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4화
스르르릉!
토튼 로벨이 검을 뽑았다. 검집을 스치는 칼날 소리에 연무장의 분위기가 섬뜩해졌다.
“기다리기 지루하다고 했나?”
그가 시퍼런 검날로 도리안을 겨눴다.
“소원대로 해주지. 당장 검을 뽑아라.”
“저 건방진 주둥이부터 교육시키세요. 다시는 주절대지 못하도록.”
팔렌도 도리안을 노려보며 이를 바득 갈았다.
“으으윽….”
도리안은 얼굴이 노랗게 질린 채 뒤에 있는 라온을 바라보았다. 제발 도와달라는 애처로운 눈빛이었다.
-도와줄 생각이 없다는 건 아는데, 조언도 안 해주는 것이냐?
라스가 도리안의 떨리는 눈동자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저 녀석은 무력보다 마음이 약한 놈이니라.
‘그래서야.’
라온이 겁에 질린 도리안에게 경쾌하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방긋 웃는 미소는 덤이었다.
-그래서라고?
‘너도 알잖아. 도리안은 약하지 않아.’
-본왕이 보기에는 개미만큼이나 약하느니라.
‘…….’
-왜?
라스는 진심이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입장에서는 그렇겠지만,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을 정도라는 건 알잖아.’
도리안의 상대인 토튼 로벨이 익스퍼트 최상급이라는 건 맞지만, 초입을 간신히 벗어난 상태였다.
나이에 비하면 뛰어난 경지지만, 광풍단 조장들에 비하면 한참 하수에 불과했다.
-그거야 그렇지.
‘도리안은 스스로를 익스퍼트 상급 초입이라고 생각하지만, 저 녀석의 진짜 실력은 최상급의 벽에 닿아 있을 정도야.’
도리안은 혼자서도 꾸준히 수련하여 상급의 초입을 벗어났다.
해령화의 이파리를 복용하고, 자신이 연공을 도와주어 실력이 계단을 밟듯 올라갔으며, 이곳까지 오면서 진행한 실전 훈련 덕분에 익스퍼트 최상급 바로 앞에 멈춰선 상태였다.
‘다만 저 녀석은 여전히 몰라.’
도리안을 상대할 때 마스터 초입 수준으로 후려 팼기에 녀석은 자기 객관화가 되어 있지 않다.
그는 여전히 스스로를 약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웬 왕국에서 치른 결투에서도 상대가 동료니까 너무 쉽게 졌잖아.’
도리안은 곁투에서 같은 광풍단 검사를 만나서 패했는데, 진심으로 싸웠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었다.
그가 진심으로 싸우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저 녀석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힘을 안 써.’
-음, 확실히….
라스도 동의하는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힘을 쓰고 용기를 낼 때는 남을 위해서지. 너도 저 녀석이 나한테 대륙추종향을 뿌렸던 거 봤잖아.’
라온이 눈을 내리감고 납치당하던 그 날을 떠올렸다.
‘상상도 못 했지.’
멀린의 아티팩트에 끌려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건 도리안이 대륙추종향을 뿌리는 모습이었다.
광풍단 중에서도 가장 겁이 많은 녀석이 그런 일을 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납치되면서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도리안도 할 때는 하는 녀석이야.’
그게 자기의 일이 아니라서 문제지.
라온이 천천히 눈을 떴다. 도리안은 여전히 검을 뽑지 못한 채 어깨를 떨고 있었다. 구원을 바라는 표정으로 뒤를 힐끔거렸다.
-그래도 너무 과격하게 키우는 것 같느니라. 조금 더 부드럽게….
‘네가 부하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건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이번에는 달라.’
떨리는 손으로 검병을 쥐는 도리안을 보며 눈빛을 가라앉혔다.
‘지금은 도리안을 절벽에서 떨어뜨릴 때야. 스스로 기어 올라올 힘을 기르도록.’
도리안의 겁 많은 성격을 당장 바꾸는 건 무리다. 아마 평생 바뀌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만큼은 달라져야지.’
그가 저런 성격이 된 이유는 이곳에서 형제들과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모욕과 구박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 과거를 부수기 위해서는 본인의 팔과 다리로 절벽을 올라와야 한다.
-절벽에서 떨어뜨린다라….
라스는 고개를 돌린 채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뭘 하나 보니, 손바닥에 필기를 하고 있었다.
‘너 뭐하냐?’
-보면 모르는 것이냐. 필기하고 있느니라.’
‘그걸 왜 하는데?’
-마계에 돌아갔을 때 네놈 같은 악마들을 키우기 위해서니라.
녀석은 라온 두 명만 있으면 마계를 지배할 수 있을 거라며 히죽였다.
‘힘들걸.’
-웃기지 마라. 본왕은 라온 지그하르트를 복제하여 마계와 대륙을 모조리 손아귀에 넣을 것이니라!
라스는 묻지도 않은 마계와 지상 공략 작전에 대해 읊었다.
‘제2의 라온 지그하르트는 나올 수가 없어.’
나도 내 성격을 종잡을 수 없으니까.
암살자로 살아온 전생. 가문의 망신거리이자, 실비아의 사랑을 받으며 큰 유년. 훈련생 시절부터 지금까지는 살짝 정신이 나간 리메르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최근에는 글렌의 기질도 스며들고 있다.
두 번의 삶과 그 주변에 있는 수많은 사람의 인연 덕분에 자신의 성격과 기질은 계속 변하고 있었다.
‘이것도 검계현신을 위한 준비 중 하나겠지.’
검계현신은 단순한 검술이 아니라, 지그하르트 검사가 살아온 삶을 보여준다.
지금도 자신의 검계현신은 심상 속에서 천천히 만들어지고 있었다.
‘어쨌든 도리안은 이대로 놔둘 거야.’
이 전투에서 익스퍼트 최상급의 벽을 깨도 혹은 깨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가 감정을 열고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아가길 바랄 뿐이다.
‘뭐, 그래도 저 정도는 꺾어줘야지.’
한 달 넘게 개인 훈련을 해줬으니까.
-그거 싸운 게 아니라, 얻어터진….
‘그게 그거지.’
-아니, 상당히 다른….
“도리안!”
라온은 라스의 말을 끊어버리고 턱을 떠는 도리안에게 손을 흔들었다.
“좁밥이라며! 빨리 조져!”
-…….
* * *
도리안이 뒤에서 들린 라온의 목소리에 이빨을 딱딱 부딪쳤다.
‘저 인간 오늘 왜 저러는 거야!’
평소에도 정신이 살짝 돌아 있는 사람이지만, 오늘은 반 이상 돌아간 것 같다.
장난기 많은 리메르의 강화판을 보는 느낌이었다.
“야.”
토튼 로벨의 참을성이 다되었는지 눈빛이 서늘하게 번들거렸다.
“빨리 검을 뽑아. 5초 안에 안 뽑으면 이대로 간다.”
진심인지 그의 기세가 살기가 되어 전신을 압박해왔다.
“끄윽….”
도리안이 입술을 깨물며 검을 뽑았다.
“다시는 그 주둥이를 함부로 놀릴 수 없게 만들어주마!”
토튼 로벨이 땅을 박차고 쇄도해온다. 탄력을 받아서 내리치는 검날에서 섬뜩한 검기가 쏟아져 나왔다.
“히익!”
도리안이 운현보법을 밟으며 우측으로 이동했다.
“어딜!”
토튼 로벨이 급격하게 방향을 바꾸고 쫓아온다. 송곳처럼 날카로운 기운이 좌우에서 몰아친다. 예검과 쾌검을 제대로 익힌 검사였다.
“크읍!”
도리안이 미끄러지듯 뒤로 물러서며 십문현검을 펼쳐냈다.
비단처럼 부드럽게 펼쳐지는 검기가 토튼 로벨의 날카로운 검기와 맞부딪쳤다.
쩌저저엉!
도리안이 강맹한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뒤로 쭉 밀려났다. 토튼 로벨은 짧게 세 걸음만 물러섰다.
“입을 털 자격은 있군. 하지만….”
토튼 로벨이 살짝 떨리는 검날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 정도로는 간에 기별도 안 가!”
그가 눈을 부라리며 재차 돌진해온다. 제 실력을 발휘했는지 이전보다 속도가 더 빨랐고, 칼날 위를 두른 검기도 짙은 푸른빛을 발했다.
콰아아앙!
두 번째 부딪침이 일어나며 연무장 중심에 작은 구덩이가 파였다.
“끄엑!”
힘에서 밀린 도리안이 공처럼 바닥을 굴렀고, 토튼 로벨은 더 오러를 끌어 올리고서 네 걸음을 물러났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머리도 들 수 없게 짓밟으라구요!”
팔렌이 눈매를 좁힌 토튼 로벨에게 삿대질을 했다.
“좀 기다리쇼.”
토튼 로벨이 이를 갈며 도리안을 노려보았다.
“한 수를 숨겨두고 있었구나.”
전력을 끌어올리는 듯 그의 어깨 위로 푸른 오러가 넘실거리며 타올랐다.
“어, 없는데요….”
도리안이 고개를 저으며 이를 꽉 깨물었다.
‘한 수? 무슨 한 수가 있어!’
토튼 로벨이 쏘아낸 검기를 그저 본능적으로 받아쳤을 뿐이다. 숨겨둔 것 실력 따위는 없었다.
치이이이잉!
토튼 로벨이 빛살처럼 다가와 검을 연달아 내친다. 말을 때리는 채찍처럼 그의 검기가 둥글게 휘어진 채 사방에서 몰아쳤다.
컁! 캬갸갸걍!
십문현검의 초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펼쳐냈다.
구름처럼 둥실거리며 퍼지는 검기가 운율처럼 유연하게 퍼져나갔지만, 토튼 로벨의 사나운 검기를 버티지는 못했다.
찌지지직!
십문현검의 검기가 사정없이 찢겨나가며 속이 울렁거리는 충격을 일으켰다.
“흐읍….”
도리안은 신음을 삼키며 검술과 보법을 조화시켜 방어를 단단히 굳혔지만, 토튼 로벨의 공세는 끝없이 이어졌다.
점차 손발이 어지러워지며 도망칠 공간조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결국 이 수준인가? 이 실력으로 입을 털었다니, 전장에 나갔다면 이미 목이 달아났을 것이다!”
토튼 로벨은 라온의 말을 정말 믿었는지 뻘게진 눈으로 더 날카로운 검격을 쏟아냈다.
“이럴 줄 알았어. 네까짓 게 검을 수련해 봤자지.”
팔렌은 여유를 찾은 듯 팔짱을 낀 채로 비웃음을 흘렸다.
“도리안! 뭐 하는 거야! 네 전력이면 단번에 깨부술 수 있잖아! 네 필살기 무한궤도무적참마검을 써!”
라온은 또 헛소리를 시작하며 방긋 웃는다. 무한궤도무적참마검이 뭔데! 처음으로 저 잘난 면상을 치고 싶었다.
뿌드득.
도리안이 어금니를 부러져라 깨물었다.
‘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라온의 요상한 연기에 속아서 검을 마구 내리치는 토튼 로벨에게도, 9년 만에 돌아온 동생을 여전히 무시하고 조롱하는 누나 팔렌도, 오늘따라 장난이 과한 라온에게도 화가 났다.
빠직.
가슴 속에 응어리진 무언가의 껍질이 으깨지는 듯한 소리가 전신을 울렸다.
“젠장!”
도리안이 평소에 하지 않는 욕설을 내뱉으며 차오른 분노를 그대로 검에 휘감았다.
콰아앙!
십문현검이 부드러움을 벗어던지고 강렬한 파동을 일으키며 어깨로 쏟아지는 토튼 로벨의 검격을 후려쳤다.
“크윽!”
토튼 로벨이 짧은 신음을 흘리며 다섯 걸음을 물러섰고, 도리안은 다시 바닥을 굴렀다.
“이 자식!”
토튼 로벨이 눈을 뻘겋게 물들인 채 바닥을 부수며 달려온다. 꼭 달콤한 과일에 이끌린 초파리 같은 녀석이었다.
“덤벼!”
물러서던 도리안의 발이 우뚝 멈췄다. 그는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검술이 담아냈다.
‘이제 나도 몰라!’
어차피 라온도 도와줄 생각이 없어 보이니, 직접 해결해야 한다.
멍청이들을 다 패고 싶다는 의지가 차오르자, 가슴에 응어리진 무언가의 껍질이 확 갈라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후우우웅!
십문현검의 여덟 번째 초식 현천후봉이 펼쳐진다.
“그딴 검술은 통하지 않아!”
토튼 로벨은 현천후봉을 이미 파악한 듯 밑으로 파고들며 검을 위로 올려 쳤다.
“이 바보. 멍청아!”
도리안이 손목을 꺾일 듯 휘돌렸다. 봉우리가 걸린 구름처럼 고고하게 뻗어나가던 현천후봉의 검기가 급격하게 변하며 강맹한 기운을 뿜어냈다.
콰아아아앙!
격렬한 충격파가 터지고, 토튼 로벨이 일곱 걸음을 물러섰다.
쿠구구.
도리안은 더이상 바닥을 구르지 않았다. 열 걸음을 밀려났지만 두 발로 땅을 밟고 서 있었다.
“추잡한 놈. 지금까지 힘을 숨기고 있었다니.”
토튼 로벨이 또 헛소리를 하면서 우측으로 짓쳐 든다. 날카로운 검기가 양팔과 어깨, 다리를 향해 쏘아졌다.
‘확실히 강해. 살이 아파서 울고 싶을 정도야. 그런데….’
생각했던 정도는 아니야.’
토튼 로벨의 검기는 분명 강하고, 빠르며, 날카롭다.
하지만 이곳에 오면서 매일 같이 대련한 라온 지그하르트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의 검이 눈에 익었는지 쇄도해오는 푸른 검기가 갸날프게 느껴졌다.
치이이잉!
도리안은 십문현검의 절기 회현중결을 펼쳤다. 태풍을 노니는 구름처럼 선선하게 흘러가는 검기가 토른 토벨의 검기를 모조리 쳐냈다. 갈라진 검기들이 바닥을 긁으며 사라졌다.
“이 건방진!”
토튼 로벨이 참지 못하고 직접 달려들어 검을 내리쳤다. 도리안이 물러서지 않고, 바닥을 긁으며 검을 올려 그었다.
쩌어어어엉!
검과 검. 그리고 도리안과 토튼 로벨이 눈빛을 마주쳤다.
“네놈이 무엇을 숨기고 있던 상관없다.”
“아니라고!”
“닥쳐!”
그가 검을 밀어내며 손목을 돌렸다. 은빛 칼날 위로 섬뜩한 기운이 줄기줄기 솟구치며 십수 개의 검기가 쏘아져 왔다. 회전하며 사위를 포위하여 도망칠 공간도 없었다.
“다시는 주둥이를 놀리지 못하게 해주마!”
그 말이 진심인지 그가 가장 강하게 노리는 곳은 얼굴. 그것도 입이었다.
후우우웅!
도리안의 시선이 빠르게 돌아간다. 승리를 확신하는 토튼 로벨, 비웃음을 흘리는 팔렌 그리고 여전히 방긋 웃는 라온. 세 사람에 대한 짜증이 다시 한 번 폭발했다.
“내가 도대체 뭘 했다고! 이 망할 자식들아!”
참고 있던 말을 외치자, 가슴 속에서 끓어 오르던 응어리의 껍질이 완전히 깨지는 듯한 굉음이 전신을 울렸다.
캬아아아앙!
족쇄가 풀린 듯 온몸에서 힘이 넘쳐 흘렀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화아아아아!
도리안이 오러를 전력으로 개방했다. 지금까지 자신이 느끼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기운이 검에 휘감기자 거대한 운무가 피어났다.
십문현검의 마지막 절기 대십현참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멍청이들아! 내가 안 했다고오오오오!”
그 말과 함께 뻗어나간 십자 형태의 검기가 토튼 로벨의 검기 폭풍을 깨부수고 그의 전신을 사정없이 두들겼다.
콰아아아아아앙!
강대한 충격파가 터지며 연무장에 갈색 먼지가 가득 차올랐다.
후우우웅!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먼지를 헤집으며 결투의 끝을 보여주었다. 토튼 로벨이 눈을 까뒤집은 채 바닥에 박혀 있었고, 도리안이 그 위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
팔렌이 그 모습을 보며 턱이 빠질 정도로 입을 벌렸다 .
“이, 이게 어떻게….”
그녀는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다는 듯 말을 잇지 못했다. 라온의 지시대로 그녀의 입이 제대로 닫혔다.
“내, 내가 이겼어. 이, 이 바보들아.”
도리안은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는지 손을 떨었다. 그의 얼굴에 홍조가 가득 차 올랐다.
“도리안!”
대련 내내 헛소리만 하던 라온이 도리안을 불렀다. 돌아보자 그가 싱긋 웃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그렇게 멋 없게 끝낼 거야?”
“윽!”
그 말에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타올랐다. 응어리가 아니라, 뜨거운 웅심이었다.
도리안이 입술을 깨물며 팔렌의 뒤에 있는 두 명의 무인에게 손짓했다.
“다음 나와!”
* * *
라온은 자신감 넘치게 손짓하는 도리안을 보며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닿았군.’
익스퍼트 최상급. 본래 해령화의 이파리를 먹고, 연공으로 전신의 마나회로를 열어주었을 때 갔어야 하는 길이 드디어 뚫렸다.
그 동안 마스터 초입 수준으로 녀석을 상대해줬기에 정신을 차린다면 토튼 로벨 따위는 꺾어주는 게 맞았다.
‘근데….’
쟤 진짜 너무 착하네.
응어리를 풀면서 한 말이 고작. 나 아니야! 이 바보들! 멍청이! 뿐이다. 나쁜 말도 못 하는 순도 100%의 순둥이였다.
‘내 말이 맞지?’
라온은 조용해진 라스의 머리를 톡 치며 도리안을 가리켰다.
‘알아서 할 수 있다고 했잖아.’
-그래. 잘 봤느니라.
라스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저녀석이 벽을 깰 때 이용한 감정은 분노였느니라! 역시 본왕의 부하다운 선택이었다!
녀석은 도리안이 분노를 터트려서 벽을 넘어선 게 마음에 들었는지 히죽 웃었다.
‘하여튼.’
평소에 보여주는 식충이 기질 때문에 폭식이라고 생각하지만, 결국 분노의 마왕인 것 같았다.
“덤벼!”
도리안이 엄지손가락으로 코를 튕기고서 남은 무인들에게 손짓했다.
‘제대로 흥분했네.’
처음으로 본인의 힘을 십분 발휘해서 강한 무인을 상대로 이겼으니, 과하게 흥이 오른 것 같았다. 자극한 보람이 있었다.
-저거 이제 말려야하는 거 아니냐? 과한데?
‘있어봐.’
라온은 씩 미소를 지은 채 앞쪽으로 소리쳤다.
“도리안 잘했어! 계획대로 네 누나가 입을 닥쳤잖아!”
도리안에게 향하는 말이지만, 그 목소리는 팔렌의 귀에 쏙쏙 들이박혔다.
“끄으으윽….”
팔렌이 붉어진 눈동자를 번들거리며 이를 갈았다.
“저 자식 당장 때려잡아요!”
그녀의 뒤를 돌아서 남은 두 무인을 쏘아보았다.
“당장!”
팔렌의 외침에 무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물주가 원한다면 어쩔 수 없지.”
“내가 해결하지.”
그중에서 덩치가 큰 남성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가 움직이려 할 때 어둠 속에서 용병 차림을 한 중년 남성이 걸어 나왔다.
“이 이상 야간 근무는 사양이야.”
그는 고개를 젓고서 도리안에게 다가갔다.
“얼마든지 오라고!”
도리안은 두 눈에 뜨거운 감정을 담아낸 채 검을 휘돌렸다. 익스퍼트 최상급에 오른 기쁨과 흥분에 정신이 살짝 나간 표정이었다.
-이대로 놔둘 것이냐?
라스가 그런 도리안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저거 마스터잖아!
녀석은 이번에 나온 무인이 도를 뽑는 것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 마스터지.’
그것도 실전을 겪을 대로 겪은 용병 출신 마스터였다.
-설마 저 녀석도 이길 거라 생각하는 것이냐?
‘아니, 죽었다가 깨어나도 못 이겨.’
-근데 왜 도발시킨….
‘바닥에 있던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니까. 얻어 터져서 조금 굽히게 해줘야지.’
술도 애들끼리 먹다가는 안 좋은 술버릇을 배우게 되는 법. 지금 제대로 교육시키지 않는다면 도리안은 전쟁에서 허무하게 죽을 수도 있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팔렌 세피아를 보는 라온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녀에게도 가르쳐주어야겠지.’
도리안이 9년 동안 쌓은 건 그저 본인의 무력만이 아니라는 것을.
라온은 언제라도 움직일 수 있도록 천천히 어깨와 발목을 돌렸다.
-그, 그러니까. 자신감을 심어준 뒤에 그 자신감이 와장창 깨지는 것까지 지켜보겠다는 것이냐?
‘그렇지.’
-너….
라스는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푸는 라온을 보고 헛바람을 흘렸다.
-진짜 마왕 한 번 안 해볼 테냐?
역대급 대악마가 탄생할 거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