만, 저런 능력은 처음 보는데.”
그는 망혼귀가 즉시 재생 능력을 가지고 있는 건 처음 알았다며 짧게 혀를 찼다.
“아마 저 구슬 때문일 겁니다.”
라온이 망혼귀의 로브 안쪽에서 번들거리는 검은 구슬을 가리켰다.
“계속 저 구슬을 이용해서 죽음의 기운을 증폭시켰으니까요.”
망혼귀는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 저 시꺼먼 구슬을 이용해서 검은손을 소환하고, 마법을 운용했다.
지금도 검은 구슬을 중심으로 몸이 모여드는 것을 보니, 충분히 가능성 있는 가설이었다.
“그러면….”
“예. 쳐야죠.”
라온이 말을 마치자마자 땅을 박찼다. 리메르도 약속을 한 듯 뛰어올라 강기를 일으켰다.
만화공의 기운을 두른 진혼검으로 망혼귀를 베려 할 때 놈의 로브에서 시꺼먼 기운이 튀어나와 둥근 막을 형성했다.
쩌어어엉!
오싹할 정도로 검게 물든 막은 두 개의 강기를 막아내면서도 바로 부서지지 않을 정도의 강도를 지니고 있었다.
빠지지직!
물론 얼마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지만, 망혼귀는 그 사이에 육체를 재생한 뒤 뒤로 이동해 있었다.
라온은 허공에서 몸을 돌려 리메르의 어깨를 밟고, 망혼귀에게 돌진했다.
쩌어어엉!
강기를 두른 제천검으로 놈이 들고 있던 구슬을 후려쳤지만, 베이기는커녕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꺼져라!”
망혼귀의 손아귀에서 검은 광채가 쏟아진다. 그 빛을 본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터엉!
라온은 급히 육체의 무게를 높여 땅으로 내려간 후 태화삼보를 밟아 뒤로 물러섰다.
콰과과광!
그가 밟았던 땅이 터져나가며 밑이 보이지 않는 섬뜩한 구멍이 생겨났다.
“그것도 못 베냐? 내 어깨가 아깝다!”
“생각보다 더 단단해요.”
라온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는 리메르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나쁘지는 않아.’
검강으로 구슬을 베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줬으니, 저놈은 방심하게 될 것이다.
기회를 노려서 ‘그 힘’을 운용한다면 충분히 깨부술 수 있다.
“이 버러지 같은 것들이!”
망혼귀는 가면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전신을 떨었다.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보이는 듯했다.
“한 조각도 남기지 않고 지워주마.”
“아까 너처럼?”
리메르가 망혼귀를 가리키며 옅게 웃었다.
“닥쳐!”
망혼귀가 검은 구슬을 앞으로 내밀자, 죽음의 땅에 거대한 파동이 일어나며 간신히 죽였던 언데드 몬스터들이 더 지독한 사기를 불태우며 솟아올랐다.
고오오오오!
하나하나가 하귀 급 데스나이트보다 강한 기운을 두르고 있어서 밀랜드와 보리니 키튼을 비롯한 강자들도 쉽게 처리하지 못할 것 같았다.
“저것들 말고, 저놈만 처리하면 되잖아.”
리메르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죠.”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태화보를 내디뎠다.
빠지지직!
리메르는 바로 옆으로 따라붙으며 바람과 뇌기를 일으켰다. 뇌기 운용이 자연스러운 것을 보니, 수련만큼은 제대로 한 듯 보였다.
쿠구구구궁!
망혼귀에게 다가가려 하는데, 지진이 일어난 듯 놈이 밟고 있는 땅이 무너지고, 갈라지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앙!
검은 대지가 뒤틀리며 푸른 불꽃을 두른 용의 머리가 튀어나왔다.
그 뒤를 이어서 산맥처럼 거대한 날개와 몸체가 튀어나온다. 마지막으로 하늘에 닿을 듯 창처럼 날카로운 꼬리가 울렁이는 대지를 내리쳤다.
“저건….”
가죽을 벗기고 뼈로 이루어진 채 냉기를 두른 용은 하나뿐이다. 언데드 몬스터 중 최강을 논한다는 본 드래곤이었다.
쿠오오오오!
망혼귀는 포효를 내지르는 본 드래곤의 등에 올라탄 채 구슬을 앞으로 내밀었다.
“기회는 끝났다. 이제 네놈들이 내게 닿을 일 따위는 없다.”
놈은 그 말을 남기고 본 드래곤과 함께 허공으로 떠올랐다.
“라온!”
“알고 있습니다.”
라온이 허벅지 근육이 터질 정도로 힘을 주며 땅을 박찼다.
촤아아악!
방해하기 위해서 밑에서부터 솟구쳐 오르는 검은 손을 설풍검결로 베어내고, 제천검을 위로 뻗어냈다.
‘지금 사용할 검술은….’
이미 본 드래곤이 비상을 시작했다. 다른 검술들을 사용해도 망혼귀가 막을 수 있으니, 지금은 놈을 끌어내리는 게 가장 중요했다.
라온 지그하르트 류 검식.
제2형 중천포.
제천검의 검극에서 돋아난 강기의 구체에서 막대한 인력이 발생하며 떠오르던 본 드래곤의 몸체가 밑으로 끌려 내려오기 시작했다.
‘역시 먹히는군.’
중천포는 인력을 발생시키는 검술이기에 적을 끌어당길 수 있다.
마스터 상급에 오르며 더 강해진 인력이 본 드래곤의 비상을 멈춰 세웠다.
“이게 무슨!”
“우리 부단주가 좀 하지?”
망혼귀가 당황하여 턱을 떨 때 리메르가 그의 머리 위로 올라가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성격은 더럽지만, 실력은 진짜라고!”
리메르는 이를 꽉 깨물며 바람과 벼락이 깃든 검을 내리쳤다.
콰아아아앙!
망혼귀가 급히 검은 구체의 막을 만들어냈지만, 리메르의 검격에 담긴 막대한 힘을 이기지 못하고, 본 드래곤의 균형이 무너졌다.
‘지금이다.’
라온은 본 드래곤의 몸체가 기울어진 틈을 놓치지 않고 검극에 응집시킨 중천포의 기운을 폭발시켰다.
콰과과과광!
제천검의 검극에서 뻗어나간 섬광이 망혼귀가 만들어낸 검은 막을 깨부수고, 본 드래곤의 왼쪽 어깨와 날개를 찢어버렸다.
쿠와아아아앙!
위에서 리메르가 찍어누르고, 아래에서 라온이 뭉개버린 본 드래곤은 몸체가 뒤집힌 채로 땅으로 추락했다.
후우우우웅!
워낙에 거대한 몸체였기 때문에 바닥에서 거대한 먼지 폭풍이 일어났다.
라온이 끝을 내기 위해서 달려들 때 먼지 속에서 푸른빛이 솟구쳤다.
‘설마….’
어마어마한 냉기. 본 드래곤의 냉기의 숨결이었다.
언데드답게 고통을 느끼지 않으니, 몸이 부서졌음에도 바로 반격하는 것 같았다.
콰아아아아아!
본 드래곤의 냉기의 숨결은 이전에 만났던 드레이크의 냉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다.
7성의 수속성 저항력이 있다고 해도 맨몸으로는 버틸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간다.
라온은 냉기의 숨결을 피하지 않았다. 불의 고리와 만화공을 극성으로 운용하며 서리 폭풍을 향해 뛰어들었다.
쩌저저저적!
날카롭기 그지없는 적섬으로 냉기를 가르고 나아가 본 드래곤의 주둥이에 진혼검을 박아넣고 염룡결을 운용했다.
화아아아아!
붉은 칼날에서 뿜어지는 열기의 숨결이 본 드래곤의 내부로 파고들었다.
찌지지지직!
본 드래곤을 둘러싸고 있던 냉기가 염룡결의 불길에 의해 밀려나며 놈의 뼈가 뭉개지기 시작했다.
콰드드드득!
냉기는 본 드래곤을 잇는 생명력 그 자체. 그 냉기가 열기에 의해 녹아버리니, 놈이 버티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크르르….
본 드래곤은 원통하다는 듯 턱을 떨다가 무너져 내렸다.
“이쪽은 끝났군.”
라온은 본 드래곤의 눈동자에서 빛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치리리링!
리메르는 물러나는 망혼귀에게 따라붙으며 바람의 기운이 실린 강기를 연달아 쏘아냈다.
“이 망종 놈이!”
망혼귀가 구슬을 앞으로 내밀었다. 놈이 지닌 죽음의 기운이 한순간에 증폭되며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검은 창이 쏟아져 내렸다.
쿠구구구!
창에 깃든 기운은 하나하나가 마스터 상급의 강기 수준이었다.
“우와아악!”
리메르는 간드러진 비명을 지르며 몸을 휘돌려 사기의 창을 피해냈다.
우우우우웅!
하지만 망혼귀가 만들어낸 사기의 창은 끝없이 많았다. 이대로 떨어진다면 리메르만이 아니라, 뒤에 있는 사람들까지 죽게 될 것이다.
“하여튼.”
라온이 어금니를 지그시 씹으며 망혼귀의 앞으로 쇄도했다.
치리리링!
제천검으로 백영섬을 긋고, 진혼검으로 염해무결을 쳐올렸다.
백색 그림자가 사기의 창을 지우고. 붉은 불꽃이 사기의 창을 집어삼킨다.
무희의 춤사위처럼 단아하게 피어나는 백색과 적색의 물결 앞에서 사기의 창은 흔적 하나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치이잉!
리메르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바람이 되어 나아가 망혼귀에게 검을 그어 내렸다.
쩌어어엉!
하지만 그의 검은 망혼귀에게 닿지 못했다. 갑자기 바닥에서 튀어나온 붉은 문이 검을 막고 있었다.
“이건….”
리메르는 붉게 물든 문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크 리치가 소환하는 언데드의 최고봉이 데스나이트나 본 드래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망혼귀의 비웃음과 함께 문에 걸린 쇠사슬이 떨어진다. 수천 명이 동시에 내지르는 듯한 비명과 함께 시뻘건 문이 열렸다.
어둠으로 가득 찬 공간 속에서 어깨 보호대가 유난히 큰 붉은 갑옷을 입은 기사가 나타났다.
용의 머리를 형상화한 투구 때문에 내부가 보이지 않지만, 살아있지 않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저놈도 데스나이트처럼 언데드인 것 같았다.
쿠구구구구구!
붉은 갑옷의 기사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상귀 급 데스나이트를 초월하고 있었다. 놈의 뻘건 눈동자에서 피어나는 건 산 자에 대한 악의가 아니라, 싸우고 싶다는 투지였다.
“이건 또 뭐야?”
리메르는 불안감을 느낀 듯 입맛을 다시며 뒤로 훌쩍 물러섰다.
-오?
라온이 알 수 없는 몬스터를 보며 인상을 찌푸릴 때 라스가 작은 탄성을 흘렸다.
‘아는 놈이야?’
-당연하느니라. 마계에도 있는 놈이니까.
‘뭐?’
-저건 타락한 데스나이트의 영혼이 격을 넘고 마계에 도달했을 때 진화하는 헬 필그림이라는 놈이다.
라스는 마계의 순례자라는 의미의 이름이라며 꽤 조심해야 할 거라고 말했다.
스르르릉!
망혼귀가 손을 들어 올리자, 헬 필그림이 허리춤에서 장검을 뽑아 들었다. 검이 뽑히는 섬뜩한 소리에 가슴이 울렁였다.
“가라. 모조리 죽여버려!”
그의 외침에 헬 필그림이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파아아앙!
시야가 뻘겋게 변하는 듯한 착각과 함께 눈앞으로 짓쳐 든 헬 필그림이 장검을 내리쳐온다.
염옥검과 달리 검신 위로 아주 얇게 타오르는 검은 불꽃에 소름이 돋아올랐다.
‘어설프게 막으면 죽는다.’
라온이 만화공을 전력으로 끌어올리며 광아검에서 가장 단단한 초식인 분결창첨을 내질렀다.
쩌어어어어엉!
붉고, 검은 불꽃이 경합하며 치솟은 강기가 대지를 터트리고, 허공에 무수히 많은 스파크를 일으켰다.
크르르륵.
헬 필그림은 검격이 막힌 게 오히려 즐거운 듯 기괴한 웃음을 흘리며 재차 검을 내리쳤다.
후우우웅!
우측에서부터 휘어져 내려오는 검인데, 빠르면서도 변화무쌍하여 그 흐름을 읽기 어려웠다.
불의 고리를 극성으로 운용하며 감각을 드높이고 나서야 헬 필그림이 그리는 검로의 흐름이 보였다.
치지지지징!
제천검으로 설풍검결을 운용하여 헬 필그림의 검격을 흘려내고, 왼발을 앞으로 뻗으며 진혼검을 내질렀다.
크르르!
헬 필그림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어깨 보호대를 이용하여 진혼검을 비껴낸 뒤 팔꿈치를 찍어 내려왔다.
‘반응이 빨라.’
근접거리 박투를 예상 못 한 건 아니었기에 손등으로 팔꿈치를 쳐낸 뒤 무릎으로 헬 필그림의 복부를 후려쳤다.
뻐어어억!
만화공이 운용되고 있었기에 헬 필그림의 흉갑이 고철처럼 찌그러졌지만, 놈은 약간의 통증만 느낀 듯 작은 신음만 흘리며 물러섰다.
“어딜 가.”
라온이 빙판을 미끄러지듯이 태화보를 걸었다. 헬 필그림의 뒤편으로 쇄도해 서리연을 펼쳐냈다.
쩌어어어엉!
두 개의 칼날이 연달아 쏟아질 때 헬 필그림은 제천검을 쳐내며, 서리의 칼날을 지옥의 불길로 태워버렸다.
빠른 반응과 적절한 대처까지. 언데드가 아니라 제대로 단련해온 기사나 검사와 싸우는 듯한 기분이었다.
크르르르!
이번에는 헬 필그림의 반격이다. 오른쪽 무릎을 굽혀 자세를 낮추며 검을 위로 세웠다.
‘상단세.’
본래 상단세는 검술 자세 중 가장 공격력이 강한 자세였다. 지금은 방어로 돌리는 게 나았다.
‘하지만….’
불의 고리가 있는 자신에게 방어란 어울리지 않는다. 스스로의 실력을 믿고 앞으로 나아갔다.
콰아아아아!
헬 필그림의 검이 떨어져 내린다. 느리지만 거대한 무게가 전신을 압박해와서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느껴졌다.
극한까지 다듬은 중검의 묘리가 놈의 검에 어려 있었다.
‘그 검….’
라온이 입술을 깨물었다.
‘깨주마.’
중검이라면 어떤 검사에게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단련해왔다.
왼발로 진각을 밟으며 만화공을 극성으로 끌어 올렸다.
발목에서부터 끌어 올린 회전력을 허리와 어깨, 손목까지 이으며 제천검을 밀어냈다. 검극에서 시뻘건 구체가 돋아나며 맹렬한 회전을 일으킨다.
치이이이잉!
만화공 회천. 극한까지 응집된 열화의 구체가 헬 필그림의 검격과 정면에서 맞부딪쳤다.
쿠와아아아아앙!
어마어마한 열기의 폭풍이 치솟으며 죽음의 땅에 거미줄 같은 금이 그어지고, 지축이 뒤틀린 것처럼 흔들렸다.
“후우….”
숨을 몰아쉴 때 검은 연기 속에서 섬뜩한 빛이 일렁였다. 놈이다. 바로 방어 태세를 갖췄다.
연기를 뚫고, 검게 타오르는 장검이 심장을 노리고 쏘아져 왔다.
캬아앙!
설풍검결의 바람이 깃든 진혼검으로 쳐내고, 미친 야수의 살기를 두른 제천검을 내리쳤다.
쩌저저저정!
라온은 근접거리에 제천검과 진혼검으로 헬 필그림의 검을 밀어내며 입매를 비틀었다.
‘힘 좀 쓰는데.’
인간도, 데스나이트도 초월했기 때문인지 육체 능력이 상식을 벗어나 있다.
‘거기다….’
헬 필그림의 가라앉은 눈을 보면 아직 실력을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 힘 끌어내 주지.”
제천검에 열기, 진혼검에 냉기를 두른 채 헬 필그림을 밀어내려고 하는데 갑자기 팔과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현기증이 나며 세상이 돌아가는 듯 흐려졌다. 코에서 뭔가 흐르는 듯 느껴 살짝 시선을 내리니 코피가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이 정도 충격은 없었을 텐데?’
내상을 입은 건 사실이지만, 코에서 피가 나고 팔다리에서 힘이 빠질 정도는 절대 아니었다.
-멍청하긴.
당황하여 마른침을 삼킬 때 라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본왕이 경고했잖느냐. 체력도, 오러도 회복시킬 수는 있지만, 정신력은 되돌리지 못한다고.
‘그건….’
-거기다 네놈은 백은의 오로라를 두 번이나 사용했느니라. 아무리 본왕이 도와주었다고 해도 혼을 갉아 먹는 행위였지. 그 여파가 지금에서야 찾아온 것이니라.
라스는 인간치고는 오래 버틴 거라며 드물게도 칭찬을 해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버텨야… 크윽!’
헬 필그림을 밀어내려고 하지만 놈은 이쪽에 문제가 생긴 걸 알아차린 듯 더 강한 힘으로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치이이이익!
헬 필그림의 검이 제천검과 진혼검을 밀어내고 어깨를 태우기 시작할 때 뒤에서 불어온 청명한 바람이 열기를 가라앉혀 주었다.
캬아아아앙!
어느새 나타난 리메르의 검이 헬 필그림의 검을 가볍게 튕겨냈다.
크륵!
헬 필그림이 짧게 이를 갈고서 뒤로 물러났다.
“허억….”
라온이 거친 숨을 토해낼 때 리메르가 다가왔다.
“난 제자를 이렇게 약하게 안 키웠는데.”
리메르는 라온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얼마나 싸웠다고 벌써 지쳐서 강아지처럼 헥헥거리는 거야.”
6일이다. 이 인간아!
라온이 이를 드러내고 리메르를 노려보았다. 잠도 안 자고 6일 동안 싸웠다고 따지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뭐, 오랜만에 스승 노릇을 하는 것도 괜찮겠지.”
리메르가 빙긋 웃으며 헬 필그림에게 다가갔다.
“검계현신에 대해 물었던가?”
“단주님…?”
“그럼 네 눈으로 직접 보고 깨달아라. 무엇이 달라졌는지.”
그의 검이 검게 물든 하늘을 찌르고, 왼손이 땅을 가리켰다.
“검계현신.”
리메르의 낮은 음성이 어둠을 짓눌렀다.
“바람과 벼락의 노래.”
고고한 진언과 함께 내리친 파마의 벼락이 죽음의 땅을 꿰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