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348화 (348/653)

제348화

라온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울대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릴까 봐 참고 싶었지만, 극도의 긴장감에 자신도 모르게 목구멍이 저절로 움직였다.

‘아직….’

아직 들키진 않았어.

데루스 로베르트가 자신을 파악했다면 이미 움직여서 눈앞에 나타났을 것이다.

지금도 하늘에 떠 있는 걸 보면 아직 알아차리지 못한 게 분명했다.

-맞느니라.

라스가 위를 올려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저놈은 지금 이곳에 도착했고, 무너진 협곡만을 바라보고 있다. 아직까진 네놈은 찾지 못했지. 물론 어설프게 움직인다면 바로 알아차릴 것이니라.

‘그래.’

라온이 입술을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

던전 최하층에서 수평으로 수영을 해서 나왔기 때문에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은 깊은 바닷속이다.

육지에서도 한참 떨어져 있기에 아무리 데루스라도 해도 단번에 파악하기 힘들었다.

‘이 향기 오랜만이네.’

전생에 데루스에게 목이 날아갈 때 느꼈던 죽음의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다만 빠져나갈 길이 없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사로 사이에 생로가 끼어 있었다.

라온이 목이 뻐근할 정도로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주 먼 하늘 위에 점 같은 것이 보인다.

‘데루스 로베르트.’

눈에 오러를 집중하면 제대로 볼 수 있겠지만, 그랬다가는 바로 들켜서 산 채로 잡힐 것이다.

‘당황해서는 안 돼.’

절대로.

멀린에게 납치당할 때도 조금만 머리를 굴려서 그 둘을 끝까지 싸우게 만들었다면 상황이 바뀌었을 수도 있다. 냉정함을 유지하여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라온이 차가워진 손으로 주먹을 말아쥐었다.

‘일단 상황부터 파악하자.’

칼만 들지 않았을 뿐 목숨을 건 생사결을 치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무엇이 유리하고, 불리한지부터 생각해야 한다.

‘내가 유리한 점은 놈이 알아차리기 쉽지 않은 곳에 있다는 거지.’

현재 자신은 심해 바로 위. 깊이나, 거리로 볼 때 발견하기 힘든 곳에 가라앉아 있었다.

‘미리 준비도 했고.’

데루스가 오기 전에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을 다시 염색했고, 불의 고리를 공명시켜 존재감을 극한으로 줄였으며, 글래시아를 운용하여 물과 비슷한 기척을 만들어냈다.

알고 보지 않는다면 바닷속에 있는 물고기나, 해초 정도라고 생각될 것이다.

반면 데루스는 본인의 분노한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이쪽이 먼저 놈을 파악하게 된 건 그 덕분이었다.

데루스가 차원 관문을 탈 것은 예상했지만, 이곳에 도착한 시간은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그가 전보다 강해진 것도 있겠지만, 힘을 아끼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즉, 이성을 잃을 정도로 화가 났다는 거지.’

놈은 지금도 협곡이 깨져서 가라앉은 주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노에 먹혀 시야가 좁아진 상태였다.

라온이 떨리는 팔에 힘을 주었다.

‘물론 문제도 장난 아니게 크지만….’

데루스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자신도 움직일 수가 없다.

놈의 감각이라면 분노한 와중에도 어색한 몸짓을 그대로 잡아낼 테니까. 바닷속에 있는 돌멩이처럼 가만히 있어야 했다.

‘거기다….’

가장 큰 문제는 놈의 기감이다.

데루스 로베르트는 그랜드 마스터를 넘어선 초월자. 글렌과 맞먹는 힘을 지닌 대륙십천이다.

놈이 기감을 저 아래가 아니라, 이곳 전체에 뿌린다면 아무리 은신을 잘하고 있어도 들킬 수밖에 없다.

‘그게 올라올 때까지는 버텨야 하는데….’

데루스와 만날 가능성도 예측했기에 던전을 부수기 전에 대비를 해두었다. 그게 나올 때까지는 어떻게든 견뎌야 했다.

‘얼마 남지 않았어….’

-무슨 준비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힘들 듯하구나.

라스가 코웃음을 치며 동그란 손으로 데루스의 발아래를 가리켰다. 옅은 기운이 구체의 형태를 그리며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젠장!’

라온이 볼 안쪽을 징겅 씹었다.

‘사방으로 기감을 열었어!’

말이 씨가 된다고 했던가. 가정했던 최악의 상황이 일어났다. 데루스는 무너진 협곡 주변이 아니라, 바다와 육지 전체를 뒤덮는 기감을 뿌렸다.

‘저 싸이코 자식!’

이런 다급한 상황에서 던전이 있던 곳을 상세하게 탐색하는 게 아니라, 모든 곳을 전부 파악하려고 들다니, 역시 정상적인 인간과는 거리가 먼 놈이다.

분노로 시야가 좁아지지 않았다면 이곳에 오자마자 바로 들켰을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빨라.’

초월자답게 기감이 퍼지는 속도도 비정상적으로 빨랐다.

육지와 바닷속에 이어 하늘까지 탐지하고 있음에도 속도가 줄지 않았다.

‘괴물 자식….’

라온이 심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두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이대로라면 시간에 못 맞춰.’

준비한 그게 지금 나와도 데루스에게 먼저 들키게 될 것이다. 이대로라면 놈에게 잡히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빌어먹을….’

놈의 기감이 어느새 협곡이 있던 곳을 넘어 코앞까지 다가왔다. 푸른 오러에서 느껴지는 짙은 살기에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오러가 다가올수록 차디찬 칼날이 심장으로 스며드는 기분이다. 물속인데도 전신에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본왕이 숨겨줄까?

라스가 비웃음을 흘리며 둥그스름한 손을 뻗어왔다.

‘숨겨준다고?’

-그렇느니라. 저 정도라면 본왕의 특성으로 네놈을 살려줄 수 있느니라.

살려준다라.

그건 아니다. 살기 위해서는 라스가 아니라, 자신의 판단을 믿어야 한다.

다만 약간의 시간이 부족한 건 사실. 녀석의 도움이 필요했다.

‘공짜는 아니겠지?’

-역시 계산이 빠르군. 10초마다 분노 10을 받아들인다면 네놈을 저 기감에서 벗어나게 해주마.

라스는 빨리 결정하라는 듯 손을 까딱였다.

‘10초에 분노 10….’

도망치게가 아니라, 숨겨준다는 건 결국 이 자리를 벗어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즉, 데루스가 저 위에 계속 있다면 무지막지한 양의 분노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라온이 코앞까지 다가온 데루스의 오러를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1분이면 올라올 거야. 그때까지만….’

곧 이곳을 벗어날 기회가 온다. 그때까지는 어떻게 해서든 버텨야 했다.

‘후우우우.’

눈을 내리감고서 라스의 손을 잡았다.

-좋은 선택이니라!

라스의 웃음기 어린 음성이 들린 순간 육체와 영혼이 바다에 녹아내린다. 나 자신이 바다와 하나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후우우우욱!

라스의 손을 잡은 지 0.1초도 지나지 않았을 때 데루스의 기감이 스쳐 지나갔다.

등골을 칼로 찌르는 듯한 오싹한 느낌. 하지만 데루스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듯 기감의 범위만 늘려갔다.

‘안 걸렸어….’

라스의 자신감은 진짜였다. 녀석의 능력은 데루스의 기감을 피할 힘을 힘을 가지고 있었다.

-<설화의 은막>이라는 능력이니라. 저놈이 좀 더 상세하게 살폈다면 위험했겠지만, 속도와 범위에 중점을 두어서 약간의 구멍이 있었느니라.

녀석은 데루스를 올려보며 피식 웃었다.

-이게 분노의 군주이자, 마계의 왕. 라스님의 힘이니라. 지금부터는 네놈도 본왕을 따르도록 하거라.

라스는 낄낄 웃으며 어깨춤을 췄다.

[분노가 10 상승했습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 눈앞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10초가 지나자마자 바로 분노를 주다니, 이런 쪽으로는 칼 같은 녀석이었다.

-이대로라면 네놈의 육체를 먹어치울 수 있을지도?

‘그럴 일은 없어.’

라온은 즐거워하는 라스의 턱을 돌린 후 뒤를 돌아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멈추질 않는군.’

데루스의 기감은 끝을 모를 정도로 뻗어나갔다. 이 바다에 있는 모든 것을 다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분노가 10 상승했습니다.]

10초가 더 지났다.

데루스는 기감이 드디어 멈췄다. 다만 그건 그리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허….’

라온은 데루스의 발밑에서 뻗어나가는 진한 푸른 빛을 보며 입을 틀어막았다.

‘저 미친놈이!’

놈은 빠른 기감을 뻗어내서 혹시 모를 움직임을 막은 뒤, 느리지만 더 상세하게 살필 수 있는 두 번째 기감을 펼쳐서 이 바다에 있는 모든 것을 확인하고 있었다.

-으음….

라스가 그 모습을 보며 입맛을 쩝 다셨다.

-아, 아무래도 들키겠는데?

‘뭐?’

-지금 영체 상태라 본래의 힘을 다 내기 힘드니라….

녀석은 이게 한계라며 고개를 저었다.

‘마왕이라며! 힘 좀 써보라고!’

-네놈이 맨날 본왕의 능력을 쪽쪽 빨아먹는데 힘이 어디 있겠느냐!

‘젠장….’

시간이 지나도 분노를 보내지 않는 걸 보면 라스도 당황했다는 뜻이었다.

라온은 라스가 아니라, 무너진 협곡이 있는 곳을 노려보았다. 기포와 함께 작은 먼지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손에 힘이 들어갔다. 드디어 기다리던 안배가 도착했다.

-죽기 싫다면 본왕에게 몸을 맡겨라. 이곳에는 네놈의 편도 없지 않느냐!

‘싫어.’

-감지되는 순간 네놈은 저놈의 손에 잡혀있을 것이니라!

라온이 고개를 저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괜찮을 거야.’

-너 무슨….

‘그게 왔거든.’

데루스의 두 번째 기감이 피부에 닿기 직전 협곡이 가라앉은 곳에서 어마어마한 흙먼지가 치솟았다.

콰아아아아아!

화산이 폭발한 듯 뻗어 올라오는 흙먼지에 에메랄드빛 바다가 순식간에 흙탕물이 되어 껌껌해졌다.

-저게 무슨….

라스가 그 모습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계곡의 발장구.’

-뭐?

‘계곡에 가서 발을 구르면 흙탕물이 올라와서 물이 탁해지잖아. 그걸 극대화한 거야.’

계곡에서 움직이다 보면 밑에 가라앉은 흙이 올라와서 물이 탁해진다.

염해무결을 이용하여 거대한 협곡을 사정없이 가르고, 부숴서 떨어뜨렸기에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흙먼지들이 일제히 올라와 바다 위를 가득 채운 것이다.

후우우우웅!

흙먼지가 진해지자, 데루스의 기감이 급격히 줄어들며 협곡이 가라앉은 심해 쪽으로 집중되었다.

“빌어먹을!”

허공에 떠 있던 데루스가 악을 지르며 물에 뛰어드는 모습이 보인다.

평소 냉정함과 여유로 가득 찬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분노가 가득 찬 데루스의 표정을 보자,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임에도 웃음이 나왔다.

-어어? 뭐야 이게!

‘말했잖아. 괜찮다고.’

라온이 당황한 라스의 손을 놓고, 천천히 심호흡했다.

‘다급하게 움직이면 안 돼.’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었다간 밑으로 내려간 데루스가 위로 쫓아올 수 있다. 조금 전 라스가 했듯이 나 자신을 물에 녹이며 손과 발을 움직였다.

너무 긴장했기 때문인지 손과 발이 목각처럼 뻣뻣하다. 손가락부터 몸을 풀며 부드럽게 헤엄을 쳤다.

‘아직도 뒤에 붙어 있는 거 같네.’

데루스의 시선이나 기감이 따라붙는 듯한 느낌에 등골이 오싹했다. 뒤를 돌아보고 싶은 감정을 꾹 참으며 최대한 조용히 움직였다.

-이, 이런 미친….

라스가 입을 떡 벌렸다.

-네, 네놈 설마 이것까지 예측한 것이냐?

‘예측이 아니라, 준비를 한 거지.’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또 당하긴 싫었으니까.’

데루스를 만날 가능성을 두고 준비한 안배였다. 물론 라스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죽었겠지만.

-왜 그렇게 잘게 부수나 했더니, 밑에 가라앉은 흙을 퍼올리기 위해서였군.

‘맞아.’

멀린에게 당했기에 혹시나 하고 준비한 대비였다. 라스 덕분에 시간을 벌지 않았다면 결국 죽었겠지만.

-지금은 어디로 가는 것이냐.

‘저놈이 절대 안 올 곳.’

라온이 피식 웃으며 동쪽을 가리켰다. 데루스가 지금 절대 가지 않을 곳. 로베르트 가문이 있는 방향이었다.

-흙먼지를 이용하고, 도망칠 곳까지 미리 생각해놓다니….

라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찡그렸다.

-네놈의 대가리를 뜯어서 연구하고 싶느니라.

‘나도 마찬가진데….’

대체 머리에 뭐가 들었기에 맨날 밥 타령만 하는지 보고 싶었다. 아마 뇌 대신에 아이스크림이 들어있을지도 몰랐다.

-아, 그리고….

‘음?’

-보, 본왕이 조금 당황해서 분노 30을 더 주어야 하는데 못 줬느니라. 지금이라도….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

라온이 손을 저었다.

‘원래 지나간 마차는 서지 않는 법이야.’

-무슨 헛소리냐! 손을 들어서 멈춰 세운다면….

‘네 손을 밟고 지나가겠지. 끝.’

피식 웃으며 손을 저었다.

‘분노 30 정도는 상관없지.’

최근에 많은 성장을 이뤘기에 분노 30을 받은 정도로는 아무 의미도 없다. 오히려 분노의 마안을 더 쉽게 사용할 수 있을 테니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제 좀 숨이 쉬어지네.’

라스와 멍청한 대화를 하고 있다보니, 데루스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쪼그라든 폐를 펴기 위해서 돌린 호흡법을 빠르게 할 때 눈앞으로 메시지가 올라왔다.

[특성 <설화의 은막>을 습득했습니다.]

<설화의 은막> 조금 전 라스가 데루스에게서 숨겨줄 때 사용했던 바로 그 능력이었다.

-뭐, 뭐시여?

메시지를 보자마자 라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걸 왜 주는데! 갑자기 설화의 은막을 왜 주냐고!

녀석은 손을 휘저으며 악을 질렀다.

‘아!’

라온이 손가락을 튕겼다.

‘조금 전에 이곳까지 올 때 네 손을 잡았을 때의 느낌을 이용해서 왔거든. 그래서 줬나 본데?’

-…….

라스는 대답하지 않고 눈을 부릅뜬 채로 멍하니 서 있다가 손을 들어 올렸다.

-야! 여기에 라온 있다! 여기에 라온 지그하르트가 있다고! 잡아가란 말이다!

바다가 요동칠 정도로 시끄럽게 떠들었지만, 당연히 그걸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이거 좋네. 잘 써먹을게.’

라온은 콧노래를 부르며 물고기 떼에 몸을 맡겼다.

*     *      *

라온은 잠수한 채로 로베르트 영지의 휴양지까지 헤엄쳐왔다. 미리 바닷속에서 옷을 갈아입었고, 관광객이 많아서 자신에게 관심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하아아아아아….”

물 위에 몸을 띄운 채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 극한의 위기를 빠져나왔기 때문인지 온몸의 뼈가 아리고, 피부가 쪼그라든 기분이었다.

‘죽을 뻔했네.’

라스의 도움과 던전 전체를 갈아버리는 안배를 하지 않았다면 그곳에 뼈를 묻을 뻔했다. 아니, 데루스에게 잡혀서 다시 노예가 됐을지도 모른다. 살았다는 안도감에 피로가 확 몰려들었다.

-운 좋은 놈….

라스가 이를 바득 갈았다.

-처음부터 몸을 내놓으라고 했어야 했는데!

라온의 꿈을 보아서 잠시 마음이 약해졌다. 처음부터 몸을 뺏었어야 했다는 안타까움에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분노 30이라도 가져가라고!

‘응. 싫어.’

라온이 손을 휘휘 저었다. 이미 다 끝난 일. 30이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지만, 60은 버거울 수도 있다. 설화의 은막까지 생겼으니, 받을 필요가 없었다.

‘편안하네.’

모든 일을 다 끝냈기 때문일까. 나른하니 잠이 들 것 같았다. 슬쩍 눈을 감으려고 할 때였다.

쿠와아아아아아아아!

던전이 있던 동쪽 해안에서 어마어마한 파도가 치솟았다. 자연적인 게 아니다. 심해에 있는 데루스가 분풀이를 하는 여파가 터져나온 것이다.

“하하하하!”

라온이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 얼굴을 다시 보고 싶네.’

심해로 들어갈 때 보았던 데루스의 찌그러진 표정을 떠올리자, 자신도 모르게 짙은 미소가 지어졌다.

‘아무것도 발견 못 했겠지.’

천장이 무너져서 죽은 암살자들을 제외한 놈들의 시체는 모두 지워버렸다. 놈이 심해를 뒤져서 발견할 수 있는 건 돌무더기에 깔린 시체뿐이다.

-이 사악한 놈. 네놈도 곱게 죽지는 않을…

‘밥 먹을까?’

-응!

저주를 퍼붙던 라스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은 피식 웃으며 해변가를 나가서 이전에 라스가 먹고 싶다고 했던 식당의 야외 테이블에 앉았다.

“어서 오세요!”

젊은 점원이 방긋 웃으며 메뉴판을 가져왔다.

“저희 바다의 집은 해산물만이 아니라, 육류 요리에도 능한 식당으로….”

메뉴판을 펼치자, 점원의 연설이 시작되었다.

-육류 음식도 잘한다지만, 네놈이 다 시켜줄리는 없으니, 일단 바닷가재 피자부터 시키고, 새우 구이를….

라스는 메뉴판 가장 위에 있는 피자를 고르며 입맛을 다셨다.

“여기 있는 거 전부 주문할게요.”

라온이 메뉴판에 있는 모든 음식을 쓸어내리며 미소를 지었다.

-오오?

“저, 전부 다요? 혼자 아니세요?”

“다 먹을 수 있어요. 그리고 맥주도 한 잔.”

주문을 마치고 점원에게 은화 하나를 팁으로 주었다.

“옙!”

점원이 방긋 웃고서 식당으로 달려 들어갔다.

-웨, 웬일이냐.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는 것이냐? 저 요리를 다 주문하다니!

라스가 말이 안 된다며 눈을 부릅떴다.

‘먹고 싶은 거 다 사주겠다고 했잖아.’

던전에서 라스가 해준 말은 지금도 가슴에 남아 있다. 실비아가 자주 말하듯 고마움을 받았으면 그만큼 갚아주는 게 옳았다.

“일단 맥주부터 드릴게요. 요리는 조금만 기다리시면 하나씩 나올 겁니다!”

점원은 테이블에 맥주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꾸벅인 뒤 안으로 들어갔다.

-술? 네놈이 대낮에 술을 마신다고?

‘오늘은 마시고 싶네.’

저 멀리서 거칠게 폭발하는 파도 속에서 분노에 찬 데루스의 함성이 메아리쳐 들려오는 것 같았다.

거친 해일을 향해 맥주잔을 들어 올렸다.

‘복수 하나는 끝냈어.’

이름 모를 친구여. 편히 잠들길.

라온은 9호의 명복을 빌며 맥주를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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