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9화
길고 긴 직사각형 테이블 위로 산해진미가 깔린다.
가지각색 요리의 향이 후각을 자극하고, 입안에 침이 고이게 만들었지만, 식탁을 바라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식당에 있는 모든 사람은 전부 아디스 세피아만 바라보았다.
-저 영감탱이는 왜 지금 저런 말을 꺼낸 것이냐! 분위기 파악 더럽게 못 하느니라!
물론 인간이 아닌 라스는 음식에만 온 정신을 집중했다.
-밥은 따뜻할 때 먹어야 하는데 다 식고 있지 않느냐! 맛과 향이 벌써 2할은 줄어들었을 것이니라!
‘좀 참아.’
라온은 달라붙는 라스를 밀어내며 아디스 세피아의 입이 다시 열리기를 기다렸다.
“흠.”
아디스는 본인이 한 말을 잊은 듯 바로 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잘라 입에 넣었다.
“맛있군.”
그는 스테이크를 천천히 씹어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 영감이 먹었으니, 우리도 먹어도 먹자! 말했듯이 수프부터….’
‘기다려 봐.’
라온은 고개를 젓고서 아디스를 바라보았다.
“뛰어난 요리사는 좋은 재료를 고르는 안목이 있고, 재료 본연의 맛을 살려서 작품과도 같은 요리를 완성하지.”
아디스는 스테이크를 조금 더 썰어 먹은 뒤 미소를 지었다.
“뛰어난 목수는 너무 단단하여 작은 형태를 잡기도 어렵다는 흑목으로 이런 고풍스러운 식탁을 만든다. “
그는 음식들이 놓인 직사각형의 식탁을 쓸어내리며 후계자 후보들을 한 명씩 살폈다.
“상인은 물건을 싸게 떼 온 뒤 이문을 얹어 비싸게 파는 직업이다. 그럼 뛰어난 상인은 뭐가 다를까?”
그가 물음을 던졌지만, 답을 구하는 질문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모두 말을 하지 않았다.
“도리안?”
하지만 역시 아디스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본인이 답을 말해줄 것처럼 분위기를 만든 뒤 대답을 하라며 도리안을 불렀다.
“어억!”
도리안은 갑작스럽게 훅 들어온 질문에 무릎 위에 올려둔 양손을 떨었다.
“그게….”
그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도움을 바라는 듯 라온에게 슬쩍 눈동자를 돌렸다.
“…….”
라온은 입으로도, 오러 메시지로도 아무런 말을 해주지 않고 눈을 내리감았다.
-뭐 하는 것이냐! 빨리 답을 알려주란 말이다! 저 굼벵이가 생각하는 동안 음식 다 식느니라!
‘성장할 기회를 막아선 안 되지.’
이 대답이 어떻게 나오냐에 따라 식당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도리안의 평가가 바뀌게 될 것이다.
그가 한 번 더 클 수 있는 기회를 뺏고 싶지 않았다.
“후우….”
도리안이 입술을 깨물며 아디스를 바라보았다. 떨리는 눈동자 속에서 은은한 빛이 맴돌았다.
“제, 제 생각에는 손님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뛰어난 상인이 아닐까 싶은데요….”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그런 게 중요하다고?”
“돈을 많이 버는 건 상인에게 굉장히 중요하죠. 하, 하지만 돈만 쫓다보면 사람도, 신용도 잃을 테니, 가장 중요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신뢰를 쌓으면서 상업을 계속하면 언젠가 모두가 알아주는 상회가 되지 않을까요?”
“넌 꿈속에서 사는구나.”
아디스가 도리안을 보며 눈썹을 무겁게 내렸다.
“크흡.”
“손님이라….”
“아직 어리군.”
다른 후계자 후보들의 수하들이 입매를 말아 올리며 도리안을 비웃었다.
“으윽….”
도리안의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손님과 상인의 신뢰. 돈과 시간만 따지는 지금 시대에는 정말이지 우스운 말이다. 그러나….”
도리안의 어깨가 한 손에 잡힐 정도로 쪼그라들 때 아디스의 말이 이어졌다.
“이 상회는 그렇게 컸다.”
“예?”
“아버지?”
“상회주님?”
식당에 있는 사람들이 놀라서 아디스를 돌아보았다.
“뛰어난 상인은 손님의 욕구에 맞출 줄 알아야 한다. 타인의 입맛에 맞춘다는 건 어렵고, 귀찮고, 힘들지. 하지만 그렇게 쌓인 신용과 신뢰가 상회의 이름이 되어준다. 만물상 세피아의 이름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라온이 그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피아를 이렇게 키운 거인답네.’
세피아가 만물상이라 불리는 이유는 가지고 있는 수많은 상품을 파는 게 다가 아니라, 손님의 주문에 맞는 물건을 구해주는 일도 하기 때문이다.
아디스는 세피아 상회를 5대 상회로 만들고서도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으음….”
식당에 침묵이 흘러내린다. 다들 고개를 숙인 채 도리안을 흘낏 노려보았다.
도리안은 그들의 눈빛을 받으면서도 당당히 허리를 폈다. 살짝 무서운지 전신을 떠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라온이 그런 도리안을 보며 피식 웃었다.
‘내가 말했지. 성장할 수 있는 기회라고.’
-조금은 달라졌군. 하지만….
‘하지만?’
-음식은 무지하게 달라지고 있느니라! 1분 1초가 위험해! 빨리 먹어야 하느니라! 본왕의 뱃속으로 구출해주어야 한다고!
‘…….’
라스의 눈동자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한동안 이 녀석의 말을 무시해야 할 것 같다.
“흠!”
아디스가 가볍게 목을 축이고 식탁 앞에 앉은 후계자들을 바라보았다.
“최근 꽤 어려운 의뢰가 하나 들어왔다. 본래라면 내가 처리해야 할 일이지만, 너희들의 시험으로 쓰기에 딱 좋을 듯싶어서 가져왔다.”
그의 시선이 가장 먼저 팔렌에게 향했다.
“누군가는 돈을 모았고.”
두 번째로 바라보는 사람은 디알룬이다.
“누군가는 인맥을 쌓았으며….”
세 번째로 상석 바로 옆에 있는 제세르에게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는 돈과 인맥 모든 것을 가졌지. 그래서 어느 정도 결정이 되었다고도 생각했다. 헌데….”
아디스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도리안에게 돌아갔다.
“돈도, 인맥도 아닌 인연을 가지고 온 녀석이 있더구나.”
그가 담담한 표정으로 테이블 위에 손을 얹었다.
“일이 재밌게 됐으니, 재밌는 시험을 내리는 게 맞겠지.”
아디스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후계자 후보들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회색 망치 길드의 의뢰다. 드레이크의 뿔과 이빨, 발톱 그리고 뼈를 가지고 와라. 사체를 통째로 가져온다면 더 좋겠지.”
‘드레이크!’
라온은 아디스의 말을 듣자마자, 테이블 아래에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드레이크의 사체?”
“드레이크….”
후계자 후보들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시험에 입을 떡 벌렸다.
“직접 잡든, 누군가에게 사 오든 혹은 훔쳐 와도 상관없다. 보름이라는 기한 내에 가장 뛰어난 드레이크의 사체를 가져오는 사람이 승자다.”
“가장 뛰어난 건 누가 결정하는 겁니까?”
“당연히 손님인 회색 망치 길드에서 한다.”
아디스의 손짓에 후계자와 그 수하들의 눈동자가 시퍼렇게 빛났다.
“식사를 마쳤으니, 일어나도 되겠습니까?”
첫째 제세르는 음식에 손도 대지 않은 채 고개를 숙였다.
“마음대로 하도록.”
“잘 먹었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제세르와 디알룬이 일어섰다.
두 사람과 그 수하들은 거침없이 식당 밖으로 나갔다.
“으음….”
팔렌은 일어나지 않은 채 라온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팔렌 세피아.
라온은 다른 곳을 보며 그녀에게 오러 메시지를 보냈다.
-저를 보지 마시고, 평소 하던 대로 행동하세요. 곧 다른 지시를 내리겠습니다.
팔렌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식당 밖으로 나갔다.
-어어억….
라스는 그 모습을 보며 턱을 떨었다.
-그, 그냥 갈 거 아니지? 그럼 본왕 진짜 운다!
‘…….’
협박이 전혀 안 무섭다. 다만 안 먹고 나가면 울부짖으며 귀찮게 할 게 뻔하기에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수프라고! 다 식었어도 수프! 그걸 먹어야 다른 음식을 많이 먹을 수 있단 말이다!
‘어휴….’
라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 수프를 덜어서 입에 넣었다.
트러플의 고소한 향과 부드러운 수프의 맛이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수프가 이 정도이니, 다른 건 더 끝내주겠구나! 다음은 저 고기!
‘점점 귀찮아지네.’
한숨을 내쉬고 고기를 잘라갈 때 도리안이 옆으로 다가왔다.
“부단주님. 뭐 하시는 거예요! 다 나갔잖아요!”
도리안은 턱을 파르르 떨며 손으로 엑스 자를 만들었다.
“지금 이런 거 먹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다들 움직이고 있을 거라구요!”
“걱정할 필요 없어. 우리가 제일 빠를 테니까.”
라온이 포크를 든 손을 여유롭게 흔들었다.
“저쪽이 먼저 갔는데 우리가 어떻게 빨라요. 대체 뱃속에 뭐가 들어가 있길래 이렇게 음식을 밝히시는 거예요!”
“뭐가 있긴 하지.”
헤죽거리는 푸른 솜사탕을 보며 픽 웃었다.
마왕. 그것도 식충이 마왕이.
* * *
식사가 끝난 뒤의 식당.
아디스와 그의 집사 리그윈 둘만 남아서 가벼운 술자리를 즐기고 있었다.
“정말 많이 변하셨군요.”
리그윈이 도리안이 앉아 있던 자리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도리안 도련님이 저리 당당히 본인의 의견을 말할 줄은 몰랐습니다.”
“저 나이 먹도록 의견 하나 못 말하면 쓰나.”
아디스는 당연히 해야 한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 의견이 대견하지 않습니까. 젊은 시절 상회주님을 보는 듯했습니다.”
“내가 저리 못났던가?”
“아뇨. 대단하셨죠. 콧구멍만 한 상회를 대륙 제일로 만들겠다고 선언하시고 실제로 이루시지 않았습니까.”
리그윈이 아디스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세피아 상회가 물건을 떼서 파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직접 의뢰를 받은 게 그때부터였죠. 싸움도 못 하시는 분이 직접 몬스터를 잡겠다고 뛰쳐나갔던 게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옛이야기를 꺼내다니, 자네도 많이 늙었군.”
아디스가 리그윈의 이마에 새겨진 주름을 보며 눈매를 찡그렸다.
“늙었죠. 그래서 더 도리안 도련님의 변화가 와닿는 것 같습니다.”
“음….”
그건 공감하는지 아디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세르 도련님이나, 디알룬 도련님도 이 상회를 잘 운영하실 거라 생각하지만, 지금보다 더 크게 만들 사람은 의외로 도리안 도련님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 다만 그건 녀석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아디스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의 시선이 도리안의 옆에 있던 라온의 자리로 향했다.
“라온 지그하르트. 그 친구 그저 강한 게 다가 아니었어. 끼어들 때와 끼어들지 않을 때를 정확히 알더군. 사람을 다루는 일도 능해. 패왕과 성왕의 기질을 모두 가지고 있어.”
“…그 정도입니까?”
리그윈이 눈을 부릅떴다. 칭찬에 인색한 아디스의 입에서 패왕과 성왕이라는 단어가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다른 아이들이 다급히 나가고 있음에도 홀로 여유롭게 식사를 즐기지 않았던가. 나이를 떠나 인간 자체가 대범해. 대상인들이 오히려 놀라서 움찔거리더군.”
그가 라온 앞 식탁을 보았다. 다른 곳과 달리 그릇들이 전부 텅텅 비어 있었다.
“본래 사람은 음식을 먹을 때 본성이 드러나는 법. 눈앞의 요리를 조금도 남기지 않을 것을 보면 욕심도 보통이 아니야. 솔직히 소름이 돋아 오를 정도였네.”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이 정도로 대식가일 줄은….”
“그와 함께한다면 이 상회가 나머지 넷을 누르고 우뚝 서거나, 망하거나 둘 중 하나가 될 듯하군.”
두 사람은 아주 큰 착각을 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 * *
다음 날 정오.
라온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도리안을 데리고 로칸 시내로 나갔다.
“알아봤어?”
“알아는 봤는데 잘 될까요? 형들은 이미 움직였다고 하던데….”
도리안은 뒤처졌다는 불안감 때문인지 손을 가늘게 떨었다.
“이번 시험은 우리가 유리할 수 밖에 없어.”
그것도 시작 전부터.
라온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한참 전부터 의뢰한 정보였으니까.’
실비아의 단전을 고치기 위해서 필요한 재료는 드레이크 하트와 씨 서펜트 하트다.
엔시아에게 그 재료에 대해 들은 직후 데닝로즈에게 드레이크의 위치에 대한 의뢰를 넣었기에 지금이라면 대략적인 정보가 나왔을 것이다.
“여기예요.”
도리안이 건어물을 판매하는 작은 상점을 가리켰다.
“이곳이 암시장 로칸 지부래요.”
그도 확신은 못 하는지 거미줄이 쳐진 간판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암호는 알고 왔어?”
“그것도 듣기는 했는데….”
도리안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상점 내부로 들어갔다. 마른 어패류 특유의 향이 코끝을 간지럽히는 통로를 지나자, 흔들의자에 등을 묻고 있는 노파가 보였다.
“아, 안녕하세요.”
“…….”
노파는 대답하지 않았고, 흔들의자의 삐걱거림이 그를 반겼다.
“시, 십 년 동안 말린 바다뱀을 찾는데요. 껍질은 벗기고, 소금 간을 해서 짭짤한 녀석으로 주시겠어요?”
그 말이 끝났을 때 흔들의자의 움직임이 멈췄다.
“이쪽으로 오세요.”
노파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들어 올리는 시선과 목소리가 외모와 비할 수 없을 만큼 젊다. 본래 젊은 여성이 변장한 것 같았다.
티디딕!
그녀는 안쪽에 있는 방으로 안내해준 뒤 오른쪽 벽의 이곳저곳을 두드렸다.
스으으윽.
약간의 소음이나 진동도 없이 벽면이 열리고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이 길로 내려가시면 됩니다.”
여성은 고개를 숙이고 다시 흔들의자에 가서 앉았다. 순식간에 졸음을 참지 못하는 노파가 되었다. 암시장에 갈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하나 같이 범상치 않은 인물들이었다.
조명과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또 다른 시장이 열려 있었다. 말 그대로 암시장. 특이한 식료품부터 찬란한 빛을 뿜어내는 귀금속까지 없는 게 없어 보였다.
다만 천장과 벽면의 조명이 쨍쨍하여 외부의 시장보다 더 밝은 느낌을 주었다.
“우와….”
도리안은 보급에 몰두하는 성격답게 암시장에 깔린 물건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여기는 카멜룬이랑 달리 장물도 꽤 많은 모양인데.”
물건들의 상태를 보니 모두 정상적인 방식으로 유통되는 것 같지 않았다. 저주가 풀리지 않은 물건도 있고, 감정되지 않은 물건도 가득했다.
“가자. 시간 없다며.”
라온은 도리안의 어깨를 두드리고 정보를 사기 위해 검은 깃발이 꽂혀 있는 저택으로 향했다.
“엄청나긴 한데 저한테도 좀 있는 물건들이네요.”
“…….”
도리안은 어처구니없는 말을 하고서 뒤를 따라왔다.
‘언젠가 저 주머니 한 번 까봐야 하는데.’
-저놈 배때기 까보면 드레이크도 나오는 거 아니냐?
‘그럴지도….’
지금까지 보여준 것으로 따지면 정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 드레이크도 주머니에 있는 거 아니지?”
“음, 맨 처음 탈출할 때 무슨 발톱 몇 개 챙기기는 했는데….”
도리안이 배 주머니에서 두꺼운 창날이 굽어진 듯한 거대한 발톱을 두 개 꺼냈다.
“알아보니까 드레이크는 아니고, 그리폰의 발톱이더라구요.”
“그리폰….”
그리폰은 드레이크보다 더 희귀한 몬스터다. 그런 신묘한 놈의 발톱이 있다는 것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아….”
라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 암시장의 끝에 있는 저택 앞에 섰다. 큼지막한 철문 앞에는 눈빛에서 정광이 흐르는 네 명의 무인이 서 있었다.
“저는….”
“백검룡을 뵙습니다!”
무인들은 허리가 직각이 되도록 굽혀 극히 정중한 인사를 해왔다.
“들어가십시오.”
그들은 이곳을 찾아온 이유를 알고 있는 듯 길을 비키고, 철문을 열어주었다.
‘내가 올 줄 알고 있었나?’
라온은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안으로 들어갔다. 외부와 달리 눈을 편안하게 해주는 은은한 조명과 고급스러운 장식품들을 지나 유일한 인기척이 있는 안쪽 방으로 향했다.
“우와, 역시 백검룡!”
도리안이 옆으로 다가오며 눈동자를 빛냈다.
“검룡이라는 이명을 얻으면 이런 혜택도 있는 건가요?”
“있겠냐?”
라온이 코웃음을 치며 손을 저었다.
“아무래도 안면 있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야.”
복도 끝에 있는 방문 앞에 서자, 문이 저절로 열리고 그 안에 있던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불에 타오르는 듯한 적발이 어깨 끝으로 흘러내리고, 오른쪽 눈에 장미가 그려진 안대를 쓴 화려한 미녀였다.
‘역시 데닝로즈였군.’
에덴에 납치되었을 때 구출에 큰 역할을 해주었던 데닝로즈가 곱게 일어서서 머리를 숙였다.
“백검룡을 뵙습니다.”
“오랜만입니다.”
라온이 마주 인사를 하고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앉으세요.”
데닝로즈는 맞은편 자리를 가리키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 앉았다.
“이젠 로칸의 지부장이 되신 겁니까?”
그녀가 담당했던 지역은 그란세빌이었다. 한창 복구가 진행 중일 곳을 떠나 이곳에 왔을 줄은 몰랐다.
“아뇨. 전 여전히 그란세빌의 지부장이에요.”
“근데 왜 여기에….”
로칸은 그란세빌과 굉장히 멀리 떨어진 지역이다. 지부장도 아닌 사람이 왜 이곳에 있는 건지 모르겠다.
“어쩌다 보니 제가 라온 님 담당이 되어서요. 오실 것 같아서 기다리고 있었죠.”
“알고 있었다면….”
“라온 님이 세피아 상회의 막내 도련님을 위해서 힘을 쓰신다는 정도는 이제 비밀도 아니니까요.”
데닝로즈가 가는 웃음을 흘렸다. 이전부터 느끼지만 화려한 외모에 비해 표현 자체는 소박한 느낌이었다.
“거기다 드레이크 수색은 라온 님께서 한참 전부터 의뢰하신 일이니, 당연히 제가 와야죠.”
그녀는 이미 아디스가 내린 시험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다.
“이미 다른 사람들이 다녀간 모양이군요.”
아무래도 정보를 얻기 위해서 제세르와 디알룬이 이곳을 지나간 것 같았다.
“…….”
데닝로즈는 대답하지 않고 살짝 눈을 내리감았다. 그것으로 대답은 충분했다.
“드레이크는 찾으셨습니까?”
라온이 테이블 위에 놓인 차로 목을 축이고 물었다.
“드레이크 성체의 둥지로 보이는 곳을 발견하기는 했어요. 조금 더 정보를 모은 뒤에 알려드리려고 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됐네요.”
“우왁!”
도리안이 기겁하며 마시던 차를 뱉었다.
“어, 어떻게 미리 준비를 한 거예요?”
그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차가 흘러내리는 입을 틀어막고 눈동자를 파르르 떨었다.
“어쩐지 이상하다 싶었어! 너무 빨리 강해지잖아! 도련님 대체 정체가 뭐에요! 신이야! 악마야!”
“네 상사다.”
라온이 덜덜 떠는 도리안의 머리를 후려쳤다.
“으어억!”
머리를 마구 비비는 도리안을 놔두고 데닝로즈를 보았다. 그녀는 이 상황이 재밌는지 선선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 실례….”
데닝로즈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가 일어났다. 진짜 미소가 사라지고, 다시 연기하는 미소가 드러났다.
“어쨌든 찾긴 찾으셨다는 거죠?”
“네. 둥지를 오래 떠나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위치 자체는 확실해요. 다만….”
그녀의 표정이 말라붙은 석고상처럼 굳어졌다.
“흑탑이 그곳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드레이크를 노리고 있는 듯 해요.”
“흑탑….”
“흑탑은 오마 중에서도 정보가 제한되어 있는 곳이죠. 솔직히 말해서 부딪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흑탑이라….”
괜찮겠는데?
흑탑이 온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손을 데지 않고 코를 풀 수 있는 계획이 하나 떠올랐다.
“혹시 그 지역의 지도가 있습니까?”
“무슨 생각이 떠오르신 건가요?”
데닝로즈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네.”
라온이 머리를 매만지는 도리안을 보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잘하면 두 마리 물고기에 새우까지 잡을 것 같군요.”
어부지리를 이룰 수 있는 계획을 생각할 때 라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거 구워 먹을 거냐?
‘아,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