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403화 (403/653)

제403화

쿠구구구구!

라온은 쏟아져 내리는 마법 줄기와 목으로 짓쳐 드는 염옥검을 보며 불의 고리를 극성으로 운용했다.

극한의 상황에서 이루어진 공명 때문인지 평소보다 시간이 더 느리게 흐르는 듯 보였다.

‘이럴 줄 알았어,’

세 개의 기둥이 박혀 있는 죽음의 땅으로 들어가며 느꼈다.

이곳에 깃든 죽음의 기운은 지금까지 밟아온 땅과 격이 다르고, 천지사방에 수많은 마법진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당연한 일이지.’

아크 리치는 공성전을 벌일 때부터 사람들을 관찰하며 언데드들을 지휘했기에 지금까지 아무 대비도 없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이곳까지 돌진해온 무인들을 죽이기 위해서 많은 준비를 해두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나를 죽이고 싶었던 모양이네.

안쪽으로 들어온 건 한 명인데, 마법진을 개방하고 죽음의 기운 속에 숨어 있던 상귀 급 데스나이트까지 모습을 드러낸 것을 보면 어떻게든 먼저 죽이고 시작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다만 준비는 너희만 한 게 아니야.’

아크 리치가 이쪽을 관찰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상황이 이렇게 흘러갈 것을 알고 있었다.

라온은 점점 더 다가오는 데스나이트의 염옥검과 마법 줄기를 보며 입매를 말아 올렸다.

‘라스. 빨리 거래를….’

-싫으니라.

‘어? 뭐?’

-싫다고 했느니라.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체력과 오러를 회복해주고, 냉기와 분노까지 빌려주겠다고 한 녀석이 갑자기 싫다고 고개를 저었다.

라온은 점점 더 다가오는 염옥검을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갑자기 무슨 말이야! 거래하기로 했잖아!’

-생각해보니 네놈만 이득을 보는 것 같으니라.

라스는 아무리 생각해도 손해라며 눈을 내리감았다. 본인이 우위에 선 것을 알고 있는 듯 입매라 올라갔다.

다만 협상할 생각이 없는 건 아닌지 기이한 힘을 전해줘서 생각은 그대로지만, 시간은 더 느리게 흐르도록 만들었다.

‘끄응….’

이런 상황까지는 예측하지 못했기에 심장이 꽉 오그라들었다.

‘분노를 더 받을게. 그러면 됐지?’

라스는 이 몸을 차지하기 위해서 계속 분노를 밀어 넣고 있지만, 그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녀석에게 분노의 사용법을 익혔기에 장단점이 모두 있었다.

-…….

라스는 대답하지 않고 입을 삐죽하게 내밀었다.

이게 아니야?

당연히 분노를 더 가져가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녀석은 아무 말도 없었다.

‘시간 없어. 빨리 말 안 하면 다 끝나. 아무것도 못 얻고….’

-쯔읍!

‘설마…?’

라온은 입맛을 다시는 라스를 보고 인상을 찡그렸다.

‘전쟁이 끝나고서만 아니라, 여기서 떠난 뒤에 가문에 돌아갈 때까지 먹고 싶은 거 다 먹을게.’

-흐으음….

‘루난이 말한 구슬 아이스크림 신제품도 먹을게!’

-콜이니라!

‘망할 식충이 같으니!’

이런 급박한 순간에 흥정하려 하다니, 욕이 절로 나오는 녀석이다.

다만 라스는 아직 모르겠지만, 녀석의 흥정은 생각대로 되지 않았을 것이다.

-제대로 주도록 하지.

라스의 들뜬 목소리와 함께 젖은 솜처럼 짓눌려 있던 육체에 활력이 차오른다. 텅텅 비어 있던 단전에 열기와 냉기가 끝없이 치솟았다.

특히 냉기는 두껍고 거대한 단전을 뚫고 나올 정도로 어마어마한 크기가 되었다.

라온이 무게 중심을 낮추며 진혼검을 앞으로 내뻗었다.

화아아아!

샛노란 요기에 얹어지는 건 극한의 서리와 마왕의 분노. 이질적인 기운을 두른 붉은 칼날 위로 시퍼런 빛이 타올랐다.

찌지이이잉!

왼손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요기와 냉기 그리고 분노를 동시에 폭발시켰다. 진혼검이 부러질 것처럼 진동하며 세계를 얼릴 듯한 냉기가 솟구쳤다.

콰아아아아아!

진혼검을 매개체로 백은의 오로라가 피어나며 하늘에서 떨어지는 마법과 지옥불을 내지르는 데스나이트가 동시에 얼어붙었다.

“크으….”

라온은 얼어붙은 세계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쉽지 않아….’

속이 울렁거리고, 진이 빠진다. 당장 쓰러지고 싶은 기분이다.

라스의 도움을 받았기에 가능했지 혼자서 백은의 오로라를 사용하기에는 아직 무리인 것 같았다.

뿌드드득.

얼음 속에서 데스나이트의 몸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라스의 기술을 맞고도 움직이려는 것을 보면 생각보다 더 강한 놈이었다.

치이이잉!

라온은 지끈거리는 가슴의 통증을 참으며 오른손에 쥐고 있던 제천검에 만화공의 열기를 담았다.

빠드드득!

빨갛게 달아오른 칼날 위로 치솟은 열선으로 바로 앞에서 얼어붙어 있는 상귀 급 데스나이트의 몸통을 깨부쉈다.

콰과과과광!

백은의 오로라로 만들어낸 거대한 얼음 기둥이 적섬에 의해 갈라지며 산산조각으로 쏟아져 내렸다.

“저건 또 뭐야….”

하분성주 밀랜드는 라온이 만들어냈던 얼음 장벽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마, 마법 같은데, 마법이 아니군요. 그야말로 현상 그 자체….”

모렐은 어처구니없는 일이라며 튀어나올 정도로 눈을 부릅떴다.

“검술이 변한 건가?”

“변한 게 아니라, 그 사이에 실력이 늘어난 것 같습니다.”

삼왕자와 보리니 키튼은 백은의 오로라가 아니라, 데스나이트를 일격에 갈라버린 적섬을 보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젠 서커스를 다 하는군.”

철전대주 트레빈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저게 인간이냐?”

“난 언데드보다 저 인간이 더 무서워….”

“안 까불어야겠다.”

광풍단 역시 말도 안 되는 광경을 보며 진짜 질리는 인간이라고 중얼거렸다.

* * *

“이, 이게 무슨!”

아크 리치는 수백 개의 마법과 데스나이트의 검을 단 한 수로 막아낸 라온을 보며 뒷걸음질 쳤다.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갑자기 오러를 회복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

저 어린 지그하르트가 냉기의 장벽을 만들 수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현재의 오러와 체력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놈은 검과 마법이 닿기 직전 단전에 존재하지 않던 어마어마한 오러를 폭발시키며 저 말도 안 되는 냉기의 기둥을 만들어냈다.

‘뭐, 저런….’

아무리 생각해도 현재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 비밀을 아는 것보다 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벗어나는 게 먼저다. 적은 저 어린놈만이 아니었으니까.

‘어떻게 해야 하지?’

데스나이트를 다시 소환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저 인간들을 모두 죽일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크 리치가 사기의 실을 움직여 죽은 데스나이트를 되살리고 있을 때 어린 지그하르트가 뒤로 손짓을 했다.

“다 끝났습니다. 이제 들어오세요.”

그가 손짓하자, 뒤에서 대기하던 인간들이 천천히 죽음이 땅에 발을 내디뎠다.

‘기회다!’

인간들은 모르겠지만 공간에 설치해둔 마법진은 일회용이 아니라, 지속형이다.

아무리 저놈이라고 해도 방금 만든 냉기의 벽을 연속으로 사용할 수는 없을 테니, 저들이 모두 들어왔을 때 마법진을 발동시키면 치명적인 피해를 입힐 수 있을 것이다.

인간들은 거침없이 죽음의 땅을 밟고 들어와 얼어붙지 않은 언데드들을 쓸어버리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아크 리치는 마지막 한 사람까지 땅에 들어온 순간 다시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공격 마법을 떨어뜨리며 데스나이트의 부활을 가속하려던 그가 우뚝 멈췄다.

‘어…?’

마법진이 발동되지 않는다. 발동 안 되는 수준이 아니라, 1달 동안 놔두어도 문제없어야 할 마법진들이 모조리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뭐, 뭐야! 왜 마법진이!”

너무 당황하여 만들던 데스나이트 부활 마법도 멈췄을 때 어린 지그하르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마법진이 발동 안 돼?”

그는 얼음 장벽을 만들어냈던 단검을 손가락으로 돌리며 빙긋 웃었다.

“설마 그 단검으로….”

저 불길한 요검으로 마법과 마법진을 깨는 모습은 많이 봤지만, 이곳에 있는 모든 마법진을 무효로 만들 줄은 상상을 못 했다.

“너는 대체 뭐야! 뭐 하는 놈이냐!”

“글쎄.”

라온은 턱을 떠는 아크 리치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당황했는지 놈의 청색 화안이 꺼질 것처럼 출렁거렸다.

‘제대로 먹혔군.’

아무리 진혼검이라고 해도 저 모든 마법진을 동시에 깨는 건 무리다.

불의 고리를 통해 마법진의 중심이 되는 곳을 파악한 뒤 백은의 오로라와 마법 요혈로 진을 파괴한 게 제대로 먹혀든 것 같았다.

“이거 스트레스 풀리네!”

버렌은 스파토이의 몸을 으깨며 히죽 웃었다.

“이 지겨운 해골 새끼들 대가리 가져와!”

마르타는 지금까지 당한 것을 풀듯이 언데드들의 머리통만 깨부쉈다.

“빨리 끝내고 잠! 잠! 잠!”

루난은 한계에 달했는지 보랏빛 눈에 시퍼런 투지를 두르고 듀라한을 네 등분으로 베어냈다.

“끝이 보인다!”

“별것도 아닌 것들이!”

“모조리 조져!”

광풍단 만이 아니라. 네 세력의 무인과 마법사들도 끝이 보인다는 생각에 마나를 쏟아부으며 언데드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워낙에 강한 세력이 모였기에 얼마 지나기도 전에 아크 리치를 제외한 언데드 몬스터들이 모조리 쓰러졌다.

“이제 바싹 마른 뼈다귀 하나 남았군.”

밀랜드가 라온의 옆에 서며 아크 리치에게 검을 겨누었다.

“상귀 급 아크 리치라 흔하지 않은 놈이로군. 실험할 맛 나겠어.”

모렐이 손아귀에 화염 폭풍을 압축시키며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 언데드를 부리는 것을 보면 어떻게 해서든 제거해야 할 놈입니다.”

보리니 키튼이 날카로운 기세를 두른 채 다가왔다.

“저놈이 우리를 이곳까지 부르게 한 원흉이라는 건가. 건방진 놈이로군.”

트레빈이 검에 강기를 일으키며 아크 리치를 노려보았다.

네 사람이 일으키는 강대한 기파에 아크 리치의 손끝이 떨리는 듯 보였다.

“이제 어떻게 할래? 너 혼자 남았는데?”

“혼자가 아니다.”

아크 리치가 이를 갈며 손을 들어 올렸다. 거대한 사기가 요동치더니, 그의 밑에서 조금 전에 죽었던 데스 나이트와 상급 언데드들이 나타났다.

“미안하다.”

데스나이트는 바로 검을 들어 올리며 아크 리치에게 사과했다.

“미안해할 필요 없어.”

라온이 대신 대답하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네 친구도 곧 똑같이 따라갈 테니까.”

“입 닥쳐라!”

데스나이트가 이를 갈며 달려든다. 조금 전보다 더 빠른 속도. 전력으로 보법을 밟은 것 같았다.

‘빠르군. 하지만….’

아는 방식이야.

라온은 오른발을 앞으로 뻗으며 아래에서부터 제천검을 쳐올렸다.

쩌어어엉!

광아검의 묘리가 깃든 흉악한 검격이 데스나이트의 염옥검을 쳐냈다.

“무슨!”

데스나이트는 본인의 검이 가볍게 밀려난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 턱을 떨었다.

“전에 이곳에 있던 데스나이트는 네 분신이지?”

“그걸 어떻게….”

“검술이 똑같으니까.”

저 상귀 급 데스나이트는 이전에 이곳에서 보았던 성장하는 데스나이트와 완전히 똑같은 기수식과 보법, 검술을 사용했다.

자세와 체격 그리고 검술이 같았기에 놈의 분신임을 알 수 있었고, 어렵지 않게 검을 쳐낼 수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고작 그것을 상대해놓고 내 검을 파악했다는 것이냐!”

데스나이트가 다시 달려든다. 말을 의식한 듯 보법과 검술을 조금 다르게 운용했지만, 그리 큰 차이는 느껴지지 않았다.

몸에 익힌 검술 흐름은 그리 쉽게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비슷해.’

라온은 설풍검결의 흐름이 스며든 제천검으로 데스나이트의 염옥검을 흘려낸 뒤 앞으로 나아갔다.

데스나이트와 거리가 코앞까지 좁아졌을 때 진혼검으로 은검몽을 일으켰다.

쩌어억!

꿈결처럼 스쳐가는 짧은 칼날의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온 요기의 칼날이 데스나이트의 핵을 가르고 지나갔다.

“아….”

데스나이트는 본인이 무엇을 당했는지도 모른 채 염옥검을 떨어뜨렸다.

“이건….”

“처음 보지?”

언데드들을 잡으며 많은 검술을 사용했지만, 일부러 은검몽만큼은 보여주지 않았다.

데스나이트는 처음 본 은검몽에 핵이 터지며 가루가 되어 바스러졌다.

아무리 이곳이 사기로 넘치는 땅이라고 해도 이번에는 바로 부활할 수 없을 것이다.

콰아아아앙!

아크 리치 역시 밀랜드와 보리니 키튼의 연계 검격을 피하다가 모렐이 개방한 화염의 뱀에 휘감겨 땅으로 추락했다.

“커흑….”

고통을 느끼지는 못하지만, 충격이 없지는 않은지 아크 리치가 신음을 토하며 손을 떨었다.

“이, 이놈들이!”

라온은 아크 리치가 화염의 뱀을 끊어버리고, 흑마법을 발동시키려고 할 때 태화보를 밟고 놈에게 다가갔다.

‘그냥 치면 분명 피할 거야.’

아크 리치가 마법사라고 해도 지금까지 해온 일을 생각해보면 만만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시간이 많지 않아도 제대로 베어야 한다.

“큭!”

아크 리치가 이쪽을 보며 손을 들어 올렸다. 회색 손가락뼈에서 짙은 보랏빛 섬광이 솟아올랐다.

치이이잉!

라온이 제천검으로 물결을 그렸다. 칼날에서 피어난 백색 그림자가 아크 리치가 일으킨 섬광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우우우웅!

동시에 왼쪽에서 뻗어나간 진혼검에서 붉은빛을 두른 검명이 터진다. 혈우. 아크 리치가 봤지만, 듣지 못한 망자의 울음이 놈의 움직임을 멈춰 세웠다.

‘여기서 한 발 더.’

라온은 왼발을 내디디며 흑마법을 흡수한 백영섬과 혈우를 뿌린 진혼검으로 십(十)자를 그었다.

“끄….”

아크 리치가 다가오는 두 자루의 검을 보며 어떻게든 움직이려 했지만 혈우의 울음소리는 여전히 놈의 팔다리를 놓아주지 않았다.

빠드드득!

제천검과 진혼검이 떨어지며 아크 리치의 몸체가 네 등분으로 갈라진다.

콰과과광!

뜯겨나간 아크 리치의 육체 위로 밀랜드와 보리니 키튼의 강기가 쏟아지고, 모렐의 화염 폭풍이 폭발했다.

화아아아악!

아크 리치는 뼛조각 하나 남기지 못하고 사기로 가득한 땅속으로 사라졌다.

혼의 구슬을 깨지 못했으니, 언젠가 부활하겠지만 아마 엄청나게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우와아아아!”

“끝났다아아아!”

“드디어 다 조졌어!”

“으흐흑! 이제야 잘 수 있어.”

6일을 내리 싸운 광풍단은 이제 쉴 수 있겠다며 환희가 담긴 함성을 질렀다.

라온은 아크 리치가 죽은 땅을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조금 이상하군.’

아크 리치와 데스나이트가 지니고 있던 사기는 분명 소름이 돋아 오를 정도로 무시무시했지만, 실제 전투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놈들이 짜놓은 여러 계획이 망가지고, 조력자들의 무력이 뛰어났다고 해도 너무 쉽게 잡은 느낌이라 어쩐지 기분이 가라앉았다.

“성주님.”

라온이 뒤를 돌아서 밀랜드에게 다가갔다.

“이놈들 너무 쉽지 않았….”

그에게 지금 생각을 말하려고 할 때였다.

“역시 눈치가 빨라.”

섬뜩한 음성과 함께 죽음의 땅이 다시 한번 출렁인다. 지금까지와 달리 이 땅에 퍼진 죽음의 기운 자체가 움직였다.

촤아아아아악!

땅속에서 시꺼먼 손아귀가 솟구쳐 죽음이 땅에 들어온 모든 사람과 손과 발을 묶어버렸다.

“허억!”

“뭐, 뭐야! 이건!”

“거, 검은 손?”

“그 리치 아직 안 죽은 건가?”

무인들과 마법사들이 검은 손을 향해 검기와 마법을 쏟아부었지만, 검게 물든 손은 절대 사라지지 않았다.

“이런….”

“가, 강기로도 못 지운다고?”

밀랜드와 보리니 키튼은 강기에도 지워지지 않는 검은 손을 보며 눈동자를 떨었다.

“마법이 아니야!”

“이게 안 베이다니….”

검은 손은 모렐의 화염 마법에도 녹지 않고, 마스터 최상급에 오른 트레빈의 강기로도 베이지 않았다.

“마, 마나를 흡수하고 있어!”

“모두 오러를 끌어 올려서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

삼왕자와 밀랜드의 말대로 검은 손은 움직임만 막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가진 체력과 마나를 흡수했다.

“젠장!”

라온이 진혼검으로 손목을 붙잡고 있는 검은 손을 내리찍었다. 마법 요혈을 운용했음에도 검은 손은 사라지지 않았다.

‘마법이 아니라는 뜻이야.’

이 손은 마법이 아니었다. 백은의 오로라처럼 기운 자체를 이용하는 현상이었다.

“끄으으윽….”

“이대로 있다간 생기가 다 빠져서 좀비가 될 거야!”

“어떻게든 움직여!”

“그러고 싶지만, 방법이 없어!”

사람들이 당황하여 발버둥 칠 때 세 개의 기둥이 박힌 땅에서 작은 울림이 일어났다.

쿠웅!

죽음의 땅에 다시 늪이 차오른 듯 거대하면서도 느릿한 파문과 함께 검은 로브를 두른 괴인이 일어났다.

“아….”

라온은 괴인이 착용하고 있는 아크 리치의 가면을 보고 손끝을 떨었다.

“망혼귀?”

에덴의 간부이자, 고위 아크 리치의 힘을 이어받았다는 망혼귀가 분명했다.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로군. 라온 지그하르트.”

망혼귀는 묵직한 음성을 흘리며 천천히 허공을 떠올라 인간들을 굽어보았다.

“저들을 이곳까지 데리고 와주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그가 아래를 향해 오른손을 뻗는다. 그의 손아귀에 들린 검은 구슬에서 아크 리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한 빛이 솟아올랐다.

“바로 돌아가지 않고 실험을 한 보람이 있군.”

라온은 태양처럼 거대해지는 보라색 광구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누군가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망혼귀였다니….’

빌어먹을.

타천이 한동안 포기한다는 말을 전해주었고, 멀린이 따로 찾아오지도 않아서 이 전쟁 뒤에 에덴이 있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아니야. 내 실수야. 오지 않을 거라고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됐어.’

멀린은 간부들에게 이런저런 개인 임무가 많이 떨어진다고 했었다.

에덴은 미친놈들의 집단이니, 타천의 말을 무시하고, 단독적으로 공격을 해올 수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었어야 했다.

‘하지만.’

역전의 발판이 없는 것은 아니야.

라온이 영혼의 밑바닥에 가라앉은 분노와 불의 고리를 동시에 끌어 올렸다.

쿠구구구구!

뼈와 피부가 뒤틀릴 정도로 거대한 격이 해방되며 손과 발을 잡고 늘어지던 검은 손이 으깨져 나갔다.

터어엉!

눅진한 땅을 박차고 망혼귀에게 뛰어올랐다.

백영섬으로 마법을 무효화하고, 진혼검으로 망혼귀의 목을 베려고 할 때 놈이 왼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멈추는 게 좋을 텐데?”

그 말과 함께 망혼귀의 왼손에서 유아와 율리우스가 나타났다.

두 아이는 기절한 듯 눈을 꾹 감은 채로 빨랫줄에 걸린 셔츠처럼 흔들렸다.

‘가짜? 아니, 생기가….’

가짜라고 믿고 싶지만 느껴지는 기척과 존재감은 진짜였다. 가짜라면 상관없지만, 진짜라면 벨 수 없다.

-파인애플 소녀가 맞느니라!

‘빌어먹을!’

라스의 말이라면 틀리지 않는다. 라온은 오러를 전력으로 운용하여 허공에서 억지로 몸을 멈춰 세웠다.

차악!

다시 발이 바닥에 닿자, 이전보다 더 큼지막한 검은손이 올라와 발을 억세게 끌어안았다.

“현명한 선택이다.”

망혼귀가 묵직한 음성 속에 비웃음을 담았다.

“이 아이들은 내가 직접 아리안 가문에 가서 데리고 온 아이들이니까.”

“네가 움직이는 걸 느끼지 못했는데?”

“사기 속에 숨어서 이동했으니까.”

그는 그걸 위해서 이 땅 전체 사기가 퍼지도록 만들었다고 말했다.

“너무 억울해하지 마라. 이 두 아이를 먼저 발견한 건 네가 아니라, 나니까. 내 입장에서는 네가 뺏어간 거였지.”

망혼귀가 유아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 아이는 내 생각보다 더한 그릇이더구나. 네 손에 타락했지만, 걱정 마라. 조만간 노래 하나로 수천의 인간을 죽이도록 만들어주지.”

그는 기대가 된다며 서늘한 웃음을 흘렸다.

“그럼 끝을 내도록 하지.”

망혼귀가 내민 구슬에서 다시 한번 거대한 빛이 일렁였다.

쿠구구구구!

백영섬과 진혼검의 마법 요혈로도 다 막을 수 없는 사기 자체로 짓누르는 힘의 발현이었다.

이미 라스의 도움을 받았기에 저걸 막을 방법이 생각나질 않았다.

‘다시 공격해야 하나? 아니, 그러면 율리우스를 방패로 쓸 수도. 하지만 가만히 있으면 모두 죽을 텐데….

머리가 깨질 듯이 복잡한데, 어떠한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고오오오오!

생각이 아직 정리되지 않았음에도 망혼귀가 만들어낸 사기의 광구가 떨어질 준비를 마쳤다.

‘어쩔 수 없어. 아껴두려고 했지만….’

끝까지 숨기려고 했던 신성력을 끌어올리려 할 때 청아한 바람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아니, 바람만이 아니다. 날카롭고 고고한 벼락의 향이 그와 함께했다.

‘설마….’

고개를 들어 올리니, 그는 이미 망혼귀의 뒤에 있었다.

붉은 머리의 엘프가 그어 내린 바람과 벼락의 칼날이 망혼귀의 육신을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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