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4화
전신이 쏘아낸 듯한 백창과 화룡의 숨결이 맞부딪쳤다.
백과 적. 극명하게 색이 다른 강기가 적의 심혼을 노리고 뻗어나갔다.
쿠구구구궁!
전장의 중심에서 막대한 기운이 응집되며 대지의 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시가지 훈련장 자체가 뭉개지고 있음에도 라온과 트레빈은 물러서지 않았다.
찌지지직!
라온은 서로가 서로를 일그러뜨리는 강기의 물결을 보며 제천검을 꽉 말아쥐었다.
‘이걸로는 안 돼.’
트레빈 역시 전력을 모조리 쏟아부어서 검격을 날렸기에 쉽게 꺾이지 않았다. 그를 이기기 위해서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야 한다.
쿠와아아아아앙!
다음 검술을 준비하기 위해서 무게 중심을 낮춘 순간 철관검의 절기와 염룡결이 동시에 폭발하며 어마어마한 충격파를 일으켰다.
간신히 그쳤던 강기의 폭풍이 더욱 거대하게 솟구쳤다.
‘지금!’
라온이 바스러지는 대지를 박찼다. 불의 고리와 만화공을 극성으로 운용하며 강기의 폭풍 속으로 파고들었다.
치이이익!
강기에 어깨와 허리가 갈라지고, 핏물이 흘러나왔지만, 신경 쓰지 않고, 앞으로 내달렸다.
‘이대로 끝을… 어?’
반대편에서 하얀 섬광이 쏘아져 왔다. 트레빈이다. 그 역시 강기의 폭풍을 뚫고 달려오고 있었다.
“네가 돌진해올 거라 예상했다!”
트레빈은 차디찬 미소를 지으며 검을 내질러왔다. 이미 보았던 철관검의 초식이지만, 이전보다 더 빠르고 예리한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
‘그도 강해진 건가.’
이 전투를 치르며 트레빈 역시 성장한 것 같았다.
“이거 좀 질리는데요.”
라온이 시원하게 웃으며 준비해둔 광아검의 구결을 풀었다. 어둠 속에 숨어 틈을 노리던 맹수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냈다.
쩌어어어엉!
제천검과 트레빈의 검이 뱀과 덩굴처럼 꼬이며 양옆으로 튕겨 나갔다.
터엉!
손목을 털어내서 충격을 감소시켰다. 오른발로 무너지는 대지를 박차고 트레빈을 향해 쇄도했다.
“흐읍!”
트레빈은 밀려나면서도 재차 검을 내질렀다. 승리에 대한 집착인지, 이 싸움을 끝내기 싫은 건지 잘 모를 정도의 정신력이었다.
피익!
오른팔을 노리는 트레빈의 검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한 뒤 우측에 젖혀두었던 제천검을 내리그었다.
캬아아앙!
트레빈이 뒤늦게 검을 회수하여 막았지만, 어깨와 가슴을 베이는 건 피하지 못했다.
“크흑!”
그는 바닥을 구르면서 물러선 뒤 고개를 들었다. 크고 작은 부상을 입고, 많은 오러를 소모했음에도 눈동자가 죽지 않았다.
“아직이다.
트레빈은 비틀거리며 일어선 뒤 검을 들어 올렸다. 다리와 허리가 떨렸지만, 신기하게도 검만큼은 흔들리지 않았다.
“내 검은 아직 꺾이지 않았어.”
그가 검을 겨눠온다. 오러와 체력이 동났음이 분명한데 등골이 오싹했다. 지금까지 중 가장 위험한 냄새가 났다.
-저놈.
라스가 팔찌 위로 올라오며 입맛을 다셨다.
-실력은 허접하지만, 나름 괜찮은 인간이로구나.
‘그래.’
라온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력, 정신력, 마음가짐까지 무엇 하나 모자라지 않아.’
트레빈은 상대를 모욕하지도, 비겁한 짓도 하지 않고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싸웠다.
저런 무인이 카룬과 같은 직계라는 게 믿기질 않았다.
-저놈에게 무슨 음식을 잘하냐고 물어보아라. 괜찮으면 본왕의 부하로 삼도록 하지. 물론 실제로 요리하는 모습을 보아야….
‘좀 가라.’
파이를 잘 구웠으면 좋겠다고 중얼거리는 라스를 쳐내고 제천검을 들었다.
“이게 마지막이 되겠군요.”
“그렇겠지.”
트레빈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본인의 검극을 보았다.
“내가 사용할 초식은 철관검의 기본이 되는 관일첨진이다.”
“저는 광아검의 광류사일이라는 초식을 사용하겠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트레빈과 마주 섰다. 서로에게 검을 겨누고 있을 때 강기의 폭풍에 휩쓸린 돌조각이 떨어져 내렸다.
타악.
돌조각이 땅에 닿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라온과 트레빈이 서로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피이잉!
공교롭게도 둘 모두 찌르기. 상대의 어깨를 노리는 검격이 빛살이 되어 쏘아졌다.
쩌어어엉!
얇디얇은 검극과 검극이 격돌했다.
찌지지직!
호각이었던 힘겨루기가 라온에게 기울어진다. 오러나 힘이 아닌 검술 단련의 차이였다.
퍼어어억!
결국 제천검이 트레빈의 검을 깨부수고 그의 어깨를 박혔다.
“크윽!”
트레빈이 신음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힘이 다했는지 전신을 파르르 떨면서도 미소를 지었다. 이 전투가 만족스러운 것 같았다.
“네 검이 나보다 더 빠르고, 날카로웠다.”
이번에도 솔직하고 깔끔한 인정. 트레빈은 차가운 인상과 달리 명예와 신의를 아는 무인이었다.
“음….”
라온이 제천검을 아래로 내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안 되겠군.’
원래 승리하기 직전에 기권해서 시험에 대한 평가는 높이고, 리메르의 도박을 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 기권한다면 검과 검. 마음과 마음을 부딪친 트레빈을 무시하는 행동을 하게 되기에 손이 올라가지 않았다.
‘그래. 이런 사람을 조롱할 수는 없지.’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무인을 만났는데 놀림감으로 만들 수는 없다.
특히나 리메르를 조지기 위해서 리메르와 같은 사람이 되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라온이 뒤를 돌아보았다. 훌쩍 물러서 있는 광풍단 검사들도 상황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맞느니라.
라스가 콧방귀를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리 진지하게 나온 상대를 조롱하는 건 마족들도 하지 않는 짓이니라.
녀석의 말을 들으면 마족이 인간보다 더 착한 것 같았다.
-그러니 그 귀때기를 제대로 밟아버려야 하느니라.
‘그래. 돈도 뺏고, 귀도 뽑아놔야지.’
라온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트레빈이 시원한 미소를 지은 채 손을 들어 올렸다.
“내가 졌다.”
그가 패배를 인정함과 동시에 해리슨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철전대주 트레빈 지그하르트 전투 불가!]
[시가지 전투의 승자는 광풍단입니다!]
해리슨의 선언이 울리자마자, 광풍단이 손을 들어 올렸다.
“우와아아아아아!”
“우리가 이겼다!”
“철전대를 꺾었다고!”
“광풍단! 광풍단! 광풍단!”
“광견! 광견! 광견!”
광풍단과 전장을 둘러싸고 있던 관객들이 모두 환호성을 내질렀다.
“일어나시죠.”
“흐음.”
라온은 주저앉은 트레빈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그 손을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나름 제대로 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상으로 성장하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군. 다음에 싸우게 되면 내 예상보다 한 급은 더 높게 잡아야겠어.”
트레빈이 라온을 보며 피식 웃었다.
“다음? 또 싸우실 생각이십니까?”
“난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야. 덕분에 배운 점도 있고, 조만간 제대로 붙어보고 싶은데.”
“성격이 조금 변하신 것 같군요.”
“자네 덕분이지.”
그는 조심성 많은 성격을 고쳐봐야겠다며 웃었다.
“물론 이 성격을 쉽게 고칠 수는 없겠지만, 한 번씩 대련을 해줬으면 좋겠군.”
이번에는 트레빈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물론입니다.”
라온이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이 맞잡은 손 위로 관객들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 * *
“크으으으!”
글렌은 라온과 트레빈이 손을 잡는 모습을 보며 맥주를 들이킨 듯한 시원한 탄성을 흘렸다.
그는 참지 못하고 박수까지 치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회주가 이전에 말했던 거 있지 않소?”
“예? 어떤….”
눈탱이가 밤탱이가 된 도리안을 보며 미소 짓던 아디스가 고개를 홱 들었다.
“라온에게 사람을 변화시키는 재능이 있다는 말 말이오.”
“아! 맞습니다!”
“나도 지금 그걸 본 것 같소.”
글렌이 만지면 녹을 듯한 보드라운 미소를 지으며 라온을 내려보았다.
“본래 트레빈은 조심성이 많고, 좋지 않은 상황일 때 포기가 빠른 아이였소. 하지만 라온과 싸우며 저 녀석도 변한 것 같소,”
“역시 제가 잘못 본 게 아니었군요.”
아디스는 다른 건 몰라도 사람 보는 눈은 자신 있다며 웃었다.
“로엔.”
글렌이 뒤를 돌며 로엔을 불렀다.
“조금 전에 라온이 한 말은 모두 적었겠지?”
“물론입니다. 라온 복음 2장에 적어두었습니다.”
로엔이 품에서 성스러울 정도로 새하얀 책자를 꺼내 흔들었다.
“좋군. 일도 잘 끝났으니, 이제…음?”
글렌은 가장 먼저 도박꾼에게 다가가서 돈을 챙기는 키가 큰 남자를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아니,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군.”
그의 손아귀에서 붉은 뇌기가 타올랐다.
“죽여야 할 놈이 남았어.”
“허허허.”
* * *
“허!”
마르타가 라온을 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마스터 최상급을 꺾을 정도로 성장했다니….”
라온은 오웬 왕국에서 대련할 때보다 더 성장해서 돌아왔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어이가 없을 정도로 강해져서 돌아오니, 인간이 아니라 무슨 괴물을 보는 것 같았다.
“나도 미쳤다고밖에 할 말이 없어.”
버렌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저 녀석의 페이스에 끌려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도 당황스럽네.’
어디까지 갈지 모르겠어.
20살에 마스터 최상급을 꺾는 무력은 대륙의 기나긴 역사를 뒤져봐도 드물디드문 경우일 것이다.
저런 괴물이 동시대에. 그것도 바로 옆에 있다는 게 축복인지, 저주인지 모르겠다.
“이제 자도 돼?”
루난은 눈을 비비며 고개를 꾸벅였다. 승리의 기쁨보다 잠이 급한 것 같았다.
“들었나.”
세 사람이 각자 떠들고 있을 때 철전대 1번 부대주 카망이 다가왔다.
“너희 부단주와 우리 대주가 앞으로 자주 대련을 하자더군.”
그가 눈매를 좁히며 버렌과 마르타, 루난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다음에는 절대 안 진다.”
“그때도 저희가 이길 겁니다!”
“다음에는 나 혼자 꺾어주지.”
버렌은 주먹을 말아쥔 채 고개를 끄덕였고, 마르타는 자신감 넘치게 미소를 지었다.
“누구?”
루난은 얼굴이 부어오른 카망을 못 알아본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크으윽….”
“얘들아!”
카망이 자존심 상한 듯 이를 갈 때 관객들 사이에서 리메르가 튀어나왔다.
“전부 고생했어! 난 너희를 믿고 있었다!”
“…….”
광풍단은 리메르가 신나게 춤을 추고 있음에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내가 너희를 믿고 전장을 떠난게 정답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네. 모두 한 층 더 성장한 느낌이야.”
“…….”
“왜 아무도 대답을 안 하는 건데? 나는 너희를 생각해서….”
“단을 버린 단주에게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라온이 차가운 안색으로 리메르에게 다가갔다.
“다, 단을 버린 게 아니라, 너희를 단련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기권한 거라고! 봐! 결과도 좋잖아!”
리메르가 어색하게 웃으며 붕어처럼 눈동자 돌렸다.
“단주님의 돈을 위해서겠죠. 배당이 7배로 늘어서 금화 좀 만지셨겠네요.”
“무슨 소리야! 오늘은 도박판 근처에도 안 갔어!”
그는 절대 아니라며 손을 마구 저었다.
“똥파리가 똥을 그냥 지나칠 리가 없죠.”
라온이 리메르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또, 똥….”
리메르가 마른침을 삼키며 뒤로 물러섰다.
“증거도 없잖아! 난 오늘 정말….”
“증거는 여기 있다.”
천공에서 웅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올리니, 글렌이 허공을 계단처럼 밟으며 내려오고 있었다.
“가, 가주님?”
리메르가 턱을 파들파들 떨었다. 글렌이 있다는 건 알았어도 이 자리에 직접 내려올 줄은 몰랐던 표정이었다.
딱!
글렌이 손가락을 튕기자, 어디선가 나타난 로엔이 리메르에게 다가가 털모자를 씌우고, 콧수염을 달았다. 귀신같은 솜씨였다.
“저, 저거 광풍단에 돈 건 놈이잖아! 그것도 제일 많이 걸었어!”
언덕 위에서 도박판을 관리하던 이빨 빠진 노인이 비명을 질렀다.
“자, 잠깐 그러면….”
“저 자식이 또!”
“이번에도 장난질 친 거야?”
“손모가지를 그냥….”
리메르가 재빠르게 모자를 벗고, 콧수염을 뗐지만 이미 늦었다. 도박판에 있던 사람들이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적당한 도박은 스트레스를 풀기 좋아서 무시했지만, 눈앞에서 이루어진 승부조작까지 놔둘 수는 없지.”
“우욱….”
글렌이 건조한 음성에 리메르가 고양이 앞의 쥐처럼 몸을 움츠렸다.
“전력을 다해 싸운 광풍단과 철전대의 전투를 승부조작으로 더럽히고 싶지 않군. 오늘 이뤄진 도박은 무효로 한다. 그리고….”
로엔이 글렌에게 다가가 아공간 주머니를 건넸다. 리메르가 품에 넣어두었던 주머니였다.
“승부조작을 벌이려 한 광풍단주의 금화는 가문의 보고로 환수하고, 광풍단주 본인은 6개월간 감봉에 처한다.”
“아, 잠깐만요! 그건 너무 심한….”
“아직 안 끝났다.”
글렌의 손이 아래로 내려섰다. 그의 손길을 따라 마른하늘에서 시뻘건 뇌광이 번쩍였다.
쿠르르르릉!
어떠한 전조도 없이 쏟아진 낙뢰가 리메르의 정수리에 내리꽂혔다.
한 번이 아니다. 글렌은 벼락을 연속으로 세 번 떨어뜨려 리메르의 전신을 짓눌러버렸다.
“끄아아아악!”
붉은 우레에 휘감긴 리메르가 불에 구운 오징어처럼 전신을 비틀며 비명을 질렀다.
치이이이익!
리메르는 기절한 듯 입을 떡 벌린 채 회색 김을 내뱉었다.
“죽었어?”
모두가 글렌의 위엄에 놀라서 꼼짝도 못 할 때 루난은 어디선가 나뭇가지를 가지고 와서 리메르의 뺨을 콕콕 찔렀다.
리메르가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처럼 꿈틀대고, 하얀 나뭇가지에 시꺼먼 재가 묻어나왔다.
탁탁.
글렌은 가볍게 손을 털고서 시꺼멓게 그을린 리메르의 등을 밟고 라온과 트레빈에게 걸어왔다.
“철전대주.”
“아, 예!”
트레빈이 차려자세를 하고 턱을 바짝 세웠다.
“조심성이 많다는 건 분명 큰 장점이지만, 중요한 기회를 놓칠 수 있는 단점이 되기도 하지. 가끔은 과감한 선택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예.”
“중간을 잘 찾아보도록.”
“감사합니다!”
트레빈은 글렌의 조언에 얼굴이 붉어진 채로 고개를 숙였다. 스스로도 깨달은 부분이었기에 더 크게 울리는 것 같았다.
“광풍부단주.”
“예.”
라온이 글렌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철전대주의 성격을 알고 있었나?”
“준비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먼저 상대에 대해 조사부터 했습니다.”
“준비 기간이 짧았다? 그건 또 무슨 소리지?”
“라, 라온! 말하면 안… 끄허어억!”
글렌이 작은 벼락을 떨어뜨려 리메르의 입을 막았다.
“사실 이 전투가 있다는 걸 어제 들었습니다.”
라온은 리메르 때문에 늦게 이 시험을 늦게 알게 된 점을 이야기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떨어진 두 줄기의 벼락이 리메르의 머리를 대지에 박아넣었다.
“으으….”
그는 이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가는 신음과 고기가 구워진 듯한 냄새만을 풍겼다.
“진짜 죽었어?”
살짝 떨어져 있던 루난이 재빠르게 다가가 나뭇가지를 찔렀다.
“후….”
글렌은 한숨을 내쉬고서 라온을 바라보았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주어진 정보만으로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내다니, 훌륭한 판단이었다.”
그의 시선이 광풍단 모두에게 향했다.
“용기와 의지가 보이는 전투였다. 광풍단. 대로 가는 첫 번째 시험을 통과한 것을 축하한다.”
그는 마지막으로 라온과 눈을 마주치고서 몸을 돌렸다. 한 발을 걷는 것 같더니 어느새 훈련장에서 사라졌다.
“우와아아아아아!”
“첫 시험 돌파!”
“광풍대가 얼마 안 남았어!”
“우리도 이제 대가 되는구나!”
광풍단은 서로 손을 맞잡으며 함성을 내질렀다.
“잠깐.”
라온이 손을 들어 기뻐하는 광풍단을 막아섰다.
“아직 다 안 끝났어.”
그 말을 하며 자빠진 리메르를 가리켰다.
“아, 그러네. 저 망할 단주가 남았지.”
마르타가 주먹을 말아쥐며 이를 드러냈다. 이전보다 더한 광기가 그녀의 눈에서 타올랐다.
“오늘은 나도 안 말려.”
버렌도 눈을 희번뜩 뜨며 다가갔다. 입에서 더운 김이 흘러나왔다.
“저도 못 참겠어요! 진짜 힘들었다구요!”
도리안이 코피를 막고 있던 천을 빼며 콧김을 뿜었다.
“그러니까! 오늘 확실히 밟아….”
“넌 빠져. 크레인.”
“예….”
초반에 탈락한 크레인은 라온의 서늘한 음성을 듣고, 알아서 땅에 머리를 박았다.
“얘, 얘들아….”
“다들.”
라온은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리메르에게 손가락을 겨누었다.
“밟아.”
“죽어!”
“죽어는 좀 심하고 마르타.”
“뒈져!”
“그건 좋네.”
광풍단이 모조리 달려들어 리메르를 밟기 시작했다.
“끄어어어억….”
간신히 일어서던 리메르는 본인의 제자들에게 밟히며 갈라진 바닥에 다시 처박히기 시작했다.
“함께 하시죠.”
라온의 손짓에 트레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가자!”
“예!”
“저 망할 엘프 때문에 다 꼬였습니다!”
“우릴 무시하다니!”
열심히 준비했던 계획들을 사용 못 해서 우울해하던 철전대도 달려와 리메르를 밟기 시작했다.
다만 아직 리메르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들은 한참 남아있었다.
“이 망할 자식아!”
“내 돈 내놔!”
“그거 어떻게 딴 건데!”
“내 7배애애애애애!”
“넌 뒈졌어!”
광풍단에 걸었다가 원금만 간신히 돌려받은 도박꾼들이 우르르 달려와 리메르를 밟기 시작했다.
그날 리메르는 200여 명에게 밟혀 지그하르트에 새로운 기록을 썼다. 오죽하면 라스가 걱정할 정도였다.
-저러다가 진짜 귀 뽑히는 거 아니냐?
‘오늘은 뽑혀도 돼.’
-조립식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