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9화
라온은 쏟아지는 철우 속에서 서리연을 그었다. 은백색 섬광이 된 제천검 뒤로 냉기의 칼날이 따라붙는다.
콰과과과과!
서리연에 담긴 건 더이상 예리함과 속도만이 아니다. 무시무시한 힘의 파동에 언데드 무리가 썩은 과일처럼 터져나갔다.
화아아아아!
수십의 언데드를 베었음에도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 진혼검에 회천의 묘리를 담았다.
원망의 기운이 깃든 염열의 구체가 맹렬하게 회전하며 우측에 모여 있는 언데드들에게 쏘아졌다.
쿠와아아아앙!
강렬한 폭발을 일으키며 솟구친 화염 폭풍 속에서 살아남은 언데드는 단 한 마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 숫자를 줄여놔야 해.’
아크 리치는 힘의 우위를 드러내기 위해서 강한 언데드들을 전방에 배치해놨다.
오러와 체력 소모가 심하더라도 지금은 언데드 군단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혀 놔야 했다.
챠아아아앙!
라온은 성벽 위에서 쏟아지는 검기와 화살 세례를 믿으며 태화보를 밟았다.
언데드들의 중심으로 파고들어 제천검으로 청우, 진혼검으로 화령을 일으켰다.
우우우우웅!
청우가 퍼뜨린 장대한 검명에 언데드들이 고통을 느낀 듯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어서 허공을 뒤덮은 화염의 조각들이 언데드들의 머리통을 녹여버렸다.
라온이 말 그대로 언데드 군단을 학살하고 있을 때 그의 머리 위로 시꺼먼 문자가 새겨진 마법진이 떠올랐다.
‘마법진?’
이 언데드들을 조종하는 아크 리치의 마법이 분명했다.
파아아앙!
마법진에서 보라색 광선이 내리꽂힌다. 어마어마한 속도. 뒤로 물러나는 걸음에 태화보를 담았다.
콰아아아앙!
조금 전 밟고 있던 땅에 밑이 보이지 않는 구덩이가 생겨났다. 속도만이 아니라, 위력마저도 상상을 뛰어넘었다.
‘이 정도 거리에서, 이 위력이라면….’
최소 상귀.
죽음의 땅끝에서 이 정도 위력의 마법을 사용한 것을 보면 상귀라는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강함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이쯤에서 물러날까.’
이득을 챙길 만큼 챙겼고, 화살과 검기가 닿지 않는 곳까지 왔기에 지금은 물러날 때였다.
우우우웅!
하늘에서 두 번째 검은 마법진이 그려진다. 조금 전 마법이 아닌지, 문자가 달랐다.
“오늘은 여기까지.”
라온은 지금 이곳을 지켜보고 있을 아크 리치를 놀리듯 손을 흔들었다.
“잘 있어.”
바로 등을 돌려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으로 뛰었다.
-역시!
라스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성질 하면 라온 지그하르트지!
‘음?’
-본왕은 네놈만큼 인성질을 잘하는 인간을 보지 못했느니라. 네놈의 재능은 이 대륙이 아니라, 마계를 향해 있느니라!
녀석은 인간계에 있기 아까운 재능이라며 어깨를 두드렸다.
‘너나 돌아가라고.’
달라붙는 라스를 밀어내고, 대지를 박찼다.
쿠와아아앙!
뒤에서 일어난 거대한 폭발에 옷과 머리카락이 흔들린다. 리치를 놀리듯 그 바람을 타고 더 빠르게 성벽으로 올라갔다.
“후우….”
라온이 탁한 숨을 뱉으며 죽음의 땅을 내려다보았다.
‘제대로 망가졌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인간들에게 압도적인 공포를 주었던 언데드 군단의 전열이 완벽하게 무너져 있었다.
잡졸들처럼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있어서 어떠한 위협도 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대존잘 라온.”
루난의 부름에 뒤를 돌아보았다.
“야이 미친놈아!”
“사악하기 그지없네.”
“역시 마왕이라니까!”
“저 인성질을 우리만 당하는 게 아니라는 게 다행이야.”
“언데드라 반응이 없는 게 아쉽다. 백혈교나, 에덴한테 저랬으면 아주 난리가 났을 텐데!”
광풍단은 히죽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조금 전 창백했던 안색이 활력을 찾아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라온 님! 고생하셨어요!”
“뭐,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검술이었습니다.”
웬디와 프리카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얼굴에도 더이상 그늘이 보이지 않았다.
“역시 백검룡. 명불허전이네.”
베인더는 동료라도 되는 듯 여유로운 모습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우와아아아! 우리 별관의 자랑!”
“그게 칭찬이냐!”
“…….”
유아와 율리우스도 활짝 웃으면서 만세를 불렀다. 마크 괴튼은 고생했다는 듯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라온도 광풍단과 황전대, 그리고 레인저들의 밝아진 눈동자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제대로 먹혔어.’
언데드들을 몰아내는 것만이 아니라, 성벽 위의 기세도 최고조로 올랐다. 원했던 결과가 모두 이루어졌다.
“모두 조금만 더 버티면….”
마지막으로 희망이 깃든 말을 해주려고 할 때 성벽 위 허공에서 마법진이 돋아났다.
‘역시 왔군.’
아까 언데드가 모여 있는 곳에서도 마법을 쓸 정도이니, 당연히 이곳에도 발동시킬 수 있으리라 예상했다.
‘여기서 제대로 베어야 해.’
아크 리치라고 해도 이 먼 거리에서 마법을 마음대로 쓸 수는 없을 것이다. 확실하게 베어서 마법을 쓰면 오히려 손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찌지지직!
마법진에서 보라색 광선이 쏟아지려는 순간 진혼검을 비도처럼 쏘아냈다.
파아아앙!
마법 요혈이 운용된 진혼검의 칼날이 아크 리치의 마법과 마법진을 갈라버렸다.
찌지지직!
아크 리치가 소환한 마법진은 마법을 쏟아내지도 못한 채 마른 낙엽처럼 바스러졌다.
“해골 대가리가 멀리서 뭘 하든 소용없어.”
라온이 떨어지는 진혼검을 가볍게 잡았다. 입매를 말아 올려 이곳을 보고 있을 아크 리치에게 비웃음을 흘렸다.
‘이게 마지막 수.’
이 도발이 먹혀서 아크 리치가 직접 모습을 드러낸다면 이 싸움은 무조건 이길 수 있다.
‘다만 나오지 않고, 계속 소모전을 한다면….’
힘들 수도 있겠지.
* * *
이제는 죽음의 늪이 아니라, 죽음의 땅이라 불려야 하는 서쪽 끝.
늪에 잠겨 있던 세 개의 기둥은 본래의 모습을 드러냈는데, 검에 베인 듯한 상흔이 여러 개 새겨져 있었다.
텅 빈 안구에서 푸른 불꽃을 뿜어내는 아크 리치와 데스나이트는 기둥에 등을 기댄 채 큼지막한 유리구슬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저게 이 시대의 지그하르트인가.”
아크 리치가 구슬에 비치는 라온을 보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여전히 지독한 기운을 지니고 있군. 그놈을 보는 듯해.”
“그래. 아리안과 달리 여전히 핏줄에 힘이 깃들어 있다.”
데스나이트가 두 주먹을 맞댄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력만 있는 게 아니다. 어떻게 해야 전쟁을 이길 수 있는지 아는 놈이다.”
아크 리치가 로브 자락을 내리며 손에 든 지팡이를 매만졌다.
‘마법도 함부로 쓸 수 없게 만드는군.’
어린 지그하르트의 후예는 자그마한 단검으로 마법과 마법진을 가볍게 찢어버렸다.
장거리 마법에는 많은 마나와 정신력이 소모된다. 어떤 방식으로 마법을 깼는지 알 수 없기에 함부로 공격할 수가 없었다.
“다만 보기보다 체력과 오러의 소모는 심했을 거다. 다른 인간들도 마찬가지일 테고.”
“그럼 바로 치도록 하지.”
데스나이트가 고개를 끄덕이고서, 허리춤에 차고 있는 장검에 손을 얹었다.
“다시 전열을 갖춰라. 내가 선봉에 서서 저 성벽을 무너뜨려 주마.”
“알겠다. 지금 바로….”
“아니, 아니지.”
두 최상급 언데드가 직접 나서려고 할 때 그들의 뒤에서 망혼귀가 나타났다.
“그게 놈이 원하는 거야.”
망혼귀가 말을 하고 있음에도 데스나이트와 아크 리치는 뒤를 돌아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녀석은 지금 너희들이 와주기만을 바라고 있거든.”
그가 로브 안쪽에서 구슬을 꺼냈다. 샘물처럼 맑았던 구슬은 어느새 반 이상이 시꺼멓게 물들어 있었다.
“너희가 갈 게 아니라, 놈을 이쪽으로 불러야지. 그게 역사를 바꿀 수 있는 방법이다.”
망혼귀가 담백한 음성을 흘리며 구슬을 든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내가 조금 도와주마.”
구슬에서 피어난 검은 연기가 데스나이트와 아크 리치에게 스며들었다.
쿠구구구구!
두 언데드가 지닌 기운이 급격하게 강해지고, 죽음의 땅에서 피어나는 사기 역시 한층 더 지독한 악취를 뿜어냈다.
“일어나라.”
데스나이트와 아크 리치가 손을 들어 올렸다.
쿠구구구구!
죽음의 땅에 무너질 듯 거대한 진동이 일어나더니, 성벽 앞에서 죽어 나갔던 언데드들이 되살아나서 전열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래.”
망혼귀가 조금 더 검게 물든 구슬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을 말려 죽이는 게 너희가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가 쓰고 있는 아크 리치 가면의 안구에서 시퍼런 불길이 치솟았다.
“칼을 뽑을 시간은 내가 알려주도록 하지.”
* * *
라온은 물밀듯이 다가오는 하급 언데드들을 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무래도 머리가 돌아가는 놈인가 보네.’
성벽을 내려가서 언데드들을 학살하고, 아크 리치를 도발한 지 이틀이 지났다.
화가 솟구친 놈들이 직접 찾아올 줄 알았지만, 놈들은 이틀 동안 중하급 언데드들만을 보내서 소모전을 벌였다.
5일 동안 언데드의 시체가 쌓이고 또 쌓여 결국 성벽에 닿을 수 있는 낮은 구릉이 만들어질 정도였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야.’
라온이 입술을 깨물고 뒤를 돌아보았다.
“크으으….”
“빌어먹을! 대체 언제 끝나는 건데! 개미도 저렇게는 안 와!”
“자고…싶어….”
버렌, 마르타, 루난이 창백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두려움 같은 게 아니라, 5일간 제대로 자거나, 쉬지 못한 채 싸웠기에 체력과 정신력이 한계에 도달한 것이다.
“이, 이거 끝나기는 하는 건가?”
“우리를 말려 죽일 생각이야….”
“망할! 시체들 같으니!”
“제발 좀 그만 와라!”
광풍단 검사들은 조장들 이상으로 지쳐서 검을 쥔 손까지 떨었다. 잠은커녕 휴식도 제대로 취하지 못해 눈꺼풀이 반쯤 내려가 잇는 이들도 많았다.
“끄으윽….”
“자, 잠 좀….”
“끝이 안 나는군.”
광풍단이 저 상태였기에 황전대는 실신한 것처럼 무릎을 잡거나,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고, 레인저들은 탈진하여 쓰러진 이들도 많았다.
라온이 주저앉은 검사들과 레인저의 손을 보며 눈매를 찡그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직접적인 전투가 없었음에도 레인저와 검사들은 손에 피투성이가 된 붕대를 감고 있었다. 5일 동안 손에서 무기를 놓지 않았으니, 오히려 잘 버텼다고 하는 게 맞았다.
“여, 여긴 지옥이야….”
라온은 배 주머니에서 빨래 집게를 꺼내 눈두덩이에 찝은 도리안에게 다가갔다.
“도리안. 그거 받으면 받았다고 연락이 오지는 않아?”
“아쉽게도 그런 건 없어요. 말 그대로 일방이라….”
도리안은 눈을 찝은 빨래집게를 빼며 고개를 저었다.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것뿐이죠.”
“그렇군.”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성벽 앞에 섰다. 생각을 하는 지금도 언데드들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다른 방법을….’
-네놈부터 생각해라.
라스가 팔찌에서 나오며 인상을 구겼다.
-다른 놈들은 쪽잠이라도 잤지. 너는 5일째 안 자고 있지 않느냐!
녀석은 네놈이나 좀 쉬라고 말하며 동그란 주먹을 날려왔다.
‘걱정해주는 거야?’
-거, 걱정은 무슨! 네놈의 육체는 곧 본왕의 것이 될 테니, 함부로 쓰지 말라는 말이니라!
라스가 빠르게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외쳤다.
‘하긴 아까 백은의 오로라를 사용하면서도 은근슬쩍 분노를 넣더만.’
-허억! 그걸 어떻게….
‘그걸 모를 수가 있나.’
라온이 옅게 웃었다. 라스는 백은의 오로라의 발동을 도와주며 밀어 넣은 분노를 회수하지 않았다. 본인은 일부러 놔둬서 나중에 사용할 덫으로 삼으려고 했겠지만, 이미 다 알고 있었다.
-끄으응! 정말이지 도와주고 싶지 않은 놈이니라!
‘어쨌든 걱정해줘서 고마워.’
라스의 솜사탕 같은 머리를 두드리며 숨을 골랐다.
‘이 전쟁이 끝나면 먹고 싶은 거 다 사줄게.’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밥도 마음 편하게 먹지 못해서 제대로 차려 먹고 자고 싶었다.
-저, 정말이냐?
‘그래.’
-네놈이 웬일로….
‘대신이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분노를 받을 테니까. 오러와 체력을 회복시켜 줄 수 있지?’
-오러는 가능하다. 상처도 낫게 해줄 수 있지. 하지만 정신력은 무리다.
‘정신력….’
-지금 네놈은 조금도 자지 않은 채 이 성을 책임지고 싸우느라 정신력이 깎일 대로 깎인 상태이니라. 그것만큼은 본왕도 어떻게 할 수가 없느니라.
라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체력과 오러가 차올라도 정신력이 부족하다면 제대로 싸울 수 없느니라.
‘그렇군.’
맞는 말이다. 연공을 통해 조금씩 오러를 회복시킬 수는 있지만, 정신력은 회복되지 못한다. 다만 그걸 알고 있음에도 지금은 버틸 수밖에 없었다.
라온이 가늘게 한숨을 내쉴 때 웬디 아리안이 다가왔다.
“라온 님.”
웬디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이, 이제 성을 버리고 물러나는 게 어떨까요?”
그녀는 입술을 덜덜 떨면서 이 성을 버리자고 말했다.
“진심이십니까?”
웬디 아리안은 아리안 전체가 타락하고, 망가지고 있을 때도 가문을 살리기 위해서 홀로 검을 휘둘러 온 진짜 무인이다. 존경스러운 정신력을 가진 그녀가 이 성을 버리고 도망치자고 말한다는 건 그만큼이나 위기라는 뜻이었다.
“네. 성보다는 사람이 중요하니까요.”
그녀는 이미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지만 안 돼요.”
라온이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게 놈들이 노리는 겁니다.”
초대 아리안 가주가 만든 이 성에는 사기를 막아내는 효과가 있다. 혹시라도 성이 무너지거나, 밖으로 나간다면 땅에서 올라오는 사기를 버티지 못하고 일반인은 모두 죽게 되고, 검사와 레인저들도 지치지 않는 언데드에게 사냥당하게 될 것이다.
‘그 인간은 아직도 수련 중인 건가?’
답답함에 리메르마저 떠오를 때 휴식을 취하러 갔던 레인저 조장 프리카가 달려왔다.
“크, 큰일 났습니다!”
프리카는 이마에서 흐르는 식은땀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위겐 아리안과 간부들이 도망쳤습니다!”
“뭐?”
“감옥 문을 어떻게 열었는지 인질을 잡고 동쪽 성벽을 넘어서 도망쳤다고 합니다!”
“아….”
웬디 아리안이 절망한 듯 손톱을 물어뜯었다.
“뭐, 그런….”
라온이 프리카를 보며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그 정도의 쓰레기였다니.
아무리 밀려났다고 해도 본인 가문이 위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도망을 치다니, 믿기지 않는 추잡함이었다.
“도와준 건 누구지? 베인더인가?”
“전 아닙니다.”
프리카를 따라 올라온 베인더가 손을 저었다.
“전 숙소에서 쥐 죽은 듯 쉬고 있었습니다. 프리카가 증인이지요.”
“네….”
프리카는 그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얌생이 같은 인간이었지만, 그래도 가주가 도망쳤기 때문에 분위기가 좋지 않아요. 다 도망쳐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는 위겐과 간부들 때문에 하나 되었던 가문의 기세가 망가졌다며 이를 바득 갈았다.
“그렇겠지.”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못나도 가주였으니까.’
웬디가 새로운 가주가 되었다고 해도 결국 임시일 뿐이다. 미꾸라지처럼 살던 위겐 놈이 도망까지 쳤으니, 사람들의 사기가 떨어지는 건 당연했다.
“그 돼지 새끼는 내가 어떻게든 조진다!”
마르타가 참지 못하고 바닥에 주먹을 내리쳤다.
“하아….”
라온이 답답함에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뒤편에서 강대한 사기가 차올랐다.
‘설마?’
뒤를 돌자, 시꺼먼 구름이 일어나는 게 보였다.
쿠구구구구!
성 내부의 불안을 알아차린 것처럼 좀비와 스켈레톤 뒤에 숨어 있던 중상급 언데드 군대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끼이이이!
시작은 하늘에 떠 있던 스펙터다. 검게 물든 숨결을 내뱉어 우측 성벽 끝에 선 레인저들을 노렸다.
“루난!”
“응.”
라온의 부름에 우측 성벽 근처에 서 있던 루난이 땅을 박찼다. 발을 내디딤과 동시에 뻗어나가는 서리의 장벽이 레인저들의 앞을 막아섰다.
쩌어어엉!
사기의 숨결과 냉기의 벽이 맞부딪치며 동시에 사그라든다.
루난은 벽이 깨진 순간 허공으로 뛰어올라 두 번째 검을 펼쳐냈다. 빠르면서도 부드러운 서리의 검격에 뒤로 물러나려던 스펙터 두 마리의 몸이 반으로 갈라졌다.
다만 언데드들은 스펙터가 죽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전력으로 달려왔다.
쿠구구구구구!
구울과 스켈레톤 워리어가 중앙에서 뛰어들고, 듀라한 무리가 기사단처럼 돌진을 해왔으며, 좌측에는 세 기의 데스나이트가 붉은 화안을 밝혔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우측에서도 리치와 스켈레톤 메이지들이 나타나 마법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숨기고 있던 마법 병단이었다.
“마르타, 버렌.”
라온이 입술을 깨물며 마법 병단을 가리켰다.
“어떻게든 마법을 막아.”
“명대로 따르지.”
“너무 쉬운 일을 맡겼잖아!”
두 사람은 말과 달리 침중하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오러를 일으켰다.
콰과과과광!
리치와 스켈레톤 메이지들이 사기 짙은 마법들을 쏘아낸다. 버렌과 마르타는 바람과 대지의 기운이 깃든 검기를 쏘아내 허공에서 마법을 격추시켰다. 다만 폭발의 여파가 성벽으로 밀려오며 크고 작은 균열들을 만들었다.
“가주님은 계속해서 성벽 전체를 보호해주세요! 마크 경은 중앙에서 밀려오는 놈들을 부탁드립니다. 저는….”
라온이 좌측에서 돌진해오는 듀라한 무리에게 은빛 검격을 내질렀다. 가늘게 나아가는 검기 뒤로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강기가 튀어나왔다. 은검몽을 변형시킨 장거리 검격이었다.
촤아아아악!
소름 끼치는 절삭음과 함께 듀라한 여섯 기가 몸이 반으로 갈라져 땅을 굴렀다.
“큰놈들을 맡겠습니다.”
이번에는 우측으로 태화보를 밟았다. 좀비 100여 마리가 뭉친 듯한 키메라 좀비가 달려오고 있었다.
‘저놈이 다가오게 해서는 안 돼.’
검을 고쳐 잡으며 초고속의 검기를 날렸다. 하지만 시퍼런 검기가 닿기 전에 키메라 좀비의 몸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콰아아아앙!
바람을 밀어 넣은 듯 커지던 키메라 좀비는 검기가 닿기 전에 본인의 육체를 터트렸다. 시꺼멓게 물든 살과 뼈가 성벽을 향해 날아들었다. 자살 공격이라 불리는 시체폭발이었다.
치리이잉!
라온이 기울어진 성벽에 발을 디딘 채로 제천검을 쥔 손에 힘을 풀었다. 어둠을 지우며 풀려나간 백색 그림자가 성벽에 쏘아진 뼈와 살점을 모조리 녹여버렸다. 백영섬. 모든 기운을 지우는 검술로 폭발의 여파를 없애버렸다.
우우우우웅!
허공에 두 개의 마법진이 돋아난다. 숨을 내쉴 시간도 없이 성벽을 박찼다. 마법진에서 검게 물든 창들이 쏘아지려 할 때 강기를 두른 진혼검을 내리그었다.
촤아아아악!
마법 요혈이 운용되며 내리꽂히려던 마창과 마법진을 동시에 갈랐다.
“후….”
라온이 거친 숨을 내뱉으며 시선을 내렸다. 너무도 많은. 그것도 강화된 언데드 무리다 보니 검기를 뚫고 안으로 파고드는 놈들이 많았다.
‘음?’
검기는 날아가고 있지만, 끝없이 떨어지던 화살이 멈춰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레인저들이 활만 잡은 채 손을 떨고 있었다.
‘화살이 떨어진 건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웬디가 큰마음을 먹고 물자를 보충했어도 이 정도로 전투가 벌어질 줄은 몰랐으니까. 주민들이 나서서 화살을 만들어 준 덕분에 지금까지나마 버틸 수 있었다.
“창을 들어라!”
라온의 외침에 레인저들이 단창을 말아쥐고 성벽 앞으로 향했다.
“던져!”
“으아아아아!”
숙련도가 떨어졌지만 언데드가 워낙에 많아 단창은 구울과 스켈레톤 워리어의 머리통에 내리꽂혔다. 하지만 언데드의 진격은 멈추지 않았다.
콰아아아아아!
만화공으로 불길을 일으키고, 글래시아의 냉기로 얼음창을 만들어서 날렸지만, 홀로 언데드 전체를 감당하기에는 무리였다.
‘예상보다 빠르지만 어쩔 수 없어!’
라온이 물자를 관리하는 레인저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성수를 뿌려라!”
그 말에 레인저들이 아끼고 아껴두었던 성수의 뚜껑을 열고, 소금 물에 부었다. 그들은 빠르게 물을 섞고서 성벽 아래로 쏟아부었다.
촤아아아악!
하지만 언데드들은 성수를 뒤집어쓰고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빠르게 달려와 성벽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꾸드드득!
언데들에게 깃든 진한 사기에 성벽의 균열이 점점 더 벌어졌다.
“허억!”
“뭐, 뭐야….”
“서, 성수가 안 통한다고?”
“이건 말이 안 되는데!”
성수를 무시하고 다가오는 언데드들의 괴이한 모습에 레인저와 검사들이 턱을 덜덜 떨었다.
“저, 저거 가짜인 거 같아요.”
웬디가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저었다.
“가짜?”
“전 가주가 창고에서 뭘 판다고 하고, 엄청난 돈을 챙겼는데, 그게 진짜 성수였던 것 같아요.”
그녀는 설마 비축해둔 성수를 팔 줄은 몰랐다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
“가, 가짜 성수라니….”
“이게 말이 돼?”
성수가 가짜라는 말에 성벽의 사기가 한층 더 가라앉았다. 레인저만이 아니라, 검사들의 얼굴에도 그림자가 차올랐다.
“도리안!”
“필수품이니까 있어요! 근데….”
도리안이 검을 내려놓고, 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다시 꺼낸 녀석의 손에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유리병 다섯 개가 들어 있었다.
“이거 비싼 건데에에에!”
녀석은 꽃에 물을 줄 때 사용하는 물뿌리개에 성수와 소금물을 탄 후 성벽에서 아래로 뿌렸다.
끄어어어어어!
캬아아아악!
창과 화살, 검기에 맞아도 황소처럼 밀고 들어오던 언데드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나기 시작했다. 성벽을 파고들던 사기 역시 지우개로 지운 듯 사라졌다.
콰아아아아아!
언데드 마법 병단을 지휘하던 리치의 손에서 시꺼멓게 물든 광선이 쏘아졌다. 방향을 보니, 도리안을 노리고 있었다.
촤아아악!
라온이 역수로 든 진혼검을 내리그어 날아드는 마법을 베어냈다. 그대로 아래로 내려가며 제천검에 불의 의지를 담았다. 검극이 앞으로 쏘아짐과 동시에 뿜어지는 화룡의 숨결이 성벽에 접근하던 언데드들을 모조리 태워버렸다.
피아아앙!
공격을 하는 중에 스켈레톤 아처와 스켈레톤 메이지가 쏘아낸 마법과 화살들이 쇄도해왔다.
쩌저저정!
진혼검으로 마법을 베고, 제천검으로 화살을 베고 있을 때 좌측 성벽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올리니, 좀비 무리 속에 숨어 있던 데스나이트가 성벽 위로 뛰어 올라가 있었다.
챠앙!
루난이 빠르게 다가가서 레인저에게 떨어지던 검을 막았지만, 그녀 역시 지쳐 있었기에 바로 밀려났다.
라온이 발목부터 시작한 회전력을 손목까지 끌어 담아 천살비를 쏘아냈다.
피아아아앙!
무결비의 구결이 깃든 살기 짙은 칼날이 빛살이 되어 날아가 데스나이트의 두개골을 깨부쉈다.
“크으….”
라온은 폐가 아려오는 것을 참고 다시 성벽으로 올라갔다.
‘더럽게 힘드네.’
검을 쥔 손을 떨며 눈매를 찡그렸다. 성수와 염룡결로 인해 잠시 물러났지만, 시간 벌이일 뿐이다. 이쪽은 지칠 대로 지쳤지만, 저쪽의 전쟁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라온은 몰려드는 언데드와 꽉 닫혀 있는 성문을 바라보며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이제 남은 방법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