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8화
“살려주세요! 뭐든 할 테니까! 제발!”
팔렌이 파리처럼 양손바닥을 비비며 울부짖었다.
“하인도 좋고. 노예도 좋습니다! 곁에만 있게 해주십시오!”
마크 괴튼이 머리를 바닥에 박으며 진중한 목소리로 외쳤다.
-으음….
라스가 턱을 긁적이며 입맛을 다셨다.
-본왕이 지금 이해가 안 되서 그러는데, 네놈 저 둘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어제 후려친 거 빼고는 아무 짓도 안 했어.’
심지어 팔렌은 패지도 않았지. 알아서 기절했으니까.
라온은 무릎 꿇고 비는 팔렌과 마크 괴튼을 보며 눈썹을 살짝 내렸다.
-근데 왜 저래?
‘나도 모르지.’
-널 방심시켜서 대가리를 날리려고 하는 것 아니냐?
‘그럴 수도 있지만, 가능성은 낮아.’
지금까지 본 팔렌은 가진 능력보다 자존심이 강한 여자다. 자신을 치기 위한 계획을 짜더라도, 무릎을 꿇고 빌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리고….’
라온이 팔렌의 얼굴을 보고 입매를 가늘게 찡그렸다.
‘공포에 질린 얼굴이야.’
기절했다가 깨어난 뒤 굉장히 무서운 일을 겪은 것 같았다. 그게 아니고서는 저런 표정을 만들어낼 수가 없다.
“둘 다 들어오세요.”
라온은 나가려던 걸음을 되돌려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팔렌과 마크 괴튼은 무릎을 꿇은 채 기어서 방으로 들어왔다.
“허…”
라온은 헛바람을 흘리며 문을 닫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일어나서 앉으세요.”
의자를 꺼내 준 뒤 두 사람에게 앉으라고 손짓했다.
“괘, 괜찮아요.”
“저도 이게 편합니다.”
팔렌과 마크 괴튼은 일어서지 않고,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저었다.
“대체….”
라온이 다른 색으로 가라앉은 두 사람의 눈동자를 보며 관자놀이를 만졌다.
‘이해가 안 가네.’
-네놈도 이해가 안 간다.
‘뭐가?’
-갑자기 왜 존댓말을 하는 것이냐. 어제만 해도 반말 찍찍 뱉더니.
라스가 이쪽을 보며 콧잔등을 찡그렸다.
‘저쪽에서 예의를 차리니까.’
-그래서 너도 존댓말을 하는 거라고? 어제는 반말하고?
‘그래.’
-본왕이 보기엔 네놈도 정상은 아니야. 대략 45도 정도 돌아가 있느니라.
녀석은 인간을 이해하기 이렇게 어려울 줄은 몰랐다며 담배 연기처럼 허공을 둥둥 떠다녔다.
‘같은 사람도 서로를 이해하기 힘드니 당연한 거지.’
라온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 뒤 마크를 살폈다. 허무와 절망이 차 있던 눈동자에 작고 은은한 정광이 깃들어 있었다.
‘이쪽이 더 말하기 편하겠군.’
공포에 짓눌린 팔렌보다는 마크 괴튼과 먼저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마크 괴튼.”
“예!”
“하인으로 받아달라는 게 무슨 뜻입니까?”
“그 말 그대로입니다.”
마크 괴튼이 주먹으로 심장이 있는 왼쪽 가슴을 두드렸다.
“하인이 되어서라도 따르고 싶습니다! 주군으로 모시게 해주십시오!”
목소리에도 어제 본 사람이라고는 믿기 힘든 힘이 실려 있었다.
“갑자기 이러시는 이유가 뭐죠?”
라온이 짧게 한숨을 내쉬고 무릎에 팔을 기댔다. 어이가 없어서 몸에 힘이 빠졌다.
“복수를 위해서 등 뒤에 서려는 거라면 주소 잘못 찾았습니다. 전 당신을 믿지 않아요.”
“그게 아닙니다.”
“그럼 제가 지그하르트 소속이라….”
“그것도 아닙니다! 전 깨어났을 때 당신이 라온 지그하르트라는 걸 몰랐으니까요.”
마크 괴튼이 맹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기절했다가 깨어났을 때 얻어맞은 턱이나, 베인 상처보다 아팠던 건 심장이었습니다. 제 턱을 치기 전에 하셨던 말이 송곳이 되어 제 가슴을 찌르고 있더군요.”
그가 다시 한번 왼쪽 가슴을 두드렸다.
“라온 님의 말이 맞습니다. 어렸을 땐 재능에 취해서 노력을 게을리했고, 나이를 먹고 나서는 이미 늦었다는 생각에 해야 할 수련을 미루고, 제가 하고 싶은 수련만 했습니다.”
마크 괴튼이 말아쥔 주먹으로 바닥을 눌렀다.
“난 노력하고 있다. 난 열심히 하고 있다고 자기 위안을 하며 도를 휘둘렀지만, 그 안에는 기본도, 초식도, 의지도 없었습니다.”
“음….”
그는 부끄러운지 얼굴을 뻘겋게 물들이면서도 말을 이어갔다.
“라온 님 덕분에 늦게나마 정신이 들었습니다. 받아만 주신다면 노예라도 되겠습니다. 옆에서 보필하며 마지막 기회를 잡고 싶습니다.”
그는 말을 마치고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어찌나 세게 내리쳤는지 방이 울렸다.
‘진심 같기는 한데….’
라온이 뒷목을 쓸어내리며 라스에게 눈짓을 보냈다.
‘어떻게 봤어?’
-마약을 한 듯 일그러졌던 눈동자가 다림질을 한 것처럼 쫙 펴지지 않았느냐. 진심이라는 뜻이겠지.
‘세뇌를 당했다면?’
-고작 하루에 저런 세뇌는 불가능하느니라. 그런 마력의 향기도 남지 않았고. 다만 확신할 수는 없지. 아티팩트를 썼을 수도 있으니까.
라스의 말대로 진심 같지만 확신할 수는 없다.
마스터 하급을 수하로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지만, 먹고 배탈이 날 수도 있으니, 함부로 결정해서는 안 된다.
“왜 오셨는지는 알겠지만, 당신을 무조건 믿을 수는 없습니다.”
“이해합니다.”
마크 괴튼이 고개를 숙였다. 어제 본 그와는 영혼이 바뀐 듯했다. 너무 변하다 보니 오히려 신뢰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생각해볼 테니, 돌아가 계세요.”
“알겠습니다.”
마크 괴튼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방문으로 향했다. 들어올 때처럼 무릎으로 기어서.
“좀 걸어가요!”
“옙!”
걸으라고 말하고 나서야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후우….”
라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 팔렌을 보았다. 그녀는 아직도 공포에 질린 사람처럼 마른 입술을 물어뜯고 있었다.
“팔렌 세피아. 당신은 왜 온 겁니까.”
“요, 용서를 빌려고 왔어요.”
“무슨 용서를?”
“어제 주제도 모르고 건방지게 굴었던 일과….”
팔렌이 잠시 말을 끊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급격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니, 고민을 하는 듯 보였지만 결국 그녀의 입이 다시 열렸다. 무언가에 대한 공포를 이기지 못한 것 같았다.
“다, 당신을 암살하려고 했던 일을요….”
“암살?”
라온이 턱을 파르르 떨었다.
‘뭐야?’
무슨 생각이지?
팔렌이 암살단체를 고용할 건 예상했지만, 암살하려고 했다는 걸 밝힐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암살 이야기를 꺼낸다는 건 속내를 모두 드러낸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날 암살하려고 했다고?”
“네, 네….”
팔렌이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걸 왜 밝힌 거지? 숨기고 있었다면 몰랐을 텐데?”
“주, 죽기 싫으니까요.”
“죽기 싫다?”
“네. 다, 당신에게 사실을 밝히지 않으면 죽을 거예요. 아니,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온다고….”
“누가 당신을 죽인다는 거지?”
“누, 눈에 십자가가 걸린… 누, 누구지?”
팔렌이 멍해진 눈으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그게 누구였지?’
혀 깨물고 죽고 싶을 정도의 공포와 고통을 느꼈는데, 정작 기억 나는 건 눈동자에 맺힌 붉은 십자가뿐이다.
지독할 정도의 오싹함에 전신의 털이 곤두섰다.
다만 확실한 게 하나 있다.
밤새 느꼈던 일이 꿈이 아니었다는 것. 라온에게 모든 사실을 밝히고,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면 평생 그 공포와 고통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제발! 제발 용서해주세요!”
팔렌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며 용서해달라고 다시 머리를 박고 양손을 싹싹 비볐다.
“음….”
라온이 팔렌을 보며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냄새가 나는군.
‘그래.’
스스로 깨달은 듯한 마크 괴튼과 달리 팔렌에게서는 외부의 개입이 있던 것 같았다.
‘둘 정도인가….’
이 일을 저지른 것으로 예상되는 곳은 두 곳이었다.
의뢰를 넣으려던 암살단체에 역으로 압박을 받았던가 혹은… 두 번째는 솔직히 상상하기 싫었다.
“암살 의뢰는 어디에 넣으려고 했지?”
“흐, 흑사라는 곳이에요.”
“흑사….”
흑사라는 말을 들은 라온의 눈빛이 굳어졌다.
‘여기서 이 이름이 나온다고?’
흑사는 데루스가 음지에서 키운 암살 집단 그림자가 사용하는 외부 이름 중 하나였다.
‘쥐새끼 같은 놈.’
여기도 끼어들려고 했군.
데루스는 세피아 상회의 후계자 싸움에도 발을 걸쳐두려고 했던 것 같았다.
요난, 북방에 이어 세피아까지. 놈은 대륙 전체에 손을 뻗고 있었다.
“아, 아직 의뢰가 들어가지 않았을 거예요! 연결고리만 확인하라고 했으니까. 바로 취소를….”
“아니.”
라온이 느릿하게 고개를 저어서 팔렌을 말렸다.
“그 의뢰 실행하세요.”
“네. 네?”
팔렌이 기겁하며 머리를 들어 올렸다. 놀랐는지 눈동자가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도리안이나, 다른 형제들도 암살하려고 했겠죠?”
“그, 그게….”
“나머지는 취소하고, 저와 도리안만 놔두세요.”
“대체 왜 그런 짓을….”
“그건 알 필요 없습니다.”
라온이 일어서서 팔렌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턱을 잡고 눈을 마주쳤다.
“뭐든 다 하겠다고 말했죠?”
“아….”
팔렌이 입술을 떨었다. 태양보다 시뻘겋게 타오르는 붉은 눈을 보자 어젯밤 자신을 짓눌렀던 공포가 다시 살아났다.
아니, 더 짙은 어둠이 온몸을 짓누르는 듯한 오싹함에 전신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기대하겠습니다.”
“네….”
노예 목줄을 차는 것과도 같은 말에 할 수 있는 건 고개를 끄덕이는 일뿐이었다.
* * *
라온은 겁에 질린 팔렌을 돌려보낸 뒤 어제 대련을 했던 연무장으로 향했다. 아침 식사 시간이기에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보, 본왕은 가기 싫느니라! 혼자 가라!
라스는 누구를 만나러 가는지 알아차린 듯 연무장 문을 부여잡고 낑낑거렸다.
‘나도 가기 싫지만 어쩔 수 없잖아.’
이번 일을 확실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만나러 가야 했다.
라온은 어제 작은 기척을 느꼈던 나무 밑으로 가서 기막을 펼쳤다. 소리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막은 뒤 시선을 들어 올렸다.
“있지?”
“응!”
밝다 못해 낭랑한 목소리와 함께 나뭇잎으로 가려진 가지 위에서 날다람쥐 한 마리가 툭 튀어나왔다.
-끄아아악!
라스가 날다람쥐 모습을 한 멀린을 보며 꽥 비명을 질렀다.
-광녀! 역시 광녀였느니라!
녀석은 평범한 동물과 차이를 모르겠다며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네 짓이지?”
“응!”
속일 생각도 없는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경쾌한 대답이었다.
“하아아….”
라온이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멀린이었군.’
어제 스쳐 지나가듯 보았던 날다람쥐 그리고 오늘 겁에 질린 팔렌을 보며 떠올렸던 예상이 그대로 적중했다.
“걱정하지 마. 너한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조절했으니까.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내가 끼어든 건 아무도 몰라.”
멀린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몸을 좌우로 비틀었다. 지금 들어보니, 피로가 쌓인 사람처럼 평소보다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너 어제 멀린의 기척을 느낀 적 없어?’
-없느니라! 있었으면 당장 네놈을 깨워서 도망가자고 했겠지!
라스는 정말이지 광녀 그 자체라며 자신의 어깨 뒤로 숨었다.
“여긴 어떻게 들어왔지?”
“귀여운 다람쥐를 견제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멀린이 머리를 쓱쓱 문지르며 방실 웃었다. 매번 느끼지만 동물 상태에서 표정을 너무 잘 표현하는 것 같다.
“이곳까지는 그렇다 치고 저택에는 경계 마법이 있잖아.”
총단 건물에는 여러 경계 마법이 걸려있다. 밤이면 더욱 두터워지는 경계를 어떻게 뚫고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네가 이곳에 온다는 걸 알고, 미리 움직일 경로를 다 파악해뒀거든. 저런 큰 건물일수록 구멍이 많은 법이야.”
“겨, 경로….”
라온이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만졌다. 미리 다 경로를 파악했다는 말이 너무도 무섭게 들렸다.
“구멍이 있다고 해도 경계 마법은….”
“경계 마법이 잡아내는 건 대상의 몸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는 마나야. 이 아이의 몸에는 아주 미약한 양의 마나 밖에 존재하지 않으니까. 걸릴 수가 없지.”
멀린은 아이에게 가르침을 주는 선생처럼 부드럽게 말을 이어갔다.
“그럼 팔렌에게 공포는 어떻게 심었는데?”
어제 라스에게 멀린의 마법에 대해 들었기에 의문이 남았다.
“이대로 마법을 걸었지.”
-불가능하느니라!
라스가 어깨 위로 튀어나와서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조금 전 본인이 말한 대로 마나가 적은데 어떻게 마법을 쓰겠냔 말이다!
그 말대로다. 마나가 적어서 경계를 벗어났는데, 어떻게 마법을 썼다는 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있잖아. 여기.”
멀린이 날다람쥐의 가슴을 가리켰다.
“서, 설마….”
“그래. 생명력. 내가 조종하던 아이들에게는 모두 내 생명력을 넣어뒀는데, 그걸 회수하지 않고 사용했어. 내 일에 관심이 많네. 기분 좋은데?”
그 말과 함께 흘러내린 멀린의 웃음소리를 듣자, 오싹함에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입술을 떨며 라스를 보았다.
-가, 가능은 하느니라. 생명력을 마나로 치환하는 건 무인만의 특기가 아니니까. 그런데 생명력은….
‘수명이잖아.’
심장이 꽉 조여드는 기분이다.
이곳에 오기 전에 싸웠던 마티오가 생명력으로 오러를 끌어 올리듯 마법사는 생명력으로 순도 높은 마나를 만들어낼 수 있다.
저 미친 여자는 본인의 수명을 깎으며 이번 일을 저지른 것 같았다.
“너 진짜 미쳤어?”
라온이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은 채 외쳤다.
“어머! 내 걱정해주는 거야?”
멀린이 나무 위에서 뛰어내렸다. 가볍게 날아서 떨고 있던 자신의 손 위에 착지했다.
“행복해….”
그녀는 날다람쥐의 작은 손으로 자신의 손가락을 만지며 볼을 붉게 물들였다.
“걱정하지 마. 널 위해서라면 내 모든 것을 다 녹여버릴 수 있으니까.”
“됐고. 수명은 얼마나 깎았지?”
“얼마 안 돼. 네가 그 아이의 정신의 벽을 깨부순 덕분에 무혈 입성했거든.”
멀린은 한 달도 안 된다며 손을 저었다.
“앞으로 그딴 짓 하지 마. 네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지만, 수명을 깎는 건 허락 못 해.”
멀린이 좋아서가 아니다. 이대로 그녀를 이용했다간 전생의 자신을 가지고 놀았던 데루스와 같은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멀린이 스스로 했다고 해도 데루스와 비슷한 짓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제 날 생각해주는구나.”
멀린은 행복한 듯 반달 같은 눈웃음을 지었다.
“네가 그렇게 말하면 따라야지, 알겠어….”
그녀는 짙은 미소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치겠네.”
라온이 하늘을 올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 말이 안 통하느니라. 저건 이미 두 바퀴는 돌았어….
라스는 이제 공포를 느끼는 듯 흔들리는 눈만 빼꼼히 내밀었다.
“마크 괴튼에겐 뭘 했지?”
“걔한테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뭐?”
“시간이 없었거든.”
멀린이 정말이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그쪽은….’
진짜였다는 건가.
아무래도 그는 진심으로 자신을 따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내가 도움이 됐어?”
멀린이 허리춤에 손을 올린 채 싱긋 웃었다.
“…….”
라온이 멀린을 바라보며 눈을 내리감았다.
‘도움은 됐지.’
팔렌이 술수를 부리기 전에 끊어버렸고, 그림자의 세력을 줄일 기회까지 얻었으니, 큰 도움이 됐다. 다만 수명까지 깎아가며 할 일은 절대 아니었다.
“그래. 하지만 네가 이렇게 나설 필요까지는 없었어. 다시는 이런 일 하지 마.”
“응. 근데….”
“이번에는 뭐지?”
“네가 내 걱정을 해주니까. 너무 흥분돼서 연결이 끊어지고 있어. 어제 좀 무리하긴 했나 봐.”
멀린 얼굴의 홍조가 짙어지며, 목소리가 뚝뚝 끊어지기 시작했다.
“이 아이가 꽤 고생 많이 했거든. 그러니까….”
“이럴 줄 알았어. 이번에는 뭐지?”
라온이 미소를 지으며 날다람쥐를 바라보았다. 아공간 주머니에 다양한 먹이들을 가져왔기에 이번에는 자신 있었다.
“새의 알이랑 썩은 고기를 먹고 싶대.”
“…….”
“들었지? 새알이랑 썩은 고기. 그중에서도 달걀은 싫다네.”
“다, 다람쥐가 그런 걸 먹어?”
“다람쥐는 잡식이고, 계절마다 좋아하는 게 달라져. 그럼 잘 부탁할게.”
그녀는 그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다람쥐의 눈동자에 어려있던 축축함이 단숨에 사라졌다.
“끼익!”
날다람쥐가 빨리 음식을 달라는 듯 손을 뻗어왔다.
“아, 음, 어….”
라온이 아공간 주머니를 살폈다. 당연히도 알이나, 썩은 고기 따위는 없었다.
“트, 특이 취향이구나.”
“끽!”
날다람쥐는 시끄럽고 빨리 달라는 듯 손바닥을 툭툭 쳤다.
“그니까 에….”
“부단주님!”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할 때 연무장 문이 열리고 도리안이 들어왔다.
“오늘 아버지가 저녁 식사에 초대하셨어요! 아무래도 전에 말씀하신 시험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라온이 고개를 젓고서 도리안에게 손짓했다.
“너 혹시 새알 있냐? 작은 걸로?”
“그 녀석 주게요?”
도리안이 손바닥에 있는 날다람쥐를 보며 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잠시 후 그의 손 위로 작고 앙증맞은 새알 두 개가 잡혀서 올라왔다.
“끼익!”
날다람쥐가 손바닥 위에서 방방 뛰며 좋아했다.
“혹시 썩은 고기는….”
“그런 것도 먹는대요? 특이하네요.”
도리안이 날다람쥐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하긴 너도 그런 건 안 가지고 다니겠지.”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공간이 남아도 누가 썩은 고기를 가지고 다니겠는가.
“어떤 썩은 고기가 필요한데요? 소? 돼지? 닭? 오리까지는 있는데.”
도리안이 배 주머니에 비닐에 포장된 고기들을 줄줄이 꺼냈다.
“이, 있다고?”
“당연히 있죠. 필수품이잖아요.”
“그게 왜….”
-미치겠네….
라스가 도리안과 날다람쥐를 번갈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썩은 고기를 왜 가지고 다녀!
녀석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악을 질렀다.
-이 시대에 왜 이렇게 미친 인간이 많은 건데!
* * *
라온은 도리안과 함께 아디스가 초대한 저녁 만찬 자리에 참여했다. 약속 시간 20분 전에 도착했음에도 긴 직사각형 테이블은 대부분 차 있었다.
‘후계자 후보들의 수하들인가.’
자신이 도리안을 따라왔듯이 다른 후계자 후보들 옆에도 한두 명의 수하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정광 어린 눈빛을 보니 전부 한가락하는 사람들 같았다.
“저기 끝에 있는 아저씨가 저희 첫째 형이에요.”
도리안이 옆으로 한발 다가와서 속삭였다.
상석 우측에 있는 자리에 야수족에서 온 듯한 풍채 좋은 중년인이 앉아 있었다. 수염과 머리를 깔끔하게 정리하여 덩치가 큼에도 둔해 보이지 않고 냉철한 인상을 주었다.
‘저쪽은 당연히 알고 있지.’
제세르 세피아.
팔렌과 디알룬은 어떠한 무학이나 마법도 익히지 않았지만, 제세르는 상가만이 아니라, 무인 쪽에서도 유명한 사람이었다. 뛰어난 천재는 아니지만, 돈을 발라서 고수가 된 특이한 경우였다.
‘안 먹어본 영약이 없다고 했었지.’
아디스의 정실부인이 굉장히 귀하게 키워서 제세르는 안 먹어본 영약이 없고, 매번 마스터 급의 고수에게 무학 수업을 받았다고 들었다. 그 때문인지 몸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어마어마했다.
“…….”
제세르는 이쪽을 흘낏 보고서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도리안의 말 대로네.’
괴롭협던 팔렌, 디알룬과 달리 제세르는 아예 존재 자체를 무시했다고 했었다. 9년 만에 돌아온 동생을 저리 대하는 것을 보니, 여전히 가족으로 여기지 않는 것 같았다.
‘다만….’
실력은 진짜야.
개인의 무력만이 아니라, 가진 세력과 자금이 다른 이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 거다. 후계자 경쟁에서 가장 순위가 높고 위험한 인물이었다.
“어, 어서오세요.”
팔렌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고개를 숙여왔다. 표정이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역시 오셨군요. 환영합니다.”
디알룬은 환영한다는 말과 달리 매서울 정도로 차가운 눈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도리안이 식탁 중앙에 서서 고개를 숙였다.
“…….”
“그래.”
“으응….”
제세르는 아예 반응하지 않았고, 디알룬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으며, 팔렌은 어깨를 떨었다.
“가시죠.”
라온은 도리안의 안내를 받아 테이블의 끝자리에 앉았다.
“후우….”
도리안이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한숨을 뱉었다.
“조금 떨리네요.”
“괜찮을 거다.”
라온은 피식 웃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최고급 요리들의 향기가 진동을 하는구나!
라스는 어딘가에서 흘러오는 음식 냄새를 맡고서 강아지처럼 혀를 쭉 내밀었다.
-빨리 달라고 말해라! 육해공이 전부 있는 것 같느니라!
‘알아서 나올 테니까. 가만히 좀 있어.’
라온이 라스의 머리를 눌러서 억지로 팔찌에 밀어 넣을 때 식당 문이 활짝 열렸다.
쿠웅!
아디스 세피아와 그를 따르는 다섯 명의 대상인들이 들어왔다. 무학을 익히지 않았음에도 존재감이 천장에 닿을 것처럼 거대했다.
드드드득!
테이블에 앉아 있던 모두가 일어서서 아디스에게 고개를 숙였다.
“상회주님을 뵙습니다!”
“초대에 응해주어서 고맙네. 앉게.”
아디스는 절도 있는 자세로 상석에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감사합니다!”
후계자 후보들과 그들의 수하들이 모두 자리에 앉았다.
짝!
아디스가 손벽을 치자, 다시 식당 문이 열리고 사용인들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요리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오오!
라스가 숨을 크게 들이키며 헤헤 웃었다.
-먼저 먹고 시작하려는 것 같구나!
‘그러네.’
음식부터 부르는 걸 보면 먼저 식사부터 하고 본론을 꺼내려는 것 같았다.
-역시 본왕 수하의 아비다운 선택이니라!
라스는 테이블 위에 놓이는 요리들을 보며 욕망으로 가득 찬 눈동자를 빛냈다.
-먼저 저기 있는 트러플 수프부터 먹어라. 따스한 수프로 배를 녹이고 나서 제대로 된 전투를….
“음식이 차려지는 동안 모두를 부른 이유를 설명하지.”
라스가 즐거워하며 먹을 요리의 순서를 정할 때 아디스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식당을 울렸다.
“너희들 모두에게 하나의 시험을 내려줄 생각이다.”
서늘한 정도로 담담한 음성에 살짝 웅성거렸던 식당에 침묵이 내려왔다.
‘이 상황에서?’
긴장을 풀어 준 뒤 다시 긴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다니, 역시나 보통 사람이 아니다.
‘재밌네.’
라온이 흥이 차오른 눈빛으로 아디스를 바라보았다.
-아….
라스는 쭈구리처럼 어깨를 움츠린 채 요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바, 밥 식는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