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6화
도리안이 뒤를 보며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전 아무것도 안 했어요! 진짜에요! 두개골이 지 혼자 빠개진 거라구요!”
그는 데스나이트 두개골이 부서진 것과 본인은 아무 상관이 없다며 손을 마구 흔들었다.
버렌이 고철처럼 찌그러진 위겐의 옥좌를 가리켰다.
“아까 라온이 의자를 뭉갤 때 같이 부서진 거 아니야?”
“아, 맞네! 부단주님이 부순 거네요!”
도리안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부단주 파괴왕 시절에 화나면 다 부수고 다녔잖아요! 이번에도 거기 걸렸나 보네!”
그는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버렌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마르타가 호기심이 동한 듯 단상 위로 올라갔다.
“아니야.”
그녀는 가루가 된 데스나이트의 두개골을 확인하고서 고개를 저었다.
“저놈의 힘이 무식하게 센 건 맞지만, 이건 지금 다른 힘으로 깨진 거야.”
“맞아.”
어느새 단상 위에 올라가 있던 루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에 안쪽에서 폭발이 일어났어.”
루난은 어디선가 구해온 나뭇가지로 데스나이트의 두개골이었던 가루를 문지르며 입맛을 다셨다.
“으이익….”
도리안은 마르타와 루난의 증언에 겁을 집어먹고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살려주세요!”
그는 바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라온은 도리안이 아니라, 루난이 나뭇가지로 찌르는 두개골 가루를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루난의 말대로야.’
두개골의 내부에서 타오른 죽음의 기운이 뼈를 모조리 태워버렸다.
다만 갑자기 왜 사기가 나타난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라스.’
-왜 부르는 것이냐.
라스가 팔찌에서 흘러나오며 귀찮다는 듯 하품을 했다.
‘저 두개골에서 왜 죽음의 기운이 터진 건지 알아?’
-본왕이 모르는 것 따위는 없느니라.
‘그럼 왜….’
이유를 물어보려고 할 때 라스가 동그란 손을 까딱거렸다.
‘음?’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는 법이니라. 여긴 포도와 블루베리 요리가 유명하다더구나. 먼저 포도잼을 바른 샌드위치와 블루베리가 들어간 파이부터….
라스는 콧노래를 부르며 이곳에서 유명한 음식들을 나열했다. 저걸 또 언제 다 들어서 기억하고 있는 건지 참으로 신기한 녀석이다.
‘다 먹어줄게.’
선택권이 없기에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
‘알겠으니까. 설명해 봐.’
-커험!
라스는 괜히 헛기침하고서 시선을 들었다.
-데스나이트의 두개골에서 사기가 터진 이유는 연결이 끊어졌기 때문이니라.
‘연결이 끊어져? 그럼 설마….
-그렇느니라. 그 데스나이트를 소환한 놈이 따로 있다는 뜻이니라.
‘아….’
라온이 라스를 보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게 더 자연스러워.’
초대 가주 이후로 수백 년 넘게 아무런 변화 없던 죽음의 늪이 지금 와서 변한 것보다 누군가가 손을 썼다는 게 더 그럴듯해 보였다.
‘누가 데스나이트를 소환한 거지?’
-모르느니라.
‘그럼 소환자는 어디에 있어? 우리가 갔던 그 기둥에 있는 건가?’
-그곳에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
‘어?’
-이런 간단한 조작은 아주 먼 곳에서도 가능한 일이니라. 즉, 본왕도 모른다는 거지.
라스는 데스나이트와 연결을 끊어버린 거라 위치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조금 전에 모르는 거 없다며.’
-이것만 모르느니라!
녀석은 있지도 않은 콧대를 높이며 아주 당당하게 모른다고 대답했다.
“후….”
라온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일부터 밥은 나딘 빵이다.’
-그, 그게 무슨 헛소리냐! 블루베리 파이는 어디로 간 것이냐!
‘나딘 빵이나 드셔. 중요한 건 아무것도 모르면서.’
위치도, 정체도 모르면서 왜 다 아는 척을 한 건지 모르겠다.
-잘 모른다는 걸 알지 않느냐! 이거 굉장히 중요한 요소….
‘조용히 해.’
라온은 발버둥 치는 라스를 밀어내고, 벽에 박힌 아리안 가문의 표식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데스나이트를 소환한 놈이 따로 있다는 말을 듣자, 주디엘에게 들었던 정보가 떠올랐다.
‘리치와 싸웠다고 했지.’
수백 년 전 죽음의 늪에서 초대 지그하르트 가주와 초대 아리안 가주가 힘을 합쳐서 싸운 건 데스나이트가 아니라, 아크 리치였다.
라온이 그 정보를 되새기며 구석에 박혀있는 위겐에게 다가갔다.
“위겐 아리안.”
“무, 무슨 일이십니까!”
마르타에게 얻어맞은 덕분인지 바로 존대가 튀어나왔다.
“지그하르트 초대 가주와 아리안 초대 가주가 아크 리치와 싸웠던 일에 대해 말해 봐.”
“예?”
“이 가문이 세워진 역사를 말해보라고.”
“저, 저는 그걸 잘 모르는….”
“허.”
라온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아는 게 신기한 일이지.’
가주라는 놈이 가문의 역사를 모르고 있니, 아리안 가문이 이 모양 이 꼴로 망가지는 게 당연했다.
“그건 제가 알고 있습니다.”
뒤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베인더가 손을 들어 올렸다.
“당신이 안다고? 외부에서 들어왔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니까 더욱 잘 알아야죠.”
베인더가 멍이 든 눈두덩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강 말씀드리자면 라온 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지그하르트와 아리안의 초대 가주는 수하들과 함께 수많은 언데드들을 뚫고 들어가 죽음의 늪 끝에 있던 아크 리치와 싸워서 승리했습니다.”
그가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이후에 지그하르트 초대 가주가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아리안 가문의 초대 가주에게 이곳을 지켜달라고 했죠. 그래서….”
베인더는 아리안 가문의 역사에 관한 몇 가지 사실들을 더 말해주었다. 그는 의외로 이 가문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걸 아는 사람이 한 번도 정찰을 안 나간 건가?”
“아는 것과 행하는 건 다르니까요.”
아무것도 모르는 위겐도, 알면서 움직이지 않은 베인더도 참으로 한심한 놈들이었다.
“저게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마르타가 단상에서 뛰어 그대로 발차기를 후렸다.
뻐어어억!
갑옷이 뭉개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베인더가 벽에 처박혔다.
“이 얍실한 새끼들!”
라온은 다시 간부들을 패는 마르타를 뒤로 하고, 검집을 툭 두드렸다.
‘여기가 정리되면 혼자서라도 늪에 가 봐야겠어.’
라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걸 보면 당시 죽음의 늪에는 데스나이트를 소환한 놈이 없었을 것이다.
다만 데스나이트의 두개골을 부순 것을 보면 놈은 다시 늪에 찾아와 더 큰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아리안 가문을 떠나기 전에 혼자서라도 늪을 수색해봐야 할 것 같았다.
‘그 전에….’
라온이 뒤를 돌아서 손뼉을 쳤다.
“집합.”
집합이라 말하자, 이곳저곳에 늘어져 있던 광풍단이 서늘한 눈빛을 일으키며 모여들었다.
“이제 약속을 지킬 때다.”
“약속?”
“무슨 약속?”
광풍단은 무슨 말을 하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희 데스나이트 못 잡았잖아.”
“아니, 그걸 어떻게 잡아!”
“점점 강해져서 버티는 것도 힘들었다고!”
“심술쟁이….”
버렌과 마르타, 루난이 처음부터 안 되는 일이었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난 잡았는데? 그것도 한 방으로.”
어깨를 으쓱이자, 광풍단이 입을 다문 채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래도 어려운 수련은 아니야.”
라온이 광풍단과 마크 괴튼을 보며 서늘한 미소를 흘렸다.
“딱 한쪽만 죽는 서바이벌이니까.”
* * *
지그하르트 가주전 알현실.
로엔이 옥좌 앞에 놓인 원형 테이블에 하얀색 찻잔을 내려놓았다.
“바렌스로 우린 차입니다.”
그는 주홍빛이 피어나는 찻물을 내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찻잎이 녹아내리는 소리와 함께 감미로운 향이 퍼져나갔다.
“바렌스? 찻잎을 바꾼 건가?”
글렌이 점차 색이 진해지는 차를 보며 눈매를 내렸다.
“예. 바렌스로 우린 차는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전에 마시던 것도 나쁘지 않았는데.”
“요새 잠을 못 주무시는 것 같아서 바꿔봤습니다.”
로엔이 차를 젓던 티스푼을 내려놓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음, 그런가.”
“예. 이 차를 마시면 아리안 가문에 가신 도련님들에 대한 걱정이 조금이나마 가실 겁니다.”
“크흠!”
글렌이 크게 헛기침하면서 손을 저었다.
“무, 무슨 말인가. 그건 시험이야. 녀석들이 어찌 되든 관심 없네!”
“그런 것치고는….”
로엔이 어깨를 으쓱이고서 우측 창문을 가리켰다.
“요즘 하루 종일 창밖만 바라보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럴 거면 한 번 다녀오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합니다.”
“끄음….”
글렌은 고민하는 듯 인상을 찌푸리다가 로엔의 눈동자에 웃음이 깃드는 것을 느끼고 팔걸이를 쿵 쳤다.
“말했지않나! 라온이 어찌 되든 아무 상관없다고.”
“후후.”
로엔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저도 라온 도련님이 이번 임무의 진의를 파악할 수 있을지 조금 궁금해서요.”
“흠.”
글렌이 눈빛을 가라앉히며 차를 마셨다.
“대는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여야 할 임무를 맡게 되지. 권한을 넘겨줬는데도, 이번 일을 처리 못 할 정도라면 아직 대를 운영할 그릇이 못 된다는 뜻이야.”
“아, 라온 도련님이 대를 맡아서 제대로 운영할 수 있을지를 걱정하신 거군요.”
“끄응, 아니라니까!”
그는 정말 관심 없다는 듯 손을 저었다. 다만 손등에서 땀이 흐르는 건 감추지 못했다.
로엔은 그런 글렌의 손을 보며 얇은 미소를 지었다.
“저는 왠지 라온 도련님이 아리안 가문을 뜯어고치고 돌아오실 거라 생각….”
그가 라온이 임무를 잘 마치고 돌아올 거라고 말할 때 알현실의 아치형 문이 거세게 열렸다.
문 앞에 서 있던 붉은 머리의 엘프가 본인의 방이라도 되는 듯 당당한 걸음으로 알현실에 들어섰다.
“둘 다 있구만!”
리메르의 머리는 산발이었고, 옷은 페드릭처럼 넝마가 되어 있었다. 다만 그의 눈동자는 산속의 호수처럼 맑으면서 고요했다.
“흠….”
글렌은 거지꼴이 된 리메르를 훑어 내리며 옥좌의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이제 조금은….’
제 모습을 찾은 건가.
그 동굴에서 나왔다고 해도 이전과는 격이 다른 기세가 느껴진다. 인공 단전도 안정되었고, 그 안에 어린 기운들도 제 자리를 잡았다.
예전 광검이라 불리던 리메르가 떠오를 정도라 작은 미소가 지어졌다.
“연무장에 애들 없던데 어디 갔어요?”
“네놈이 나오질 않아서 두 번째 시험을 내렸다.”
“어?”
리메르가 헉 소리를 내며 폴짝 뛰었다.
“정말요?”
“그래. 네놈이 너무 오래….”
“우와, 다행이다!”
그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히죽 웃었다.
“막상 수련은 끝났는데, 임무 나가기 귀찮더라구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다 끝났네!”
리메르는 일부러 시간을 끈 보람이 있다며 콧노래를 불렀다.
“허허허….”
로엔은 리메르의 미래를 짐작한 듯 특유의 웃음을 흘리며 뒤로 물러났다.
“가주님.”
리메르는 조용해진 글렌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사실 라온 녀석 혼자서도 웬만한 임무는 다 처리할 수 있거든요. 놔두면 알아서 해결하고 올 겁니다.”
그는 깍지를 낀 손으로 뒷머리를 잡으며 미소를 지었다.
“후….”
글렌이 나가려던 손을 억지로 멈추고 한숨을 뱉었다.
“그래도 네놈이 단주잖느냐. 대주까지는 하고 싶다고 했으니, 지금이라도 가 보거라.”
“예에?”
리메르는 귀찮다는 듯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그으으, 아리안 가문이 멀기도 하고, 끈적거리고, 습도도 높아서 제 취향이 아닌….”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명백한 거절 의사를 내비칠 때 알현실 천장에 시뻘건 뇌기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어…?”
리메르는 공간을 찢는 스파크를 보며 입을 벌렸다.
“나, 나오자마자?”
“내가 잘못 봤군.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글렌이 차가운 인상을 굳힌 순간 알현실 천장을 가득 메운 뇌기가 쏟아졌다.
파아앙!
그 순간 리메르의 두 눈이 번쩍였다. 오른손에 바람, 왼손에 뇌기를 두른 채 쏟아지는 벼락을 향해 두 손을 내질렀다.
파지지지직!
그는 낙뢰와 맞닿는 순간 손을 부채처럼 펼쳐서 글렌의 뇌기를 반으로 가른 뒤 대지로 흩어지게 만들었다.
치이이익!
글렌의 뇌기가 흘러간 바닥이 시꺼멓게 그을렸다.
“캬아아!”
리메르가 양손을 보며 시원한 탄성을 흘렸다.
“머릿속에서 생각만 했던 건데 진짜 되잖아!”
그는 아직 몸에 남아 있는 글렌의 뇌기를 받아들이며 헤죽 웃었다.
“허. 허. 허….”
로엔도 이런 상황이 벌어질 줄은 몰랐던지 웃음이 뚝뚝 끊어졌다.
“흠.”
글렌은 그리 놀라지 않은 채 리메르의 손을 보며 옅게 웃었다.
“이제야 좀 봐줄 만하군. 사실 너무 늦었….”
“가주님도 늙으셨나 보네요. 별로 찌릿거리지도 않으니.”
리메르는 팔짱을 낀 채로 껄껄 웃었다. 거만하게 말아 올린 입꼬리는 덤이었다.
“이러다가 내가 가주 해먹는 거 아니야?”
그 말에 글렌의 이마에 힘줄이 뚜둑 돋아났다. 그가 입을 다물고 손을 들어 올렸다.
쿠르르르릉!
조근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뇌기가 천장에 응집되기 시작했다.
“어….”
리메르가 고개를 들어 올리며 턱을 덜덜 떨었다.
“노, 농담인데요. 저건 못 막는….”
그가 천천히 뒷걸음질 치다가 몸을 돌렸다. 전력으로 가주전을 벗어나려는 순간 뇌기가 번쩍였다.
콰아아아아앙!
반응할 새도 없이 쏟아진 벼락이 리메르의 복부에 내려꽂혔다.
“끄아아아악!”
리메르는 벼락에 지져진 채로 바닥을 굴렀다.
빠지지지직!
하지만 글렌의 손은 아직 다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늙어서 한 대로는 안 되겠구나.”
“자, 잠깐만….”
리메르 점점 더 부풀어 오르는 뇌기의 구체를 보며 턱을 달달 떨었다.
“잠깐 따위는 없다.”
“끄아아아악!”
그날 가주전에서는 천둥벼락과 비명이 끝없이 터져 나왔다.
* * *
라온은 서쪽 성벽에 서서 아리안 가문을 내려다보았다.
많은 사람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지만, 처음 왔을 때 은은히 흐르던 불안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많이 변했네.’
아리안 가문의 가주가 바뀐 지 일주일이 지났다.
임시 가주 자리에 앉은 웬디 아리안이 처음 선택한 업무는 사과였다. 그녀는 가문의 사람들을 모두 모은 뒤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모두 밝히고 정식으로 용서를 구했다.
웬디가 본인의 잘못도 낱낱이 밝혔지만, 가문 사람들은 그녀를 욕을 하거나 헐뜯지 않았다.
웬디라는 사람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있었기에 오히려 응원을 해주었다.
물론 위겐과 간부들을 따르던 놈들이 반항해댔지만, 마르타의 주먹 앞에 조용해졌다.
‘그걸 보고 잘 골랐다고 생각했지.’
가문의 간부들이 모두 욕을 먹고 있음에도 홀로 지지를 받는 걸 보면 웬디라는 사람의 인성과 책임감은 진짜였다.
웬디가 두 번째로 선택한 일은 가문의 방어 태세 정비였다.
-그건 네놈의 의견이었잖느냐.
라스가 헹하고 콧방귀를 끼었다.
‘그렇지.’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데스나이트를 소환한 놈이 다시 이곳을 노릴 수도 있기에 가문의 무인들을 훈련시키고, 방어 장비들의 보수하게 만들었다.
아직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아서 할 일이 산더미처럼 남았지만, 일을 하는 사람들의 안색에는 활력이 넘쳤다.
콰아아아앙!
더운 땀을 흘리면서 일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을 때 죽음의 늪에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라온이 여유롭게 뒤를 돌아보았다. 거칠게 출렁이는 늪 위에서 대광풍진을 운용하는 광풍단과 강기를 일으킨 마크 괴튼이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쩡! 쩌어어엉!
광풍단과 마크 괴튼은 생사대적을 만난 것처럼 서로를 향해 전력이 담긴 검격을 쏟아 부었다.
‘제대로 싸우네.’
-네놈이 지는 쪽을 데리고 밤새 훈련을 시키는데 당연하지 않느냐!
라스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눈을 흘겼다.
‘그게 좋은 건데.’
-너한테나 좋지!
녀석은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말라며 고개를 저었다.
-인간들은 네놈처럼 훈련에 미친 변태가 아니니라!
‘변태는 아니지.’
라온이 피식 웃으며 시선을 안쪽으로 내렸다. 유아와 율리우스가 늪에서 체력훈련을 하고 있었다.
‘여기는 훈련하기 딱 좋은 곳이잖아.’
늪지에서 수련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않다. 이곳까지 온 김에 모두를 늪지에 적응시키고 체력까지 올려줄 생각이었다.
-뭐, 그건 틀린 말은 아니…음?
라스가 말을 하다가 멈추고 저 먼 곳을 바라보았다.
‘왜?’
-저것들 불러라.
‘뭐?’
-저 허약한 것들 전부 부르라고!
이유는 모르지만, 라스가 이렇게 놀랄 정도라면 보통 일이 아니다. 설화의 감각을 전력으로 운용하며 아래를 보았다.
“전부 올라와!”
“예?”
“부단주님? 뭐라고 하셨어요?”
지금까지 중간에 훈련을 멈춘 적이 없기에 모두가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았다.
“전부 성으로 올라오라… 아!”
라온이 죽음의 늪 쪽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저 멀리서 거대한 해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성문을 열고 닫을 시간도 없을 것 같았다.
“젠장!”
바로 성벽에서 뛰어내린 뒤 유아와 율리우스를 허리에 꼈다.
“죽고 싶지 않으면 빨리 뛰어서 올라와!
그 말을 하고 성벽을 걷어차고 위로 올라갔다.
“뭐, 뭔데!”
“갑자기 왜 저러셔?”
“일단 올라가!”
광풍단은 당황하면서도 라온을 따라 성벽을 올랐다. 모두가 성벽에 내려선 후 1분도 채 지나기 전에 허연 안개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졌다.
“저, 저게 뭐야….”
“늪! 늪이야!”
“늪의 해일….”
죽음의 늪이 통째로 들린 듯한 거대한 해일이 성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성 자체가 휩쓸려 사라질 것 같았다.
화아아아아아!
라온이 입술을 씹으며 글래시아의 기운을 극성으로 끌어 올렸다. 전신이 허옇게 물들 정도로 냉기를 응집시킨 뒤 다가오는 진흙 해일을 향해 손을 뻗었다.
라스의 기술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