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351화 (351/653)

제351화

라온과 도리안은 모트런 시에서 하루 휴식을 취한 뒤 세피아 상회가 있는 서남부의 대도시 로칸을 향해 출발했다.

모트런 시가 동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기에 첫날부터 노숙을 하게 되어 파도처럼 굴곡진 구릉 위에 자리를 잡았다.

라온은 땅을 파서 임시 화로를 만들고, 갈릭 치킨 스튜를 조리했다.

뽀얀 국물에서 솔솔 피어나는 달큼하면서도 부드러운 향기에 입안에 저절로 침이 고였다.

-간! 간부터 보거라!

라스는 스튜가 담겨 있는 냄비를 향해 손을 휘저었다. 꼭 밥을 달라고 재촉하는 털이 복실복실한 강아지를 보는 기분이었다.

‘아직 익지도 않았어. 좀 기다려.’

-그럼 화력을 올리면 되지 않느냐! 네놈의 단전에 있는 열기는 이 순간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니라!

오늘 점심을 딱딱한 빵으로 떼워서 그런지 라스의 눈동자가 회까닥 돌아가 있었다.

‘…….’

라온은 라스의 입에서 침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단단히 정신이 나갔네.’

지그하르트 초대 가주가 남긴 만화공이 요리를 위해서 존재하다니,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미쳤다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빨리 맛을 보여다오. 고소한 냄새가 나서 참을 수가 없느니라!

‘시끄러워.’

-우억!

라온은 바닥을 뒹굴며 재촉하는 라스를 걷어차 버리고, 임시 화로의 화력을 살짝 높였다.

‘이 정도면 되겠지.’

경지가 상승한 만화공 덕분에 자신만이 아니라, 외부의 열기마저 내 것처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요리에 가장 적절한 온도를 자연스럽게 맞출 수 있었다.

“하….”

만화공이 5성에 오른 체감을 처음으로 느끼게 되는 부분이 요리라는 게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라온은 천천히 끓어오른 스튜를 휘휘 저은 뒤 간을 보았다.

큼지막한 닭고기와 달달 씁쓸한 마늘이 녹아있는 국물이 혀를 부드럽게 휘감았다.

-허어!

라스가 탄성을 지르며 벌떡 일어섰다.

-이게 노숙용으로 만든 요리라니! 미쳤느니라!

깜짝 놀랐는지 녀석의 눈동자가 크게 벌어져 있었다.

‘괜찮네.’

“끄으응….”

조금 더 익히기 위해서 화력을 살짝 올렸을 때 도리안의 신음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도리안이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닦으며 돼지고기를 살피고 있었다. 표정이 더할 나위 없이 심각했다.

“너 뭐해?”

“고, 고기가 잘 익었는지 모르겠어요….”

“하아….”

여전하네.

도리안은 소심한 성격답게 고기가 제대로 익었는지를 확신하지 못하고 너무 과하게 익히고 있었다.

돼지고기의 기름이 쭉 빠져서 말린 베이컨처럼 되어 있었다.

“그만하면 됐어. 과자 되겠다.”

“아, 알겠습니다.”

도리안이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바싹 익은 고기를 접시에 담아서 가져왔다.

“과자네. 과자.”

라온은 씹으면 바삭 소리가 날 것 같은 돼지고기를 보며 피식 웃었다.

-저 멍청한 녀석!

라스가 도리안에게 달려가 꿀밤을 내리쳤다.

-이 좋은 고기를 망치다니 네놈은 쓰레기다! 100년 동안 주방에 들어올 생각도 하지 마라!

여기가 마계의 주방도 아니고, 지가 주방장도 아니다. 어이도 없고, 의미도 없는 협박이었다.

“먼저 먹어.”

라온은 고기가 망가져서 심통이 단단히 난 라스를 놔두고 도리안에게 완성된 치킨 스튜를 퍼주었다.

“잘 먹겠습니다. 어억!”

도리안은 고개를 꾸벅이고서 스튜 그릇을 받았다. 먼저 한 입 먹어보더니 눈을 부릅떴다.

“뭐, 뭐에요? 왜 이렇게 맛있어요?”

-이게 요리라는 것이니라! 앞으로 보고 배우거라!

라스는 본인이 만든 것처럼 허리에 손을 올리고 콧김을 뿜어냈다.

“불 조절을 잘했거든.”

라온은 스튜를 한 입 먹었다. 기름진 닭 육수와 신선한 야채들이 어우러진 시원한 감칠맛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크으으! 맛있느니라! 매번 말하지만, 네놈은 검보다 요리에 재능이 있느니라. 칼 잘못 잡은 거 아니냐?

라스가 입맛을 다시며 어깨를 두드렸다.

-네놈이 원한다면 본왕의 쉐프로 삼아주겠느니라! 허약한 주제에 칼을 휘두르지 말고, 주방 칼이나 잡아라.

‘너는….’

라온이 라스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음식을 좋아하는 것 치고는 맛 표현이 참 단순하네.’

-무, 무슨 소리냐!

‘먹는 거 좋아하는 사람들은 맛 표현도 잘하던데, 넌 어딜 가나 <맛있느니라! 더 먹겠느니라! 끝내주느니라!> 이런 말만 하잖아.’

-아, 아니다! 본왕도 잘 할 수 있느니라!

라스가 절대 아니라며 다시 스튜를 먹어보라고 말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스튜와 돼지고기를 차례로 먹었다.

-으음….

맛을 음미하듯 쭈그려 앉아서 눈을 감고 있던 라스의 눈이 번뜩 열렸다.

-돼지고기는 바삭한 맛이 좋고, 스튜는 적당히 기름져서 맛있느니라!

‘…….’

라온이 허리를 쭉 세운 라스를 한심한 눈으로 굽어보았다.

‘그게 다야?’

-그럼 또 뭐가 있다는 것이냐!

‘간단하게 예를 들면 이 고기구이는 직화로 구워서 바비큐처럼 매큼한 불향이 후각을 자극하고, 기름기를 쫙 뺀 덕분에 진해진 짠맛과 쿠키 같은 바삭함으로 입안을 즐겁게 한다. 뭐 이런 식으로 말하면 되잖아.’

-어….

라스가 그 어느 때보다 반짝이는 눈으로 라온을 바라보았다.

-가르쳐 주어라! 그게 배우고 싶느니라!

‘이게 가르쳐 준다고 되는 게 아니라, 그냥 느껴지는 대로….’

-됐고 가르쳐다오! 본왕도 그거 하고 싶느니라!

음식에 진심인 녀석답게 맛 표현을 제대로 배우고 싶은 것 같았다.

다만 자신도 그냥 있어 보이는 단어를 나열했을 뿐이었다.

‘나도 몰라.’

라온이 달려드는 라스를 공처럼 쳐버리고 시선을 돌렸다. 도리안이 스튜를 먹으며 이쪽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왜?”

“부단주님. 그 머리색으로 가실 거예요?”

그는 먹던 스튜를 내려놓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가리켰다.

“그러려고.”

라온이 달처럼 붉은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모습으로 가면 네가 어떤 대우를 받는지 제대로 못 볼 거 같아서.”

라온 지그하르트의 이름은 너무 많이 퍼졌다.

특히 백검룡이라는 새로운 이명을 얻은 육황 결투 대련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에 이대로 간다면 시비를 걸어오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도리안이 어떻게 생활하고,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백검룡이 아니라, 광풍단원 중 한 명으로서 가는 게 맞았다.

“음, 그런데 변장이 다 통하는 건 아니에요. 부단주님처럼 키가 큰 사람은 티가 많이 나요.”

“그래서 이곳에 오기 전에 로브를 입고 무릎을 살짝 숙였어.”

로베르트 영지에서 벗어날 때는 로브를 입고 무릎을 굽혀서 키를 10cm 이상 줄였다. 데루스가 이 잡듯이 뒤져도 자신의 행적은 절대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키, 키까지 속였다니, 그걸 몰랐네요.”

도리안은 놀랍다는 듯 헛바람을 흘렸다.

“뭐, 별건 아니고…음?”

라온이 손을 저으며 말을 이어가려 할 때 뒤에서 작은 기척이 움직였다. 날붙이 같은 게 아니라, 작은 생명체였다. 뒤를 돌자, 날다람쥐 한 마리가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차악.

손을 올리자, 날다람쥐는 손가락을 껴안으며 그 위에 정확히 착륙했다.

“어억! 그 녀석!”

도리안이 날다람쥐를 보고 입을 떡 벌렸다.

“왜?”

“어제 부단주님이 연공하면서 공중에 떠올랐을 때 제 손을 물어뜯은 녀석이에요!”

“후….”

라온이 날다람쥐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이 녀석의 정체가. 아니, 솔직히 말하면 날아올 때부터 알고 있었다.

‘이번에도 도움을 받은 건가.’

아무래도 깜짝 놀란 도리안이 연공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도와주었던 것 같다.

-광녀다! 광녀가 왔어!

라스도 멀린이라는 걸 알아차렸는지 기겁하며 어깨를 떨었다.

“끼익.”

날다람쥐가 본인의 발을 들어 올렸다. 하얀 종이로 작은 매듭이 묶여있었다.

‘직접 온 건 아닌가?’

멀린이 직접 왔다면 도리안이 없을 때 와서 말을 걸었을 텐데, 평소와는 다른 마법인 것 같았다.

날다람쥐의 발에 걸린 쪽지를 뺀 뒤 도리안에게 땅콩과 아몬드를 받아서 주었다. 녀석은 아몬드는 입에 넣고 양손에 땅콩을 든 채 뒤뚱거리며 숲으로 사라졌다.

“쟤 뭐예요? 정말 동물원 차리시게요?”

“내 정보원.”

라온은 옅게 웃으며 쪽지를 펼쳤다. 그 안에는 딱 한 줄만 적혀 있었다.

“곧 아이들을 다시 만날 수 있겠는데?”

“아이들? 설마 그 보육원에 있던 아이들이요?”

도리안이 마른침을 삼키며 벌떡 일어섰다.

“이제 괜찮은 거예요?”

-아이들은 괜찮은 것이냐?

마음이 여린 도리안과 라스가 동시에 물음을 던져왔다.

“그래.”

라온은 날다람쥐가 준 쪽지를 태워버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분이 가셨거든.”

*     *      *

카멜룬 인근에 위치한 오웬 왕국 전용 별장.

외부에서 파인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던 45호는 별장의 연무장에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아….”

답답해.

맑고 높은 하늘과 달리 머리가 너무 갑갑하다. 손가락도 움직일 수 없는 작은 상장 안에 몸을 끼워 넣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못 하겠어.’

아이들을 고문하던 악마는 죽고, 훈련은 사라졌지만, 감정과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질 않는다. 자유를 찾았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의 영혼은 아직도 그 보육원 지하에 갇혀 있었다.

‘그분은 언제쯤… 윽!’

보육원에 찾아와 악마들을 베고, 모두를 구해주었던 그 검사를 떠올리려고 할 때 머리가 찢어지는 듯한 강한 두통이 찾아왔다.

“아흑….”

또 왔어.

머릿속에 있는 작은 악마들이 손짓한다. 저기서 지켜보고 있는 기사들을 찔러 죽이라고 명령했다. 보육원 지하에서 벗어난 이후로 하루에도 수없이 찾아오는 발작이었다.

‘참아야 해.’

저 기사들은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서 먼 곳까지 찾아와준 사람들이고, 지금도 소중하게 대해주는 고마운 분들이다. 절대 공격해서는 안 된다.

‘가! 가라고!’

하지만 견디고, 견뎌도 머릿속의 울림은 사라지지 않고 점점 커지고, 늘어났다.

[죽여. 죽여. 찔러서 죽여.]

머리 안에 있는 악마는 살인 명령을 반복하며 기사들을 죽일 계획까지 만들어주었다.

[안기는 척하면서 돌조각으로 왼쪽 기사의 아킬레스건을 자르고, 무릎을 꿇으면 목을 찔러버려. 기사의 검을 뽑으면 오른쪽 기사도 죽일 수 있을 거야. 너라면 할 수 있어. 죽여!]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살인 계획이 저절로 뇌리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45호는 입술을 깨문 채 눈을 감았다. 보지 않는다면 이 지시도 좀 줄어들 거라는 생각이었다.

[너라면 죽일 수 있다.]

하지만 눈을 감고 시야가 어두워지니 머릿속 악마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죽여라. 내 지시대로만 움직인다면 저 둘만이 아니라 다른 기사들도….]

‘제발 가!’

머리를 부여잡고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하지만 머릿속 목소리는 절대 사라지지 않았다.

“으아아아아!”

억지로 버티고 있을 때 누군가의 비명을 들려왔다. 눈을 뜨자, 같은 방을 쓰던 친구 86호가 날카롭게 깎은 나뭇가지를 쥔 채 기사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안 돼!”

45호가 달려가서 86호의 팔을 잡았다. 하지만 그녀의 힘은 강했고, 자신은 머릿속 지시를 이겨내느라 제대로 막을 수가 없었다.

“이야아아아!”

“아아아!”

“죽어!”

86호가 기폭제가 되었는지 다른 아이들도 기사들에게 뛰어가 숨겨둔 흉기를 휘둘렀다.

“으으윽….”

“흐윽!”

“아….”

기사들은 단숨에 아이들의 흉기를 쳐냈다.

다만 아이들은 그래도 멈추지 않고, 울부짖으며 손과 주먹을 휘둘렀다.

“…….”

“으음….”

훈련받은 주먹과 손날이었기에 강한 충격이 있었지만, 기사들은 아이들이 다칠까 봐 그 공격을 방어하지 않았다.

“제발 그만둬!”

45호가 주먹질하는 86호를 끌어당기며 눈물을 떨궜다.

‘제발….’

보육원의 악마들은 아이들이 구조될 상황도 예측한 것처럼 모두의 정신을 괴물로 만들었다. 저 상태에서는 기절시키기도 힘들었고, 매일 같이 발작이 일어났기에 자신들이나, 기사들이나 지옥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으아아아!”

86호가 어깨를 들이치며 45호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아아….”

45호가 턱을 떨었다. 스스로의 정신도 감당하기 힘들다 보니, 86호를 잡을 힘이 나지 않았다.

지금 떠오르는 건 그 사람이다. 보육원에서 자신들을 구해주고 홀연히 사라진 키가 큰 검사가 떠올랐다.

45호는 주머니에서 종이 하나를 꺼냈다.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기사들을 따라가.]

매끄러운 필체로 적힌 그 검사의 글씨를 보자, 조금 머리가 맑아졌다. 다시 달려가서 86호를 잡았다.

“86호. 참을 수 있어! 멈춰!”

86호의 어깨를 잡았지만, 이미 이성을 풀어버린 그녀의 힘에 끌려다닐 수 박에 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보리니 키튼이 입술을 깨물고 다가와 86호를 끌어 안아주었다.

“으아아악!”

86호가 이빨로 어깨를 물어뜯었지만, 보리니 키튼은 눈을 감은 채 등을 다독여주었다.

“괜찮아.”

보리니 키튼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고통받지 말고 놓아주라는 뜻 같았다.

“으으….”

눈물을 쏟고 싶었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악을 지르고 싶었지만,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언제까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하는 거지?’

살이 문드러지는 듯한 영혼의 고통을 느낄 때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눈이 맑은 노인이 다가와 있었다. 거지처럼 몸에 넝마조각을 걸치고 있었는데, 악취가 아니라 푸근한 향이 났다.

“이제 괜찮단다.”

노인이 손가락을 들어 86호의 이마를 툭 쳤다.

“아….”

86호가 눈을 내리감은 채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꼭 잠에 빠진 듯한 부드러운 표정이었다.

“너도 좀 쉬거라.”

노인의 손이 이마를 툭 친 순간 머릿속에서 계속 떠들던 목소리가 사라졌다. 정말 오랜만에. 아니, 처음으로 머리가 맑아진 기분이었다.

다만 그 기분은 느끼기도 전에 참을 수 없는 잠이 쏟아졌다. 45호는 눈을 내리감은 채 그대로 수마에 몸을 맡겼다.

*     *      *

넝마를 입은 노인. 성자 페드릭은 두 아이가 쓰러지지 않게 붙잡아서 바닥에 눕혔다.

“서, 성자님을 뵙습니다!”

보리니 키튼이 페드릭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여기는 어떻게….”

“잠시만 기다려주게. 다른 아이들도 진정 시키고 오겠네.”

페드릭이 윙크를 하고서 가볍게 걸음을 옮겼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난동을 부리던 아이들이 잠에 빠진 듯 조용히 쓰러졌다.

보리니 키튼은 그 모습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최근에는 재우기도 힘들었는데….’

아이들의 세뇌는 시간이 지날수록 지독해져서 최근에는 더 폭력적인 성향이 되었고, 마나회로를 눌러서 잠 재울 수도 없었다. 저렇게 쉽게 재울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다 끝났군.”

페드릭은 모든 아이를 재운 뒤 손을 툭툭 털고서 다가왔다.

“설마 아이들을 치료할 사람이라는 게….”

“그래. 나일세.”

그는 잘 알아봤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대체 누굽니까? 어떻게 이런 일을 알고 지시를 내린 겁니까?”

보리니 키튼이 마른침을 삼키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나도 모르네. 아이들을 구해달라고 해서 왔을 뿐이야.”

페드릭이 전혀 모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 그럼 아이들은 구할 수 있는 겁니까?”

보리니 키튼은 정체를 모른다는 말에도 실망하지 않고, 바로 아이들에 대해서 물었다.

“조금 더 살펴봐야하겠지만, 다행히 세뇌가 완성되기 직전에 끊겼어. 아이들이 흉폭해진 것도 세뇌를 완성시키라고 머릿속에서 조르고 있기 때문일세.”

“아, 그러면….”

“그래. 구할 수 있을 것 같네.”

페드릭이 45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미소를 지었다.

“하아아….”

보리니 키튼이 두 손을 맞잡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야.’

기사로 살며 많은 일을 겪었지만, 이렇게 슬프고 무력했던 경험은 처음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아이들을 구하고 싶었는데, 그 기회가 와서 정말 다행이었다.

“역시 성자님이십니다! 감사합니다.”

“아니, 대단한 내가 아니야.”

페드릭이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정말 대단한 건 라온 그 녀석이지.’

이 아이들을 구할 수 있게 된 건 라온 덕분이다. 그가 요난 가문에 있던 시녀에게 걸려 있던 세뇌를 연구시키지 않았다면 이 불쌍한 아이들을 구하지 못하거나, 한참 더 고생시켰을 지도 모른다.

“일단 이 아이들을 북쪽으로 데리고 가야하네.”

페드릭은 잠이 든 아이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북쪽에는 왜….”

“서늘한 자연의 바람이 머릿속에 깃든 세뇌를 지우는데 효과가 좋거든.”

“음, 그렇군요. 다만 이 아이들을 습격하려는 자가 있을 수도 있어서….”

“걱정말게. 내 친구가 북쪽에 작은 가문을 하나 하고 있으니까.”

“작은 가문? 서, 설마….”

“그래.”

그는 눈을 부릅 뜬 보리니 키튼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그하르트로 데리고 갈 생각이네. 그 녀석도 이런 아이들을 내치진 않겠지.”

페드릭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 항상 더 먼곳을 살피는 라온의 눈빛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네가 원하는대로 아이들을 치료해서 지그하르트로 데려다주마.’

*     *      *

라온은 도리안과 함께 짧으면서도 긴 여정을 지나 세피아 상회가 있는 대도시 로칸에 도착했다.

‘카멜룬과는 조금 다르네.’

카멜룬이 화려하고, 세련된 감각의 건물들이 주를 이뤘다면, 로칸은 조금 더 높은 대신 딱딱하고 건조한 느낌의 건물들이 많았다.

설렁설렁 지나가게 했던 카멜룬의 경비병과 달리 로칸의 경비들은 숫자도 더 많았고, 한 명 한 명 세심하게 검사했다.

경비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의복도 절제된 것을 보면 이 도시 특유의 분위기가 딱딱한 것 같았다.

다만 같은 점도 있었다.

대도시답게 수많은 사람들이 왕래하고 있었고, 도시 내부 시장은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손님과 상인이 흥정을 하는 하모니가 이곳저곳에서 울려 퍼졌다.

“후우….”

도리안은 도시를 쭉 둘러보며 한숨을 뽑아냈다. 집 근처에 도착하니 긴장이 되는 것 같았다.

“편하게 마음 먹어.”

라온이 도리안의 어깨를 치며 미소를 지었다.

“몰래 도망친 아이는 이제 없잖아. 넌 지그하르트의 검사라고.”

그 말에 가늘게 흔들리던 도리안의 눈동자가 우뚝 멈췄다.

“그러네요.”

도리안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의 한마디를 듣자, 고동치던 심장이 가라앉았다. 이 사람이 옆에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도 해결될 것 같았다.

“가시죠. 안내할게요.”

도리안은 자신감을 찾은 걸음으로 나아갔다.

“그래.”

라온은 웃음을 흘리며 도리안의 뒤를 따라갔다. 그는 얼마 가지도 않아 멈춰섰다.

“또 왜? 아직도 마음이….”

“아뇨.”

도리안이 고개를 저으며 앞을 가리켰다.

“도착했어요.”

“음? 여기는 그냥 상가잖아.”

라온은 한 눈으로 세기 힘든 건물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도리안이 손가락을 돌려 그 건물들을 모두 가리키며 입맛을 다셨다.

“전부 세피아 상회의 것이에요.”

“어….”

라온이 입을 떡 벌렸다.

‘이게 전부?’

가지각색의 건물들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며 이런저런 물건들이 나오고 들어갔다. 도시의 4분지 1이 넘는 곳이 전부 세피아 상회의 것이라니, 만물상이라는 칭호가 조금도 모자르지 않았다.

“도리안.”

라온은 도리안의 어깨를 잡으며 활짝 핀 미소를 지었다.

“고맙다.”

“예. 갑자기 무슨…?”

도리안은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듯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이게 세피아 상회.’

생각보다 규모가 더 크네.

라온의 눈동자에서 전투를 치를 때와 비슷한 불똥이 튀었다.

‘이게 앞으로 내 거. 아니, 도리안 게 된다는 말이지?’

-미친놈이로다.

라스가 어이없다는 듯 헛바람을 흘렸다.

-그리드가 보면 무릎 꿇을 또라이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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