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357화 (357/653)

제357화

아디스 세피아의 집무실 문이 조용하게 열리고, 집사 리그윈이 들어와서 고개를 숙였다.

“상회주님. 끝났습니다.”

“음….”

서류를 보고 있던 아디스가 펜을 멈추고 시선을 들어 올렸다.

“어떻게 됐지?”

“당연하게도 백검룡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그렇군.”

“다만 조금 특이한 점이 있었습니다.”

“특이한 점?”

“예. 검기로 강기를 깨부수더군요.”

“…그게 가능한 일인가?”

아디스가 헛바람을 흘리며 펜을 내려놓았다.

“저도 그런 건 처음 보았습니다. 임기응변 같은 게 아니었는지, 상처 하나 없이 마크 괴튼의 강기를 지워버리더군요. 소문 이상의 괴물이었습니다.”

리그윈이 어이없다는 듯 눈매를 찡그렸다.

“내 눈도 아직 옹이구멍이 아닌 모양이야.”

아디스가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리안의 상태는?”

“부상은 입었지만, 백검룡이 적절할 때 끼어들어서 중상까지는 아닙니다.”

“후음….”

아디스가 아주 짧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도리안 도련님의 대련에서도 특이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이번엔 뭐지?”

“도리안 도련님이 토튼 로벨을 꺾었습니다.”

“뭐?”

아디스가 책상을 치며 벌떡 일어났다. 냉소적인 성격인 그에게서 보기 힘든 반응이었다.

“그, 그게 정말인가?”

“예. 처음에는 힘겨워했지만, 깨달음을 얻고 익스퍼트 최상급에 올라 토튼 로벨을 무릎 꿇렸습니다.”

“그럼 도리안의 부상은….”

“마크 괴튼에게 당한 상처입니다. 강기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버티시더군요. 도리안 도련님을 다시 보게 됐습니다.”

리그윈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허, 허!”

아디스가 헛웃음을 흘리며 책상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 아이가 거기까지….”

“의지가 굳건하셨습니다. 외모만이 아니라, 성격도 작은 마님을 보는 듯하더군요.”

“…그래. 닮았더군.”

아디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의 입가에서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났다.

“팔렌은 어떻게 됐지?”

“육체적인 충격은 전혀 없었고, 백검룡의 기세에 짓눌려 기절했습니다.”

“기절만 시켰다라….”

아디스가 그 말을 듣고서 신음을 흘렸다.

“라온 지그하르트. 생각보다 더 무서운 남자였군.”

“예. 이후에 이루어질 시험까지 생각한 게 분명합니다.”

리그윈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지금 이 순간 가장 큰 보물을 가지고 온 사람은 도리안 도련님인 것 같군요.”

“그래. 차기 대륙제일인이 될 수도 있는 무인이 이 정도로 도리안을 챙겨줄 줄은 몰랐어.”

아디스가 시선을 내려 마지막 서류에 서명을 마쳤다.

“내일 저녁 식사에 모두를 부르도록.”

그가 펜을 내려놓으며 미소를 지었다.

“후계자 시험을 시작해야겠어.”

*     *      *

라온은 도리안과 함께 상회 총단 내부에 있던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마쳤다.

-캬아아아!

라스는 텅텅 비어버린 그릇들을 보며 탄성을 흘렸다.

-끝내주는구나. 최고급 재료에, 셰프의 실력까지 뛰어나니, 음식이 맛있을 수 밖에 없지!

녀석은 기대감이 그대로 충족되었다며 방실방실 웃었다.

-다만….

‘다만?’

라온이 디저트로 나온 차를 마시며 라스를 돌아보았다.

-뭔가 정이 없느니라.

‘정? 지금 정이라고 했어?’

-그렇느니라. 이 요리들이 파인애플 소녀나 너희 시녀장의 음식보다 맛있긴 하지만 더 끌리는 건 별관의 음식이니라. 오랜만에 먹고 싶군.

‘허….’

마왕의 입에서 정이라는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매번 느끼지만, 분노의 군주와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녀석이다.

‘그래도 기분은 좋네.’

헬렌과 유아의 요리가 세피아 상회의 최고급 요리보다 더 끌린다고 하니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라온은 차와 함께 나온 사과를 먹은 뒤에 시선을 내렸다.

‘근데 아까 정말 멀린 없었어?’

나무 위에서 작은 동물의 기척이 느껴졌지만, 그게 멀린이 맞는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동물이 있었지만, 그게 그 광녀인지는 모르느니라. 솔직히 말해서 정말 정신 나간 마법이니라.

‘정신 나간 마법이라고?’

-그렇느니라. 동물 상태에선 공격할 수 없고, 본체로 교환하는 데 어마어마한 마력과 시간이 필요하기에 효율이 완전 꽝이다.

라스는 사자의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를 떠올리며 헛바람을 흘렸다.

-말 그대로 오직 네놈을 스토킹하기 위해서만 만든 마법이다. 아주 정신이 나갔어. 그리드 급의 욕망이니라….

녀석은 정말 무서운 여자라며 어깨를 떨었다.

‘그리드라….’

라스의 입에서 아주 가끔 나오는 이름이다. 이름으로 추측해보면 탐욕의 군주. 욕망으로 가득 찬 마왕의 이름이었다.

‘탐욕의 군주인가?’

-그렇느니라. 아주 돈에 미친 놈이지.

‘돈? 마계에도 돈이 있는 건가?’

라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계는 폭력과 비명만 난무하는 세계라 생각했기에 돈이 있을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마계를 무시하지 마라!

라스가 솜사탕 몸체를 부풀리며 빽 소리쳤다.

-지성 있는 것들이 사는데 돈이 없겠느냐!

‘아, 미안.’

맞는 말이라 시선을 내려 사과를 했다.

-그런데….

‘음?”

-마계에 관심이 생긴 것이냐?

라스의 눈이 잘 닦은 유리창처럼 빤딱빤딱하게 빛났다.

‘이거 괜찮겠는데?’

라스에게 마왕의 정보를 빼낼 수 있는 기회라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리드라는 녀석이 돈을 모으는 이유는 뭔데?’

-별 이유가 있겠느냐. 돈을 모을수록 강해지니까 그렇지.

‘…돈을 모을수록 강해진다고?’

라온이 눈을 부릅떴다.

-그렇느니라. 인간도, 마족도 돈에 자신들의 욕망을 투여하지. 좋은 집, 좋은 옷, 좋은 음식. 돈이라는 개념 자체가 지성체들의 욕망을 그대로 보여주느니라.

녀석의 눈동자에서 푸른 기운이 스멀스멀 타올랐다.

-그리드. 그 추잡한 놈은 돈을 통해서 인간과 마족의 욕망을 빨아들여 본인의 능력을 강화한다.

라스는 더러운 놈이라고 말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다만 그놈이 온 세상의 돈을 모아봐야 본왕보다 약하느니라! 모은 돈을 다 부숴버린다고 하면 쫄아서 나오지도 않을 것이야!

‘허….’

살짝 허세가 느껴졌지만 라스가 우위에 있다는 건 진짜 같았다.

-어쨌든 그 추잡한 놈 이야기는 됐느니라. 지금부터 마계의 역사와 본왕의 위대함에 대해 설명을 시작하지. 본왕은 태어났을 때부터 남다른….

필요 없는 이야기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렇군.’

-마, 말이 아직 안 끝났는데?

‘다 들었어.’

-…진짜 네놈이 왜 인간계에서 태어났는지 의문이니라! 다시 시작하겠느니라! 본왕은 태어났을 때부터….

라온이 라스의 목소리를 흘리며 사과 조각 하나를 입에 넣었다.

“저기 부단주님.”

도리안이 포크를 내려놓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런 말 하기 좀 그렇지만, 저희 셋째 누나요. 아마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남에게 당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 분명 복수를….”

“알고 있어.”

라온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런 사람을 한두 번 본 게 아니라.”

팔렌 세피아는 세피아 상회의 직계로 태어나 돈을 물 쓰듯 쓰고, 하고 싶은 것을 전부 하면 살았기에 그런 막무가내가 되었을 것이다.

처음으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는 굴욕을 맛보았으니, 깨어나는 대로 복수를 준비할 게 뻔했다.

‘사실 그걸 위해서 놔준 거지.’

팔렌을 확실하게 끝내기 위해서 자존심만 긁었다. 이곳에 온 목적은 그녀를 꿇리는 게 아니라, 이 상회를 먹어 치우는 거니까.

‘물론 이유는 하나 더 있지만….’

라온은 차를 마시며 옅게 웃었다.

“강한 무인을 데리고 와서 정면에서 싸움을 걸면 귀엽게 넘어가 줄 수 있지.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자신을 이길 가능성 있는 무인이라면 마스터 최상급 혹은 그랜드 마스터 급이어야 한다.

그런 초고수 중에서도 돈에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천문학적인 금액이 필요하다.

아무리 세피아 상회의 적녀 팔렌이라고 해도 자금이 거의 동나게 되어 후계자 전쟁을 할 수 없게 될 거다.

즉, 그녀가 선택할 길은 뻔하다.

“암살자를 고용할 가능성이 높지.”

“그, 그걸 아시면서 왜 확실하게 압박하지 않고….”

“일단 그쪽이 정도를 지켰잖아.”

팔렌도, 그녀의 지시를 받은 무인들도 한 번도 살기를 일으키지 않았다.

마지막 선을 지켰기에 자신도 그들에게 치명상을 입히지 않았다.

“거기다 이번 일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너야. 심하게 처리하면 네 성격상 죄책감을 느낄 것 같았으니까.”

“아….”

도리안은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가장 여리고 순한 녀석이다.

훗날 후회할 수도 있으니, 일을 저지르기 전에 그의 각오를 듣고 싶었다.

“네가 결정해. 형제들과 피를 흘리며 싸울 수 있어?”

“…….”

도리안이 마른침을 삼키고 라온의 눈을 보았다.

‘진짜….’

신기한 분이야.

망나니처럼 막 나가다가도, 이럴 때는 현자와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것 같다가도, 정말 중요할 때는 그 사람의 의사를 따른다.

생각 없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느낌이지만, 그 끝은 항상 성공이었다.

정말이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다.

‘다만 확실한 게 두 가지 있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내가 평생을 따라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

“후우….”

도리안이 마음을 정한 뒤 깊은숨을 뱉어냈다.

“그….”

“음?”

“주, 죽이지는 말구요. 파, 팔다리도 자르지 마시고….”

라온이 볼을 긁적이는 도리안을 보며 키득거렸다.

“어렸을 때부터 구박하고, 무시한 사람들인데? 돌아와서도 어떻게든 쫓아낼 생각만 했는데도?”

“그래도 형제니까요.”

도리안은 단단해진 눈동자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안 죽이고도 고통 주는 방법은 많으니까.”

라온이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으윽….”

도리안은 몇 가지 생각이 떠오른 듯 턱을 떨었다.

“돌아가자.”

“예에….”

라온이 식당을 나서려고 할 때 문이 열렸다. 오후에 봤었던 도리안의 둘째 형 디알룬 세피아였다.

“으음….”

그는 이미 소식을 전해 들었는지 자신의 머리 색과 눈동자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표정이 석고처럼 굳어지는 건 피하지 못했지만.

“두 번째로 인사드리는군요. 백검룡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전에는 속여서 죄송합니다. 라온 지그하르트라고 합니다.”

디알룬은 이전에도 겉으로나마 예의를 지켰기에 제대로 인사를 해주었다.

“오신 날부터 큰일을 치르셨군요.”

디알룬이 살짝 턱을 내렸다.

“걸어오는 시비는 참지 않는 성격이라.”

“굉장히 무섭게 들리는군요. 꼭 협박처럼.”

“먼저 치지 않으면 이쪽도 움직일 생각 없습니다.”

라온이 디알룬의 가라앉은 눈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후우….”

디알룬이 한숨을 내쉬고서 라온의 옆에 선 도리안을 보았다.

“솔직히 말하면 네가 승부에 낄 수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감당하기 힘든 사람을 데리고 왔구나.”

그가 서늘한 눈으로 도리안을 바라보았다.

“네가 제일 위험할지도 모르겠어.”

“잘 보셨어요.”

도리안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고개를 들었다.

“형들한테도 지지 않을 거예요. 이제 전 혼자가 아니거든요.”

“하!”

그 말에 디알룬이 차게 웃었다.

“알고 있다. 광풍단의 도리안 세피아.”

디알룬이 도리안의 어깨를 치고서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를 따르는 무인과 하인들이 우르르 들어갔다. 하나 같이 눈빛에 정광이 어려 있었다.

라온은 그들의 기척을 기억해둔 뒤 밖으로 나갔다.

“저, 저 이상한 말 하지는 않았죠?”

조금 전에는 당당하더니, 금세 위축되어 어깨를 떤다. 정말 신기한 녀석이다.

“네가 그렇게 의사를 밝히는 건 처음이었지. 멋있었다.”

“오오!”

“다만….”

라온이 빙긋 웃으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목소리가 갈라지고, 바들바들 떨렸어.”

“어….”

‘솔직히 좀 없어 보이기도 하더라.”

“끄아아악! 창피해!”

도리안이 머리를 부여잡고 비명을 질렀다.

“이제 시작이나 차츰 나아질 거야.”

라온은 씩 웃고서 숙소로 향했다.

-…그래서 본왕은 마계의 군주가 될 수 있었느니라!

‘….’

계속 말하고 있었어?

*     *      *

팔렌 세피아가 힘겹게 눈을 떴다.

“으음….”

익숙한 천장과 침대의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자신의 방이었다.

“내가 왜 여기에… 아!”

지끈거리는 두통과 함께 지난 일들이 떠오른다. 붉은 눈을 드러낸 라온 지그하르트의 기세에 질려 기절했던 것 같다.

“제기랄!”

팔렌이 몸을 벌떡 일으키며 욕설을 내뱉었다. 연무장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꿈결처럼 머리를 스쳤다.

“스윈!”

그녀의 부름에 문이 열리고, 정복을 차려입은 비서가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봐.”

“아가씨께서 기절하신 뒤….”

“아니, 처음부터!”

“도리안 도련님과 연무장에 도착해서 토튼 로벨과….”

스윈이라 불린 비서는 연무장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남김없이 말해주었다.

그의 말을 듣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꿈이 현실이 되어 그곳의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욕이 절로 나오는 상황뿐이었다.

“크으….”

팔렌이 긴 머리를 부여잡고 이를 바득 갈았다.

“빌어먹을!”

세피아 상회의 적녀로 태어나 처음으로 남에게 무릎을 꿇고 백기를 들었다. 굴욕. 그것도 다시 없는 굴욕이었다.

‘봐줬더니….’

그래도 피가 반 섞였다고 적당히 주물러만 주려고 했지만, 일이 이렇게 되니 살의가 가득 치솟았다.

도리안보다도 라온 지그하르트를 때려죽이고 싶었다.

“흑사라는 암살단 놈들과 연결 고리는 아직 남아 있지?”

팔렌이 서늘한 눈으로 스윈을 바라보았다.

“아가씨. 그들은 정체를 밝히지 않은….”

“닥치고 답만 해.”

“남아 있습니다.”

스윈이 옅은 숨을 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에게 연락해. 오빠들과 도리안만이 아니라, 라온 지그하르트까지. 모두 칠 거야.”

“예? 라, 라온 지그하르트를 건드렸다가는….”

“알아. 상회가 사라질 수도 있겠지. 그러니까 놈이 이곳을 떠난 후에 죽일 수 있게 일단 연락만 해둬.”

라온 지그하르트를 건드렸다간 상회 자체가 위험해질 수도 있기에 놈이 이곳을 떠난 이후에 노려야 했다.

“하아….”

스윈이 깊은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잠깐.”

그가 그대로 나가려고 할 때 팔렌이 손을 들어 올렸다.

“술도 가져와. 독한 걸로.”

“…예.”

스윈은 진한 갈색 위스키와 몇 가지 안주를 가져온 뒤 방을 떠났다.

팔렌은 테이블에 앉은 채로 위스키를 들이켰다.

“시발….”

술을 마시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머릿속에서 도리안의 승리와 라온의 붉은 눈이 떠오른다.

술에 취하지 않는다면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았다.

“응?”

안주도 없이 위스키만 들이키는데, 우측 창문에서 작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날다람쥐 하나가 창문에 붙어 있었다.

“꺼져!”

“끼익!”

팔렌이 창문을 향해 술잔을 던졌다. 술잔이 조각나 깨지고 날다람쥐가 어디론가 도망쳤다.

“후우….”

그녀는 그래도 화가 안 풀렸는지 위스키를 병째 들이켰다. 가득 차 있던 술을 모조리 마신 뒤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여버릴 거야.”

팔렌은 빙글빙글 돌아가는 듯한 천장을 보며 라온 지그하르트에게 복수를 하겠다고 다짐했다.

술기운과 피로 때문인지 바로 눈이 감기고 수마에 빠져들었다.

‘어?’

팔렌이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몸이 안 움직여.’

정신은 멀쩡한데,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눈꺼풀도 올라가지 않아 깜깜한 어둠뿐이었다.

‘가위에 눌린 건가?’

가위에 걸린 건 처음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들었던 상황과 비슷했다.

‘재수 없으려니까 별일이 다 있네.’

속으로 욕을 하며 빨리 풀리라고 손가락 끝을 까딱였지만, 몸 전체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대체 언제까지… 음?’

가위에 눌려도 감각은 정상인지 무언가가 이마에 닿는 게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눈꺼풀과 눈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게 뭐….”

팔렌은 뭔지 모를 불안감을 느끼며 눈을 떴다.

‘끄악!’

눈을 뜨자마자, 다시 기절할 뻔했다.

푸른 눈동자에 붉은 십자가가 새겨진 젊은 여성이 이마를 맞댄 채 자신을 내려보고 있었다.

찌그러진 안구에서 피어나는 기운이 사이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뭐, 뭐, 뭐야! 이년은 대체….’

귀기를 풍기는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을 바라만 보았다.

암울한 기운이 스며든 눈동자의 붉은 빛에 심장이 터질 듯 조여들었다.

“누굴 죽여?”

그 짧은 한마디가 귀가를 스치자, 지렁이가 귓속을 헤집는 듯한 오싹한 감각이 느껴졌다.

여자의 눈동자에서 피어나는 축축한 살기에 온몸에 닭살이 올라왔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누굴죽여?누굴죽여?누굴죽여?누굴죽여?누굴죽여?누굴죽여?누굴죽여?누굴죽여?누굴죽여?누굴죽여?누굴죽여?누굴죽여?누굴죽여?누굴죽여?누굴죽여?누굴죽여?누굴죽여?누굴죽여?누굴죽여?누굴죽여?누굴죽여?누굴죽여?누굴죽여?누굴죽여?누굴죽여?”

‘아아….’

그녀의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살점이 뜯겨나가는 듯한 고통이 일었다. 지독한 고통에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움직이는 건 여전히 눈밖에 없었다.

‘흐으으윽!’

억지로 눈을 감고 싶었지만, 눈꺼풀이 또 움직이지 않는다. 마주 보는 여자의 눈동자에 심혼이 찢겨나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누굴 죽인다고?”

여자의 손이 어깨를 잡아 왔다. 뭔지 모를 뜨거운 기운이 들어오더니 개미가 온몸을 갉아 먹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아아흑!’

지독한 고통에 눈동자가 저절로 돌아갔지만, 정신은 계속 말짱하다. 기절하고 싶었지만, 기절할 수가 없었다.

‘제, 제발….’

눈으로 살려달라고 빌었지만, 이 미친 여자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섬뜩한 미소를 흘린 채 이마를 맞대고만 있었다.

“말해.말해.말해.말해.말해.말해.말해.말해.말해.말해.말해.말해.말해.말해.말해.말해.말해.말해.말해.말해.말해.말해.말해.말해.말해.말해.말해.”

광녀의 집착과 팔렌의 소리 없는 비명이 밤새 세피아 상단을 울렸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악!

*     *      *

라온은 새벽 연공을 끝낸 뒤에 눈을 떴다. 창가에서 쏟아지는 햇볕이 기분 좋게 어깨에 와닿고 있었다.

-어떻게 하루도 안 빠지고 그 지겨운 짓거리를 할 수 있는 거지?

라스는 매일 연공을 하는 게 이해가 안 간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하는 거지 뭘.’

지겹지도, 귀찮지도 않다. 살기 위해서 숨을 쉬는 것처럼 강해지기 위해서 연공을 하는 것뿐이다.

‘이젠 안 하면 몸이 찌뿌둥해.’

일어나서 기지개를 피고 몸을 풀듯, 연공을 하면 몸 내부의 마나 회로를 자극하는 효과가 있다.

오러와 연공 경지가 늘어나고, 몸까지 풀리는데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건 그렇고.’

라온이 두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는 문을 바라보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네.’

-그러게 말이다. 바보들도 아니고.

라스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외로 정면에서 도전할 생각인가? 아니면 속임수를 쓰려나?’

피식 웃으며 일어나서 문을 열었다. 어젯밤에 만난 팔렌 세피아와 마크 괴튼이 양 양쪽에 서 있었다.

“무슨 일….”

“살려주세요!”

“받아주십시오!”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외침을 터트리고서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제, 제발 살려주세요! 잘못했어요!”

팔렌 세피아가 일그러진 눈동자로 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박았다.

“저를 받아주십시오! 하인이라도 좋습니다!”

마크 괴튼은 턱에 두꺼운 붕대를 감은 채 고개를 숙였다.

“…….”

라온은 예상하지도 못한 상황에 멍하니 입을 벌렸다.

얘네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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