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398화 (398/653)

제398화

라온이 제천검을 휘돌리며 낮은 숨을 뱉었다.

시야 밖에서 죽음의 찬가를 부르짖던 언데드들이 몸을 돌리는 기척이 느껴진다.

수천이 넘는 언데드 군단이 동시에 발을 내딛자, 땅에 거대한 진동이 일어났다.

쿵! 쿵! 쿠웅!

사기로 가득 찬 걸음 소리와 진동이 안개를 가른다.

조금 전 염룡결에 녹아내린 좀비와 스켈레톤은 선봉조차 되지 않는다는 듯 수를 헤아리기 어려운 숫자의 언데드 군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좀비와 스켈레톤뿐이지만, 숫자가 너무 많아, 자연스레 입이 벌어졌다.

‘끝이 없군.’

광풍단과 황전대, 레인저들이 긴장과 두려움을 떨쳐냈는데, 다시 겁에 질릴 모양새였다.

라온이 어떻게 할까 고민할 때 뒤에서 버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부단주.”

버렌이 떨리던 입매를 끌어 올려 은은한 미소를 만들었다.

“몇 번을 말해야 돼! 광견이 아니라, 광풍이라고!”

그는 그만 좀 헷갈리라며 고개를 저었다.

“저 자식 일부러 저러는 거야.”

마르타가 한 발 앞으로 나오며 인상을 찌푸렸다.

“저 망할 자식 때문에 나도 나찰녀라 불리게 된 거라고!”

“아닌데? 마르타는 성격 때문인데?”

“닥쳐!”

마르타는 반박하는 루난에게 팔을 휘적였다. 그녀의 손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라온.”

루난은 마르타에게서 한 발 떨어진 후 라온에게 고개를 돌렸다.

“다 끝내고, 구슬 아이스크림 매장에 가자. 새로운 맛이 나왔대.”

그녀는 처음부터 긴장 따위 하지 않았다는 듯 맹한 눈을 깜박였다.

-새로운 맛?

“이 와중에 아이스크림….”

“진짜 부단장님이나, 조장님들은 긴장을 안 한다니까.”

“근데 광견 나름 괜찮지 않아? 난 광풍보다 멋있어 보이는데?”

“미친개가 멋있어? 넌 나찰녀도 멋있다고 하겠네.”

“그건 무서운 거지.”

광풍단원들도 미소를 지은 채 수다를 떨었다. 어마어마한 숫자의 언데드 군단을 보고도 압박을 느끼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겁먹을 필요 없다!”

웬디 아리안이 황전검대와 레인저들을 보며 주먹을 들어 올렸다.

“우리보다 저놈들을 잘 아는 사람은 없어! 이 땅에 손끝도 댈 수 없게 만들어라!”

그녀의 외침에 황전검대와 레인저들의 눈동자에 선명한 빛이 어렸다.

“맞는 말이야!”

“어차피 좀비와 스켈레톤뿐이잖아!”

“우리가 평생 싸워온 놈들이라고!”

“해보자!”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의지를 다지자, 언데드들이 일으키는 사기에 밀리지 않는 강대한 군기가 일어났다.

-걱정할 필요도 없었군.

라스가 볼을 꾹꾹 찌르며 씩 웃었다.

‘그러네. 내가 저들을 너무 무시했어.’

라온이 미소를 지으며 목소리에 오러를 실었다.

“전원 전투 준비!”

“전투 준비!”

광풍단의 눈동자에 샛노란 광기가 깃들고, 황전대의 손끝에 정심한 기운이 어린다.

레인저들도 활을 들어 올리며 매와 같은 눈동자를 번쩍였다.

쿵! 쿵! 쿵!

좀비와 스켈레톤은 이 성을 부술 공성 무기도, 성벽을 타고 오를 사다리도 챙기지 않은 채 다가왔다. 물량으로 뚫어버리겠다는 기세였다.

‘일반적인 전장에서는 멍청하다고 하겠지. 다만….’

저들에겐 충분히 효과적인 방법이야.

‘성벽은 약하고, 시체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죽음의 늪이 사라지면서 아리안 가문의 성벽은 본래보다 높아진 상태다.

언데드를 소환한 놈은 좀비와 스켈레톤의 시체를 쌓아서 이 성벽을 오를 계단을 만들려는 것이다.

언데드들은 강한 사기를 지니고 있기에 닿는 것만으로도 낡고 약해진 성벽에 균열을 일으킨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언데드 군단이 성벽에 다가오기 전에 쓰러뜨려야 한다.

라온은 흐느적거리며 다가오는 좀비와 스켈레톤을 보며 손을 들어 올렸다.

찌이이익!

레인저들이 활시위에 화살을 걸고, 검사들이 오러를 일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좀비와 스켈레톤이 화살의 사거리 안으로 들어온 순간 손을 앞으로 뻗었다.

“쏴!”

“쏴라!”

웬디 아리안이 복명복창하며 검을 내질렀다.

피아아아앙!

한순간에 백여 개의 활시위가 풀리며 은백색 빗물이 하늘을 가득 채웠다.

파바바바박!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철우가 좀비와 스켈레톤을 휩쓸었다. 일격에 죽은 언데드들도 많았지만, 죽지 않은 놈들도 상당했다.

레인저들이 다시 시위에 화살을 걸고, 손가락을 튕겼다. 또 한 번 허공을 가득 채운 화살이 떨어져 좀비와 스켈레톤의 악의를 꿰뚫었다.

강한 힘이 깃든 화살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지만, 워낙에 많은 숫자가 다가오고 있기에 화살 비를 뚫고 접근하는 언데드도 많았다.

라온이 광풍단과 황전대를 보며 제천검을 들었다.

“최대한 오러를 아끼면서 검풍을 날려. 머리를 노린다면 가는 바람으로도 놈들을 죽일 수 있다.”

붓을 내리긋듯 붉게 물든 제천검을 그었다. 달아오른 검신에서 피어난 꽃잎이 바람을 타고 퍼져나가 성벽으로 다가오는 언데드 무리에게 쏟아졌다.

화아아아아아아!

벚꽃처럼 흘러내린 불꽃의 조각들은 화염 장벽이 되어 언데드들을 지워버렸다.

고오오오오!

신기와도 같은 검술에 성벽 위의 사기가 한 번 더 충천한다.

“접근조차 할 수 없게 만들어!”

버렌이 발을 구르며 삭풍검을 내리쳤다. 오러를 최소한으로 줄였음에도 뻗어나가는 바람에 섬뜩할 정도의 날카로움이 깃들었다.

촤아아악!

우측에서 다가오던 언데드들은 몸체가 반으로 잘린 채 쓰러졌다.

“뼈다귀 새끼들! 모조리 우려주마!”

마르타가 이를 갈며 검을 내리친다. 그녀는 답답함을 참고, 오러 소모가 가장 적은 검술만을 펼쳤지만, 워낙에 힘이 좋아 일격에 언데드가 다섯 마리씩 뭉개졌다.

“아이스크림의 원수.”

루난이 미끄러지듯 검을 내지른다. 검날에 어린 서리가 퍼져나가 선두에 선 언데드들의 발을 얼렸다.

부드드드득!

걸음이 멎은 언데드가 진로를 방해하며 좀비끼리 서로 이를 드러내고 부대끼기 시작했다.

“우리도 가자!”

광풍단도 성벽에 달라붙은 채 검풍을 내리쳤다.

전투가 길어지고 있음에도 이마에서 땀 한 방울 흐르지 않는다.

라온은 영약을 먹이고 지옥 훈련을 시킨 보람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러가 떨어진 사람은 물러나서 체력을 회복하고 오도록.”

라온이 끝없이 밀려드는 언데드들에게 검풍을 날리며 가는 미소를 흘렸다.

“이 전쟁은 하루 안에 끝날 게 아니니까.”

* * *

프리카가 활시위를 튕겼다.

피아아앙!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진 화살이 좀비와 스켈레톤의 머리통을 뚫고 지나갔다. 놈들은 머리가 뭉개진 채 바닥으로 기울어졌다.

“후욱….”

거친 숨이 차오른다. 얼마나 화살을 날렸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저 화살통에 있는 화살을 던지고, 통이 비면 다시 화살을 채우길 반복했을 뿐이다.

“크윽….”

다시 활시위에 화살을 걸려고 하는데, 중지가 찢어질 듯 아려왔다.

활 쏘는 연습을 계속해왔지만,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연달아 화살을 날린 적은 없기에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프리카는 입술을 꾹 깨물고, 손가락의 위치를 바꾼 후에 다시 화살을 쏘아냈다.

활을 계속 잡아 온 보람이 있는지, 화살은 목표한 대로 스켈레톤의 머리를 정확하게 꿰뚫었다.

지쳐서 떨리는 무릎에 힘을 주며 옆을 보았다. 하루가 지나고 또 해가 지기 시작했음에도 좀비와 스켈레톤 무리는 끝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조장, 조원 가릴 거 없이 모두 지쳐서 화살을 쏘는 속도가 느려졌고, 검사들 역시 힘이 빠져 검이 흔들렸다.

그럼에도 검사와 레인저 중 누구 하나 무기를 놓는 사람이 없었다. 지쳤음에도 검풍을 긋고 활을 쏘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이들이 억지로라도 버티는 이유는 하나다.

‘라온 지그하르트.’

프리카가 시선을 들어 올려 성벽 가장 앞에 서 있는 남자의 등을 보았다.

‘저 사람이 버티고 있으니까.’

라온은 가장 앞에서 누구보다 많은 언데드들을 쓸어버렸다.

솔직히 말해서 라온 한 명이 쓰러뜨린 언데드가 레인저, 광풍단, 황전대 모두가 쓰러뜨린 것보다 더 많을 것이다.

‘저렇게까지 해주시는데, 내가 포기할 수는 없지. 그리고….’

라온 옆에서 검을 휘두르는 웬디 아리안을 보았다.

‘저분까지도.’

솔직히 말해서 웬디라는 사람의 의지는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무력은 그리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마스터라고 해도 실전 경험이 별로 없으니,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웬디는 라온에게 밀리지 않을 정도로 수많은 언데드들을 베고, 또 베어 성벽의 사기를 드높였다.

아리안에서 유일하게 가문의 의지를 지키려 한 검사다웠다.

‘왠지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굳건한 라온과 웬디의 등을 보자, 이 가문이 바뀐 것처럼 언데드 군단의 돌진도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프리카는 핏물이 흐르는 손가락에 시위를 걸고 화살을 튕겼다.

피아아아앙!

시원하게 쏘아진 화살이 어둠을 가르고 언데드의 머리를 박살 냈다.

* * *

라온은 가라앉는 태양을 바라보며 눈매를 좁혔다.

‘정말 끝이 없군.’

태양조차 떠오르는 시간이 정해져 있는데, 언데드의 진격에는 끝이 없었다.

‘아니, 이제 시작인가.’

-그렇느니라. 아직 멀었지.

좀비와 스켈레톤의 벽 너머에 더 강력한 사기를 두른 놈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마 구울과 스켈레톤의 상위종이겠지.’

놈들은 좀비와 스켈레톤을 씹어먹으면서 더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라온이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시체의 언덕이라….’

스켈레톤과 좀비들은 성벽에 닿지 못하고 쓰러져 성 앞에 시체들의 언덕을 만들었다.

다만 앞으로는 지금처럼 쉽게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이제부터는 사상자도 각오해야 했다.

“도리안.”

“네에….”

라온의 손짓에 도리안이 다가왔다. 그 역시 지쳤는지 동그란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었다.

“그건 보냈지?”

“네. 근데 전에도 말했듯이 무조건 도착한다는 보장이 없어요. 중간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도 있거든요.”

도리안은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몇 개는 갈 테니까.”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손가락에 낀 반지를 매만졌다.

‘정 안 되면 이걸 써야겠지.’

반지는 체임버에게 받았지만, 사용법은 리메르에게 들었다. 이번 일. 아니, 광풍단의 마지막 보루였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 웬디 아리안에게 다가갔다.

“황전대주님.”

“네!”

웬디는 지쳤음에도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서류 업무를 할 때보다 훨씬 생기 있는 표정이었다.

“감옥에 넣어둔 간부 중에 전투에 참여할 사람이 있으면 데리고 오세요.”

“예? 그, 그들을 왜….”

“이독제독. 더러운 것들도 도움이 될 때가 있으니까요.”

베인더를 포함한 몇몇 간부들은 전투에 도움이 될 것이기에 식충이처럼 놔두기보다 써먹는 게 맞았다.

라온은 뒤를 돌아서 광풍단과 레인저, 황전대를 보았다.

“모두 두 시간만 쉬고 돌아와. 이게 아마 마지막 휴식이 될 테니까.”

“라온은?”

루난이 바로 고개를 들었다.

“나는 싸우면서 회복이 가능하니까. 괜찮아.”

이곳에서 조금이나마 싸우면서 회복할 수 있는 건 라온 혼자 밖에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 부단주님만 놓고 가요!”

“그래! 지금도 무리하고 있잖아.”

“반반씩 쉬는 게….”

라온이 대답하지 않고 글래시아의 냉기가 담긴 광아검을 내리쳤다.

화아아아아!

바닥이 은빛으로 물들며 틈을 노리고 다가오던 좀비와 스켈레톤이 모조리 얼어붙었다.

따악!

손가락을 튕기자, 얼어붙은 언데드가 박살 나며 뿜어진 얼음 조각들이 다른 언데드들을 고슴도치로 만들었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야.”

라온이 파리를 쫓듯 손짓했다.

“이건 명령이다. 시간이 없으니, 빨리 가서 쉬고 와.”

* * *

완전히 해가 떨어지고, 밤이 찾아왔을 때 레인저와 검사들이 돌아왔다. 제안을 받아들였는지 베인더를 포함한 몇몇 간부들도 함께였다.

다만 모두는 체력과 오러를 회복하고 왔음에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오히려 성벽을 내려갈 때보다 더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라온이 그들의 반응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겠지.’

지금부터가 진짜라는 걸 알았을 테니까.

좀비와 스켈레톤의 숫자가 줄어든 대신 상위종인 구울과 스켈레톤 워리어가 무서운 사기를 흘리며 다가온다.

끼아아아악!

검게 물든 천공에서는 기괴한 형체 유령이 날아다녔고, 양옆에서는 시꺼먼 갑주를 두른 채 흑마를 탄 듀라한이 날뛰었으며 용아병이라 불리는 스파토이도 어둠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마지막으로 시체들이 뭉쳐서 만들어진다는 키메라 언데드까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라온은 죽음의 기운이 넘실거리는 진짜 언데드 군단을 보며 입술을 꾹 씹었다.

‘이건 쉽지 않겠군.’

성벽 위에서 검사와 레인저가 싸우고, 성벽 아래에서 주민들이 전력을 다해 보조를 해주고 있었지만, 벽이 뚫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래도 해야겠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전원 전투 준비!”

“전투 준비!”

레인저와 광풍단, 황전대가 다시 성벽의 끝에 섰다. 그들은 언데드들이 일으키는 죽음의 기운에 질려 손을 떨면서도 활과 검을 들어 올렸다.

언데드들은 좀비와 스켈레톤처럼 무식하게 돌진하지 않았다. 제대로 전열을 갖추고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쿵! 쿵! 쿠웅!

걸음 소리마저 이전보다 훨씬 무겁게 들려온다. 주변 사람들이 긴장한 심장 소리가 크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두웅!

라온이 손을 내려서 화살을 날리게 하려 할 때 언데드 군단의 걸음이 뚝 멈췄다.

개미 떼처럼 모인 언데드 군단의 중심이 갈라지며 텅 빈 안구에 녹색 안광을 일으킨 데스나이트가 걸어 나왔다.

“지그하르트와 아리안의 인간이여.”

데스나이트의 턱이 열리며 심해에서 올라온 듯한 괴기스러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일대일 결투을 제안한다.”

그 말과 함께 데스나이트의 뒤로 바위만 한 크기의 스파토이와 듀라한 그리고 두 마리의 데스나이트가 걸어 나왔다.

“어?”

라온이 눈을 부릅떴다.

‘언데드가 일대일 결투를?’

본격적인 전쟁을 치르기 전에 간부급 무인들이 일대일 결투를 벌여서 아군의 사기를 높이는 경우가 있다.

지금 저 언데드들이 말하는 게 바로 그 결투 같았다.

“저, 저거 지금….”

“우리랑 일대일 결투를 벌이자고 하는 거야?”

“어, 언데드가?”

“미친….”

광풍단은 언데드가 말을 하는 것으로 모자라, 인간처럼 일대일 결투를 하자는 것에 놀라 손을 떨었다.

“예, 예전에….”

웬디 아리안이 옆으로 다가왔다.

“이런 일이 있었다고 들었어요.”

“예전이라면 설마….”

“네. 지그하르트와 아리안의 초대 가주가 함께 싸운 전쟁에서도 언데드들이 일대일 결투를 신청했었다는 기록이 있었어요.”

그녀는 지금 다가오는 언데드들이 그때의 괴물들 같다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렇군.”

라온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처음에 생각했던 대로 저 언데드들을 소환한 건 지그하르트 선조가 처리했던 아크 리치였던 모양이다.

‘역사를 뒤집겠다는 건가.’

놈들은 천 년 뒤의 후예들에게 복수하려는 것 같았다.

“기록에서 저 일대일 결투는 어떻게 되었죠?”

“지그하르트와 아리안에서 다섯 명이 나가서 5승을 했다고 들었어요.”

“역시.”

지그하르트를 세운 그 남자라면 이길 수 밖에 없는 대결을 했으리라 생각이 되었다.

“누가 나가지?”

“당연히 라온이 나가야지.”

“걘 마지막이니까. 말할 필요도 없고.”

“그럼 마크 경이랑 황전대주님도 나가야 하니까 2자리뿐인가?”

“그럼 내가!”

“아냐. 나야.”

단상 위의 검사들은 누가 나갈지를 떠들기 시작했다. 당연히도 루난, 마르타, 버렌이 서로 나가겠다고 싸웠다.

라온은 그들의 말이 끝나기 전에 성벽 위에서 뛰어내렸다.

“라온?”

“아직 안 정해졌어!”

“이 미친놈아! 너 혼자 가면 어떻게 해!”

루난과 버렌, 마르타가 불렀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고 언데드 군단 앞으로 다가갔다.

“네가 선봉인가.”

결투를 신청한 녹색 화안의 데스나이트가 턱을 비틀었다.

“아니.”

라온이 차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만화공의 기운을 끌어 올리며 검병에 손을 얹었다.

“내가 선봉이자, 대장이다.”

진각을 밟으며 제천검을 뽑았다. 발검과 동시에 피어나는 불꽃의 파도가 지평선을 따라 솟아올랐다.

만화공 백화.

염해무결.

일대일 결투를 위해서 나온 상위 언데드들만이 아니라, 그 뒤에서 전열을 지키던 언데드들의 목에 시뻘건 선이 그어졌다.

콰아아아아아아!

붉은 선을 가르며 뿜어진 거대한 불꽃의 파도가 전방에 있던 언데드들을 모조리 휩쓸었다.

“비린내 나는 언데드 주제에 결투를 입에 담지 마라.”

라온이 불길이 어린 제천검을 내리며 차디찬 미소를 흘렸다.

끄르르륵….

키으으으….

사악하기 그지없는 언데드들 조차 결투를 망가뜨릴 줄 몰랐는지, 뒤편의 전열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와아.

라스가 헉 소리를 내며 튀어나왔다.

-뭔 놈의 인성이….

녀석은 이게 정말 인간이 맞냐며 입을 떡 벌렸다.

‘저놈들이 먼저 시작한 거잖아.’

늪의 파도를 보내서 모조리 밀어버리려고 해놓고 이제 와서 정당한 척하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어….”

“저, 저래도 돼?”

“몬스터조차 기겁하는 인성이라니….”

“광풍단. 아니, 광견단의 주인 답네.”

“라온 존잘!”

광풍단도 응원을 하기보다 질렸다는 듯 턱을 떨었다.

일대일 결투에서 비겁한 수를 썼음에도 성벽의 사기는 지금까지 중 최고로 차올랐다.

라온이 만족하고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죽음의 땅끝에서 거대한 기운이 밀려왔다.

크아아아아아아아!

악의로 가득 찬 포효. 야수연맹의 무학 광룡음처럼 어둠의 기운이 가득 실린 울음이 아리안 가문을 향해 날아들었다. 최상의 언데드가 펼친다는 사자의 외침이었다.

라온은 글래시아를 운용하며 진혼검을 뽑았다.

까드드득!

검집을 깎으며 솟아오르는 샛노란 요기의 칼날이 원망의 괴음을 터트렸다.

콰아아아아아!

혈우가 뻗어나가 사자의 외침의 악의를 잡고 끌어내렸다.

쿠와아앙!

라온은 사자의 외침을 지운 즉시 하늘을 찌를 듯이 들어 올린 손을 내리쳤다.

피아아아앙!

강렬한 파공음과 함께 은빛 화살과 검풍이 전장으로 쏟아져 내렸다. 지휘체계가 무너진 언데드 군단이 방비를 갖출 새도 없이 쓰러져 나갔다.

라온이 언데드 군단을 쓸어내리는 화살 세례를 보며 서슬 퍼런 눈동자를 빛냈다.

“미안하지만 역사는 반복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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