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390화 (390/653)

제390화

프리카는 천천히 다가오는 라온 지그하르트와 광풍단의 신발을 보매 눈매를 찡그렸다.

‘평범한 부츠가 맞아.’

광풍단은 늪지를 걸을 때 방해만 되는 전투용 부츠를 신고도 이 질퍽한 땅을 편안하게 걸어왔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이 늪지를 찾아왔지만, 단원 전체가 저리 여유롭게 걸어오는 건 처음이었다.

‘거기다….’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듯 허허로운 기세를 풍기는 라온 지그하르트와 달리 광풍단의 눈동자에서는 오싹한 광기가 피어났다.

“윽….”

프리카가 광풍단의 눈빛을 마주하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무슨 사람들 눈빛이 저러지?’

광풍단이 광견단이라고 불린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상상 이상이다. 계속 보고 있다간 잡아먹힐 것 같아서 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으으….”

“저, 저게 광풍단인가?”

“듣던 거랑은 조금. 아니 많이 달라….”

“쳐다도 못 보겠어.”

웰리스와 레인저들도 광풍단에게서 풍겨오는 맹수 같은 기운에 질려 침을 꿀꺽 삼켰다.

라온은 마른 땅을 걷는 듯 자그마한 소리도 없이 다가와 미소를 지었다.

“아리안 가문에서 마중 나오신 분들입니까?”

“아, 네! 레인저 3조 조장 프리카라고 합니다.”

프리카가 당황한 기색을 감추며 허리를 굽혔다.

“반갑습니다. 광풍단 부단주 라온 지그하르트라고 합니다.”

“아….”

라온은 무례하지도, 과하지도 않게 머리를 숙였다. 대륙에 이름을 떨치는 백검룡이 마주 인사를 해준다는 것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아, 아리안 가문에 오신 것을 환영… 히윽!”

프리카가 고개를 들어 올리다가 라온의 뒤에 있는 세 명의 무인을 보고 비명을 흘렸다.

초록색, 검은색, 보라색 눈동자에 담긴 기세에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레인저? 확실히 날렵한 기운이 느껴지네요.”

“비실비실해서 싸울 수 있나?”

“신발 특이해.”

“으….”

세 사람은 평온하게 말을 걸어왔지만, 그들의 기운에 짓눌려 입이 열리지 않았다.

‘이들이 광풍단의 조장들인가.’

광풍단의 조장들도 육황 결투 대련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지금 보니 그 소문 이상의 존재감을 두른 괴물들이었다.

“기세 좀 집어넣어.”

라온이 뒤를 보며 가볍게 혀를 차자, 세 조장만이 아니라, 광풍단 전체가 광기를 갈무리했다.

그가 저들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럼 안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바로 출발을…아!”

프리카가 움직이려다가 말고 멈춰 섰다. 그는 뒤에 있는 마차 문을 열고 늪지용 부츠를 꺼냈다.

“늪지에서 걷을 수 있게 만들어진 덩굴 부츠입니다. 신으신다면 훨씬 편하게 움직일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두 개만 주시겠습니까.”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두 개요?”

“늪지를 걷는 것도 수련의 일환이니, 저 아이들 빼고는 이대로 갈 겁니다.”

그는 아직 앳된 아이 둘을 가리켰다. 다른 광풍단 검사들과 달리 늪지에 서 있는 게 버거운 듯한 모습이었다.

“도련님! 저도 이대로 갈게요! 마크 아저씨가 도와준대요!”

양갈래 머리를 한 여자아이가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네가 하면 나도 한다! 부단주님 저도 안 신겠습니다!”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의 남자아이도 지지 않겠다는 듯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렇다는군요. 감사하지만 부츠는 사양하겠습니다.”

라온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음, 알겠습니다. 그럼 가시죠.”

프리카가 손을 뻗어서 앞을 가리켰다.

“웰리스. 네가 앞에서 안내를 해드려. 난 뒷정리를 하고 갈게.”

“아, 알겠어.”

웰리스가 마른침을 삼키고서 앞으로 나갔고, 라온과 광풍단이 그 뒤를 따라갔다.

‘저 멍청한 놈도 광풍단에겐 장난치진 않겠지.’

프리카는 꺼낸 신발을 다시 마차에 넣고 늪지의 상태와 마차를 점검한 뒤 가장 뒤에서 일행을 따라갔다.

웰리스는 앞장서서 걸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망했다.’

간부 놈들에게 뭐라고 하지….

지그하르트 검사들이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게 흠뻑 적셔서 데리고 오라고 돈까지 받았는데, 단 한 명도 빠뜨리지 못하고 멀쩡하게 돌아가게 생겼다.

‘부츠도 없이 알아서 걷는데 방법이 있을 리가… 응?’

바닥만 보면서 걷고 있을 때 전방의 늪 중에 색이 연한 곳이 있었다.

‘맑은 늪!’

모래가 가라앉거나 옆으로 퍼져서 물의 비율이 더 많은 늪이다. 저기라면 아무리 광풍단이라고 해도 벗어나지 못할 게 분명했다.

‘좋아.’

웰리스는 미세하게 방향을 틀어서 광풍단이 맑은 늪으로 향하도록 만들었다.

해가 지는 중이라 주변이 어둡기까지 해서 라온이나 광풍단이 아무리 강해도 옷이 젖는 건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웰리스는 자연스럽게 광풍단을 맑은 늪으로 끌어당긴 후 가장 앞에 있는 라온이 그 늪을 밟을 때쯤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콰아아아앙!

늪 전체를 울리는 굉음과 함께 분수처럼 솟구친 진흙이 떨어져 내렸다.

퍼버버버벅!

웰리스는 그 진흙들을 모조리 얻어맞은 채 바닥을 굴렀다.

“끄에에엑!”

떨어지는 진흙 하나하나가 장정의 주먹에 얻어맞는 듯한 고통이었다. 정신이 없어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끄르르륵….”

쓰러진 채로 늪지에 박히려고 할 때 손이 하나 튀어나와 멱살을 잡고 끌어 올렸다.

라온이었다. 그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늪지에서 몸을 꺼내주었다.

“괜찮으십니까?”

“감사합… 힉!”

고맙다고 하려는데, 라온의 눈동자에 섬뜩한 빛이 고여 있었다. 또 장난치면 목을 날린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이빨이 덜덜 떨렸다.

“죄, 죄송합니다!”

웰리스는 감사하다고 말을 하다 말고, 늪에 머리가 닿도록 허리를 숙였다.

‘건드려서는 절대 안 되는 인간이야….’

광풍단에 비해 부드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큰 착각이었다. 괜히 저 괴물들을 수하로 데리고 있는 게 아니었다.

“야이! 멍청아!”

프리카가 뒤에서 달려와 웰리스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내가 하지 말랬지!”

그는 바로 뒤를 돌아서 라온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이놈이 장난기가 심해서. 지금부터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괜찮습니다.”

라온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앞을 가리켰다.

“출발하시죠. 너무 늦기 전에 도착하고 싶습니다.”

*     *      *

라온은 늪지 위에 세워진 회색 성벽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이게 아리안 가문의 성벽인가.’

오랜 기간을 버텨온 성벽답게 단단하면서도 굳건한 기운이 느껴졌다.

다만 보수를 제대로 하지 않았는지 멀쩡한 겉모습과 달리 이곳저곳에서 빈틈이 느껴졌다.

-특이하군.

라스가 성을 보며 눈매를 찡그렸다.

-이 성을 세운 놈은 꽤 강한 놈이었던 것 같다.

‘그걸 어떻게 알아?’

-균형이 완벽하느니라.

‘균형?’

-성을 만들 때 평범한 인간이라면 불가능한 수준으로 완벽한 균형을 맞췄다. 물론 지금은 다 망가졌지만.

녀석은 흥미가 가신 듯 어깨에 내려앉아 밥이나 먹자고 중얼거렸다.

‘틀린 말은 아니지.’

초대 아리안 가문의 가주는 초대 지그하르트 가주와 함께 죽음의 늪을 정벌했다고 했으니, 강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늪지 위에 떠 있는 성이라. 운치 있군.”

버렌은 성 자체가 놀라운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놈의 운치는 가는 곳마다 있냐.”

마르타는 놀랐음에도 티를 내지 않고 인상을 찌푸렸다.

“예쁘다….”

루난은 늪지와 반대되는 성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살짝 눈동자를 빛냈다.

콰아아아아!

광풍단 모두가 아리안 가문의 성을 보며 놀라고 있을 때 성문이 늪지를 거칠게 밀어내며 열렸다.

어떤 장치가 되어 있는지 늪의 진흙은 성문 안쪽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열린 성문에서 갈색 머리카락을 말총처럼 동여맨 여검사가 걸어 나왔다. 30대 초반으로 보이지만, 실제 나이는 그보다 많은 것 같았다.

‘이 여자가 웬디 아리안인가.’

주디엘의 책자에 아리안 가문의 유일한 마스터이자, 가주의 막내딸이라고 적혀 있던 여성이 분명해 보였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황전검대를 맡고 있는 웬디 아리안이라고 합니다.”

웬디 아리안은 이쪽의 정체를 단숨에 알아차린 듯 고개를 숙였다.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광풍단 부단주 라온 지그하르트라고 합니다.”

라온은 고개를 숙이며 웬디의 기운을 살폈다.

‘잘 단련되어 있군.’

실전 경험이 모자라 보이지만, 오랜 기간 꾸준히 단련한 검기가 느껴졌다.

마스터 초입이다 보니 마크 괴튼보다 약하지만, 제대로 단련한다면 높이 올라갈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예상 이상이야.’

아리안 가문에 마스터가 한 명이고, 나머지 검사들도 약하다고 해서 전부 망가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최소한 웬디 아리안만큼은 무인다운 눈빛을 보여주고 있었다.

라온이 웬디를 파악할 때 웬디도 라온과 광풍단을 살피고 있었다.

‘음….’

웬디는 누구 하나 진흙이 묻지 않은 광풍단을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뭐지?’

라온은 마스터니 그렇다 치고, 광풍단은 평범한 신발을 신고 있었음에도 아무도 젖지 않았다.

지금 일행 중에서 진흙 범벅이 된 사람은 베테랑 레인저인 웰리스 한 명뿐이었다.

옆을 보자, 조장 프리카가 자업자득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장난을 치다가 역으로 당했나 보군.’

늪지를 땅처럼 밟아온 3조의 부조장 웰리스가 저렇게 망신당한 것을 보면 라온과 광풍단의 실력은 소문 이상인 모양이다.

‘놀라운 건 그것만이 아니야.’

웬디가 라온의 뒤에 서 있는 광풍단을 보며 손끝을 떨었다.

‘누구 하나 모자라는 사람이 없어.’

세간의 소문에서 광풍단은 라온과 리메르만 조심하면 된다고 떠들어댔지만, 지금 보니 광풍단 검사 중 만만해 보이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마스터 하나에 익스퍼트 최상급만 네 명 그리고 다른 이들도 중급의 끝이나, 상급에 이르러 있었다.

어린아이 둘만 제외하면 아예 빈틈이 없는 전열이었다.

‘이게 진짜 지그하르트의 무력대인가.’

죽음의 늪을 점검하기 위해서 아주 가끔 지그하르트에서 검사와 관리들이 오기는 했지만, 이 정도 기세를 두른 사람들은 처음이었다.

웬디는 이마를 가볍게 두드려서 정신을 차리고서 손을 뻗었다.

“이쪽으로 와주십시오.”

그녀는 정중한 자세로 라온과 광풍단에게 손을 들어 올렸다.

“가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겠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를 따라 아리안 가문의 중심으로 향했다.

‘화려하군.’

웬디는 지은 지 얼마 안 되는 듯 외관이 화려한 저택으로 걸어갔다.

멋들어진 건물들과 달리 이곳을 지키는 사람들에게선 제대로 된 기세가 느껴지지 않았다.

‘생각 이상으로 실망스럽군.’

웬디와 그녀를 보좌하던 검사들을 빼면 눈에 차는 사람이 없었다. 예상보다 더 나태함에 물든 곳 같았다.

아리안 가문의 가주전은 지그하르트보다 작았지만, 화려함으로는 밀리지 않았다.

특산품 덕분에 돈이 많다고 하더니 벽에 박힌 장식 중 어느 하나 비싸 보이지 않는 물건이 없었다.

“이곳이 알현실입니다.”

웬디가 가주전의 끝에 있는 아치형 문을 열었다. 기름칠을 잘해놓은 듯 자그마한 삐걱거림도 없이 거대한 문이 열렸다.

알현실 안쪽에서 쏟아지는 찬란한 조명을 지나 계단처럼 세워진 단상이 보였다.

아리안 가문의 간부로 보이는 자들이 단상 양옆에 서 있었고 그 정상에 갈색 머리카락의 노인이 앉아 있었다.

얼마나 잘 먹었는지 번들거리는 볼은 튼실했고, 뱃살은 축 늘어졌다.

라온은 중앙의 붉은 카펫을 밟고 나아가 고개를 숙였다.

“지그하르트 광풍단 부단주. 라온 지그하르트가 아리안 가문의 주인을 뵙습니다.”

봉신가문이라고 해도 지그하르트와 오랜 역사를 함께 한 가문의 가주였기에 먼저 예의를 차렸다.

“그대가 그 백검룡이로군. 과연 그 이름에 맞는 기상이야.”

단상 위에서 기름기가 낀 듯한 걸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먼곳까지 오느라 고생했네. 일어나게나.”

“감사합니다.”

라온이 허리를 펴고 단상 위를 올려보았다.

‘저 남자가 아리안의 가주 위겐 아리안인가.’

지그하르트나 다른 가문들의 가주들이 스스로 빛과 기세를 펼쳤다면 저 노인은 천장에서 쏟아지는 찬란한 조명을 이용해 존재감을 만들고 있었다. 강렬한 기파도, 단단한 의지나 차가운 지성도 느껴지지 않았다.

-저거 정말 가주 맞냐?

라스도 어이가 없다는 듯 콧잔등을 찌푸렸다.

-자질이 보통 이상은 맞지만, 쌓은 게 너무 형편없느니라!

‘나도 그렇게 생각해.’

녀석의 말대로 위겐 아리안이 쌓은 건 지방밖에 없어보였다.

“북멸왕께서는 잘 계신가?”

“예. 평안하십니다.”

“그거 다행이로군.”

위겐 아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조만간 찾아뵈야겠다며 옅게 웃었다.

“이곳까지 와준 광풍단을 위해 연회를 준비했네. 오늘은 마음껏 즐기도록 하게나.”

그는 즐거운 시간이 될 것이라며 손벽을 쳤다. 뒤에 있는 웬디에게서 이를 악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환영해주는 건 감사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라온이 위겐 아리안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지원 요청을 받고 아리안 가문에 왔습니다. 일이 다 끝난다면 모를까. 지금은 연회를 즐길 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크흠….”

위겐은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팔걸이를 툭 쳤다. 팔뚝 살이 바람을 탄 듯 흔들렸다.

“자네는 잘 모르겠지만, 본래 죽음의 늪 수위는 자주 변하네. 이곳에선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야.”

“늪의 수위만이 아니라, 언데드 몬스터들의 숫자도 늘어났다고 들었습니다.”

“수가 늘어봐야 좀비와 스켈레톤이네. 화살 몇 발이면 가볍게 처리할 수 있지.”

“언데드는 스스로 사고하지 못하는 몬스터입니다. 탐색 지시를 내리는 상급 몬스터가 나타났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라온은 이곳에 오면서 생각했던 바를 그대로 말했다.

“크흠, 그건 예측 아닌가.”

위겐은 헛기침을 흘리며 의자에 등을 묻었다.

“난 이 땅에서 평생을 살아왔네. 지금과 같은 일은 10년 혹은 5년마다 있었지. 걱정할 만큼 큰 일이 아닐세.”

“그럼 왜 본가에 지원을 요청하신 겁니까?”

“황전검대주가 너무 걱정이 많아서 그렇네.”

그는 이번 지원은 자신들의 손을 거치지 않고, 웬디 아리안이 독자적으로 연락했다며 인상을 찌푸렸다.

“음….”

라온은 웬디에게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위겐만을 바라보았다.

‘예상을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군.’

위겐이 저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는 이유는 본인의 무능과 나태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다.

수백 년 동안 죽음의 늪이 변화하지 않았으니, 계속 안전할 거라고 생각하며 정찰이나 토벌을 보낸 지도 한참 지났을 것이다.

지금에 와서 늪지에 문제가 생겼다간 지그하르트에 문책을 받을 게 뻔하기에 어떻게든 이 상황을 피한 뒤 알아서 해결하려고 저런 반응을 하는 게 분명했다.

‘내가 떠나면 그제야 움직이겠지.’

다만 이젠 통하지 않아.

지그하르트 가문에서 나온 검사와 관리들에겐 이곳의 돈과 향락이 통했겠지만, 성장과 임무 완수만을 생각하는 광풍단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가주님. 이전과 같은 상황이라고 해도 확인을 해야….”

“가주는 나다!”

웬디가 앞으로 한 걸음 나오며 무릎을 꿇었지만, 위겐은 오히려 인상을 구겼다.

“자네도 무리할 필요 없네. 이곳에 온 걸 휴식이라고 생각하고 푹 쉬게나. 이쪽의 일은 잘 아는 우리가….”

“말씀드렸듯이 전 제 할 일을 해야합니다.”

“잘 모르나 본데, 내 허락 없이 죽음의 늪에 들어갈 수는 없네. 저 늪은 레인저들도 지나기 힘든 곳이니, 일단 쉬고….”

“죄송하지만….”

라온이 시선을 들었다. 불을 토하는 화산처럼 뻘건 눈동자에 위겐이 목살이 파들파들 떨렸다.

“전 가주님께 이곳의 전권을 위임받았습니다.”

책임을 지면 권한이 생기는 법.

글렌이 실제로 전권을 준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광풍단이 오롯이 책임을 지라고 했으니, 아예 헛소리는 아니었다.

“저, 전권? 그게 무슨….”

위겐은 전권이라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던 듯 입을 떡 벌렸다.

“그럼 검열 때처럼 자네들 마음대로 하겠다는 건가?”

“…….”

일부러 대답하지 않고 더 강한 시선만 쏘아냈다. 위겐이 스스로 함정에 빠지도록.

“마, 말도 안 돼. 아무리 백검룡이라고 해도 고작 단에게….”

위겐이 입술을 떨때 그의 옆으로 인상이 험악한 중년인이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제대로 들리지는 않았지만, 광풍단이 특수 부츠 없이 늪지를 통과했다는 사실을 전하는 것 같았다.

‘제대로 먹혔군.’

작은 거짓말이 물을 먹고 알아서 쑥쑥 자라기 시작했다. 광풍단을 부여잡고 수상보행을 가르친 보람이 있었다.

“크으윽….”

위겐이 라온과 광풍단을 보며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저 신발로 늪지를 걸었다니….’

특수 장화 없이 늪지를 걸어왔다는 건 수중 보행이 가능한 고수라는 뜻. 광풍단 전체가 그 일을 해냈다면 모두가 소문 이상의 실력이라는 뜻이었다.

‘뭔 애들 눈빛이….’

광풍단을 살피는데 맹수와 눈을 마주한 듯 오금이 저려 왔다. 한명 한명의 기세가 장난이 아니다. 어린아이 두 명 빼고는 싸워서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검사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광풍단이 이 정도였단 말인가.’

저 정도 무위와 기세라면 글렌에 전권을 넘겨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빌어먹을!’

방법이 없었다. 죽음의 늪에 별일이 없기를 바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휴식을 줘도 마다하다니, 특이하군. 자네들 마음대로 하게.”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온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후 뒤로 걸었다. 웬디에게 그만 가자고 눈빛을 보냈을 때 위겐이 팔걸이를 퉁 쳤다.

“웬디. 너는 남….”

“죄송하지만, 황전검대주와 함께 가도 되겠습니까? 늪에 대해 물어볼 게 좀 있습니다.”

“끄응….”

위겐은 알아서 하라는 듯 손을 저었다.

“감사합니다.”

라온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고서 뒤를 돌았다. 광풍단은 대화가 끝났음에도 잡아 먹을 것처럼 위겐과 아리안의 간부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키운 보람이 있네.’

백검룡이라는 이명만이 아니라, 광풍단 모두가 늪지를 걷고, 강렬한 기세를 뿌린 덕분에 이곳에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 힘겹게 가르친 보람이 있는 듯해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라온은 흑룡포를 가볍게 털어내고 광풍단 사이를 걸었다.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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