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366화 (366/653)
  • 제366화

    라온은 숙소에서 짐을 챙긴 뒤 웨더스 마을의 입구로 나갔다. 무너졌던 철문과 벽은 헨더슨의 지휘 아래 말끔하게 수리되어 있었다.

    ‘이제 돌아가도 되겠네.’

    마을 주변으로 다가오는 적과 몬스터도 없고, 사람들도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으며, 헨더슨이 남아 있기에 부담 없이 떠날 수 있었다.

    드레이크가 사라져서 몬스터가 나올 수 있지만, 그건 한참 후의 일이니, 돌아가서 세피아 상회에 무인들을 파견해달라고 요청할 생각이었다.

    -…했는데.

    철문 앞에서 도리안을 기다리고 있을 때 지하 밑바닥으로 꺼지는 듯한 라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 산딸기 파이와 밤 조림이 아니라, 특산품이라고 정했어야 했는데. 그랬어야 했는데….

    ‘대체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라스는 아까 촌장의 손녀인 루시에게 산딸기 마카롱과 밤 맛탕을 받은 이후부터 지금까지 저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었다.

    삐진 걸 떠나서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산딸기 파이와 밤 조림이 아니라, 특산품이라고 정했어야 했는데….

    ‘야….’

    -하필 이럴 때 신제품이라니, 세상이 본왕을 미워하는 게 분명하느니라…크흑!

    녀석은 당연히 이길 줄 알았던 내기를 세상의 억지 때문에 졌다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좀 불쌍하네.’

    숨 쉬듯 음식 노래를 부르는 녀석이 저러고 있으니 살짝 안쓰러워졌다.

    ‘마카롱은 주기 좀 그렇고….’

    돌아가는 대로 민트초코나 사줘야겠네.

    데닝로즈에게 이곳의 특산품을 가지고 돌아가겠다고 약속했기에 마카롱은 먹을 수가 없었다.

    세피아 상회로 돌아가서 라스가 먹고 싶은 음식을 사주기로 마음먹었다.

    “부단주님!”

    훌쩍이는 라스의 머리를 톡톡 두드리고 있을 때 도리안이 숙소에서 튀어나왔다.

    “준비 다 끝났어요.”

    도리안은 배 주머니를 쓱쓱 문지르며 웃었다.

    저 작은 주머니 안에 팔두마차와 35m에 육박하는 드레이크가 들어있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그럼 가자.”

    라온이 피식 웃으며 문을 향해 턱짓했다.

    “인사도 안 하고 가는 거예요?”

    도리안은 마을을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또 생색을 내려고.”

    “아니, 생색내려는 게 아니라, 인사 정도는….”

    “감사 인사는 받을 만큼 받았잖아. 아픈 사람들한테 부담 줄 필요 없이 조용히 가는 게 나아.”

    “네에….”

    별로 마음에 안 드는지 도리안의 대답이 길어졌다.

    라온이 도리안의 어깨를 툭 치고서 담벼락을 넘으려고 할 때 뒤에서 다수의 기척이 움직였다.

    “은인!”

    “이럴 줄 알았어!”

    “역시 그냥 가시는군요.”

    몸에 붕대를 감고 있는 마을 사람들이 우르르 나와 라온과 도리안에게 달려왔다.

    “정말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가시는군요. 감사드립니다. 그것 말고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촌장이 입매를 꾹 다물며 허리를 굽혔다.

    “감사드립니다!”

    마을 사람들도 촌장의 인사를 따라 고개를 숙였다. 두껍게 떨리는 목소리만 들어도 그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것 같았다.

    라온이 마을 사람들에게 마주 인사하며 미소를 지었다.

    “몸조리 잘하시길 바랍니다.”

    “으음….”

    “은인….”

    겸손 떨지 않고 싶은 말을 했을 뿐인데, 마을 사람들은 그 말에 더 감격한 듯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럴 때는 참 말끔하고 정상적인데 왜 가끔 정신이 나가시는…으헉!”

    뒤에서 도리안이 주절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째려보니 녀석은 어깨를 움찔하면서 뒷걸음질 쳤다.

    “은인!”

    아이의 목소리에 시선을 올렸다. 아까 산딸기 마카롱을 주었던 촌장의 손녀 루시가 바구니 두 개를 들고 뛰어오고 있었다.

    “이, 이거 가져가세요.”

    바구니 안에서 달달하면서도 상큼한 향이 풍겨 나왔다.

    “산딸기 파이에요.”

    “파이? 이걸 왜?”

    “아까 마카롱을 드렸을 때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준비해봤어요.”

    루시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좋아했다라….’

    입을 가리고 라스를 비웃었을 뿐인데, 그걸 보고 좋아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끄아아아아아악!

    라스가 바구니에 얼굴을 들이밀며 비명을 질렀다.

    -이걸 왜 지금 주는데에에에! 아까 주던가! 저거 신의 사도가 분명하느니라! 본왕을 놀리고 있다고!

    녀석은 신의 사도를 멸해야 한다며 오동통한 솜사탕 몸을 비틀었다.

    “고마워.”

    라온은 버둥거리는 라스를 걷어차 버리고 산딸기 파이가 들어있는 바구니를 받았다.

    “아니에요. 마, 맛있게 드셔 주시면 돼요.”

    루시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다시 들리겠습니다.”

    라온은 감사함이 가득 담겨 있는 마을 사람들의 눈을 차례로 보고서 등을 돌렸다.

    “잘 있으세요! 꼭 다시 올게요!”

    도리안은 활기차게 인사를 한 후 뒤를 따라 나왔다.

    “정말 다시 오실 거죠?”

    “그래.”

    라온이 피식 웃으며 도리안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흐윽! 산딸기 파이와 밤 조림이 아니라, 특산품이라고 정했어야 했는데….

    ‘또 시작이네.’

    마을을 벗어났음에도 라스의 주절거림은 계속 이어졌다. 상태를 보니, 며칠은 갈 거 같았다.

    “부단주님.”

    마을을 벗어나서 말을 타려고 할 때 도리안이 옆으로 다가왔다.

    “파이가 2개니까. 하나는 뜨끈할 때 먹는 게 어때요?”

    -사, 산딸기 파이와 밤 조림이 아니라, 특산품.

    도리안이 파이를 먹자는 말을 하자마자, 라스의 절규가 뚝 끊겼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던 시선도 이쪽으로 슬쩍 돌아갔다.

    ‘설마….’

    지를 저 꼴로 만든 게 이 산딸기 파이인데 식욕이 돈 거야?

    헛웃음을 흘리며 바구니 하나를 열었다. 다섯 조각으로 잘라놓은 산딸기 파이 하나를 도리안에게 주고, 두 번째 조각을 들었다.

    -꿀꺽!

    라스의 목구멍에서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천둥처럼 귓가를 울렸다.

    ‘진짜 이 마왕은….’

    라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 산딸기 파이를 입에 넣었다.

    따스하면서도 바삭한 크러스트가 입안을 즐겁게 하고, 과즙이 가득 차 있는 산딸기의 단맛이 혀 전체를 휘감고 놓아주질 않았다. 마지막으로 구운 아몬드의 고소함이 끝을 깔끔하게 장식했다.

    미소가 절로 나온다. 왜 먼 곳까지 특산품이라고 소문이 났는지 이해가 될 정도의 맛이었다.

    -헤에….

    흥겨움이 가득 담긴 웃음소리에 라스를 돌아보았다.

    멍했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오고, 입꼬리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쳐 있었다.

    -맛있당.

    통통한 볼을 감싸 쥔 채로 히죽이는 모습을 보니 어이가 없었다.

    ‘얘 진짜 뭐지?’

    분노의 마왕 맞냐고.

    *     *      *

    리메르는 한량이라도 된 듯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별관의 앞에 섰다.

    똑똑.

    문을 가볍게 두드리자, 시녀장 헬렌이 문을 열고 나왔다.

    “광풍단주님?”

    “안녕하세요.”

    리메르가 방실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이에요. 별관에는 어쩐 일로 오셨나요?”

    “실비아 님 계신가요?”

    “아,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헬렌이 고개를 숙이고 안쪽 복도로 걸어갔다.

    “들어오는 건 간만이구만.”

    리메르는 별관을 쭉 둘러보며 미소를 지었다.

    ‘요 단란한 곳에서 그 차가운 녀석이 나왔다는 게 신기하다니까.’

    별관에 들어오기만 해도 이곳의 분위기가 지그하르트에서 가장 따스하다는 게 느껴진다.

    이런 포근한 장소에서 라온 같은 괴물 꼬맹이가 태어났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어? 리메르 검사님!”

    “엘프 아저씨다!”

    복도를 지나가던 율리우스와 유아가 리메르를 보고 멈춰 섰다.

    훈련을 땡땡이치고 로엔에게 놀러 갈 때마다 만났기에 두 사람과는 꽤 친해진 상태였다.

    “여긴 왜 오셨어요?”

    두 아이는 리메르를 올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리메르 님.”

    리메르가 대답하려고 할 때 실비아가 복도 끝에서 걸어 나왔다.

    “혹시 라온의 일 때문에 오신 건가요?”

    “아뇨. 그건 아닙니다.”

    리메르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군요.”

    실비아는 다행인지, 실망인지 애매한 눈빛으로 고개를 숙였다.

    “의외로 침착하시네요.”

    리메르가 실비아의 가라앉은 눈동자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덜덜 떨면서 걱정하실 줄 알았는데.”

    “걱정되죠. 얼마 전에 납치된 아이인데 걱정 안 될 수가 있나요.”

    실비아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만 언제까지 품에 끼고 다닐 수도 없고, 제가 걱정한다고 뭐가 바뀌지도 않으니까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라온이 안심할 수 있게 믿어주는 수밖에 없어요.”

    그녀는 살짝 눈을 감았다가 떴다. 루비를 조형한 듯한 붉은 눈이 고고한 빛을 발했다.

    리메르는 그 눈을 마주하며 미소를 지었다.

    ‘달라졌네.’

    라온이 훈련생 시절에는 제발 신경 좀 써달라고 울면서 빌었는데, 지금은 걱정할지언정 아이를 확실하게 믿고 있다.

    라온이 키가 커졌듯이 실비아의 마음도 성장한 것 같았다.

    ‘이렇게 보면 똑같다니까.’

    유약한 듯 보이지만, 저 눈빛은 글렌 그리고 라온과 닮아 있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가족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리메르가 실비아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어디 가서 맞고 다닐 녀석이 아니니까. 가로나와 카디스를 때려잡았다는 것도 들었잖아요. 납치에 대한 대비도 되어 있으니, 마음 놓으셔도 됩니다.”

    “그리 말씀하시니 조금 안심이 되네요.”

    실비아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의 일이 아니라면 별관에는 왜 오셨나요?”

    “아, 얘들 때문에요.”

    리메르가 손가락을 내려서 멍하니 선 유아와 율리우스를 가리켰다.

    “요 녀석들을 광풍단으로 스카우트하려고 합니다.”

    “스카우트?”

    “광풍단?”

    유아는 고개를 갸웃했고, 율리우스는 광풍단이라는 소리에 눈에 불을 켰다.

    “그래. 너희를 구한 라온이 있는 광풍단에 들어가는 거야? 어때? 좋지?”

    “와! 갈래요!”

    “들어가게 해주십시오!”

    유아는 손을 번쩍 들었고, 율리우스는 리메르의 소매를 잡고 흔들었다.

    “흐흐흐! 그래. 그래. 우리 도장부터 찍자.”

    리메르는 누가 봐도 사기꾼이라고 외칠 표정으로 유아와 율리우스의 손을 꽉 붙잡았다.

    “자, 잠시만요!”

    실비아가 다급하게 끼어들어 리메르와 아이들 사이를 갈라놓았다.

    ‘눈빛이 너무 이상했어.’

    도박에 미친 사람이 지을 법한 얼굴에 자신도 모르게 아이들을 앞을 막아섰다.

    “아, 아이들을 데리고 뭘 하시려구요?”

    “일단 도움을 좀 받고 싶어서요.”

    리메르가 유아와 율리우스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곧 넝마의 영감이 아이들을 데리고 올 거거든요.”

    “성자님이요?”

    “예. 함께 오는 아이들이 상처를 좀 심하게 받은 녀석들이라 유아와 율리우스가 도움을 줬으면 해서요.”

    그는 어딘가 씁쓸한 눈빛으로 율리우스와 유아를 바라보았다.

    “그렇군요, 근데 왜 유아와 율리우스에게 광풍단 이야기를….”

    “아, 그것도 진짭니다.”

    리메르가 유아와 율리우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히죽 웃었다.

    “라온이 돌아오는 대로 광풍단은 광풍대로 승급을 할 테니까요.”

    *     *      *

    쿠드드드득!

    그림자를 키우는 로베르트 가문의 지하 공동에서 대륙이 갈라지는 듯한 소름끼치는 굉음이 흘러나왔다.

    데루스 로베르트. 얼굴을 붉게 물들인 그가 발을 구른 소리였다. 고작 발로 땅을 눌렀을 뿐인데, 바닥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후우….”

    그러고도 분노가 풀리지 않은 듯 데루스가 피나도록 주먹을 움켜쥐었다. 손등과 손아귀에서 떨어진 붉은 핏물이 시꺼먼 구멍 아래로 떨어졌다.

    “가주님.”

    데루스가 다시 발을 구르려고 할 때 어둠 속에서 레젤이 나와 무릎을 꿇었다.

    “알아봤나?”

    “예.”

    레젤이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들어 올렸다. 데루스의 눈동자에서 살의를 가득 머금은 붉은 기류가 일렁거렸다.

    ‘눈빛만으로도 죽겠군.’

    최근 피해가 막심한 상태에서 록탄과 독인만이 아니라,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서 보낸 정보원까지 몽땅 사라졌으니, 데루스가 분노하는 것도 이상한 게 아니었다.

    아니, 데루스라서 참는 거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미 폭발했을 것이다.

    “그곳에 라온이 아니라, 흑탑의 괴인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흑탑?”

    “예. 드레이크를 노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흑수장의 시체와 흔적들이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허….”

    데루스가 헛웃음을 흘리며 시선을 뚝 떨어뜨렸다.

    “그러니까 잡으라는 라온 지그하르트는 안 잡고, 흑탑과 전쟁을 벌였다는 건가?”

    “그런 듯합니다.”

    레젤이 입술을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데루스를 계속 모셔왔지만, 이 정도의 살기를 일으키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라온 지그하르트는?”

    “뒤늦게 도착해서 지친 흑수장과 록탄을 정리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을 구하고 드레이크의 시체까지 챙겼다고….”

    “후우우우우….”

    데루스가 검게 물든 천장을 올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크하하하하하!”

    그는 피가 흘러내리는 손으로 이마를 쓸어 올리며 광소를 터트렸다.

    “운이 좋은 건지 아니면 세상을 농락하는 건지 모르겠군. 놈에 대해서는 아직도 제대로 된 판단이 서질 않아.”

    데루스 로베르트가 고개를 내렸다. 분노와 살의로 가득 차 있던 눈동자가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었다.

    “가주님?”

    “한동안 라온 지그하르트와 부딪치지 말도록. 대신 정보를 모아라. 북쪽 라인을 이용해서 놈이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정보를 수집해.”

    “알겠습니다.”

    레젤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은 방심하지 않으마.”

    데루스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손등의 상처에서 흐르는 핏물을 시꺼먼 구멍 아래로 털었다.

    “네 모든 것을 파악하고, 끝을 고해주도록 하지.”

    *     *      *

    라온은 세피아 상회로 돌아가기 전에 먼저 로칸의 암시장으로 향했다. 처음 안내받은 대로 길을 따라가자, 작은 방에서 데닝로즈가 기다리고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리고….”

    데닝로즈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허리를 숙였다. 예의가 있으면서도 자존감이 깃들어 있는 자세였다.

    “페렌츠의 원수를 갚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음 듣는 이름이지만 누구를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어둠의 마나에 당한 상태에서도 끝까지 버텨서 흑탑에 관한 정보를 전해주었던 그 요원이 분명했다.

    “그도 이제 편히 갈 수 있을 겁니다.”

    담담하게 내뱉는 말에서 깊은 슬픔이 느껴진다. 페렌츠라 불리는 요원은 데닝로즈가 아끼던 사람인 것 같았다.

    “딱 한 번 그것도 짧게 만났을 뿐이지만 존경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라온이 눈을 내리감으며 입을 뗐다. 겉치레로 하는 소리가 아니다. 어둠의 마나에 당한 상태에서 카본 연공법으로 버티는 건 지금의 자신도 가능할지 의심되는 일이었으니까.

    “저희 때문에 생긴 일이었으니, 미안할 따름입니다.”

    “죄, 죄송해요.”

    라온과 도리안이 고개를 숙였다.

    “아니에요. 의뢰를 받았으니, 그는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결국 사람들도 구했으니, 만족했을 겁니다.”

    데닝로즈가 그런 말 하지 말라며 옅게 웃었다. 순식간에 찾아가는 평정. 암시장주의 후계자다운 모습이었다.

    “일단 앉으세요.”

    그녀의 손짓에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웨더스 마을은 한동안 저희가 보호할 생각입니다. 산맥에 왕처럼 군림하던 드레이크가 사라졌으니, 몬스터가 그 틈을 파고들 가능성이 있어서요.”

    “그렇군요.”

    데닝로즈 역시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다.

    ‘그럼 더 안심이지.’

    암시장은 사회의 바닥에 짓눌려있는 하위 계급들이 모여서 만든 단체답게 사람을 먼저 생각해주는 것 같았다.

    물론 그 대가로 웨더스 마을의 산딸기와 밤 유통권을 받을지 모르지만, 그건 양쪽 모두에게 이득이 될 것이다.

    “도리안.”

    라온이 도리안을 부르며 고개짓을 했다.

    “네.”

    도리안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 배 주머니에 손을 넣은 뒤 바구니와 상자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건….”

    “약속한 물건입니다. 그리고….”

    라온이 옅게 웃으며 바구니와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웨더스 마을에서 받아온 산딸기 마카롱과 산딸기 파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부장님과 요원들이 도와준 덕분에 지킨 것들이죠.”

    “그런가요.”

    데닝로즈가 미소를 지으며 파이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달덩이처럼 커졌다. 이렇게 맛있을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마, 맛있네요. 크러스크가 아직도 바삭하고, 달달한 과육이 넘쳐흘러요!”

    “마카롱도 드셔 보세요. 아직 나오지 않은 신상품이라고 하더군요.”

    “신상….”

    파이가 만족스러웠는지 마카롱을 보는 데닝로즈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녀는 빠르게 손을 가져가 마카롱도 베어 물었다.

    “이, 이것도 맛있네요. 아니, 솔직히 이쪽이 더 제 취향이에요. 요즘 나오는 마카롱은 너무 단데, 이 마카롱은 자극적인 단맛이 아니라, 상큼한 과즙과 빵처럼 부드러운 마카롱이 조화를 이루니 너무 신선해요. 카멜룬이나, 로칸 같은 대도시의 파티시에가 만든 것보다 훨씬…윽!”

    데닝로즈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라온과 도리안을 보고 얼굴을 붉혔다.

    “디저트를 좋아하시는 모양이네요.”

    라온이 데닝로즈의 손에서 파르르 떨리고 있는 마카롱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빈틈이 없지는 않군.’

    너무 똑부러져서 철혈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얼굴을 붉히면서 디저트의 맛을 표현하는 걸 보니 이제야 제 나이로 보였다.

    -본왕도 좋아하느니라. 하나만 먹….

    ‘넌 좀 빠져.’

    마카롱을 먹자고 달라붙는 라스를 가볍게 밀어냈다.

    “조, 조금 좋아해요.”

    데닝로즈가 고개를 숙인 채로 대답했다. 그녀의 귓불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세, 세피아 상회의 다른 후계자들도 각자 물건을 구해서 돌아오고 있어요!”

    화제를 돌리려는 게 분명해 보였지만 라온은 피식 웃으며 넘어가 주었다.

    “어떤 건지 알고 계십니까?”

    “네. 물론이죠.”

    데닝로즈가 고개를 끄덕이고서 반 남은 마카롱을 옆에 내려놓았다. 시선이 떨리는 걸 보니 먹고 싶은 걸 간신히 참는 것 같았다.

    -나, 남았지 않느냐. 본왕도….

    옆에서 징징대는 라스와 디저트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데닝로즈는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셋째인 팔렌 세피아는 최상급 발톱과 이빨, 뿔을 구했고, 둘째인 디알룬 세피아는 박제된 드레이크를 통째로 가져오고 있다고 해요. 그리고 첫째인 제세르 세피아는….”

    데닝로즈의 시선이 도리안에게 향했다. 그녀가 마른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드레이크를. 그것도 특별한 드레이크를 잡아서 데리고 오는 중이라고 했어요.”

    “특별한 드레이크? 저희가 잡은 것처럼요?”

    “네. 풍속성 드레이크라고 하더군요. 제가 자마리 산맥의 드레이크의 크기에 대해 정확히 듣지 못했지만 크기가 굉장히 커서 이길 수 있을지….”

    “어느 정도죠?”

    “25m가 넘는다고 들었어요. 그 정도는 정말 흔하지 않아요.”

    그녀의 말을 들은 라온과 도리안이 서로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25m인가요?”

    “25m라….”

    겨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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