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3화
아디스 세피아는 철전대를 밀어붙이는 광풍단을 보며 입을 떡 버렸다.
“저, 전황이 이렇게 변하다니….”
광풍단주가 철전대 부대주 한 명만 잡고 기권을 했을 때 이미 끝난 싸움이라고 생각했었다.
양 진형 모두 당황했다면 전력이 더 강한 철전대가 유리한 게 당연했으니까.
하지만 먼저 정신을 차리고 불리함을 극복한 건 광풍단이었다.
철전대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 문을 걸어 잠그는 동안 광풍단은 빠르게 계획을 정리한 뒤 돌진해 철전대의 중심을 무너뜨렸다.
바로 앞에서 보고 있었음에도 믿기지 않는 대담한 전략이었다.
‘이건 모두….’
아디스가 마른침을 꿀꺽 삼킨 후 철전대주 앞에 선 라온을 바라보았다.
‘저 남자 때문이지.’
리메르가 기권한 이후 당황한 광풍단을 일으켜 세운 것도, 철전대를 몰아칠 계획을 짠 것도, 철전대주 트레빈을 묶어 둔 것도 모두 라온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 전투는 진작 철전대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다.
‘다만….’
불안해.
철전대주 트레빈의 경지는 마스터 최상급이라고 들었다. 라온이 성장을 했다고 해도 무력과 경험 면에서 큰 차이가 나기에 걱정이 되었다.
아디스는 탁한 숨을 뱉으며 옆에 서 있는 글렌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전장이 아니라, 반대편에 있는 구경꾼들을 노려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화가 났는지 손가락에서 붉은 스파크가 번쩍였다.
“가, 가주님. 광풍부단주가 철전대주를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 질문을 듣고 나서야 글렌의 눈이 전장을 향했다.
“철전대주의 경지는 마스터 최상급이니, 그가 정신만 차린다면 광풍부단주가 이길 길은 없지 않겠습니까?”
“마스터 중급이라면 그렇겠지.”
글렌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라온을 보았다. 그의 기세가 부드럽게 가라앉고, 주먹에서 터지던 스파크가 사그라들었다.
“저 아이는 이미 마스터 상급에 올랐소.”
“마, 마스터 상급?”
아디스가 눈을 부릅떴다.
‘저 나이에 상급이라니, 이대로 성장한다면 정말 대륙제일인도 꿈은 아니겠어. 다만….’
그건 미래의 일이지.
상급이 되었다고 해도 상대는 최상급에 오르고 더 많은 경험을 쌓은 트레빈이다.
모든 면에서 큰 차이가 나기에 라온이 이길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도 철전대주는 마스터 최상급이지 않습니까.”
“맞소. 일반적으로 무학 경지의 급간을 넘어서는 건 무리지. 다만….”
글렌이 따스한 눈빛으로 라온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저 아이에게는 그 급간을 넘어서는 힘이 있소. 그건 그 어떤 재능보다도 희귀한 것이지.”
“아….”
자신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라온에게 끌렸듯이, 글렌은 어떤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는 라온의 모습에 반한 것 같았다.
“보고 계시오.”
글렌의 냉막한 표정에서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났다.
“저 아이가 상회주의 기대를 아주 훌륭하게 배신해줄 테니까.”
* * *
라온은 철전대주 트레빈 지그하르트를 보며 짧게 혀를 찼다.
‘너무 당황해서 오히려 침착함을 찾은 건가?’
트레빈의 흔들리던 동공이 섬뜩한 빛을 뿜어낸다. 연달아 터지는 철전대의 탈락 소식에 무너지던 정신을 억지로 잡은 것 같았다.
“후….”
트레빈이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이쪽을 바라보며 진심이 담긴 감탄을 내뱉었다.
“대단하군. 무력과 전략이 뛰어난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대범할 줄은 몰랐다. 전략으로, 그리고 단체전으로 따지자면 나의 완벽한 패배다.”
그는 직계답지 않게 순수하게 패배를 인정했다.
“하지만 나도 지그하르트의 대주. 나 때문에 쓰러지는 부하들 앞에서 그저 패배를 외칠 수는 없다.”
트레빈이 검을 세우자, 창칼처럼 예리한 기운이 끝도 없이 치솟았다. 그 자체가 하나의 검으로 화한 느낌이었다.
“검으로 너를 꺾고, 이 못난 대주를 따른 녀석들에게 승리를 안겨줄 것이다.”
“좋은 계획이지만, 난 질 생각이 없어.”
라온이 차게 웃으며 전장을 가득 메운 화령의 조각들을 움직였다.
화아아아아아!
거대한 화염 폭풍이 전장 자체를 지워버리려는 찰나 트레빈의 검이 앞으로 쏘아진다.
하나의 검극이 수백 개로 번지며 열화의 꽃잎들을 모조리 뚫어버렸다. 그가 익힌 최상급 검술 철관검이었다.
퍼버버버버벙!
강기와 강기가 서로 이를 드러내며 허공에 웅대한 빛무리가 퍼져 나왔다.
가라앉는 백광 아래로 트레빈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번쩍인다. 본래의 침착한 모습을 되찾은 것 같았다.
‘화령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워버렸군. 역시 강해. 다만….’
내 검을 아는 것 같았어.
트레빈의 검술은 그저 빠르고 강한게 다가 아니라, 화령의 투로를 읽는 것처럼 움직였다.
라온이 눈빛을 가라앉히며 제천검을 고쳐잡았다.
‘시험해볼까.’
땅을 박차고 나아가 회천을 일으켰다. 검극에 응집된 화염의 구체가 회전하며 강대한 기운을 일으켰다.
치이이잉!
트레빈이 미끄러지듯 앞으로 달려온다. 자세를 낮춘 채로 내지른 검에서 솟구친 백광이 회천의 중심을 갈랐다.
콰아아아아앙!
완성되기 전에 폭발한 회천의 화염이 분수처럼 뿜어져 시야를 가렸다.
‘회전이 힘을 받기 전에 지운 건가?’
라온은 당황하지 않은 채 뒤로 튕겨 나간 제천검에 글래시아의 기운을 휘감았다.
트레빈의 기척을 찾은 뒤 눈 앞을 가린 불꽃을 사선으로 그어 내렸다.
치이이이잉!
제천검의 투로를 따라 내리꽂히는 서리의 참격이 트레빈의 쇄골을 노릴 때 그의 눈동자가 백색으로 번쩍였다.
쩌저어어엉!
트레빈은 연속으로 철관검의 묘리를 풀어 제천검의 칼날과 냉기의 칼날을 동시에 쳐냈다.
“큭!”
라온이 흔들리는 팔에 힘을 주며 이마를 찌푸렸다.
‘역시 이 자는….’
내 검술을 알고 있어.
서리연의 검격이 두 번이라는 것만이 아니라, 어디서 오고, 얼마나 빠르게 따라붙는지를 알고 있었다.
트레빈은 그저 강한 게 다가 아니라, 라온 지그하르트의 검을 모두 파악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에 대해 연구했나?”
“그렇다.”
트레빈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검사가 유명해진다는 게 좋기만 한 일은 아니다. 네 검술, 움직임, 오러가 적들에게 연구되고 있다는 뜻이니까.”
그가 가늘게 턱짓하며 검을 들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너를 나와 같은 수준이라고 생각하면서 싸울 것이다.”
“영광이라고 해야 할까.”
라온의 눈동자에 흥미로운 빛이 맴돌았다.
“그 마음이 끝까지 변하지 않기를 바라지.”
* * *
트레빈은 돌진해오는 라온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공간을 뛰어넘는 보법이로군.’
라온이 사용하는 보법은 블링크처럼 사라졌다 나타나는 신묘한 보법이다.
다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인지 이동 거리가 제한되고, 연속으로 사용할 수 없기에 움직임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뒤!’
주변으로 기감을 펼쳐놓은 덕분에 후방에서 라온이 다가온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내리치는 검격에 사나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광아검인가.’
저 흉폭한 검격은 상대의 빈틈을 억지로 만들어내는 광아검이라는 감각검이었다.
‘대단한 검술이지만….’
막는 방법은 있지.
감각검은 상대의 빈틈을 파고드는 검술. 일부러 여러 빈틈을 만들어내서 검로를 유도하면 그만이다.
트레빈은 광아검이 제힘을 받기 전에 철관검의 선철첨을 펼쳐냈다.
캬갸갸갸걍!
검과 검이 맞부딪치며 쇳덩이가 비틀어지는 듯한 소리가 마구잡이로 퍼졌다.
“쯧.”
라온이 짧게 혀를 차며 검을 내리그었다. 광아검이 아니다. 검날 앞에 열선을 만들어내서 무기와 적을 통째로 베어버리는 극한의 예검이었다.
‘이것도 알고 있다.’
트레빈이 어금니를 지그시 씹으며 금형상절을 내질렀다. 백광을 두른 검격이 뻗어나가 열선이 완성되기 직전이었던 라온의 검을 쳐냈다.
쩌어어어엉!
라온이 검과 함께 뒤로 물러났다가 땅을 밀어내고 다시 돌진해온다. 그는 어느새 검집에 넣어둔 검을 발검했다.
‘소리의 검!’
트레빈은 청각만이 아니라, 전신의 감각을 모조리 차단하며 철관검의 철중쟁화를 쏘아냈다.
캬아아앙!
은빛 칼날이 라온의 발검을 막으며 혼란을 만들어내는 소리가 그쳤다.
쿠우웅!
라온은 철중쟁화의 거력을 이겨내지 못한 채 바닥에 깊은 족적을 남기며 뒤로 물러섰다.
트레빈이 허리를 쭉 펴며 미소를 흘렸다.
‘역시 되는군.’
철관검의 장점은 정확성과 빠름 그리고 관통력이다.
늦게 나아가도 먼저 닿는 검술이기에 정보를 모두 알고 있는 적을 상대하는 건 자신 있었다.
“말했듯이 난 너를 우습게 보지 않는다.”
트레빈은 승기를 잡았음에도 감정을 가라앉혔다. 라온은 역전의 명수이기에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된다.
“전력을 다해 깨부술 것이다.”
“…….”
라온은 어떠한 대꾸도 없이 쇄도해와 대륙에 전설을 만들었던 검격들을 쏟아냈다.
불꽃이 하늘에 닿을 정도로 솟구치고, 냉기가 전장을 모조리 얼리며 밀려왔지만, 트레빈은 물러서지 않았다.
콰과과과과!
철관검의 절기를 연거푸 펼쳐내며 미리 짜두었던 계획대로 라온의 절기들을 하나씩 깨부쉈다.
“크흑….”
라온이 뒤로 물러나며 입가로 피를 흘렸다. 철관검에 깃든 오러 관통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내상을 입은 것 같았다.
“후우!”
트레빈이 흔들리는 손목을 부여잡으며 헛바람을 흘렸다.
‘대단하군….’
라온의 검술을 끝없이 연구했고, 더 높은 경지에 있음에도 파훼하는 게 쉽지 않았다. 저 괴물은 이 싸움을 끝낸 뒤 더 위로 올라갈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이긴다.’
마스터 최상급이라는 경지 그리고 라온에 대해 연구를 했기에 전투에서 계속 이득을 얻었다.
이 싸움은 다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트레빈이 입술을 깨물며 라온을 살폈다.
‘왜 즐거워 보이는 거지?’
모든 검술을 막아내고 있음에도 라온의 눈빛이 죽질 않는다. 오히려 점점 더 기세가 거세게 타오르는 것 같았다.
“저를 연구했다는 게 정말이었군요.”
라온의 음성이 흥겨운 듯 튀었다. 갑자기 말을 높이는게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갑자기 왜 말을 높이는 거지?”
“당신은 그럴 만한 자격이 있으니까.”
“뭐?”
“처음에는 피와 지위만 믿는 멍청이들과 똑같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전투로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라온이 연한 미소를 흘렸다. 압도적으로 밀리는 상황에서 저리 웃는 이유를 모르겠다.
“제 무학만 연구한 게 아니라, 오러가 상승할 것도 예측하셨군요.”
“맞다. 네 성장은 예측불허기에 오러의 양과 질이 상승하는 것도 염두에 두었지.”
트레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은 지금까지 어떤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마다 이전보다 강해져서 돌아왔다.
그걸 바탕으로 마스터 상급이 된 라온의 무력을 생각하며 대비를 해왔다.
“철저하다고밖에 할 말이 없네요. 다만 당신이 생각한 제 검술 수준은 육황 결투 대련이겠죠?”
“그렇다.”
“그럼 주의하는 게 좋을 겁니다. 지금부터….”
라온이 들뜬 미소를 흘리며 검을 고쳐 잡았다.
특별히 무언가가 변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등골에 오싹한 소름이 돋아 올랐다.
“조금 달라질 테니까.”
그 말과 함께 라온이 달려와 광아검을 내지른다. 오러를 모조리 끌어 올렸는지 이전보다 속도가 빨랐다.
치이이잉!
꺾여서 들어오는 맹렬한 검격을 향해 철관검을 찔러넣었다.
쩌어엉!
이전과 같은 타이밍에 검을 쏘아냈지만 철관검의 묘리가 먹히지 않은 채 튕겨 나왔다.
‘뭐지?’
오러가 상승한 건 맞지만 이런 차이가 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다만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라온의 검격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으니까.
“흐읍!”
트레빈은 날카롭게 갈린 라온의 검격을 향해 철관검의 절곡백철을 꽂아 넣었다.
쩌저저저정!
검과 검이 맞물리며 터져 나온 강렬한 충격파가 사위를 휩쓸었다.
“크윽….”
트레빈은 손목을 털어내며 신음을 흘렸다. 이전과 달리 뼈가 아릴 정도의 충격에 저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으음….”
라온 역시 철관검의 관통력에 내상을 입은 듯 피를 더 많이 흘렸지만, 파훼법이 먹히지 않았다는 게 중요했다.
“너….”
“이제 시작입니다.”
라온이 제비처럼 몸을 낮춰서 접근해온다. 찰나의 순간에 냉기에 물든 검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이연격!’
진짜 칼날과 냉기의 칼날이 연달아 그어지는 극쾌의 검술이었다.
꾸욱.
트레빈은 입술을 깨문채 철관검의 절기 사자박련의 구결을 검날에 휘감았다.
쩡! 쩌저저정!
이전과 같은 두 번의 부딪침. 하지만 라온의 첫 번째 칼날은 빨랐고, 두 번째 칼날은 느렸다. 그 작은 차이에 사자박련의 초식이 비틀어졌다.
“크으윽!”
트레빈이 우측으로 튕겨나가며 입술을 깨물었다. 내상을 입은 듯 속이 울렁거렸다.
‘초식의 속도를 조절할 수 있었다니….’
라온이 방금 펼친 검술은 극쾌의 묘리를 담은 두 번의 검격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이연격이다. 그 속도를 조절해서 이쪽의 균형을 무너뜨릴 줄은 몰랐다.
화아아아아아!
라온이 검이 리본처럼 부드러운 곡선을 그린다. 그 선 위로 열화의 꽃봉오리들이 피어난다.
‘화령인가.’
조금 전에 파훼했던 라온의 주특기 검술이었다.
파아아앙!
꽃송이들이 개화하며 무수한 불꽃의 조각들이 몰아쳐 왔다. 온 세상이 붉은 꽃잎에 휩싸여 있었다.
“다시 깨주마!”
트레빈이 숨을 멈추고, 검을 뒤로 젖혔다. 그의 검이 백광을 두른 채 뻗어나간다. 철관검의 절기 백파만결이었다.
콰과과과과!
고고한 전장의 하늘 위로 홍백의 강기가 끝없이 격돌하며 연달아 폭발이 일어났다.
트레빈은 화령을 막아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것도 달라졌어.’
궤도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던 이전과 달리 백여 개의 꽃잎들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그 위력은 뼈가 아릴 정도였다. 말 그대로 하나하나가 진짜 검과 같았다.
피이이익!
미처 막지 못한 꽃잎들이 제복을 가르며 화상과 출혈을 동시에 일으켰다. 아찔할 정도의 통증에 이가 저절로 꽉 물렸다.
쩌어어어엉!
트레빈은 억지로 라온을 밀어낸 후 거친 숨을 뱉어냈다. 라온을 담은 그의 푸른 동공이 다시 한번 휘청였다.
“너, 너는 대체….”
* * *
라온은 당황하는 트레빈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철전대주께서 상정하신 제 성장은 어디까지나 오러에 국한되었겠죠.”
철전대주는 분명 자신의 여러 검술들을 이해하고 대비했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제 성장은 오러가 다가 아닙니다.”
오웬 왕국을 떠난 후부터 지금까지 단 하루도 검을 휘두르지 않은 적이 없다. 수련을 못 할 때에는 부족한 점을 떠올리고, 심상 속에서 그 단점을 고치는 수련을 해왔다.
끊임없이 단점을 고치고, 장점을 극대화한 검술들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라온이 부드럽게 대지를 내디디며 제천검을 내질렀다.
후우우우웅!
검극의 끝에서 돋아난 열화의 구체가 맹렬한 회전을 일으키며 트레빈을 향해 막대한 기운을 뿜어냈다.
‘회천은 발동시간이 빨라졌지.’
위력이 강화된 대신 발동 속도가 느려진 회천 역시 끝없는 단련을 통해 완성 속도가 빨라졌다.
콰아아아아앙!
트레빈이 반 박자 빠르게 검을 내질렀지만, 회전은 이미 완성되었다. 두 절기가 맞부딪치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크윽….”
트레빈은 강기로 막을 만들며 뒤로 물러섰다. 회천의 충격으로 그의 좌측 상반신이 뻘겋게 변했다.
“쯧.”
라온이 혀를 찼다. 오른팔이 창이 박힌 듯 아렸다. 역시나 마스터 최상급. 그의 검술은 당황한 와중에도 자신의 빈틈을 찔러왔다.
“으으!”
다만 트레빈은 기가 죽은 것처럼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지금은 통증에 가라앉을 때가 아니라, 더 나아가야 할 때였다.
터엉!
라온이 태화보를 밟았다. 공간을 뛰어넘어 트레빈의 우측에서 제천검을 내리쳤다.
치이이잉!
제천검의 검신 위로 피어난 한 줄기 열선이 트레빈의 가슴을 노렸다.
“제길!”
트레빈이 입술을 깨물며 철관검을 내지른다. 뻗어 나오는 예리함과 속도가 섬뜩했다.
쩌어어어엉!
만화공 적섬과 철관검의 절기가 정면에서 경합하며 주홍색 강기의 폭풍이 치솟았다.
쿠구구궁!
트레빈은 그 폭풍에 휩쓸릴 정도로 뒤로 밀려나 거친 숨을 토해냈다. 그의 가슴에는 사선으로 그어 내린 선명한 상처가 돋아나 있었다.
“오웬에서 힘을 숨겼던 건가….”
그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검을 쥔 손을 떨었다.
“퉷.”
라온이 내상으로 인해 역류한 핏덩이를 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강해진 겁니다. 계속 수련을 해왔으니까.”
“…그게 더 안 믿기는군.”
트레빈이 헛웃음을 흘리며 검을 들어 올렸다.
“내 정보가 쓸모없다면 단숨에 끝을 보는 게 좋겠지.”
그의 칼날에 청아한 빛무리가 어린다. 흡사 신이 들 법한 거대한 창이 검날 위로 솟구친 것 같았다.
“받아들이죠.”
트레빈이 날 인정해줬듯이 나도 그의 전력을 받아주고 싶었다.
고오오오오!
제천검을 뒤로 젖혔다. 검극부터 솟구친 불꽃이 검신 전체를 휘감았다. 용의 머리처럼 타오른 화염이 시뻘건 아가리를 드러냈다.
콰아아아아아아!
트레빈이 진각을 밟으며 뻗어낸 철관검의 마지막 절기 백전군봉이 세계를 뚫어버릴 것처럼 쇄도해왔다. 마스터 최상급이 일으킨 어마어마한 힘의 파동에 뼈가 으스러지고, 피부가 찢겨나갈 것 같았다.
“후우….”
라온은 시야 전체를 가리는 백광 속에서 호흡을 골랐다.
겁먹을 필요는 없다.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녹아내리지 않는 빙하처럼.
지금까지 쌓아온 검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면 그만이다.
백천군봉의 강기가 코앞까지 다가온 순간 제천검을 앞으로 밀어냈다. 검신에 강림한 적룡이 열화의 포효를 터트렸다.
쿠와아아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