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5화
라온은 도리안의 앞에 선 용병 차림의 중년인을 보고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마스터의 무력을 가진 용병이라….’
육황오마 그리고 그에 못지 않은 유명한 가문과 왕국들에는 많은 수의 마스터들이 존재한다. 수없이 많은 무인들이 있으니, 마스터가 여려 명인 것도 당연한 일이다.
다만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무인들이 속해 있음에도 마스터의 숫자가 극히 적은 집단이 있다.
용병.
자신의 무력과 자존심을 돈에 팔아버리는 용병들은 전투 경험은 많지만, 체계적인 훈련을 하지 못하기에 무력 수준 자체가 낮다.
‘거기다 재능 있는 무인들은 용병을 빨리 벗어나 버리니까.’
마스터가 될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면 용병으로 사는 것보다 이름 있는 가문이나 왕국에 들어가는 게 훨씬 더 많은 돈과 명성, 지위를 쌓을 수 있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음에도 용병으로 남는 사람들은 <용병왕>이 되기를 원하거나, 자유로움을 사랑하는 괴짜들 뿐이었다.
‘다만….’
극히 드물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다.
명성 있는 가문이나, 왕국에 속해 있던 마스터가 늘어나지 않는 실력에 절망하여 폐인처럼 지내거나, 사고를 치고 쫓겨나서 용병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게 저 사람이지.’
라온이 짝다리를 짚은 채 건들거리는 중년 용병을 보며 피식 웃었다.
‘마크 괴튼.’
육황 바로 아랫급으로 여겨지는 워너 왕국 출신의 기사로 젊은 나이에 마스터에 올랐지만, 10년 넘게 하급을 벗어나지 못한 절망에 사고를 치고 쫓겨나 용병이 된 인물이었다.
그리하여 얻은 이명이 떨어진 꽃이라는 비방이 담긴 의미의 ‘낙화도’였다.
그는 10년 전에도, 20년 전에도 계속 마스터 하급이었고, 지금도 마스터 하급이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르군.’
라온은 마크 괴튼의 잘 벼려진 도와 단련된 육체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역시나 소문은 다 믿을 게 못 되는 것 같았다.
“준비됐으면 오세요!”
도리안은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았는지 눈앞의 상대가 마크 괴튼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손목을 돌렸다.
“전 언제라도 상관없으니까.”
“좋겠구나.”
마크 괴튼이 자신감이 가득 차오른 도리안의 눈빛을 보며 픽 웃었다.
“뭐, 뭐가요?”
도리안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듯 어깨를 떨었다.
“그 나이에 그 무력이면 서른이 되기 전에 마스터에 오르겠지.”
마크 괴튼이 도를 내린 채 눈매를 좁혔다.
“에이, 그 정도는 아니고….”
“다만 마스터 하급 위로 올라갈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이죠?”
“마스터에 오르는 건 훌륭한 재능과 인내를 가진 이들에게 열려 있다. 늦은 나이라고 해도 재능이 있고, 죽을힘을 다해 수련한다면 언젠가는 그 길이 열리지. 하지만….”
그의 눈빛에 허무와 절망이 깃들기 시작했다.
“마스터 하급에서 위로 올라가는 이들에게는 재능을 뛰어넘는 진짜 재능이 필요하다. 너희 광풍단의 부단주 라온 지그하르트처럼. 아쉽게도 네겐 그 재능이 없어.”
“저, 저한테 부단주님 같은 재능이 없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끝까지 해보지 않으면….”
“난 말이다. 속이 좁은 놈이야. 그것도 더럽게 좁지.”
마크 괴튼이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도를 들어 올린다. 초승달처럼 얇으면서도 휘어진 칼날에서 오싹한 기세가 피어났다.
“그래서 너처럼 자신감에 찬 애송이를 보면 배알이 꼴려.”
“윽….”
기온을 낮추는 듯한 서늘한 기파에 도리안이 입술을 깨물었다. 다만 물러날 생각이 없는 듯 검을 꽉 말아쥐고 자세를 낮췄다.
-야.
라스가 도리안의 눈빛을 보고 고개를 홱 돌렸다.
-저러다가 죽는 거 아니야?
‘그렇게 놔두지는 않지.’
아무리 험하게 키운다고 해도 죽거나, 심한 부상을 입게 할 생각은 없다.
‘내가 원하는 건 깨우침이야.’
-깨우침?
‘그래. 도리안도, 녀석의 입 험한 누나도 아주 큰 착각을 하고 있으니까.’
라온이 글래시아의 꽃이 피어난 듯한 푸른 눈동자로 도리안의 등을 바라보았다.
‘이 바보 같은 대결은 그 깨우침을 위해서지.’
* * *
아디스 세피아의 집무실.
똑똑똑똑!
다급한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젊은 무인이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사, 상회주님!”
“무슨 일인가.”
서류를 보고 있던 아디스가 느릿하게 시선을 올렸다. 감정 따위는 보이지 않는 건조한 눈빛이었다.
“지금 바쁘니,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나중에 말을 하도록.”
그는 말을 끝내자마자 다시 서류를 보았다. 급한 일이 있는지 시선이 빠르게 돌아갔다.
“막내 도련님의 일입니다.”
“음….”
무인의 입에서 막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진자처럼 좌우로 움직이던 아디스의 눈동자가 우뚝 멈췄다.
“무슨 일이지?”
아디스가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 건조했던 시선에 확연한 궁금증이 스며들어 있었다.
“셋째 아가씨께서 막내 도련님을 데려가셨습니다.”
“어디로? 위치는 파악했겠지?”
그의 잔잔했던 목소리가 파도 소리처럼 출렁였다. 말을 알아듣기 쉽지 않을 정도였다.
“호위들의 연무장입니다.”
“거기에 누가 있는지도 알고 있나?”
“셋째 아가씨께서 최근에 고용한 무인들입니다. 토튼 로벨과 켈멕, 마크 괴튼이 있습니다.”
“익스퍼트 최상급 둘에 마스터 한 명.”
아디스가 쥐고 있던 펜으로 서류를 툭툭 치며 인상을 찌푸렸다. 짧게 한숨을 내쉬며 관자놀이를 짚었다.
“그들과 대련을 시키려고 도리안을 데리고 간 건가?”
“그럴 겁니다. 본인이 쌓아 올린 돈이, 막내 도련님의 무력보다 높다는 걸 보여주려고 하겠지요.”
우측에 서 있던 노집사 리그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싫다고 해도 9년 만에 돌아온 막내를 바로 건드리다니, 정말이지 철이 들지 않는군.”
아디스는 잉크가 흘러내린 종이를 구겼다. 그의 이마가 그 종이처럼 주름졌다.
“막내 도련님이 또래 무인보다 강한 건 사실이지만, 그 셋 중에 누구도 이길 수 없을 겁니다.”
젊은 무인이 손을 가슴에 올리며 허리를 숙였다.
“명령만 내려주신다면 당장 가서 막겠습니다.”
그는 말만 하라는 듯 기세를 일으켰다.
“흐음….”
아디스는 대답하지 않고 펜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도리안 혼자 간 건가?”
“아뇨. 함께 온 지그하르트의 검사도 따라갔습니다.”
“그렇군. 그럼 됐네.”
그는 피식 웃으며 우측에 있던 새로운 서류를 꺼내왔다. 별일 아니라는 듯 시선을 내려 서류를 살폈다.
“상회주님?”
“놔둬.”
“예에?”
“그가 있다면 큰일은 안 일어날 테니까. 놔두라고 했네.”
“그 사람이 대체 누구길래….”
“라온 지그하르트.”
“라온 지그하…백검룡!”
젊은 무인이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 사람이 왜 여기에….”
“광풍단 부단주로서 도리안을 데리고 왔다고 하더군….”
“그, 그러면 더더욱 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백검룡이 집안일이라고 끼어들지 않거나, 혹여 끼어서 큰 싸움이 벌어질 수도….”
“그럴 일이 없네.”
아디스는 확신을 하는 듯 옅은 미소까지 지었다.
‘절대 있을 수 없지.’
상인인 자신이 무인의 무력에 대해 얼마나 알겠느냐만은, 이곳에서 라온의 진짜 눈빛을 보았을 때는 옛 생각이 떠올랐다.
‘육황오마의 수장들을 본 느낌이었어.’
그것도 지금의 라온처럼 10대나 20대가 아니라, 어느 정도 무르익은 서른 살의 수장들을 봤을 때와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괴물. 그 자체야.’
라온에게 말했듯 사람을 보는 눈은 자신 있지만, 라온 지그하르트라는 사람의 그릇은 파악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남자가 셋째의 술수 따위에 걸릴 리가 없었다. 분명 그 아이의 계획을 깨고 도리안에게 큰 도움을 줄 게 분명했다.
“그리고 라온 검사는 이번 일에 끼어들 자격이 충분하네.”
“예? 그게 무슨….”
멍하니 서 있던 젊은 무인이 고개를 들었다.
“자네도, 도리안도, 팔렌도 아주 큰 착각을 하고 있어.”
아디스가 빙긋 미소를 지으며 책상을 두드렸다.
“그 아이가 쌓은 건 무력만이 아니니까.”
“그게….”
“아직도 모르겠는가? 그건….”
“상회주님.”
조용히 있던 노집사 리그윈이 한 발 앞으로 나왔다.
“지금 업무를 끝내지 않으시면 내일도 집무실에 계셔야 할 겁니다.
“아, 그렇겠군.”
아디스가 고개를 끄덕이고 서류에 시선을 던졌다.
“내일 도련님을 보기 위한 시간이니 꼭 준비하셔야죠.”
“그래. 오늘만을 기다렸….”
그가 황급하게 고개를 저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아니야!”
* * *
“끄으으윽!”
도리안이 마크 괴튼의 도를 막아서며 억눌리는 신음을 토했다.
‘이, 이 사람 뭐야….’
느껴지는 기운이 토튼 로벨에 비해 약해서 쉽게 이기리라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도법의 난해함도, 뿜어지는 오러도, 육체 능력도 차원이 달랐다.
도격을 한 번 막아내는 것만으로 온몸의 힘이 쭉 빠져나갔다.
“이 정도도 못 막는다라…. 내가 널 너무 높게 본 모양이군.”
마크 쾨튼이 유연하게 도를 휘돌렸다. 극한의 예기가 깃든 칼날이 섬뜩한 빛과 함께 떨어져 내렸다.
“흐읍!”
도리안이 십문현검의 절기 청화유운을 펼쳐냈다. 꽃처럼 피어난 푸른 구름이 두터운 검기의 막을 형성했지만, 마크 괴튼의 도는 그 굳건한 막을 단숨에 찢어버렸다.
콰아아앙!
도리안은 가슴을 망치로 후려친 듯한 충격을 느끼며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크헉….”
참으려고 했지만, 입을 뚫고 비명이 튀어나왔다. 마차를 오래 탄 것처럼 속이 거세게 울렁거리는 것을 보니 내상을 입은 것 같았다.
‘특별한 도법도 아니었는데….’
마크 괴튼은 도법이라고 하기도 애매한 내려치기로 자신의 절기를 깨부숴버렸다. 실력 차이가 크게 난다는 뜻이었다.
‘최상급에서도 극. 아니면….’
마스터.
도리안이 느릿하게 다가오는 마크 괴튼을 보며 턱을 떨었다. 상대가 한참 위라는 것을 깨닫자 머리를 가득 채웠던 흥분이 오싹하리만큼 차게 식었다.
“저, 저기요?”
마크 괴튼은 도리안의 부름에 답하지 않고 사선으로 도격을 쏘아냈다.
쩌어어어엉!
도리안이 다급하게 십문현검과 운현보법을 동시에 펼쳐서 도격에 맞섰지만, 그 강대한 충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끄으윽….”
“뭐지?”
마크 괴튼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도리안을 보며 턱을 치켜들었다.
“서,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마크 쾨튼이다.”
“낙화도? 헙!”
낙화도라는 이명을 부른 도리안이 스스로 입을 막았다.
“말해도 상관없다. 내 검이 떨어진 건 사실이니까.”
마크 괴튼은 낙화도라는 비웃음이 담긴 이명을 듣고서도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리고 난 네 미래이기도 하지.”
“아, 아까부터 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마스터에 오른 무인에게는 정체기라는 게 있다. 벽을 넘은 반동으로 한동안 실력이 늘어나지 않는 기간이지.”
“들어는 봤는데….”
도리안이 딱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이 마스터에 올랐을 때 리메르가 그 정체기에 대해 말해준 적이 있었다.
“누구는 정체기 따위 없이 계속 계단을 밟아 하늘로 올라가지만, 평생 그 정체기를 벗어날 수 없는 자도 있다. 나처럼.”
마크 괴튼이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얼굴로 처연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너처럼 자신감 넘치는 젊은 녀석을 보면 짓밟아서 주제 파악을 시켜주고 싶더구나.”
그의 도에서 피어나는 도기가 점차 두꺼워지기 시작했다.
“말 많은 건 마음에 안 들지만, 결론은 좋네요.”
팔렌이 코웃음을 치며 도리안을 가리켰다.
“머리부터 밟아버리세요. 다시는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저쪽에도 제대로 밉보인 모양이로군.”
마크 괴튼이 팔렌을 돌아보고서 피식 웃었다. 그의 도에서 응집되던 기가 모이고, 꼬이며 두텁고 날카로운 강을 만들었다.
우우우우웅!
강대한 도강의 울림에 도리안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물러서지도, 도망치지도 않은 채 두 손으로 검을 말아쥐었다.
“도강을 보고도 계속해보겠다는 건가?”
마크 괴튼은 겁에 질린 듯 떨리는 도리안의 눈동자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저, 전 제 주변 사람들에 비해 특별하지 않아요.”
도리안이 마크 괴튼을 보며 깊은숨을 뱉어냈다.
“무력도, 정신력도 다 떨어지죠.”
라온은 물론이고, 조장들인 버렌, 루난, 마르타와 비교해도 무엇 하나 잘난 점이 없다.
그들의 등 뒤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음에도 검술의 깨달음 하나 얻지 못했다.
‘다만 하나는 배웠지.’
어느 때에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
무섭다. 강기에 죽거나, 크게 다칠까 봐 더럽게 무섭지만, 가장 가까이에서 라온을 지켜본 그의 수하로서 아무것도 못 하고 무릎을 꿇을 수는 없었다.
우우우웅!
도리안의 검 위로 지금까지 중 가장 찬란한 빛이 솟아올랐다.
“이길 생각 따위는 없지만, 여기서 추하게 짓밟힐 생각도 없어요!”
“짜증 나는 눈빛이다.”
마크 괴튼이 이를 바득 갈고서 움직인다. 칼날 위에 쌓인 강기가 톱날처럼 공간을 갉아 먹으며 솟구쳤다.
“단번에 꿇려주마.”
비틀리며 솟구친 그의 도가 붉은 벼락이 되어 쏟아졌다.
“으아아아아!”
도리안이 기합을 터트리며 검을 앞으로 내질렀다.
도리안이 악을 지르며 검을 앞으로 내질렀다. 토튼 로벨을 꺾은 십문현검의 절기 대십현참이 두 번째로 거대한 구름을 피워냈다.
쩌저저적!
열십자로 펼쳐진 검기가 허공을 가득 채웠지만 강기 앞에서는 무의미했다.
콰아앙!
굳건해 보이던 운무가 갈라지고, 도리안이 피를 토하며 바닥을 굴렀다.
“끄으윽….”
도리안이 바로 일어서려 했지만, 힘이 다한 듯 목만 까딱였다.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오러를 모조리 쓴 반동과 육체적 충격 때문에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아하하하하!”
팔렌이 도리안에게 삿대질하며 비웃음을 터트렸다.
“이럴 줄 알았지. 그게 네 수준이야. 네가 아무리 검술을 갈고 닦아도 내가 고용한 용병 하나 못 이긴다고!”
그녀가 서늘한 눈으로 도리안을 내려보았다.
“네가 검을 휘두르며 시간을 낭비하는 동안 난 돈을 벌었지. 저 용병만이 아니라, 너 따위는 가볍게 짓밟을 무인들을 고용할 수 있는 돈을.”
“으윽….”
“예전에도, 지금도 넌 내 밑에서 무릎을 꿇는 게 가장 잘 어울… 어?”
“흐읍….”
도리안이 검을 지팡이 삼아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팔렌과 눈을 마주치며 이를 악물었다.
“아, 아직 안 끝났어.”
“뭐, 뭐하는 거예요! 일어났잖아요!”
팔렌이 황급하게 뒤로 물러서서 마크 괴튼에게 손짓했다.
“빨리 끝내요. 저 주둥이부터 깨부수라구요!”
“흐음….”
마크 괴튼이 도리안에게 다가가 눈매를 찡그렸다.
“그 상태에서 움직인다면 좋은 꼴 못 볼 텐데? 내상이 심해서 한동안 못 움직일 수도 있을 거다.”
“전 겁이 많아요. 무서운 게 싫고, 아픈 건 더더욱 싫죠.”
도리안이 숨을 들이켜며 검을 들어 올렸다. 힘 빠진 손목이 파르르 떨려서 칼날이 휘어져 보였다.
“…그래도 지금은 일어나서 검을 쥘 때라는 건 알아요.”
이제와 드는 생각이지만 라온은 아무 이유 없이 이런 일을 시키는 사람이 아니다. 그를 믿고 흔들리던 두 발에 힘을 주었다.
“점점 더 눈빛이 마음에 안 들어.”
마크 괴튼이 얼굴을 구기며 도를 내리치는 순간 붉은 선이 섬전처럼 짓쳐 들었다.
쩌어어어엉!
시퍼런 도가 거칠게 밀려난다. 도리안의 눈앞에 떠오르는 건 붉게 타오르는 라온의 장검이었다.
“당신이 왜 끼어드는 거지? 이건 우리 집안일이야!”
팔렌이 인상을 구기며 삿대질을 해왔다.
“아니, 관계있다.”
라온이 마크 괴튼의 도를 밀어내며 서늘한 눈빛으로 팔렌을 굽어보았다.
“도리안이 쌓은 무력이 당신이 쌓은 돈보다 가치가 없다고 했었지?”
“그게 뭐!”
“미안하지만 도리안이 쌓아 올린 건 검술만이 아니야.”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왼손을 들어 올렸다.
“동화보다는 조금 더 단단하고.”
손아귀에서 두 조각으로 갈라진 동화가 떨어져 내렸다.
“은화보다는 조금 더 질기며.”
두 번째로 과자처럼 바스러진 은화가 쏟아졌다.
“금화보다는 조금 더 끈끈한.”
마지막으로 금화가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인연이라는 관계를 쌓았으니까.”
“인연? 그게 무슨 개소리….”
“네가 돈을 벌었다고 자랑했듯이 도리안은 지그하르트에 와서 인연을 쌓았다. 내가 그의 힘이라는 뜻이지.”
태양처럼 짙게 타오르는 검기가 마크 괴튼의 푸른 도기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나도 다른 광풍단 검사들도 이 녀석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걸고 검을 들 준비가 되어 있다. 그건 절대 돈으로 살 수 없어.”
“끄으으으….”
라온의 차디찬 웃음에 팔렌의 얼굴이 찌그러졌다.
“저 녀석도 꿇려요. 아주 짓밟아버리라고!”
팔렌은 이를 갈며 라온에게 삿대질을 했다.
“네 눈은 더 마음에 안 드는군. 속이 뒤집힐 정도야.”
마크 괴튼이 인상을 찌푸리며 도를 튕겨냈다. 그의 칼날 위로 새파란 강기가 일어났다.
“조금 거칠어져도 이해해라.”
“낙화도라고 했던가?”
라온이 턱을 모로 세우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의 푸른 눈동자 위로 서늘한 한기가 번쩍였다.
“내 검기로 네 강기를 떨어뜨려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