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2화
붉은 달이 걸려 있는 듯한 자마리 산맥의 가장 높은 봉우리. 드레이크가 둥지를 튼 그곳에 서른 명이 넘는 사람들이 신음을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흐으윽….”
“사, 살려주세요.”
“끄어억….”
“제, 제발!”
사람들의 몸에는 시꺼먼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기이하게도 피는 조금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다만 구멍이 점점 커지며 검게 물든 핏줄이 드러나고, 주변의 살이 썩은 과일처럼 뭉개지기 시작했다.
“…….”
흑수장은 벌레를 보는 듯한 차가운 시선으로 사람들을 굽어보다가 봉우리 아래로 내려왔다.
“이즈젤.”
“예.”
흑수장의 부름에 키가 작은 금발 여성이 앞으로 다가와 부복했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해가 뜨기 전에 드레이크가 둥지로 돌아올 겁니다.”
이즈젤의 손아귀 위로 검은 구슬이 떠올랐다. 그녀는 구슬을 들여다보며 눈빛을 가라앉혔다.
“흑령들은?”
“층주께 부담이 되지 않도록 주변 경계를 세워놨습니다. 드레이크가 돌아온다면 움직일 겁니다.”
“수고했다.”
흑수장이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드레이크에게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우측에 있는 돌산으로 이동하여 기척을 죽였다.
“흑수장님.”
이즈젤이 흑수장의 옆 바위로 몸을 숨기며 낮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뭐지?”
“이번 일은 저희만으로도 충분했을 텐데, 왜 귀한 걸음을 하신 겁니까?”
“…….”
흑수장은 대답 없이 이즈젤을 바라보았다.
“으음….”
이즈젤은 그의 시꺼먼 안구에 공포를 느낀 듯 입술을 꾹 깨물었다.
“부탑주님의 지시였다.”
“부, 부탑주님이….”
“이곳에 둥지를 튼 드레이크는 냉기를 가진 특별한 개체다. 제물에 쌓아둔 어둠의 마력을 먹인다면 영물 급이 될 수도 있다.”
흑수장은 감정 없이 대답해주며 봉우리를 올려보았다.
“영물….”
이즈젤이 그 시선을 따라 올라가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건 기회야.’
흑수장이 이렇게 길게 말을 해줬다는 건 자신을 믿고 있다는 뜻이다. 부탑주에게 직접 지시를 받는 그에게 눈도장을 찍고 싶었다.
“드, 드레이크를 잡는 건 제게 맡겨주십시오.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이즈젤.”
“네.”
흑수장의 부름에 이즈젤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다만 그녀가 기대한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네가 할 일은 제물에 담긴 어둠의 마력을 증폭하고, 드레이크를 부르는 일뿐이다.”
“아….”
“네 주제를 알고 주둥아리를 놀리도록.”
“죄, 죄송합니다!”
이즈젤이 턱을 떨며 고개를 숙였다. 서늘한 시선이 머리에 내리꽂히는 듯해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
다만 흑수장은 이미 이즈젤에게 관심을 껐다. 그는 처음 이곳에 왔을 때처럼 고요하게 봉우리만을 올려보았다.
* * *
흑탑의 괴인들이 숨어 있는 돌산의 맞은편에 솟구친 다섯 개의 산봉우리.
록탄은 그 봉우리 사이에 엎드린 채로 인상을 찌푸렸다.
‘뭐지?’
흑탑 놈들이 왜 여기에 온 거지?
‘그분’의 이동 마법을 따서 빠르게 산맥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처음 본 건 평범한 사람들을 산맥 꼭대기로 끌고 가는 흑탑의 괴인들이었다.
조금만 일찍 오거나, 늦게 왔으면 들켰을 수도 있지만, 흑탑 놈들은 사람들의 몸에 어둠의 마나를 넣고 증폭시키느라, 자신들의 기척을 잡아내지 못했다.
‘저놈들도 드레이크를 노리는 건가?’
지금 상황을 파악해보면 흑탑은 라온이 이곳에 오는 줄도 모르고 어둠의 기운을 넣어둔 사람들을 드레이크에게 먹일 생각뿐인 것 같았다.
록탄이 흑탑의 괴인들이 숨은 돌산을 보며 차가운 미소를 흘렸다.
‘이거 잘 됐군.’
설화검협이라는 이명을 가진 라온 지그하르트의 성격상 이 장면을 보고 가만있을 리가 없다.
분명 흑탑과 부딪치게 될 테니, 손 안 대고 코를 풀 기회였다.
‘아니, 아니지.’
그냥 죽이기에는 아까워.
라온 지그하르트 때문에 가주님의 심기가 상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고까운 놈을 편하게 보내면 입맛이 쓸 것 같았다.
화아아아.
록탄이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검지와 중지 위로 회색 기운과 녹색 기운이 피어 나왔다.
‘고통으로 따지면 이만한 게 없지.’
회색은 광물 독, 녹색은 식물 독을 응집시킨 기운이었다.
‘춤을 추며 죽게 해주마.’
이대로 사용해도 강력하지만, 두 독기를 조화시킨다면 귀신에 홀린 듯 발버둥 치는 춤을 추고 죽어간다는 귀혈무라는 독이 완성된다.
운용하기 쉽지 않은 독이지만, 라온과 흑탑이 싸움을 벌일 때 퍼뜨린다면 모두를 중독시킬 자신이 있었다.
고오오오.
록탄이 조심스럽게 귀혈무를 조합하고 있을 때 옆으로 독인들의 조장이 다가왔다.
“록탄 님.”
“뭐지?”
“흑탑이 왔다고 보고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는 흑탑이 숨어 있는 곳을 가리키며 짧게 입맛을 다셨다.
“그럴 필요 없다.”
록탄이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네놈들 대가리에 보고라는 명령이 박혀 있어서 불편하겠지만, 오늘은 안 해도 된다.”
그는 뒤편으로 손짓을 하며 피식 웃었다.
“가주님께서 정보원들을 따로 보내놨으니까.”
록탄는 귀혈무를 완성하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죄, 죄송합니다.”
조장이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섰다.
“그딴 건 신경 쓸 필요 없고. 준비는 다 끝났나?”
“예.”
조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시만 내려주시면 바로 바람의 방향을 바꿔서 독기를 퍼뜨릴 수 있습니다.”
“좋아. 대기들 하라고.”
록탄이 귀혈무가 어린 손가락으로 손등을 두드리며 씩 웃었다.
“우리의 무희가 도착할 때까지.”
* * *
-그래. 그거다. 먼저 분노를 둘러라.
라스의 목소리가 귓가를 가늘게 울린다.
-오러가 아니라, 분노를 운용하는 것이 설화의 감각을 사용하는 진짜 방법이니라.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감각을 최대한 열었다. 영혼 밑바닥에서 솟아오른 분노가 기감의 끝으로 퍼져나간다.
내 피부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늘어난 감각. 라스의 말대로 설화의 감각의 연료는 오러가 아니라, 분노였다.
-거기서 멈추면 안 되느니라.
라스에게서 분노가 스며들어온다. 이전처럼 몸을 빼앗기 위한 감정이 아니라, 감각을 더 크게 열어주는 도움의 손길이었다.
-분노를 두른 상태에서 자연 속에 너를 퍼뜨려라. 하나가 된다는 느낌이니라.
라스의 조언을 뇌리에 새기며 분노와 어우러진 마나를 흩날렸다. 화령으로 세상에 화염의 꽃을 피우는 감각. 분노가 녹아내린 작고 세밀한 마나가 온 세상으로 펼쳐졌다.
화아아아아악!
영혼을 감싸고 있던 안대를 벗은 느낌과 함께 시야가. 아니, 모든 감각의 범위가 한계를 뚫고 끝없이 확장됐다.
후우우욱!
우측 바위산에서 시궁창 같은 냄새가 올라온다. 흑탑의 괴인들이 숨어 있는 공간이었다.
‘저놈인가?’
그중에서도 유독 지독한 기운을 뿌리는 놈이 있었는데, 그가 흑탑의 층주 중 하나인 흑수장 같았다.
라온은 흑수장과 꽤 큰 기운을 가진 마법사 그리고 흑령 30명의 기척을 모두 파악한 뒤 기감을 좌측으로 움직였다.
치이이익.
깎아지른 듯한 산봉우리 위에서 40여 명의 기척이 느껴진다. 데루스가 보낸 그림자였다.
‘역시 왔군.’
자신보다도 빨리 온 것을 보면 이동 마법이라도 이용한 것 같았다. 그림자들의 기척을 하나씩 파악하고 있을 때 거대하면서도 익숙한 독기가 느껴졌다.
‘설마 록탄인가?’
이정도로 구역질 나는 독기를 풍기고 다니는 변태는 몇 없다. 그림자에게 독술을 가르쳤던 독술사 록탄이 분명했다.
‘또 하나의 쓰레기를 만나는군.’
록탄은 새로 만든 독을 실험한다며 독무를 일으켜 목표물이 아닌 마을 전체를 독지로 만들었다.
독 교육을 한다면서 자신과 아이들에게 뱀독을 먹인 뒤 죽기 직전까지 놔둔 적도 있었다.
‘옆에 있는 놈들도 마찬가지지.’
록탄을 따르는 독인들은 사람을 죽인 뒤 얻는 인독을 사용한다.
저 정도로 인독을 쌓았다는 건 록탄처럼 임무와 관계없는 사람들까지 학살했다는 뜻. 느글거리는 기질로 볼 때 놈들 역시 쾌락 살인마가 분명했다.
‘잘 됐군.’
꼭 처리하고 싶었는데.
데루스 로베르트가 왜 록탄을 보냈는지는 알고 있다. 애매한 암살자는 통하지 않으니 독으로 중독시켜 죽일 생각이었을 것이다.
‘다만….’
나한테는 통하지 않아.
록탄의 독을 파악하고 있는 것도 그렇지만, 자신에게는 독 저항력과 불의 고리가 있다. 저딴 쓰레기의 독 따위는 씹어 삼킬 수 있다.
‘낮게 봐줘서 고맙군.’
데루스는 오늘도 심복 하나를 잃게 될 것이다.
라온은 마지막으로 자마리 산맥에서 가장 높은 곳. 드레이크가 둥지를 뜬 가장 높은 봉우리로 감각을 집중시켰다.
‘서른다섯 정도인가….’
봉우리 위에 있는 사람의 숫자가 요원에게 들었던 것보다 적었다.
‘드레이크를 부르기 위해서였겠지.’
흑탑의 괴인들은 드레이크를 더 빨리 부르기 위해서 둥지 위에서 사람을 죽여서 피를 뿌린 것 같았다.
‘상태들이 좋지 않아.’
사람들은 어둠의 마나에 중독되어 온몸에서 지독한 마기를 피워내고 있었다.
-저대로라면 내일 아침이 되기 전에 모두 숨이 끊어질 것이니라.
‘그렇겠지.’
라스의 말대로 저들에게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아 보였다.
-본왕의 디저트 타임을 위해서라도 절대 죽어서는 안 되느니라!
라온이 옅게 웃었다. 디저트 타임이든, 뭐든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노력해준다는 게 고마웠다.
‘걱정하지 마. 도리안이 도착했으니까.’
사람들이 올라간 봉우리 뒤편에서 작디작은 기척이 느껴진다. 라스의 도움이 없었다면 느끼기 힘들었을 그 기척은 봉우리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도리안의 것이었다.
‘이제 내 차례네.’
라온이 가볍게 숨을 내쉬고서 설화의 감각을 줄이고, 설화의 은막에 집중했다.
화아아아아!
영혼에 스며든 분노가 전신을 휘감으며 세상과의 동화를 이룬다. 흘러가는 바람과 흙내음에 기척을 묻었다.
-아직 부족하느니라.
라스가 부족하다며 손가락을 저었다.
-자연을 깊게 느껴라. 코로 숨을 쉬는 감각이 아니라, 폐로 호흡한다는 상상을 해라.
녀석은 직접 분노를 일으켜서 시범을 보여주었다. 솜사탕처럼 오동통한 라스가 순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세상의 흐름에 스며들었다.
‘알겠어.’
라온은 불의 고리를 통해 라스의 흐름을 파악한 뒤 그대로 자신의 몸에 휘감았다.
육체가 사방으로 펼쳐지는 듯한 설화의 감각과 달리 육체 내부로 세상이 스며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고오오오.
돌멩이 수준으로 작았던 자신의 기척이 모래 알갱이 수준으로 가라앉았다.
-이제 좀 괜찮구나.
라스가 나쁘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일정 이상 가까이 간다면 들킬 것이니라.
‘알아.’
들키지 않으면 그것 또한 곤란하다. 흑탑 놈들이 자신의 기척을 쫓아서 움직여주어야 하니까.
라온은 마음을 가라앉힌 뒤 우측으로 움직였다. 태화삼보를 밟아 물 흐르듯 부드럽게 움직여서 가장 끝에서 경계를 서고 있는 흑령의 뒤에 섰다.
푸욱.
진혼검으로 흑령의 심장을 찌르고 입을 막았다. 놈은 본인이 무엇에 당했는지도 모른 채 그대로 숨이 끊어졌다.
-뭐, 뭐냐. 왜 이리 깔끔하게….
‘말했잖아. 암살 잘한다고.’
바로 옆으로 이동하여 두 번째 흑령의 목을 갈랐다. 그 역시 자그마한 신음도 흘리지 못하고,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라온은 흑수장의 감각이 미치지 않는 외곽을 돌며 흑령들을 하나씩 제거해나갔다.
흑령 중 다섯을 제거한 뒤에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 안에서 암살하면 들켜.’
조용히 움직인다면 모를까. 이 경계 안에서 암살한다면 흑수장의 기척에 잡힌다. 다만 그게 이 계획의 핵심이었다.
푸칵.
라온은 안으로 들어가서 가장 가까이에 있던 검은 로브의 사내의 심장을 뚫어버렸다.
콰아아아아!
자그마한 소리도 없이 목숨을 끊었건만, 돌산 안쪽에서 소름이 돋아 오를 정도로 살벌한 기운이 솟구쳤다. 흑수장이 일으킨 어둠의 마나였다.
‘됐어!’
가장 빠른 태화이보를 밟고 반대편 산봉우리 쪽으로 뛰었다. 만화공을 가늘게 일으켜 전방으로 쏘아냈다. 향수처럼 은은하게 퍼진 열기가 흑탑이 있는 돌산과 독인들이 숨은 산봉우리를 연결하는 하나의 선이 되었다.
‘이제 네 차례다. 흑수장.’
라온은 산봉우리로 올라가지 않고, 중간에 봐두었던 언덕으로 빠지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쓰레기들끼리 마음껏 날뛰어 봐.’
* * *
“이즈젤.”
돌산 안에서 흑수장이 마법사로 보이는 여성을 불렀다.
“예.”
“흑령을 소집해라.”
“지금은….”
“빨리.”
“아, 알겠습니다!”
이즈젤이라 불린 여성이 흑령을 소집했지만, 나타난 건 24명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이, 이게 대체….”
“암살자다.”
흑수장이 은은한 마나의 향이 퍼지는 반대편 산봉우리를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저 뱡향으로 스캔을 펼쳐라.”
“아, 예.”
이즈젤이 스캔을 사용하자, 마나의 흐름이 펼쳐진다. 붉은색 기운의 끝이 향하는 곳은 서쪽에 있는 여러 개의 산봉우리였다.
“저, 저곳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있군.”
“예. 40명 정도 기척을 숨긴 자들이 있습니다!”
“버러지들이 감히.”
흑수장이 이를 갈며 땅을 박찼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 어둠이 타오르며 검은 날개를 펼쳤다.
“층주님을 따라라!”
이즈젤과 흑령들도 흑수장의 뒤를 따라 겹쳐있는 봉우리로 내달렸다.
…
“뭐, 뭐야!”
록탄이 이쪽으로 달려오는 흑수장과 흑탑의 괴인들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저것들 왜 이쪽으로 오는 건데!”
주변에서 은은한 열기가 느껴지더니 갑자기 저놈들이 발작하듯 달려오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 아무래도 들킨 듯합니다.”
조장들이 다가와 마른침을 삼켰다.
“들켜? 왜!”
“그건 저희도 잘….”
그들도 이유를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이런 시발!”
록탄이 욕설을 뱉으며 일어섰다. 흑수장의 모습을 볼 때 위치가 들킨 건 분명했다.
“바람을 움직여. 일단 저것들부터 치운다.”
흑탑은 어둠의 마나를 사용하는 놈들답게 지독할 정도로 집요하다. 도망쳐도 끝까지 쫓아올 테니, 지형상 유리할 때 모두 죽여야 했다.
고오오오오!
록탄이 손을 들어 올렸다. 조금 전에 조합한 귀혈무가 투명한 아지랑이가 되어 치솟았다.
‘어쩔 수 없군.’
라온을 죽이기 위해 준비한 독이지만 시간이 없다. 이걸 사용해서라도 놈들을 막아야 했다.
후우우우웅!
조장들이 일으킨 바람을 따라 귀혈무 흘렸다. 바람을 탄 무색무취의 독이 흑탑의 무리 전체로 퍼져나갔다.
귀혈무가 탑령들의 머리 위에서 떨어지기 직전 가장 앞에서 달려오던 흑수장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아귀에서 하늘까지 닿는 듯한 거대한 검은 발톱이 솟아올랐다.
“죽어라.”
그 선언과 함께 내리친 어둠의 발톱이 봉우리가 통째로 갈랐다.
“빌어먹을!”
록탄이 입술을 깨물며 뒤로 물러섰다. 일격에 엄폐를 한 봉우리가 갈라지다니, 정신 나간 위력이었다.
“산개! 산개해서 놈들을 죽여! 저 멧돼지 같은 놈은 내가 맡는다!”
“예!”
살아남은 독인들이 사위로 퍼지며 흑수장의 뒤를 따라오는 흑령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네놈이로군.”
흑수장의 검은 안구가 록탄의 모습을 포착했다.
“목숨에는 목숨. 흑탑의 율법대로.”
그의 양손에서 밤을 두른 듯한 기운이 광활하게 뻗어나갔다. 흡사 어둠을 두른 칼을 들어 올린 듯한 모습이었다.
“이 미친놈이! 우리가 뭘 했다고 이 지랄이야!”
록탄이 봉우리를 타고 오르며 양손으로 비수를 쏘아냈다. 각기 다른 독이 발린 다섯 개의 칼날이 매처럼 날아 흑수장의 급소로 파고들었다.
캬아아앙!
흑수장은 어둠을 두른 망토로 비수를 튕겨낸 뒤 록탄의 앞으로 파고들었다.
“네놈들이 먼저 시작했다.”
“우린 움직이지도 않았어! 뭘 했든 다른 놈이란 말이다!”
“암살자 냄새를 풀풀 풍기며 개소리를 하는군.”
“정말 아니라고!”
록탄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이쪽으로 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바람과 독을 풀지 않았더냐.”
“그건 다른 놈을 위해서 준비한….”
“네게 주어진 기회는 끝났다.”
흑수장이 검은 안구가 번들거림과 동시에 그의 주변으로 어둠의 마나가 불꽃처럼 타올랐다. 채찍처럼 길게 휘어지는 손톱이 벼락처럼 떨어져 내렸다.
쿠와아아아앙!
록탄이 타고 오르던 높은 봉우리가 갈라지고 절벽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제기랄!”
록탄은 봉우리에서 내려오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의 주변으로 샛노란 독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좋다. 죽고 싶다면 죽여줘야지.”
그가 독무로 이루어진 벽을 펼치며 섬뜩한 눈빛을 쏘아냈다.
“뼛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녹여주마!”
“네놈들의 살점도 제물로 써주지.”
흑수장이 두른 어둠의 마나와 록탄이 펼쳐낸 독기가 맞부딪쳤다.
콰아아아아앙!
그 둘만이 아니다. 자마리 산맥 이곳저곳에서 독인과 흑탑의 괴인들이 부딪치기 시작했다.
캬아아아앙!
암살검과 어둠의 기운이 끝없이 맞부딪치며 불협화음으로 이루어진 오케스트라가 울려 퍼졌다.
라온은 그 지옥 같은 광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서서 지휘하듯 부드럽게 손을 내리그었다.
독과 어둠의 마나.
둘 모두 적에게 지독한 고통을 주면서 말려 죽이는 추잡한 기운이다. 흑령과 독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딱 맞는 단짝이었다.
라온이 시선을 올려 반대편에 있는 드레이크의 둥지를 살폈다.
‘올라갔군.’
도리안은 이 난잡한 상황을 이용하여 드레이크의 둥지에 올라갔다. 손발을 덜덜 떨고 있는 것을 보니, 한껏 겁을 먹었지만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움직였다는 것이 대견했다.
‘자, 그럼….’
라온이 독장을 뻗어내는 록탄과 어둠의 기운으로 이루어진 손톱을 내리치는 흑수장을 보며 서슬 퍼런 눈빛을 빛냈다.
‘끝을 준비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