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5화
라온은 덜덜 떠는 도리안을 놔두고 봉우리에 쓰러진 사람들을 살폈다.
‘상태가 나쁘지 않아.’
-그래. 많이 좋아졌느니라.
마을 사람들의 몸에는 검은 구멍이 뚫려 있었지만, 크기도 크지 않았고, 검은 핏줄도 많이 돋아나지 않았다. 처음 이곳에 와서 설화의 감각으로 살폈을 때와는 천지 차이였다.
‘응급조치를 잘했는데?’
진통제만 먹여줬을 줄 알았는데 생각 이상으로 사람들의 상태가 좋았다. 어떻게 했는지 물어보려고 할 때 환자 옆에 있는 유리병이 눈에 들어왔다.
‘이걸 쓴 건가?’
-끄응, 더럽고 추잡한 냄새가 나느니라.
라스는 유리병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넌 그럴 수밖에 없겠지. 성수니까. 그것도 아주 비싼 성수.’
성수도 그냥 성수가 아니라, 켈톤 신성 왕국에서 가져온 진짜 성수다.
비싼 걸 떠나 돈이 있어도 사기 힘든 물건인데, 서슴지 않고 사용한 모양이다.
라온이 피식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도리안은 곧 다가올 지옥에 겁먹고 있음에도 다친 사람들에게 물과 음식을 먹여주고 있었다.
-저 녀석은 너무 착해서 탈이니라. 사기당하기 딱 좋은 관상이니라.
‘마계에도 관상을 보나?’
-마계를 무시하지 마라! 체계화된 관상책도 있느니라! 뿔의 길이에 따라 성격이 달라진단 말이다!
‘별게 다 있네.’
라온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저 녀석은 저래서 미워할 수가 없어.’
겁 많고, 조금 모자란 구석이 있지만, 누구보다도 선한 녀석이었다.
‘돌아가면 훈련 5배로 할 거 4배만 해야겠다.’
인성 파탄자라고 한 걸 가만히 놔둘 수는 없으니, 훈련량을 조금 줄여주기로 했다.
-아, 안 한다는 선택지는 없는 거냐?
‘없지.’
-진짜 뭐 이런 인간이….
라스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턱을 떨었다.
라온이 고개를 돌려 앞에 있는 노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자, 이제….’
이걸 어떻게 제거하냐인데.
어둠의 마나는 음의 기운. 인간의 몸에 달라붙은 채 잘 떨어지지 않기에 완전히 제거하기는 쉽지 않았다.
‘불의 고리와 만화공으로 태우는 수밖에 없겠… 음?’
불의 고리가 가진 정화력과 만화공의 순도를 믿고 어둠의 마나를 태워버리려고 할 때 검집에 넣어 둔 진혼검이 검명을 울렸다.
‘네가 할 수 있다고?’
우우우웅!
맞다는 듯 진혼검은 더 큰 울음을 흘렸다.
‘음….’
진혼검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기에 한 번 시험해보기로 하며 노인의 상처에 붉은 칼날을 가져갔다.
우우우우웅!
진혼검은 샛노란 요기를 일으켜 노인의 몸속에 깃든 어둠의 마나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검게 돋아난 혈관이 가라앉고, 시꺼먼 구멍도 좁아지다가 결국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푸카악!
어둠의 마나가 완전히 사라진 상처에서 붉은 핏물이 흘러나오며 노인의 혈색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됐어.”
라온이 미소를 지으며 진혼검을 빼냈다. 녀석은 장담한 대로 노인의 내부에 있던 어둠의 마나를 모조리 흡수해버렸다.
‘이런 게 되다니….’
-요기나, 혈기나, 마기나 비슷한 음의 기운이니까. 어차피 쓸데없는 재주지만.
라스는 별거 아니라면 손가락을 저었다.
우우우웅!
진혼검은 라스의 말을 무시한 채 받아들인 어둠의 기운을 소화시키느라 바빴다.
“도리안.”
“네!”
옆에서 보고 있던 도리안이 깜짝 놀라서 달려왔다.
“이분 지혈해드려. 난 다음 사람을 치료할 테니까.”
“넵!”
노인의 혈색이 돌아오는 것을 봤기에 도리안의 안색도 밝아졌다.
그는 바로 배 주머니에서 지혈제와 붕대를 꺼내 노인의 상처를 지혈했다.
‘다음으로….’
노인 뒤에 누워 있는 어린 소녀의 상처를 보려고 할 때 눈앞으로 메시지가 튀어나왔다.
[뛰어난 심계….]
[더 높은 경지….]
바로 메시지를 꺼버리고, 소녀의 상처에 진혼검을 가져다 대었다.
-안 보는 것이냐? 많아 보이는데….
라스는 턱을 떨며 메시지가 사라진 곳을 노려보았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지금은 성장한 것에 기뻐할 때가 아니라, 한시라도 빨리 사람들을 치료할 때였다.
진혼검은 라스가 아이스크림 먹듯이 어둠의 기운을 빨아들였기에 일출이 시작될 때쯤 모든 치료가 끝났다.
우우우우웅!
진혼검은 배가 부르다는 듯 만족스러운 검명을 흘리고서 조용히 잠에 빠져들었다. 어둠의 기운을 모두 소화하기 위한 준비 같았다.
“다 끝났어요!”
도리안은 마지막이었던 중년인의 어깨를 지혈하고서 씩 웃었다.
“이제 뭘 할까요?”
“문제가 두 개 있다.”
“두 개요?”
“그래. 첫 번째는 저 드레이크.”
라온이 바로 밑에 있는 봉우리에 처박힌 드레이크를 가리켰다.
본래라면 암시장에 이동을 부탁했겠지만, 상황이 급박하게 흘러 준비가 안 된 상태였다.
“저걸 왜 고민하세요?”
“응?”
“간단한데.”
도리안은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고서 봉우리 아래로 내려갔다. 그가 드레이크의 머리만 들어서 배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쿠구구구!
거대한 드레이크가 축소마법을 사용한 듯 도리안의 배 주머니에 쏘옥 들어갔다.
-어?
“허어….”
저게 다 들어가?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30m가 넘는 드레이크가 배 주머니에 들어가는 모습은 경악을 넘어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타악!
도리안이 가볍게 뛰어서 다시 봉우리 위로 올라왔다.
“봐요. 별거 아니죠?”
“그, 그러네.”
라온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두 번째는 뭔가요?”
“사람들을 옮겨야지.”
라온이 기절한 사람들을 가리켰다. 숫자가 많다 보니 이 사람들을 모두 마을로 데리고 가는 일이 쉽지 않았다.
“한 명씩 데리고 내려가기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어둠의 기운을 제거했다고 해도 체력을 많이 소모했기에 빨리 내려가서 쉬게 해주고 싶었다.
“혹시 이 봉우리들을 연결해서 경사진 빙판을 만드실 수 있나요?”
도리안이 계단처럼 솟구친 봉우리들을 가리켰다.
“가능해.”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화공의 열기와 달리 글래시아의 냉기는 많이 사용하지 않았다. 경사진 빙판을 만드는 일 따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럼 만들어주세요. 한 번에 갈 테니까.”
도리안이 씩 웃으며 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다시 나오는 그의 손에는 고급스러운 마차가 들려 있었다. 그것도 여덟 필의 말이 끌어야 할 거대한 마차였다.
-마, 마차가 있어?
“마차가 나와?”
라온과 라스가 동시에 입을 떡 벌렸다.
‘아니, 이걸 놀라야 하는 게 맞나?’
저 주머니 안으로 드레이크가 들어갔는데, 마차가 나오는 게 또 이상한 일까지는 아니었다.
‘놀랍든 뭐든….’
일단 저게 있으면 편해지긴 하겠어.
자신과 도리안이 앞에서 마차의 속도를 조절하면 되기에 한 명씩 데리고 가는 것보다 훨씬 편하고 빠르게 마을에 갈 수 있었다.
“마차는 당연히 가지고 다녀야죠. 필수품이잖아요.”
도리안은 마차 바퀴에 쇠사슬을 채워 미끄러지지 않게 만들면서 씩 웃었다.
라온은 당연하다는 듯 미소 짓는 도리안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너한테 필수품이 아닌 건 대체 뭔데….
* * *
라온과 도리안이 마차를 이용하여 사람들을 데리고 웨더스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하늘의 중심에 떠 있었다.
사람들이 쉴 수 있도록 빨리 잔해부터 치우려고 했는데, 그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와서 마을을 복구하고 있었다.
“백검룡을 뵙습니다. 지부장님 직속 헨더슨이라고 합니다.”
회색 머리카락의 반을 뒤로 넘긴 중년인이 앞으로 나와 고개를 숙였다. 데닝로즈의 옆에 서 있던 무인이었다.
“여기는 어떻게 오셨습니까?”
“지부장님이 백검룡께서 사람들을 구해서 돌아올 테니, 마을을 복구해 놓으라고 지시하셨습니다.”
“허….”
라온이 헨더슨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내가 이길 거라 예상한 건가?’
데닝로즈라면 이곳으로 암살자들이 움직였다는 것도 파악했을 것이다.
암살자와 흑탑의 무리 사이를 뚫고 사람들을 구해올 거라 예상. 아니, 믿고 있었다는 게 신기했다.
‘특이한 여자로군.’
조금만 선택이 잘못되었어도 암시장 사람들이 모두 죽을 수 있는데, 이쪽을 신뢰하며 사람들을 보내놨다는 점을 보면 보통 대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신관과 치료사도 데리고 왔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치료는 이쪽에 맡겨주십시오.”
헨더슨이 뒤편을 가리켰다. 마을을 복구하는 작업자 말고도, 신관복을 입은 노인과 치료사로 보이는 사람들이 서 있었다.
“도리안.”
도리안이 고개를 끄덕이고 마차를 열었다. 압축된 마차에서 사람들을 데리고 와 신관과 치료사들 앞에 눕혔다.
“허어!”
신관이 헛바람을 흘리며 고개를 훌쩍 들었다.
“부, 분명 어둠의 기운에 당한 상처인데, 잔향조차 남지않다니! 이게 무슨….”
그는 사람들의 상처를 살피며 어처구니없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대체 어떻게 치료하신 겁니까?”
“이 녀석이 성수를 제때 사용한 덕분입니다.”
라온이 도리안을 가리키며 미소를 지었다.
“그 이후에는 제 오러를 이용해서 지웠죠.”
진혼검의 능력을 알리고 싶지 않았기에 거짓을 섞었다.
“성수를 썼다고 해도 이 정도로 깔끔하게 지워지는 일은 없는데, 신기하군요! 후유증은 남지 않을 것 같습니다!”
신관은 다행이라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사람들의 육체에 축복을 걸어 회복력을 높여준 뒤 치료사들에게 상처를 맡겼다.
“정말 대단한 실력이시군요!”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모두 축복을 걸어준 뒤 다가와 두 손을 잡았다.
“저와 함께하실 생각 없으십니까? 검사님의 실력이라면 성자의 환생이 아니냐는 말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하하….”
라온이 어색하게 웃었다.
‘내가 누군지는 모르나 보네.’
뛰어난 실력을 지닌 신관이 이런 소리를 할 정도라니, 진혼검이 일 처리를 잘하긴 한 모양이다.
“전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카멘 신관. 이분은 밤새 전투를 치르고 와서 피곤하실 겁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를 했군요.”
신관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 뒤에 뒤로 물러섰다. 조금 급하지만,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두 분이 쉴 수 있는 장소를 준비해두었습니다.”
헨더슨이 우측에 설치한 막사를 가리켰다. 최고급 천막으로 세웠는지, 넓고, 빳빳하며, 냄새도 나지 않았다.
“흠….”
라온이 멍하니 천막을 살피는 도리안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도리안은 쉬는 게 좋겠지.’
맨손으로 봉우리를 올라가는 것부터 시작해서, 드레이크와 싸우고 마차까지 끌었으니, 쓰러질 정도로 지쳤을 것이다.
“부단주님. 먼저 쉬….”
도리안이 웃으며 고개를 숙이다가 그대로 꼬꾸라졌다.
-지쳤군.
‘그래.’
상태를 보니, 긴장이 풀려서 기절한 것 같았다.
‘재밌는 녀석이라니까.’
피식 웃으며 막사 내부의 침상에 도리안을 눕히고 자신의 숙소로 들어갔다.
“후우….”
라온은 막사 안쪽에 있는 침상에 걸터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할 수 있는 건 다 했군.’
데루스의 기습을 막고, 흑수장과 흑령들을 전멸시켰으며, 납치되었던 사람들까지 안전하게 구해냈다.
이곳에 온 목적인 드레이크까지 얻었으니, 최고의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 끗 차이였지만, 나쁘지 않았느니라.
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얻은 것도 좀 확인해볼까?’
-얻은 거? 무엇을 얻었다는 것이냐?
‘네가 준 선물들.’
라온이 빙긋 웃으며 이전에 꺼버렸던 메시지를 다시 불러왔다.
-본왕은 네놈에게 선물을… 어어억!
입을 떡 벌리는 라스를 놔두고 메시지를 살폈다.
[뛰어난 심계로 다수의 적을 농락하셨습니다.]
[더 높은 경지의 무인 두 명의 합격을 이겨내셨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8포인트 상승합니다.]
흑탑과 독인들을 서로 싸우게 만들고, 흑수장과 록탄의 합격술을 이겨내서 주는 포인트인 것 같았다. 다만 메시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특성 <설화의 감각>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특성 <블리딩 커스>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특성 <독 저항력>의 등급이 2단계 상승합니다.]
[특성 <설화의 은막>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두 번째는 이번에 사용했던 특성들의 등급이 올라가는 내용이었다. 설화의 감각과 설화의 은막이 올라갈 건 당연히 예상했는데, 독 저항력이 2단계나 상승할 줄은 몰랐다.
‘유령 해파리의 독단을 먹은 효과가 록탄의 독을 막으며 터진 모양이네.’
지금 정도의 독 저항력이라면 불의 고리를 운용하지 않고도 록탄의 독을 견딜 수 있을지도 모른다.
화속과 수속에 이어 독 저항력까지. 점점 더 자신의 빈틈이 사라진다는 게 느껴졌다.
-이, 이게 말이 되는 것이냐?
라스가 메시지를 보며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고작 그따위 놈들 잡았다고 이런 능력치와 특성을 올려주는 게 말이 되냐고!
‘잘했잖아.’
-잘하기는 개뿔이! 본왕이 새끼손가락으로 눌러도. 아니, 코딱지만 날려도 죽을 놈들을 처치했다고 능력치를 주는 건 너무하지 않느냐!
녀석은 정말 코딱지만으로도 가능하다며 있지도 않은 코를 후볐다. 지금 생각해보면 코도 없으면서 냄새는 어떻게 맡는지 모르겠다.
-본왕은 인정 못 하느니라! 솔직히 네놈은 아무것도 안 하고 싸우는 거 구경만 했지 않느냐!
‘마무리는 했지. 그리고 네가 인정 못 하면 어쩔 건데, 이미 들어 왔는데. 배 째던가.’
10포인트가 오르며 전해지는 희열을 느끼며 빙긋 웃었다.
-끄으으으윽! 쨀 수만 있다면….
라스가 배를 노려보며 이를 바득 갈았다.
-본왕이 돌아가면 그 시스템부터 때려 부수고 다시 만들 것이니라! 이런 돌대가리 같은!
‘…….’
돌대가리는 너라고 하고 싶었지만, 더 발작할 거 같아서 참았다.
‘미안하지만 할 말이 있어.’
-이번엔 또 뭔데!
‘산딸기 파이랑 밤 조림은 먹기 힘들 것 같다.’
-그건 또 무슨 개소리냐!
라스가 눈을 홱 돌렸다. 능력치를 빼앗길 때보다 더 강렬한 눈동자에 손끝이 떨렸다.
‘사람들이 다쳤고 죽었잖아. 이런 상황에서 그런 걸 부탁하기 힘들지.’
-말도 안 되느니라! 본왕이 왜 이곳에 온 건데!
‘여기서 일주일 정도 있는다면 모르겠는데, 이틀 뒤에는 돌아가야 해. 상회에서 맛있는 거 사 줄게.’
-싫느니라! 본왕은 꼭 이곳의 산딸기 파이와 밤 조림을 먹을 것이니라!
녀석은 절대 못 간다며 바닥을 붙잡고 머리를 흔들었다. 시장에서 사탕을 사달라며 바닥에 드러눕는 아이를 보는 느낌이었다.
‘아니, 먹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니까.’
마을은 무너졌고, 사상자도 많다. 보답을 하고 싶어도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움직일 수 없을 때다.
-흥! 네놈은 인간을 너무 우습게 보는군.
‘뭐?’
-너 사람들에게 돈 받을 생각 없지?
‘당연히.’
-그럼 본왕과 내기를 하나 하자.
라스는 그리 말하며 메시지를 보내왔다.
[<분노>가 내기를 제안합니다.]
조건 : 웨더스 마을에서 산딸기 파이와 밤 조림을 대접받지 않고 떠나기.
성공 시: 모든 능력치 +10.
실패 시: <분노>의 감정 10포인트 생성, 세피아 상회로 돌아가서 <분노>가 원하는 음식을 3일간 모두 먹어주기.
-어때? 그리 자신 있으면 받아보아라.
라스가 내기 내용을 가리키며 콧김을 흥하고 내뿜었다.
‘…좋아.’
분노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니, 별로 거슬릴 게 없는 내기라 받아들였다.
‘대신 말했던 대로 이틀 뒤에는 떠날 거야.’
-좋느니라!
라스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놈은 악마라 인간에 대해 모르느니라.
‘아니, 악마는 너잖아….’
* * *
이틀 뒤.
예상했던 대로 사람들은 고맙다고 절을 하고, 눈물을 흘렸지만, 산딸기 파이와 밤 조림을 가지고 오지는 않았다.
라온이 인상을 찌푸린 라스를 보며 피식 웃었다.
‘말했잖아. 안 된다니까. 지금은 디저트를 만들 때가 아니야.’
-아직 안 끝났느니라!
라스는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의미 없어. 말했던 대로 점심 전에 출발할 거야.’
-알고 있느니라.
라온은 마을을 벗어나서 주변을 쭉 살펴보았다. 흑탑이나, 데루스의 그림자 혹은 몬스터들이 있을지도 몰라서 기감을 펼쳐봤지만, 다행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암시장에서 보내 준 무인들이 있으니, 이 정도라면 아무 걱정 없이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여튼 걱정은.
‘음식만 바라는 너보다는 낫지.’
-본왕은 그저 취미일 뿐….
‘내가 보기엔 네 삶이 음식이야.’
-아니니라!
라스를 놀리며 숙소로 돌아왔을 때 웨더스 마을의 촌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촌장님?”
“은인!”
촌장은 땅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였다.
“오셨군요!”
“그런 인사 안 해도 된다니까요.”
촌장만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 모두가 저렇게 인사를 해오니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아닙니다. 이런 걸로는 한참 모자라죠.”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평생 갚아야 할 빛이라며 입매를 꾹 다물었다.
“오늘 떠나신다고 들었는데, 정말이십니까?”
“네. 중요한 일이 있어서요.”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계자 경쟁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미리 세피아 상회에 가서 준비를 해야 했다.
“그렇군요. 정말 도움만 주고 가시는군요.”
그는 죄송하다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저희가 모은 보상금이라도 받으시면 좋을 텐데….”
“마을 복구에 사용하셔야죠.”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돈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기에 라스와의 내기에서 승리했다는 것만으로 만족스러웠다.
“그럼 다른 거라도 받아주십시오.”
촌장이 뒤에 눈길을 주자, 콧잔등에 주근깨가 박힌 소녀가 앞으로 나와서 두 개의 상자를 내밀었다.
“제 손녀가 마을에 남은 산딸기와 밤 중에서 가장 좋은 것들로 만들었습니다. 꼭 드셔주시고 나중에 다시 방문해주십시오.”
“감사드려요. 은인”
그와 손녀가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어….”
라온은 고급스럽게 포장된 상자를 받으며 입을 떡 벌렸다.
‘이걸 만들었다고?’
아직 희생자들의 장례식도 치르지 않았는데, 자신에게 특산품을 줄 줄은 몰랐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푸헤헤헤헤헤!
라스가 배를 잡고 경박한 웃음을 터트렸다.
-본왕이 말했지 않느냐! 네놈은 악마라 인간을 모르느니라!
녀석은 지가 인간이라도 된 듯 악마라고 떠들어 댔다.
“가, 감사합니다.”
라온이 억지로 표정을 유지하며 상자를 열어보려고 할 때 메시지가 올라왔다. 당연히 패배라고 생각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분노>와의 내기에서 승리하셨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10포인트 상승합니다.]
[연승의 효과로 5포인트가 추가로 상승합니다.]
‘어?’
-엥?
다만 메시지는 자신의 승리를 말하고 있었다.
-뭐, 뭐야! 진짜 돌아버린 것이냐? 왜 본왕이 패배했다는 것이야!
‘나도 모르겠는데.’
라온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그걸 보고서야 왜 이런 메시지가 나왔는지 알게 되었다.
‘파이랑 조림이 아니야.’
상자 안에 있는 건 산딸기로 만든 분홍색 마카롱과 밤 맛탕이었다.
-어….
라스는 그 두 요리를 보며 입을 떡 벌렸다.
“산딸기 파이와 밤 조림의 뒤를 이을 새로운 디저트입니다. 은인께서 먼저 드셔주십시오.”
촌장은 산딸기 파이와 밤 조림보다 더 맛있을 거라며 미소를 지었다.
“정말 맛있어 보이네요.”
라온은 두 디저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참고 싶었지만 웃음이 계속 나와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이게 뭔데!
라스는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 하늘을 올려보며 악을 질렀다.
-왜 맨날 이딴 식인데! 새로운 디저트를 왜 하필 지금 만들었냐고!
‘고맙다잖아.’
-산딸기 파이랑 밤 조림 가져오란 말이다!
이건 억지로 까는 거잖아!
세상이 왜 본왕을 미워하는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