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370화 (370/653)
  • 제370화

    라온은 건조하게 가라앉은 아디스 세피아와 눈을 마주하며 입매를 가늘게 내렸다.

    ‘이것 때문이었나.’

    라스의 말과는 정반대의 상황. 아디스는 화를 내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큰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 집무실로 부른 것 같았다.

    다만 무조건 도와주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제게 투자하신다는 게 어떤 의미죠?”

    “말 그대로 라온 지그하르트라는 사람이 원하는 곳에 돈을 쓸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오.”

    아디스는 미리 준비한 듯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답을 내놓았다.

    -아니 왜! 다른 투자처도 많지 않느냐! 이놈은 돈 먹는 하마이니라!

    ‘시끄러워.’

    라온은 파리를 쫓듯 라스를 쳐내고 아디스를 바라보았다.

    “이유를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미래의 대륙제일인이 될 사람에게 투자하고 싶은 건 상인으로서 당연한 일이오.”

    “그 이유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정말 무력만 따졌다면 아디스는 처음부터 자신을 반겼어야 했지만, 그는 그리 살가운 모습을 보이지 않았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게 분명했다.

    “정말 나이답지 않군. 맞소. 다른 이유가 있지.”

    “어떤….”

    “당신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오.”

    “변화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소. 대륙에 강자는 많고, 천재도 많고, 부자는 더더욱 많소. 어딜 가도 이름을 알 법한 잘난 사람들이 가득하지만, 그중에서 자연스럽게 남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흔하지 않소.”

    아디스는 버릇처럼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도리안은 당신을 따라다니는 것만으로 후계자에 걸맞은 남자로 바뀌었고, 떨어진 검이라는 뜻의 비아냥이 담겨 있는 낙화도를 다시 일으켰소.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도리안을 성장시킬 땐 제 의도가 들어갔지만, 낙화도는 우연히 얻어걸렸을 뿐입니다.”

    “그 우연히 얻어걸리는 걸 남들은 몇십 년째 아무도 못 했다오.”

    마크 괴튼은 젊은 나이에 마스터에 올라 워너 왕국을 빛낼 별로 여겨졌지만, 결국 자기 자신에게 잡아먹혀 낙화도라는 오명을 얻고 용병이 되었다.

    실력이 늘지 않는다고 해도 마스터는 마스터였기에 그를 얻으려 한 사람이 많았지만, 누구도 그의 마음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달랐지.

    라온은 낙화도를 얻는다던가 깨우친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은 채 솔직하게 검을 휘둘렀을 뿐이지만, 그게 오랜 시간 벽을 바라보지도 못한 패배자의 심혼을 울렸다.

    그건 알면서도 할 수 없는 일. 무력, 재능을 넘어선 다른 가치를 가지고 있는 자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마음이 움직이기 위해서는 행위가 있어야 하는 법이라오. 당신은 본인만이 아니라, 남에게도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이지. 그래서 투자를 하고 싶다고 말한 것이오.”

    “그렇군요….”

    라온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서운 사람이군.’

    뛰어난 무력을 가졌거나, 도리안을 성장시켰다고 내게 투자하려는 게 아니었어.

    세피아 상단주 아디스는 라온 지그하르트가 어떤 인간인지 파악했기에 투자하겠다고 나온 것이다.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소.”

    아디스가 테이블을 두드리던 손가락을 뚝 멈췄다.

    “말씀하십시오.”

    “지그하르트의 가주에 오를 생각이 있소?”

    그의 간결한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가주라….’

    이전부터 생각했고, 몇 번 질문도 받았지만 계속 오를 생각이 없다고 했었다.

    ‘내 목표는 아니었으니까.’

    두 번째 삶을 살면서 정한 가장 중요한 목표는 데루스 로베르트의 정체를 밝히고, 놈을 말살하는 것이다.

    설사 다시 죽음이 찾아오더라도 그것만큼은 이뤄야 한다.

    ‘가주가 되면 편하겠지.’

    가주가 되어 데루스를 견제한다면 그 목표를 좀 더 쉽게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어마어마한 숫자의 목숨이 사라질 거야.

    개인과 개인이 아니라, 가문 대 가문의 싸움이 벌어지면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이 무수히 쓰러지게 될 것이다.

    데루스 로베르트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데루스 로베르트와 똑같은 인간이 될 수는 없는 일. 힘겹고, 외로운 싸움이 될지언정 필요 없는 희생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두 번째 목표도 별 의미 없을 테고.’

    실비아를 직계에 올리는 일도 가주가 되면 가능하겠지만, 가주가 될만한 공적을 쌓는 것보다 실비아를 직계에 복귀시키는 일이 더 빠를 것이다.

    즉, 이쪽 목표에도 필요 없었다.

    ‘가주는 내 목표가 아니야. 다만….’

    이전과 달리 지그하르트라는 가문에 정이 들었는지, 조금 더 가문의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었고, 가문을 더 크고 높게 세우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군.’

    가주가 되고 싶기도, 되고 싶지 않기도 하기에 아디스의 질문에 제대로 된 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아마 도움을 준다는 건 없어지겠지.’

    아디스는 상인. 그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는 건 분명 대가를 받아내겠다는 뜻이다.

    다만 그건 가주가 된 이후일 테니, 자신의 대답을 듣게 되면 투자 제안을 취소할 것이다.

    ‘그래도 사실을 말하는 게 마음 편해.’

    아디스는 동료의 아버지이자, 속을 알기 어려운 대상회의 주인이다. 어설프게 속여봐야 의미 없었다.

    -정말이지….

    라스가 라온을 보며 이마를 찡그렸다.

    -네놈의 성격은 종잡을 수가 없느니라. 어제는 양아치 그 자체였다가, 오늘은 현자 같기도 하고. 그야말로 미친놈이니라.

    ‘나도 날 잘 모르겠어.’

    라온은 깊은숨을 내쉬고서 시선을 들어 아디스를 보았다.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

    “예. 가주가 될 수 있다 없다를 떠나 제가 가주가 되어 무얼 할 수 있을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그렇기에 지금은 가주가 될 거냐는 질문에 답을 할 수 없습니다.”

    “으음….”

    아디스가 침음성을 흘리며 눈매를 찡그렸다.

    “이해를 할 수 없군. 모르겠다는 대답이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을 텐데, 왜 그런 대답을 한 거요? 거짓으로나마 가주가 된다고 하는 게 좋지 않았소?”

    “맞습니다. 그게 좋았겠죠.”

    라온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거짓말을 하려고 할 때 상회주께서 하신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어떤….”

    “훔친 물건을 손님에게 가져갈지언정 하자 있는 상품을 올려놓아서는 안 된다.”

    연무장에서 제세르에게 했던 그 말을 꺼내자, 아디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전 상인은 아니지만, 이 자리에 올라온 상품과도 같죠. 거짓으로 점철된 상품으로 상회주님께 거래를 걸고 싶지 않았습니다.”

    “크….”

    아디스가 테이블을 두드리던 손을 멈췄다. 어깨가 떨림과 동시에 그에서 길쭉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크하하하하하!”

    아디스는 평소 보이는 냉철함과 단단함을 풀어 헤친 채 시원할 정도의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야 알 것 같군. 그래. 그랬어.”

    그는 흥이 차오른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와 달리 도리안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정 많아 보이는 눈동자였다.

    “내가 처음에 말한 적이 있을 거요. 보는 눈은 자신 있다고.”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래도 내 눈이 늙은 모양이야.”

    “예?”

    “라온 지그하르트라는 남자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소.”

    아디스가 빙긋 웃었다. 이게 그의 진짜 모습 같기도 했다.

    “이전에 동료의 아버지이니 말을 놓으라고 했었던 말은 아직 유효하오?”

    “그렇습니다.”

    “받아들이지.”

    그가 더 진한 미소를 흘리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자네의 대답을 듣고 나니,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네. 세피아 상회는 라온 지그하르트에게 투자하겠네.”

    아디스가 개운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가는 길이 어디라도 따라가도록 하지. 뭐든 원하는 것을 말하거라.”

    -허억!

    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라스가 펄쩍 뛰어올랐다.

    -그 말만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저 멍청한!

    ‘비켜봐.’

    라온은 부르르 떠는 솜뭉치를 손등으로 쳐내고,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지금 제가 원하는 건 지그하르트의 확장입니다.”

    “확장?”

    “예. 지그하르트는 북쪽 끝에 박혀있기에 육황 중에서도 가장 폐쇄적입니다.”

    “확실히. 북멸왕께서 나선 것과 오웬 왕국에서 이뤄진 대련 결과를 듣기 전에는 육황에서도 끝자락이라고들 생각했지.”

    아디스가 공감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다 위치 때문이죠. 그래서 전 그곳의 기반 시설과 도로망을 넓히고 싶습니다.”

    이건 이전부터 생각한 일이다. 지그하르트를 성장시키기 위해선 사람과 도로, 돈 모두가 필요하기에 거대 상회의 힘이 필요했다.

    “어떤 의미인지 알겠네.”

    아디스는 상회주답게 단번에 그 뜻을 파악한 것 같았다.

    “많은 돈과 시간, 인력이 소모되겠군.”

    “다만 그 이상으로 큰 보상이 돌아올 겁니다. 가주님은 신상필벌이 확실하신 분이니까요. 지금 지그하르트의 손을 잡으려는 곳은 많지만 확정된 곳은 없습니다.”

    “그럼 먼저 움직여야겠군.”

    그는 빠르게 계획을 짜보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리고 다음은 광풍단에….”

    “다음?”

    다음이라는 말에 아디스의 눈이 두 배로 부풀었다.

    “원하는 것을 말씀하라고 하셨잖아요.”

    “그, 그랬지만 또 있을 줄은….”

    이제야 뭔가 이상함을 느낀 아디스가 입술을 떨었다.

    “아직 한참 남았죠.”

    라온은 턱을 살짝 치켜든 채 흥겨운 미소를 흘렸다.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잘 들어주십시오.”

    잠시 후 아디스는 본인의 결정을 후회하게 되었다.

    *     *      *

    지그하르트 알현실.

    북망산 정상처럼 고고하며, 서늘한 냉기가 휘몰아치는 그 장소에 올망졸망한 아이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아이들은 맹한 눈으로 알현실을 구경하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후우.”

    글렌 지그하르트는 어색하게 서 있는 아이들의 선두에 서 있는 넝마의 성자 페드릭에게 매서운 시선을 쏘아냈다.

    “이 아이들은 다 뭐지?”

    “리메르에게 말해뒀는데, 못 들은 건가?”

    “듣기는 했지만, 이렇게 많다는 말은 없었는데.”

    “숫자도 말해줬다네.”

    페드릭이 아이들을 보며 히죽이는 리메르를 가리켰다.

    “리메르.”

    “헉!”

    글렌의 날카로운 음성에 리메르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까, 까먹었습니다.”

    리메르는 에헤헤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

    글렌이 리메르를 죽일 듯이 노려보자, 뼈가 시릴 정도의 냉기가 알현실에 차올랐다.

    “으윽….”

    “아으….”

    “가, 갑자기 왜 이렇게 추운 거지?”

    아이들은 두꺼운 털옷을 입고 있음에도 전신을 파르르 떨었다.

    “글렌. 아이들이 있지 않은가.”

    “으음….”

    페드릭의 부름에 글렌이 인상을 찌푸리고서 기세를 모조리 거둬들였다. 오히려 열기를 일으켰는지 알현실에 훈풍이 불어오는 듯한 따스함이 피어났다.

    “와, 너무하지 않아요? 아이들이 있는데 기세를 풍기고?”

    리메르는 어느새 로엔 옆으로 다가가서 글렌의 흉을 보았다.

    “허허허.”

    로엔은 뒷짐을 진 채로 아이들이 귀엽다는 듯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숫자 좀 잘못 말할 수도 있지. 그거 가지고 사람을 죽이려 들고 진짜 성격 이상하다니까.”

    “허허허.”

    리메르는 로엔이 답을 해주든 말든 상관없이 계속 글렌의 뒷담을 뱉었다.

    “끄응….”

    글렌은 앓는 신음을 흘리고서 아이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 아이들이 세뇌에 당했었다고?”

    “그렇네.”

    페드릭이 겁에 질린 듯 눈동자를 떠는 아이들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글렌은 아이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아직 어른들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아이들의 눈 밑이 시꺼멓게 그을려 있었다. 밝은 인상이 아니라, 삶에 찌든 성인을 보는 듯했다.

    “이곳으로 데리고 온 이유는?”

    “이곳의 냉기를 이용하면 아직 남아 있는 세뇌와 좋지 않은 기억을 지울 수 있으니까.”

    “음.”

    글렌은 기감을 펼쳐 아이들의 외부만이 아니라, 내부까지 확인했다. 세뇌 때문인지 몸 속의 기운이 흐느적거렸고, 마나회로의 손상도 심한 상태였다.

    저 아이들을 보니 어렸을 때 혹한의 저주를 안고 있던 라온이 떠올랐다. 그때를 생각하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고칠 수는 있나?”

    “이 아이들은 치료할 수 있네.”

    페드릭은 애매한 대답을 하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설마 이 추운 곳까지 온 아이들을 돌려보내려는 건 아니겠죠?”

    글렌이 페드릭에게 고개를 끄덕이려고 할 때 리메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온이 일을 잘해놔서 요즘 돈도 많이 들어오는데, 쟤들 먹일 빵이 없는 것도 아니잖아요.”

    “허허허.”

    “사람이면 할 수가 없는 일이죠. 그렇지 않아요?”

    “허허허.”

    “허허허만 하지 말고 동조 좀 해줘요! 이러면 나만 뒈지잖아요!”

    리메르가 빽 소리를 쳤지만, 로엔은 여전히 인자한 웃음만 흘렸다.

    “받아들이지.”

    글렌이 페드릭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들을 별관 근처에 있는 저택으로 보내도록.”

    이 가문에서 가장 따스한 장소는 실비아가 있는 별관이다. 저 아이들을 치료하기 위해선 별관과 가까운 곳에 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고맙네. 역시 내가 친구를 잘 뒀다니까.”

    페드릭이 웃으며 고개를 숙인 후 알현실의 문을 열었다.

    “그럼 가자꾸나.”

    그의 손짓에 아이들이 알현실을 차례로 빠져나갔다.

    “페드릭.”

    글렌은 마지막으로 나가려던 페드릭을 불러세웠다.

    “전에 라온에게 내 앞에서 웃어보라고 한 적이 있나?”

    “아, 그랬지. 어때? 좋았나?”

    페드릭은 뒤를 돌며 히죽 웃었다.

    “…….”

    글렌은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입꼬리가 바람맞은 나뭇잎처럼 진동했다.

    “크하하하! 역시.”

    페드릭은 저녁에 다시 찾아올 테니, 술 한잔하자며 통쾌하게 웃고 알현실을 나갔다.

    “로엔. 안주를 푸짐하게 차려놓도록. 저 거지가 좋아하는 걸로.”

    “알겠습니다.”

    로엔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어어억!”

    글렌의 손짓에 페드릭을 따라 나가려던 리메르의 몸이 붕 떠올랐다.

    콰앙!

    로엔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알현실의 문을 닫았다.

    “로, 로엔 님?”

    “허허허.”

    “우, 웃지 말고 왜 문을 닫았어요!”

    “내가 시켰다.”

    싸늘한 목소리에 뒤를 돌았다. 옥좌에 몸을 묻고 있던 글렌이 일어서서 손가락을 튕겼다.

    콰지지지직!

    허공에 붉은 뇌전이 거미줄처럼 번지며 알현실 천장을 가득 메웠다.

    쿠르르릉!

    리메르는 쏟아져 내리는 붉은 벼락을 눈에 담으며 턱을 떨었다.

    “또, 또야? 끄아아아악!”

    쏟아지는 벼락과 함께 로엔의 웃음이 허공에 물결쳤다.

    “허허허.”

    *     *      *

    라온은 얻을 것을 모두 얻었음에도 2주 동안 세피아 상회를 떠나지 않았다.

    돌산의 정상에 서 있던 그는 밤하늘을 가득 메운 별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크아아아아!”

    마크 괴튼이 괴성을 지르며 암벽을 기어올랐다. 마스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느린 속도였지만 한 발 한 발 정상을 향해 움직였다.

    “에헤헤헥….”

    도리안은 마크 괴튼의 옆에서 개처럼 혀를 내민 채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눈을 풀렸지만, 워낙에 힘이 좋은 녀석이라 속도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둘 다 제법 괜찮아졌네.’

    마나 회로를 아예 막아두어서 육체의 힘만으로 암벽을 타고 올라가야 하는데, 2주가 지나니 육체가 성장하여 둘 다 이전보다 빠르고 간결하게 산을 타고 있었다.

    오늘만 해도 7번째 이 암벽을 오르고 있는데, 처음 산을 오를 때보다 속도가 훨씬 빨랐다.

    -재능 없고 어설픈 것들이지만, 확실하게 한 발씩 나아가는군.

    라스는 나쁘지 않다며 입매를 살짝 끌어 올렸다.

    -이런 것도 나쁘지는 않구나.

    ‘그래. 점점 나아지고 있어.’

    도리안도 성장하고 있지만, 정말 많이 변한 건 마크 괴튼이다. 그는 정해진 숫자가 아니라, 하루종일 이 암벽을 타면서 망가진 육체를 회복시켰다.

    “그럼 좀 도와줘 볼까?”

    라온이 옅게 웃으며 정상에 있는 바위를 슬쩍 문질렀다.

    -너 설마….

    ‘그 설마가 맞아.’

    씩 웃으며 바위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쿠와아아앙!

    파괴왕 칭호가 발동되었는지 예상 이상으로 바위가 갈라지며 도리안과 마크 괴튼의 머리 위로 돌덩이들이 쏟아져 내렸다.

    “허억!”

    “으아아아아악!”

    마크 괴튼과 도리안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숙였다. 두 사람은 바위의 움직임을 보고 이곳저곳으로 피하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눈동자에 생존 의지가 가득 흘러넘쳤다.

    “잘 피하네.”

    라온은 마크 괴튼과 도리안이 도망칠 곳에 바위들을 떨어뜨려서 계속 생각을 하며 움직이게 만들었다.

    ‘이거 재밌는데?’

    돌아가서 광풍단이랑 해야겠다.

    암벽 등반 중에 바위를 떨어뜨리는 훈련은 안법과 예측력, 민첩성까지 기르게 해준다. 최고의 훈련이었다.

    -최고의 훈련을 얼어 죽을! 그냥 저승행 마차를 태워!

    *     *      *

    라온의 계속된 방해에 도리안과 마크 괴튼은 달이 하늘의 중심에 뜨고 나서야 돌산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히이익, 히이이익!”

    “후우욱!”

    도리안은 대자로 누운 채로 침을 질질 흘렸고, 마크 괴튼은 무릎을 꿇은 채로 숨을 헐떡였다.

    “수고했습니다.”

    라온은 지친 상태에서도 쓰러지지 않은 마크 괴튼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정말 변했군.’

    지금까지 들었던 낙화도 마크 괴튼의 소문대로라면 이런 훈련은 하루 만에 때려치웠어야 했다. 그는 원래 인내심이 그리 강한 사람이 아니었고, 용병 생활을 하며 성격이 더 망가졌을 테니까.

    하지만 마크 괴튼은 2주 동안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침부터 밤까지 이 돌산에 올랐다.

    전심전력을 다했기에 그의 육체는 사람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변해 있었다.

    술과 안주로 인한 군살이 빠지고, 단단한 근육이 돋아나 누가 봐도 무인이라고 할 법한 몸이 되었다.

    -의지가 느껴지는 변화이니라.

    ‘마지막 동아줄을 붙잡은 느낌이지.’

    마크 괴튼은 그에게 온 새로운 기회를 부여잡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해 노력하고 있었다.

    아디스 상회주도 말했고, 2주 동안 직접 봐왔기에 알 수 있다. 마크 괴튼이 따르고 싶다고 말했던 건 진심이었다.

    ‘다만….’

    걸리는 부분이 하나 있었다.

    라온이 무릎 꿇은 마크 괴튼 앞으로 다가갔다.

    “마크 괴튼.”

    “예!”

    마크 괴튼은 숨을 헐떡이면서도 산이 흔들릴 정도로 우렁차게 대답했다.

    “저를 따르겠다고 하셨죠? 그 생각은 여전히 변함없습니까?”

    “그렇습니다!”

    “제가 당신의 경지를 높여주지 못한다고 해도?”

    마크 괴튼의 경지가 멈춰버린 이유는 단순히 무학과 오러 때문이 아니다.

    아마도 심리적인 문제. 광풍단을 키우듯 훈련하면 올라갈 가능성이 있지만 무조건 된다고 할 수도 없다. 이것만큼은 확실하게 그의 의견을 알고 가야 했다.

    “…….”

    마크 괴튼은 처음으로 바로 대답하지 않고 흔들리던 눈을 내리감았다.

    잠시 후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눈동자는 훈련할 때처럼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상관없습니다.”

    “정말입니까?”

    “다시 꿈을 꾸게 된 것만으로도 만족스럽습니다. 물론 기대를 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또 벽에 막힌다고 해도 전처럼 절망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경지의 벽.

    처음 그 벽을 보았을 땐 만만했고, 5년 후에 보았을 때 짜증이 났으며, 10년 후에 보았을 때는 절망했다. 그 이후에는 두려워서 한 번도 그 벽을 마주하지 않았다.

    한 달간 라온을 기다리며 마음을 다졌고, 2주 동안 이 산을 모르며 몸을 단련했다. 지금이라면 다시 벽을 봐도 무섭지 않을 것 같았다.

    라온이 마크 괴튼의 정심한 눈동자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바뀌었군.’

    본인의 실력에 절망한 용병 마크 괴튼이 작은 희망을 불씨를 찾은 기사 마크 괴튼으로 변한 것 같았다.

    “도리안.”

    “어? 예!”

    도리안이 헥헥 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네가 보기엔 어땠어.”

    2주 동안 마크 괴튼과 가장 가까이에 있던 사람은 도리안이었기에 그의 의견도 중요했다.

    “으음….”

    도리안은 마크 괴튼을 살피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좋은 아저씨예요. 저한테 요령도 알려주셨고, 무엇보다 열심히 하세요. 같이 가면 좋을 것 같아요.”

    그는 밑에서 보면 정말 전력을 다해서 올라가는 게 보인다고 말을 덧붙였다.

    “그런가.”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밑에서 본 도리안이 그렇듯 위에서 볼 때도 마크 괴튼은 항상 진심이었다.

    ‘데리고 가야겠어.’

    -그러다가 작심삼일이라도 되면 어쩌려는 것이냐?

    마음의 결정을 끝냈을 때 라스가 툭 끼어들었다.

    ‘그러면 3일마다 작심시켜주면 되지.’

    -어?

    ‘3일마다 정신을 일깨워주면 된다고.’

    -어떻게?

    ‘주먹으로. 아니면 칼로 해도 되고. 원래 말을 안 들을 땐 매가 부족한 법이랬으니까.’

    -어떤 놈이 그런 미친 소리를 했단 말이냐!

    ‘내가.’

    -억….

    라온은 입을 떡 벌린 라스를 놔두고 마크 괴튼에게 손을 내밀었다.

    “함께 가시죠.”

    “아….”

    마크 괴튼은 라온의 손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본인의 지저분한 손을 바지에 문질러서 닦으려고 했다.

    “그런 손이기에 잡을 가치가 있는 겁니다.”

    “가, 감사합니다.”

    라온은 흙먼지로 가득한 마크 괴튼의 손을 잡았다. 마크 괴튼은 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숙였다.

    “잘됐네요! 아저씨도 이제 광풍….”

    “도리안.”

    라온은 마크 괴튼에게 다가가려는 도리안을 멈춰 세웠다.

    “너 밑에서 다른 사람 살필 여유가 있을 정도라면 이 훈련이 가벼웠다는 뜻이지?”

    “예? 아, 아니 절대! 절대 아니에요! 부단주님이 감시하라고 했으니까….”

    “잘 알아들었어. 다음 훈련에 참고하도록 하지.”

    “아, 악마야. 저 사람은 진짜 악마라고!”

    주저앉아서 땅을 치는 도리안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이제 돌아갈 때가 되었네.’

    이곳에서 얻을 건 다 얻었으니, 다시 가문으로 갈 때가 되었다.

    리메르가 사고를 치지는 않았을지, 다른 단원들이 제대로 훈련하고 있을지도 걱정스러웠다.

    “이만 돌아가….”

    라온이 마크 괴튼과 도리안에게 손짓을 할 때 그의 눈앞으로 메시지가 올라왔다.

    [진혼검이 어둠의 마나를 모두 흡수했습니다.]

    [새로운 특성이 생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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