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1화
라온은 가주전을 벗어나자마자, 뒤를 돌아 웬디 아리안을 보았다.
“저희 단원들이 아직 저녁을 못 먹었는데, 식사부터 할 수 있겠습니까.”
-오오! 네놈이 웬일인 것이냐!
라스는 바로 밥을 먹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지 팔찌에서 벼락처럼 튀어나왔다. 배를 채울 생각에 얼굴색까지 환해졌다.
-이왕 시키는 거 특산품을 주문하거라! 이곳에서 가장 잘하는 음식을 바치라고 전해라!
‘네 뱃살이나 받쳐.’
라온은 라스를 밀어내고, 식사와 숙소를 준비해달라고 요청했다.
“물론입니다!”
웬디는 불을 지핀 듯한 뜨거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는 것을 보니, 위겐과의 대화를 듣고 감격한 것 같았다.
“시, 식사? 지금 밥부터 먹자고 한 거야?”
“저놈이 밥부터 챙기다니,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나?”
“잠도 챙겨줄거야?”
버렌과 마르타, 루난은 바로 임무를 시작할 줄 알았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쪽을 바라보았다.
“너희 굶긴 적 없거든.”
라온이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저었다. 잠을 안 재운 적은 많지만, 항상 밥은 챙겨주었다.
-산에서 풀만 뜯어 먹게 만들었지 않느냐!
‘그것도 밥이지.’
야생에서 풀이라도 뜯어 먹을 수 있는 게 어디인가. 그것도 밥은 밥이다.
“프리카.”
웬디가 옆으로 손짓을 하자, 이곳까지 안내해주고 사라졌던 레인저 3조 조장 프리카가 다가왔다.
“광풍단 검사분들께 숙소와 식당을 안내해드려.”
“이쪽으로 오십시오.”
프리카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인 뒤 광풍단을 우측으로 이끌었다.
라온은 식당으로 가지 않고, 웬디의 옆으로 다가갔다.
“황전대주님은 저랑 이야기 좀 하시죠.”
“알겠습니다.”
웬디가 고개를 끄덕이고, 왼쪽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죠.”
그녀는 대화하기 적당한 곳이 있다며 먼저 앞으로 걸어갔다.
-야이! 마귀 같은 놈아!
라온이 웬디를 따라가려 할 때 라스가 멱살을 잡았다.
-왜 네놈은 안 따라가는 것이냐!
‘나는 이곳의 정보를 얻어야지.’
위겐과 대화를 해보고 깨달았다. 아리안 가문은 생각 이상으로 망가졌다. 가주와 간부들이 고이고 타락해서 가문 전체가 진흙에 파묻힌 상태였다.
‘그래서 알아서 책임지라고 하신 건가.’
지금 생각해보면 글렌은 단순히 이 늪의 문제를 해결하라는 게 아니라, 망가진 아리안 가문을 바꾸고 오라는 지시를 내린 걸지도 모르겠다.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놈이 누구인지 아느냐?
‘글쎄? 악마인가?’
-희망을 줬다가 뺏는 놈이니라! 바로 너라고!
라스가 괴성을 지르며 잡은 멱살을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오늘 어떻게든 밥 먹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난동을 부리는 라스의 이마에 딱밤을 쳐서 바닥에 내리꽂았다.
-꾸엑!
라온은 라스의 비명을 뒤로 하고, 가문 내부의 사람들을 살폈다.
‘그나마 다행이네.’
안구를 나태와 욕망으로 물들였던 가문의 간부들과 달리 식솔들의 상태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현 상황에 대한 걱정은 있었지만, 근면하고 성실한 생활을 해온 기질이 느껴졌다.
‘저 검사 덕분이겠지.’
웬디 아리안은 이 가문의 화단에서 유일하게 곧게 솟은 나무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황전검대원들만이 아니라, 저 사람들도 간부들과 다를 바 없이 변했을 것이다.
아리안 가문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웬디의 걸음이 멎었다.
“이곳입니다.”
그녀가 안내해준 곳은 죽음의 늪이 보이는 서쪽 성벽 위였다.
안개 사이로 쏟아지는 달빛과 은은한 조명이 어우러져 나름의 분위기가 있었다. 버렌이 봤다면 또 운치 있다고 중얼거릴만한 모습이었다.
“나쁘지는 않죠?”
웬디가 성벽에 등을 기대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좋네요.”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성벽의 끝에 섰다. 밤이 깊었음에도 인간을 초월한 그의 감각이 죽음의 늪을 꿰뚫었다.
‘정말 좀비나 스켈레톤뿐이군.’
안개가 짙어 먼 곳까지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이 주변에 있는 몬스터라고는 흐느적대는 좀비와 삐걱거리는 스켈레톤뿐이었다.
‘다만….’
수가 많아.
언데드 몬스터의 숫자가 조금 늘어났다는 위겐의 말과 달리 상당히 많은 기척이 느껴졌다.
전부 한 번에 모여든다면 이 서쪽 길을 막을 수준이었다.
라온이 죽음의 늪을 가리키며 웬디를 보았다.
“정찰을 나간 건 언제가 마지막이었습니까?”
“…작년 10월입니다.”
웬디가 민망한 듯 고개를 숙였다.
“작년 10월….”
해가 바뀌고 4달이 넘게 지났으니, 반년 이상 정찰을 나가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웃어넘길 수 없는 심각한 일이었다.
“그것도 끝까지 가지 않았어요.”
웬디는 한 번도 죽음의 늪 끝까지 간 적이 없다며 입술을 깨물었다.
“가주님이 방해하신 겁니까?”
라온이 얼굴이 붉어진 웬디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본인의 허락이 없다면 나갈 수 없다고 했으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네. 본래 정찰을 나갈 때는 정찰대와 간부 둘. 혹은 가주가 나가야 해요. 저 이외에 다른 사람이 필요한데….”
“아무도 가질 않았군요.”
“네. 제가 어떻게든 설득하려고 했는데, 가주님이 정찰 따위는 필요 없다고 하셔서.”
“필요 없는 게 아니라, 귀찮아서였겠죠.”
조금 전 알현실에서 본 아리안 가문의 간부들도 가주인 위겐과 다를 바가 없었다.
광풍단이 수련으로 근육을 쌓을 때 그들은 향락으로 지방을 쌓았으니, 그 무거운 몸을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앞에 있는 웬디가 오히려 이상하게 보일 정도였다.
“맞습니다.”
웬디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곳에 오시자마자 가주님을 휘어잡으신 라온 님이 더 대단하게 보입니다.”
“별 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을 좀 봐와서.”
라온이 옅게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늪의 상태는 어떤가요?”
“이전보다 늪의 수위가 50cm 이상 올라왔습니다. 조금만 더 차오르면 늪이 성문 사이로 스며들 가능성도 있습니다.”
웬디는 이런 적이 처음이라 어떤 문제가 생길지 모르겠다며 눈매를 찡그렸다.
“그럼 언데드의 숫자는 얼마나 늘어났죠?”
“작년에 비해 5배 이상 늘었습니다.”
“5배.”
“늪의 수위가 높아지고, 언데드가 늘어난 건 이전에도 있었던 일이지만, 이 정도로 큰 차이가 나는 건 처음이라 윗분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지원을 부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잘하셨어요.”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하게 말해서 아리안 가문은 약하다.
별일이 아니라면 다행이지만, 저 깊은 곳에서 강력한 몬스터가 태어났다면 이곳에 있는 사람들로는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죄송합니다.”
웬디가 깊게 허리를 굽혔다.
“제가 지원을 요청했지만, 내일 정찰에는 함께 가기 힘들 겁니다. 가주님이 이곳을 보호해야 한다며 못 움직이게 할 게 뻔하니까요.”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일이었기에 조용히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대신 정찰대 3조를 보내드리겠습니다. 다 장악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제 입김이 많이 들어가 있으니, 편하게 움직일 수 있을 겁니다.”
웬디는 정말 미안하다며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괜찮습니다.”
라온은 죽음의 늪이 아니라, 뒤편의 가주전을 보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치워야 할 게 하나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 * *
아리안 가문의 알현실.
라온과 웬디는 떠났지만, 가주 위겐과 간부들은 그곳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가주님.”
단상 아래에 있던 배불뚝이 총관이 고개를 들며 이를 갈았다.
“그 건방 떠는 어린놈을 이대로 놔두실 겁니까?”
“맞습니다. 저대로 놔둔다면 우리 가문을 제집 안방처럼 헤집고 다닐 겁니다.”
해골처럼 바싹 마른 손에 반지를 가득 낀 재정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놔둬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혹여나 늪에 문제가 있다면 일이 커집니다!”
다른 간부들도 총관과 재정관 옆에 붙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놔두지 않으면?”
위겐이 콧잔등을 찌푸린 채 시선을 내렸다.
“20살에 마스터 중급에 오른 저 괴물을 자네들이 상대할 건가?”
“그, 그게….”
재정관이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저 화만 낼 게 아니라, 생각을 하고 말해.”
위겐이 차가운 눈빛을 쏘아내며 말을 이었다.
“무력만이 아니라, 명분까지 가지고 있는 놈들을 어떻게 막으라는 거냐!”
만약 라온이 실력만으로 압박을 넣었다면 어떻게든 버텼겠지만, 놈에게는 글렌이 전권을 위임했다는 명분이 있었다.
술수를 걸 틈을 주지 않으니, 방법이 없었다.
“그놈들의 눈을 봤나?”
“예?”
“광풍단 놈들의 눈깔 말이다!”
라온의 뒤에 있던 광풍단의 시선은 심장이 내려앉을 정도로 오싹했다. 인간이 아니라, 미친개의 눈을 보는 듯했다.
“연회를 하자고 말하고, 라온 놈이 거절하자마자 아주 죽일 듯한 기세를 풍겼지. 그야말로 광견이었어.”
위겐은 광풍단의 매서운 광기를 떠올리며 입술을 떨었다.
“으음….”
“바, 방법이….”
아리안 가문의 간부들이 어쩔 줄 몰라할 때 알현실의 문이 열리고, 잘 단련된 체형의 중년인이 들어왔다. 레인저들의 수장을 맡은 베인더였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베인더가 위겐에게 고개를 숙였다.
“내일 광풍단이 레인저 3조를 데리고 갈 게 뻔해서 수를 좀 써놨습니다.”
“그 수는 오늘도 안 통하지 않았나. 단 한 명도 젖지 않고 멀쩡하게 왔는데 무슨!”
위겐이 베인더를 보며 혀를 찼다.
“그래서 이번에는 조장 녀석을 꾀었습니다.”
“프리카를?”
“예. 간부직을 약속하면서 아무것도 없을 곳으로 안내를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죽음의 늪은 안개가 자욱하니, 아무리 백검룡이라고 해도 방향 잡기는 힘들 겁니다.”
베인더는 광풍단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돌아가게 될 거라며 미소를 흘렸다.
“그 이후에는 막내 아가씨를 보내서 혹시 모를 사태를 정리하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크흠!”
위겐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툼한 살집이 함께 흔들렸다.
“거기다 그분께도 연락을 보내놨습니다.”
“벌써?”
“예. 일 처리는 빠를수록 좋으니까요.”
베인더가 담담하게 고개를 숙였다.
“역시 자네밖에 없군.”
위겐이 팔걸이를 툭툭 치며 큼지막한 미소를 지었다.
“이 일이 잘 끝난다면 자네에게 큰 상이 있을 거야!”
“감사합니다.”
베인더는 머리를 내린 채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기대하지요.”
* * *
“으하함.”
크레인이 크게 하품하며 빈접시에 포크를 내려놓았다.
“우리 부단주님은 휴식이라는 걸 모르시네. 절대 안 쉬어.”
그는 환영회 정도는 괜찮지 않냐며 한숨을 내쉬었다.
“일부러 안 간 거다.”
버렌이 크레인을 보며 눈매를 찡그렸다.
“너도 봤겠지만, 이곳의 간부들은 우리가 아는 수장들과 달라. 괜히 엮여봐야 귀찮으니 먼저 끊어버린 거야.”
그는 라온이 잘한 거라며 고개를 저었다.
“라온이 미친 건 분명하지만 제대로 미쳤거든.”
마르타가 주먹으로 턱을 괸 채 입맛을 다셨다.
“우리한테 그리고 지그하르트에 문제가 생길 짓은 절대 안 하는 놈이야.”
“그건 아는데, 좀 아쉽잖아요. 쉬지를 못하는 게….”
크레인은 어깨와 무릎이 쑤신다며 인상을 찌푸렸다.
“저도 하루는 쉴 줄 알았는데, 지금은 더 빨리 싸우고 싶네요. 수련도 하고 싶고.”
도리안이 배 주머니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뭐? 너 드디어 미쳤구나! 그 괴물처럼 훈련 홀릭에 빠진 게 분명해!”
“오늘 느끼지 않았어요? 우리가 성장했다는 걸.”
“아, 그건….”
크레인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긴 하지.”
지그하르트에서만이 아니라, 이곳까지 오면서도 계속 수련을 한 덕분에 늪지를 평지처럼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거기다….’
수면 위에서 보법을 수련했기 때문인지 보법에 대한 성취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무학의 경지도 상승해서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검술과 보법을 펼칠 수 있었다.
“저 꽃이 뭔지 아세요?”
도리안이 식탁 중앙에 있는 병에 꽂힌 파란색 꽃을 가리켰다. 광풍단이 모두 그 꽃을 바라보았다.
“말레안이라는 이름의 꽃인데, 영양이 풍부한 정상 토양에서는 빨간색을, 산성 토양에서는 푸른색을 띠어요.”
그는 말레안을 만지며 방긋 웃었다.
“우리는 이 꽃과 달리 영양이 미칠 듯이 풍부한 라온이라는 토양에서 새빨갛게 자라고 있는 거죠.”
도리안은 굳어버린 크레인을 보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제가 부단주님이랑 함께 다니면서 느낀 건데요. 그 사람은 절대 의미 없는 짓을 안 해요.”
하분 성 그리고 이번에 다녀온 세피아 상회에서 확실히 느꼈다.
라온은 제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그에 걸맞은 보상과 답을 주는 사람이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크 괴튼이 마시던 차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분들에 비해 굉장히 늦게 라온 님을 만났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그분과 함께한 짧은 시간 동안 늘어난 실력이 제 십수 년을 앞질렀으니까요.”
그는 평생을 두고 갚아야할 은혜라며 미소를 지었다.
“뭐, 맞는 말이지.”
“오늘 본 사람 중에 웬디 님을 빼고 우리보다 강해 보이는 사람이 없었어.”
“점점 성장하는 게 느껴지긴 하니까.”
광풍단 단원들은 모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쩔 수 없네.”
버렌이 옅게 웃으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 괴물 자식이 삐지지 않게 계속 따라가는 수밖에.”
그는 착한 광풍단이 참자며 손가락을 돌렸다.
“맞아.”
마르타가 의자에서 일어나며 코웃음을 쳤다.
“그 망할 놈. 우리가 아니면 누가 따르겠어.”
그녀는 이만 자리를 끝내자며 일어섰다.
“자러 가자.”
루난은 머리에 수면 모자를 착용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광풍단은 누구 하나 머뭇거리지 않고 일어섰다. 식당에 가기 전에 먼저 들렸던 숙소로 향했다.
모두가 빠져나가고, 점원들이 식기를 치웠을 때 식당 기둥의 뒤편에서 라온이 걸어나왔다.
‘기특하네.’
억지로 수련만 시켜서 싫어할 줄 알았는데, 저런 생각까지 했을 줄은 몰랐다.
-본래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대화를 해봐야 아는 법이니라. 그저 생각만으로는 그 속을 알 수가 없지.
‘마족이면서 잘 아네.’
-말했지 않느냐! 본왕이 네놈보다 인간에 가깝다고!
라스가 네놈은 평생 인간을 이해 못할 거라며 콧방귀를 뀌었다.
-됐으면 이제 밥이나….
녀석이 빨리 주문부터 하자고 때 식당의 불이 꺼졌다.
뒷문으로 직원들이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광풍단 때문에 야근을 해서 빨리 정리하고 나가는 것 같았다.
-뭐, 뭐야! 왜 가! 아직 사람 남았다고! 이것들아!
라스가 꽥 소리를 질렀지만 당연히도 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야이 매미 같은 놈아! 네가 시간을 끌어서 굶게 생겼지 않느냐!
‘아, 그래도 먹을 건 있어.’
라온이 옅게 웃으며 아공간 주머니에서 빵 한 조각을 꺼냈다.
-크헉!
라스의 안색이 창백하게 굳었다.
‘나딘 빵이라도 먹을래?’
-그 사악한 거 치우거라!
* * *
해가 뜨지 않은 아리안 가문의 새벽.
서쪽 성문 앞에 광풍단과 레인저들이 모여 있었다.
라온이 턱짓을 하자, 레인저 3조 조장 프리카가 고개를 끄덕이고, 개패 장치를 열었다.
쿠구구구궁!
대지를 뒤흔드는 진동과 함께 성문이 열린다. 그간 쌓인 먼지가 허공으로 치솟으며 자욱한 회색 구름을 일으켰다.
죽음의 늪 수위가 많이 올랐기 때문인지 열린 성문 안쪽으로 아주 조금씩 진흙이 밀려들어 왔다.
라온이 뒤를 돌아서 광풍단을 보았다. 어제 보여주었던 의지처럼 모두의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광풍단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단호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의지가 깃든 강렬한 목소리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어깨를 떨었다.
“라온 님.”
웬디 아리안이 광풍단 옆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어제 말씀드린 대로 저는 대기 명령을 받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대신….”
그녀가 프리카와 레인저 3조를 가리키며 눈동자를 빛냈다.
“이들이 최선을 다해서 안내할 테니, 믿고 가주십시오.”
“감사합니다.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주세요.”
라온이 웬디와 프리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그가 먼저 늪지를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고, 그 뒤를 광풍단이 따랐다.
가장 늦은 건 이곳에서 살아온 레인저들이었다.
반년 넘게 정찰을 나가지 않았기 때문인지 늪을 가르며 걸어간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사방에서 좀비와 스켈레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으음!”
“좀비가 무슨….”
“이 정도 숫자일 줄이야….”
“조, 좀 많은데?”
레인저들은 몰려오는 언데드들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광풍단.”
라온은 걸음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검집을 두드렸다.
“지워버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등 뒤를 지키던 광풍단이 샛노란 안광을 빛내며 튀어 나갔다.
콰아아아앙!
한 번의 검격을 날렸을 뿐인데, 늪지가 초토화되었다. 수십이 넘었던 언데드 몬스터 중 살아남은 건 하나도 없었다.
“가죠.”
라온이 당황한 레인저들에게 손짓했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