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360화 (360/653)
  • 제360화

    데닝로즈가 둥근 테이블 위로 지도를 올렸다. 빳빳한 상태를 보니 이번 일을 위해 만든 지도 같았다.

    “드레이크가 둥지를 튼 장소는 자마리 산맥이에요. 여기서 그리 멀지 않죠.”

    그녀가 자마리 산맥이라 말하며 지도를 펼치자, 등고선이 가득한 산악 지형이 드러났다. 세밀하게 조사했는지 지도만으로도 지형이 파악될 정도였다.

    라온이 지도를 내려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자마리 산맥이라.’

    다행히 아는 곳이군.

    자마리 산맥은 세피아 상회가 있는 로칸 시에서 서쪽으로 깊게 들어가야 하는 곳이다.

    메마른 산악 지형이라 몬스터도 그리 많지 않은 척박한 땅이었다.

    ‘웨더스 마을….’

    산맥으로 가는 길에서 우측으로 빠지면 나오는 작은 마을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아직도 있나 보군.’

    암살자로 살아가던 시절 임무를 위해 들렀을 때 외부인인 자신에게 잠자리와 식사를 베풀어 주었던 따스한 기억이 떠올랐다.

    “드레이크가 이 마을 사람들을 노리지는 않던가요?”

    “산맥과 거리가 떨어져 있고, 드레이크가 서해 쪽으로 움직여서 그런지 아직 피해를 입은 사람은 없었어요.”

    데닝로즈가 지도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좀 물러나 있는 게 좋아 보이는데….”

    “웨더스 마을의 특산품이 산딸기와 밤이거든요. 척박한 환경에서 먹고 살게 해주는 물품들이라 알아도 쉽게 벗어날 수 없을 거예요.”

    “그렇군요.”

    맞는 말이다. 몬스터가 아무리 날뛰어도 살던 곳을 벗어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니까.

    “이번 기회에 라온 님이 드레이크를 잡아주신다면 그들도 마음 놓고 살 수 있겠죠.”

    그녀는 부탁한다며 미소를 지었다.

    “웨더스 마을의 산딸기 파이와 밤 조림은 대륙 제일이라고 해요. 드레이크를 잡은 뒤에 꼭 드시고 돌아오세요.”

    안 돼.

    데닝로즈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식충이 마왕의 귀에 대륙 제일이라는 단어가 쏙 들어박혔다.

    -오오?

    라스가 벌떡 일어서서 지도를 가리켰다.

    -산딸기 파이와 고기 조림?

    ‘밤 조림….’

    -산딸기 파이와 밤 조림? 좋구나! 본왕은 언제나 그런 특별한 요리를 원했느니라! 드레이크 구이에 그 둘을 디저트로 먹으면 되겠어! 당장 출발하거라!

    녀석은 빨리 안 가고 뭐 하냐는 듯 어깨를 토도독 내리쳤다.

    ‘드레이크를 왜 먹어….’

    -드래곤은 먹기는 힘드니, 그거라도 먹어야지. 나름 씹는 맛이 있는 고기이니라.

    ‘제발 좀….’

    라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 데닝로즈를 보았다.

    “흑탑에서는 누가 나왔습니까?”

    “흑수장 해리슨과 그의 수하들이 나온 것 같아요.”

    “흑수장….”

    다행히도 들어본 이름이다. 흑탑에서도 이름이 알려진 실력자로 마스터 상급에 올랐다고 했었다.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지금쯤이면 마스터 최상급은 되었을 것이다.

    ‘꺾을 만한 상대야. 그리고….’

    위험하면 도망치면 그만이지.

    지금 자신에게는 설화의 은막이 있다. 계획을 세밀하게 세운 뒤 위험할 때 빠지면 그만이다.

    라온은 머릿속에서 계획을 굴리며 다시 지도를 보았다.

    ‘지형도 나쁘지 않군.’

    산맥이 제멋대로 뻗어 있으면서도 넓어서 숨기 좋은 곳이 많았다.

    ‘어부지리를 얻기에 딱 좋은 위치야.’

    흑탑은 드레이크를 잡기 위해서 움직일 테고, 그림자들은 자신을 죽일 기회만을 노릴 것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 임무를 수행하려는 놈들을 부딪치게 하여 모조리 쓸어버리기에 딱 좋은 공간이었다.

    “둥지의 위치는 산맥 꼭대기겠군요.”

    “맞아요.”

    데닝로즈가 손가락을 뻗어 지도의 중심을 가리켰다. 드레이크는 당연히도 가장 높은 산맥에 둥지를 틀었다.

    “드레이크는 둥지를 오래 비우는 경우가 잦아요. 그래서 다른 종족이 올 수 없게 위험한 곳에 둥지를 틀죠.”

    그녀는 둥지까지 가는 일도 쉽지 않을 거라며 눈매를 찡그렸다.

    “지금까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이 드레이크는 7일에서 10일 정도마다 둥지에 오는 것 같아요. 사흘 전에 둥지를 나갔다고 했으니, 먼저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거예요.”

    “그렇군요.”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라면 드레이크가 오기 전에 산맥에 도착할 수 있다.

    드레이크만이 아니라, 흑탑이나 그림자를 기다리기에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혹시 놈에게 속성이 있습니까?”

    “소, 속성?”

    도리안이 눈을 부릅뜨고 달려들었다.

    “드레이크에 속성이 있어요?”

    “기본적으로 무속성이지만, 오래 살거나 처음부터 강하게 태어난 녀석들은 드래곤처럼 속성을 가지고 있거든.”

    “어어어억….”

    도리안은 그건 몰랐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질겁한 듯 턱이 달달 떨렸다.

    “안타깝게도 있어요.”

    데닝로즈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끄어어억! 뭐, 뭔데요?”

    도리안이 마른침을 삼키고 테이블을 쿵 내리쳤다.

    “얼음 속성 같아요. 둥지 근처에서 냉기의 숨결을 사용한 흔적이 있었거든요.”

    데닝로즈는 한숨을 내쉬며 손톱으로 지도를 살짝 긁었다.

    “어어어얼음?”

    “얼음이라.”

    반응이 극명하게 갈렸다. 도리안은 질식할 것처럼 얼굴이 창백해진 반면 라온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얼음 좋지.’

    현재 자신의 수속성 저항력은 7성. 드레이크가 전력으로 사용한 냉기의 숨결을 정통으로 맞아도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을 것이다.

    “아니, 드레이크가 세다는데 왜 웃으세요! 흑탑도 있는데 긴장도 안 되냐구요!”

    도리안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바람을 흘렸다.

    “흑탑은 처리하면 그만이지. 드레이크가 크니까. 네 아버지가 내려 준 시험에서 이기기 더 편해졌잖아.”

    드레이크에게 속성이 있다는 건 덩치가 굉장히 크다는 뜻이다. 놈을 깔끔하게 잡기만 한다면 이미 승부를 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허….”

    “아….”

    도리안과 데닝로즈가 뭐 이런 사람이 있냐는 듯한 멍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아쉽게도 이 정보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어요.”

    “그건….”

    라온이 데닝로즈의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에게도 안 줬다는 뜻이로군.’

    암시장의 정보는 언제나 정확해야 한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말은 아무에게도 이 정보를 넘기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저희 정보원이 아까 말씀드렸던 웨더스 마을에 대기하고 있으니, 도움을 받으시면 될 거예요.”

    “감사합니다.”

    라온이 일어서서 데닝로즈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 정도라면 그녀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고마울 뿐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도리안도 일어서서 데닝로즈에게 허리를 굽혔다.

    “아, 하나만 더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어떤 거죠?”

    “내일 정오 이후에 누군가가 자마리 산맥의 드레이크에 대해 묻는다면 있다는 표현 정도만 가능할까요?”

    데루스라면 팔렌의 정보를 듣고도 바로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이건 놈을 속이기 위한 마지막 조각이었다.

    “음….”

    데닝로즈가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이 아니니, 그 정도 정보를 말하는 건 괜찮겠네요.”

    “감사합니다. 그럼 값은….”

    “드레이크를 찾는 일은 무료로 해드린다고 했잖아요.”

    “흑탑이 끼어들었으니, 드릴 건 드려야죠.”

    “괜찮아요. 라온 님이 안 계셨다면 저도 이곳에 없었을 테니까.”

    데닝로즈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정 뭔가를 주고 싶으시다면 웨더스 마을에서 산딸기 파이와 밤 조림을 좀 가져와 주세요. 저도 먹어보고 싶네요.”

    그녀는 그거면 충분할 거 같다며 웃었다.

    -오오!

    먼저 반응한 건 라온이 아니라, 라스였다.

    -그러면 마을에 들려야겠지? 맛도 봐야겠지? 혹시 모르니 선물용으로 2개 사서 망가진 건 우리가 먹어야겠지?

    라스는 벌써 기대가 되는지 요상한 소리를 중얼거리며 길게 입맛을 다셨다.

    이 식충이 마왕이 언제 정신을 차리려나….

    “그 정도는 해드려야죠.”

    라온이 라스를 밀어내고서 데닝로즈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일 맛난 파이로 사오겠습니다.”

    *     *      *

    데루스 로베르트의 집무실.

    청명하게 쏟아지는 햇살과 달리 서늘하기 그지없는 그 공간으로 집사 레젤이 들어왔다.

    “가주님.”

    “찾았나?”

    레젤이 고개를 숙이기도 전에 데루스의 시선이 쏘아진다. 해저 던전을 망가뜨린 정체 모를 놈을 찾았냐는 뜻이었다.

    한참 전에 냉정해졌어야 할 시간이지만, 영약과 영물 그리고 마티오까지 함께 잃었기 때문인지 데루스는 아직도 분노를 벗어나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레젤이 묵묵하게 고개를 숙였다.

    “외부인으로 보이는 자들을 모두 수색해봤지만, 그곳에 발을 디딘 사람은 찾지 못했습니다.”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로베르트에는 1년 내내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든다. 이곳에서 수상한 사람을 찾는 건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후우….”

    데루스가 한숨을 내쉬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한참 후 시선을 내린 그의 눈동자에는 다시금 냉정이 돌아와 있었다.

    “이젠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군.”

    “가주님….”

    “찾은 게 아니라면 무슨 일이지?”

    “세피아 상회의 팔렌 세피아가 미끼를 물었습니다.”

    레젤이 품에서 서류 한 장을 꺼냈다.

    “팔렌 세피아라….”

    데루스가 턱을 쓸어내리며 눈빛을 가라앉혔다.

    “다만 저희의 예상과 달리 첫째와 둘째가 아니라, 막냇동생과 그를 수행하는 검사를 먼저 처리해 달라고 합니다.”

    “막내와 수행 검사?”

    “가주님도 잘 아는 자입니다.”

    레젤이 서류를 돌려서 데루스의 책상에 올려놓았다.

    “음?”

    데루스가 서류를 보고서 인상을 찌푸렸다.

    “라온 지그하르트? 이놈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세피아 상회의 막내 도리안 세피아가 광풍단 출신이더군요. 성을 속이고 있어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럼 둘만 지그하르트에서 빠져나가서 로칸으로 간 건가?”

    “그런 것 같습니다.”

    “언제부터! 놈들의 행적은 파악했나?”

    그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짓누르며 턱을 치켜들었다.

    “에덴에게 납치당했던 일 때문에 변장을 하고 움직인 듯합니다. 언제, 어떻게 움직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

    데루스가 서류에 적힌 라온 지그하르트라는 이름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그놈이? 아니야. 불가능해.’

    만약 라온 지그하르트에게 암살자 라온의 지식이 있다는 가정이 맞다고 쳐도 놈이 해저 던전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놈이 살아 있을 때 던전은 꽉 닫혀 있고 정보도 빠져나가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느낌이 좋지 않아.

    라온 지그하르트라는 이름을 볼 때마다 꺼림칙한 기분이 드는 건 분명했다.

    “정확한 의뢰 내용은 뭐지?”

    “이번 세피아 상회주가 내린 시험은 드레이크의 사체를 가져오는 일이라고 합니다.”

    “드레이크라….”

    “팔렌 세피아가 도리안의 방을 도청하여 드레이크의 위치와 어디로 갈지를 전부 파악했다고 합니다. 의뢰를 받아들인다면 바로 그 정보를 보내주겠다고 했습니다.”

    “흐음….”

    데루스가 손가락을 까딱이며 눈을 내리감았다가 떴다.

    “아무리 라온 지그하르트가 따라왔다고 해도 첫째와 둘째가 아니라 막내부터 노리다니, 좀 이상하지 않나?”

    “그것도 조사해봤는데, 라온이 도착한 날 바로 망신을 당했다고 합니다. 자세히 말씀드리면….”

    레젤이 라온과 팔렌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간단하게 말했다.

    “견제가 아니라, 복수인가? 그러면 말이 돼.”

    데루스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젤의 말을 들어보니, 왜 팔렌이 라온과 도리안부터 제거하려는 건지 이해가 갔다.

    ‘일이 재밌게 돌아가는군.’

    팔렌에게 미끼를 던지긴 했지만, 그녀가 물 확률은 그리 높지 않았다.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려고 할 때 라온 덕분에 기회가 찾아오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테네브레는 아직인가?”

    데루스가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아마도 2주는 더 걸릴 듯합니다.”

    “그럼 록탄과 그의 독인들을 보내라.”

    “록탄….”

    “라온 지그하르트를 제거하려면 무력과는 다른 수법을 사용하는 게 낫다. 록탄이라면 아무리 못해도 동귀어진은 가능하겠지.”

    그는 이미 상황이 그려진 듯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레젤은 당연하게도 어떠한 의문도 가지지 않은 채 고개를 숙였다.

    “팔렌에게 다시 연락이 오는대로 준비하겠습니다.”

    “바로 움직이지 말고, 암시장에서 정보를 구매한 뒤 대조해서 확인해보도록.”

    데루스는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않고, 정보를 확인하라 말했다.

    “예.”

    레젤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뒤 방문을 나섰다.

    화아아아!

    데루스가 레젤이 준 서류를 먼지로 만들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방해만 하는 놈이라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기회를 만들어주는군.’

    그 대가로 고통스러운 죽음을 만들어주마.

    *     *      *

    다음 날 정오.

    팔렌 세피아가 창가로 다가가서 창틀에 끼워진 편지를 빼냈다. 그녀는 편지를 보지 않고 방 중앙에 있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다, 답이 왔어요.”

    “수고했습니다.”

    라온이 빙긋 웃으며 팔렌이 내려놓은 편지를 들고 펼쳤다.

    편지에는 암살 의뢰를 받아들인다는 문장과 라온과 도리안의 정보를 오늘 저녁까지 정리해서 넣어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역시.’

    흑사라는 세력이 평범한 암살단체였다면 절대 이 의뢰를 받지 않았겠지만, 놈들의 뒤에는 데루스 로베르트가 있다.

    예상대로 놈들은 자신을 죽이고 팔렌 세피아에게 목줄을 채우기 위해서 이 의뢰를 받아들였다.

    라온은 만화공을 이용하여 편지를 불태운 뒤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놓았다.

    “이 내용대로 쪽지를 적어서 창문에 끼워 넣으세요.”

    “아, 네….”

    팔렌 세피아가 턱을 떨며 종이를 받았다. 펼쳐서 내용을 확인한 그녀가 눈을 부릅떴다.

    “저, 저기….”

    그녀가 종이를 쥔 손을 떨며 마른침을 삼켰다.

    “하나만 여쭤봐도 되, 되겠습니까?”

    “뭐죠?”

    “왜 암살자를 끌어들이시는 거죠? 흑사는 실패한 적이 없는 암살자 집단인데 아무리 당신이라고 해도 위험하지 않나요?”

    “위험해도 사람 목숨으로 거래를 하는 놈들을 놔둘 수는 없으니까요.”

    “으윽….”

    라온이 서늘한 눈빛으로 팔렌 세피아를 굽어보았다. 그녀가 뱀 앞에 놓인 개구리처럼 울대를 떨었다.

    -지랄이니라. 네놈이 그딴 생각을 할 리 없느니라!

    라스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맞는 말이지. 다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먹혀.

    ‘협이라는 이명이 이럴 때 편하지.’

    설화검협이라는 이명 덕분에 이런 말을 할 때 누구도 트집을 잡지 않는다. 평소에는 불편하지만, 이런 식으로 대의를 위한 척할 때는 편하기 그지없었다.

    “당신은 이대로 제 말만 따라주면 됩니다. 그리하면 오늘 밤에도 편안하게 주무실 수 있을 겁니다.”

    “네. 네….”

    편안하게 잘 수 있다는 말에 팔렌은 인형처럼 딱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트라우마가 제대로 박혔군.’

    저 정신적 충격을 극복하려면 최소 1년은 필요해 보였다. 아니, 팔렌은 정신이 여물지 못하고 자존심만 가득하던 사람이니 더 많은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동안은….’

    이쪽의 하인이나 다름없다는 뜻이지.

    팔렌이 정신을 차렸을 때 이 상회는 이미 도리안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팔렌이 본인의 필체로 자마리 산맥과 드레이크에 대한 정보를 연락용 쪽지에 적은 것을 확인한 뒤 일어섰다.

    “가, 가시나요?”

    “먼저 가서 준비해야죠.”

    라온이 문으로 나가려다가 뒤를 돌았다.

    “그녀가 언제나 지켜볼 수 있다는 걸 명심하세요.”

    “아….”

    “언행은 평소처럼 하시구요.”

    “아, 알겠습니다!”

    팔렌은 전신을 바르르 떨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협박 한번 살벌하게 하는군.

    라스는 소름이 돋는다며 본인의 팔을 꼬집었다.

    라온은 피식 웃으며 기척을 죽인 채 팔렌의 방을 나섰다.

    *     *      *

    라온은 준비를 마친 뒤 총단 저택을 나왔다. 문 앞에서 도리안이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고 있었다.

    “뭐 하냐?”

    “빨리 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는데, 흑탑이 있다고 하니까. 발이 안 떨어져요….”

    도리안은 왜 맨날 무서운 일만 터지냐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쯧!

    라스는 도리안을 보며 혀를 찼다.

    -좀 달라졌나 했더니, 여전히 겁쟁이로구나.

    ‘사람이 그렇게 빨리 바뀌면 죽어.’

    라온은 피식 웃으며 검집을 툭 쳤다.

    “걱정할 필요 없어. 흑탑이랑 싸울 건 우리가 아니니까.”

    “예? 그게 무슨….”

    “응원군을 불렀거든.”

    “지, 진짜요? 광풍단이라도 부른 거예요?”

    “그건 아니지만, 칼 하나는 잘 쓰는 놈들이야.”

    물론 이쪽을 죽이기 위해서 칼을 드는 놈들이지만.

    -암살자를 부른 걸 말을 안 해주는 것이냐?

    ‘알면 울부짖으면서 안 갈 테니까.’

    -하긴. 눈에 훤히 보이는구나.

    라스가 안도의 한숨을 쉬는 도리안을 보며 키득거렸다.

    “가자.”

    라온이 도리안의 어깨를 툭 치고 먼저 앞으로 나갔다.

    “흑탑보다 먼저 자리를 잡아야 해.”

    “네엡!”

    밝아진 도리안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뒤에 붙었다.

    상회에서 받은 말을 몰고 도시를 빠져나가고 있을 때 양산으로 얼굴을 가린 귀부인이 옆으로 다가왔다.

    ‘이 여자….’

    모를 수가 없다. 바로 어제 만났던 데닝로즈의 기척이었다.

    ‘왜 왔지?’

    암시장의 간부들은 그 이름답게 양지에서 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녀가 나타났다는 건 예상외의 사건이 터졌다는 뜻이었다.

    우우웅.

    라온인 기막을 펼쳐서 소리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았다.

    “문제가 생겼어요.”

    데닝로즈가 옆으로 붙어서 양산을 살짝 들어 올렸다.

    “흑탑이 드레이크의 위치를 잡았어요.”

    “그건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잖습니까.”

    흑탑이 자마리 산맥으로 움직이고 있었기에 드레이크 둥지를 발견하는 건 생각했던 일이다. 어차피 드레이크가 다시 돌아올 때까진 말미가 있기에 별 상관이 없었다.

    “네. 하지만 흑탑은 바로 산맥으로 가지 않고 우회했어요.”

    양산 밑으로 보이는 데닝로즈의 입술에서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놈들이 웨더스 마을을 습격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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