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347화 (347/653)
  • 제347화

    갈색 로브를 두른 노마법사가 데루스 로베르트에게 고개를 숙였다.

    “천검성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데루스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노마법사 옆에 있는 반원형 틀을 바라보았다.

    ‘차원 관문을 타게 만들다니.’

    본래 자신은 누군가에게 몸을 맡기지 않는다. 차원 관문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마법사에게 몸을 전적으로 맡겨야 하기에 정말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거의 이용하지 않았다.

    내 눈으로 세상을 보고, 내 발로 세상을 걷고 싶다는 핑계를 대며 이번 육황 회의도 마차를 타고 왔는데, 결국 차원 관문을 이용하게 된 것에도 분노가 일었다.

    ‘살아 있는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지.’

    마티오와 코시니를 죽인 놈이 해저 던전에 있던 영물이든, 갑자기 끼어든 제3의 인물이든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후우……”

    데루스가 짧게 한숨을 내쉬고서 노마법사에게 시선을 보냈다.

    “시작해도 됩니다.”

    “알겠습니다.”

    노마법사가 다시 고개를 조아리고서 지팡이로 바닥을 내리쳤다.

    쿵 소리와 함께 반원형 틀에서 오색찬란한 빛이 솟아올랐다. 빛이 진해짐과 동시에 부채꼴로 번지며 반원의 틀 전체를 채워 문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로베르트 가문으로 이어지는 문입니다. 들어가시지요.”

    노마법사가 미소를 지으며 옆으로 물러섰다.

    데루스가 고개를 끄덕이고서 차원 관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허공에 붕 뜨는 감각과 함께 찬연한 빛이 시야 전체를 가렸다.

    “쯧.”

    남에게 몸을 맡긴다는 짜증에 혀를 차며 뒤를 돌아보았다. 레젤도 따라 들어와서 뒤에 붙어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아니.”

    데루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정말 오랜만에 진심으로 화가 나는구나.”

    9번 사육장이 망가졌을 때도 짜증이 났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테머스가 요난 가문을 먹지 못하고 홀로 지그하르트를 습격했다가 죽었을 때와 비슷할 정도로 분노가 차올랐다.

    ‘오랫동안 준비한 일이니까.’

    해저 던전 아래에 가라앉아 있는 영약과 영물을 모두 가지기 위해서 오랜 기간 준비를 해왔다.

    던전 주변에 있던 해양 몬스터들을 싸그리 죽이고, 던전 위를 막고 있던 거대한 바위들을 모두 제거한 뒤 입구가 무너지지 않게 몇 년에 걸쳐서 조심스럽게 열었다.

    요난 가문을 먹을 때처럼 오랜 기간 넘게 준비한 일이 무너지고, 마티오와 코시니라는 인재를 잃었다는 것에 속이 더부룩할 정도로 끓어올랐다.

    ‘절대 놓치지 않는다.’

    둘이 죽은 건 이미 돌릴 수 없는 일. 던전 아래에 있는 보물과 영물은 무조건 가져가야 한다.

    우우우우웅!

    분노를 억지로 참으며 입술을 씹고 있을 때 빛이 가라앉으며 이곳에 들어왔을 때처럼 반원형 문이 나타났다.

    “후……”

    데루스는 가늘게 숨을 내쉬고 그 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가주님! 복귀를 환영합니다!”

    로베르트 가문의 검사와 마법사들이 차원 관문 앞에 정렬한 채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데루스는 그들의 인사도 받지 않은 채 걸치고 있던 코트를 내던지고, 창공으로 뛰어올랐다. 그의 몸이 빛살이 되어 던전이 있는 방향으로 쏘아졌다.

    ‘신이라 할지라도…….’

    하늘을 걷어차고 나아가는 데루스의 눈동자에 분노의 불길이 번쩍였다.

    ‘내 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     *      *

    라온은 물웅덩이 위에 떠 있는 꽃 한 송이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푸른 꽃?’

    바다색으로 반짝이는 다섯 개의 꽃잎과 달의 곡선을 닮은 매끄러운 줄기 마지막으로 투명한 여섯 개의 잎사귀까지.

    만지면 부서질 듯 위태로우면서도 아름다운 꽃이었다.

    ‘이거 설마……’

    해령화?

    해령화는 바다의 영혼이라 불리는 꽃이자, 바다의 모든 기운이 응집되어있는 전설급 영약이었다.

    설화와 전설에나 나오던 영약을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마, 맞네…….

    라스가 튀어나올 정도로 눈을 부릅뜬 채 고개를 끄덕였다.

    -해령화가 맞느니라. 어, 어떻게 이게 여기에…….

    녀석도 어처구니가 없는지 목소리를 떨었다.

    “나도 모르지.”

    모르는데…….

    굳어진 표정이 뚫고 웃음이 저절로 피어나고 있었다.

    -우서?

    “그럼 울어 줄까? 지금은 가능할 거 같은데.”

    눈앞에 희대의 영약이 있는데 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끄으으윽!

    라스가 주먹을 바들바들 떨었다.

    -대체 무엇이냐! 이놈이 무엇이길래 세상이 이렇게 밀어주는 것이냐! 답답하니까 말이라도 해보아라!

    녀석은 아무도 없는 허공에 삿대질하며 악을 질렀다.

    -본왕은 영약의 영자도 못 보고 수백 년을 살았는데, 요놈은 왜 가는 곳마다 영약을 처먹는 것이냐! 영약이 눈깔사탕이냐고!

    “시끄럽네.”

    -시끄러워? 오냐! 더 시끄럽게 해주마! 본왕이 마계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알면 네놈이 눈물을 흘리고 그 영양을 바칠…….

    오랜만에 수다가 제대로 터졌다. 눈동자가 돌아간 라스를 밀어버리고 해령화를 살폈다.

    ‘진짜야.’

    모양도, 해령화에서 피어나는 청아한 기운도 이야기 속에서 듣던 그대로였다.

    ‘다만…….’

    왜 해령화에서 만화공의 기운이 느껴지지?

    바다의 기운을 가졌다는 해령화에게서 아주 친숙한 기운이 함께 느껴졌다.

    ‘보면 알겠지.’

    라온은 천천히 숨을 고르고서 해령화의 잎사귀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었다.

    빠지지지직!

    그 순간 눈앞이 번쩍이면서 세상이 변했다.

    *     *      *

    이 던전에 들어와서 보았던 그림 같은 장면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금발의 검사가 보인다. 이젠 익숙해진 등. 만화공과 불의 고리를 익히고 있는 지그하르트의 초대 가주였다.

    그 반대편에는 눈동자가 하얗고, 눈자위가 검은 괴인이 서 있었다.

    예전 중무전의 동굴에서 보았던 자와 비슷하지만, 이마에 하나의 뿔이 달려있는 게 달랐다.

    서로를 노려보던 두 사람이 움직인다. 동시에 뻗어나가는 검과 도. 선조의 검에 새빨간 불꽃이 타오르고, 괴인의 도에서 검게 물든 빛이 뿜어졌다.

    무시무시한 힘의 격돌에 수백이 넘는 해양 몬스터들이 가루가 되고, 해저의 산이 반으로 쪼개졌다.

    갈라져서 떨어지는 오러의 뭉치에 해저의 산에 거대한 구멍이 파인다. 바로 이곳. 이 던전을 만들어낸 전투였다.

    괴인의 도에서 뿜어지는 기운에 세계가 얼어붙는다. 그는 하늘을 짓누르는 기운을 도에 담은 채 그대로 내리쳐왔다.

    바다 자체가 찌그러지는 듯한 어마어마한 기운 앞에서 지그하르트의 초대 가주는 물러서지 않았다.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거칠게 흔들리는 수평선을 따라 열화의 검을 그었다.

    적과 흑이 서로를 집어삼키듯 거친 경합을 벌이며 바닷물을 끝없이 증발시켰다.

    호각. 괴인의 검과 선조의 검은 그야말로 용호상박이었다.

    두 괴물은 해가 지고 다시 떠오를 때까지 바닷속을 대지처럼 노니며 서로를 향해 검과 도를 내리찍었다.

    시간이 지나자, 선조가 힘에서 밀린 듯 해저 산에 돋아난 구멍에 처박혔다.

    괴인이 비웃음을 흘리며 선조에게 쇄도해 연달아 도를 내리쳤다. 구름처럼 넘실거리는 검은 기운이 산의 중심을 꿰뚫었다.

    선조는 괴인의 강대한 기운에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만화공의 검술을 운용하며 모든 공격을 차단했다.

    지치지도 않는지 괴인의 칼날에 깃든 검은 기운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강하고 거대해졌다.

    맹렬하게 뿜어지는 검은빛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는 찰나 선조의 검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푸른 화염이 치솟았다.

    괴인의 기운에도 밀리지 않는 강대한 불꽃이었다.

    인간을 한참 벗어난 두 괴물은 검과 도를 부딪치는 질주를 하며 해저의 산속에 길고 거대한 통로를 만들어냈다.

    나를 무아지경에 이르게 한 검흔들은 바로 이 전투에서 남은 흔적들이었다.

    선조와 괴인이 끌어모은 기운이 맞부딪치며 대지가 뭉개지고, 거대한 공동이 만들어졌다.

    마티오와 코시니가 죽고, 진짜 염해무결을 얻었던 그 장소였다.

    괴인의 기운이 한 번 더 증폭한다. 바다 전체를 뒤흔들 정도로 끌어모은 흑색의 기운이 지옥에서 강림한 악마의 숨결처럼 쇄도해온다.

    그 어떤 검술을 펼쳐도 막을 수 없을 듯한 사악함이 깃들어 있는 도격이었다.

    선조의 검극에서 푸른 불똥이 튄다. 작디작은 불꽃이 나선으로 퍼지며 장대한 선을 펼쳐냈다.

    만화공 염해무결. 푸른 불꽃의 바다가 거대한 어둠과 맞부딪쳤다.

    넘실거리는 청염이 사위로 뻗어나갔지만, 괴인은 그 거대한 흑도를 꽉 말아쥔 채 그 자리에서 버텨냈다.

    그가 악을 지르자, 검은 기운이 한층 더 두텁게 솟아나 푸른 불길을 가르기 시작했다.

    선조는 그 모습을 보고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괴인에게 뭐라 중얼거리며 검날을 비틀었다.

    그 순간 푸른 불꽃이 금빛으로 변한다. 상서로운 빛이 끝없이 치솟아 모든 공간을 잠식했다.

    괴인이 발악하듯 검은 기운을 폭발시켰지만, 선조가 일으킨 금염은 검은 기운만이 아니라, 괴인마저 한순간에 지워버렸다.

    선조는 검을 내린 채 재가 된 괴인을 바라보았다.

    눈을 감고 무슨 말을 할 때 그의 뒤편으로 누군가가 나타났다. 검은 로브를 두르고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체격으로 볼 때 여자 마법사 같았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자, 선조가 발을 굴렀다. 바닥이 뭉개지며 해령화와 유령 해파리를 만난 공간이 나타났다.

    바닥에 바닷물이 차올라 있는 건 그대로였지만, 그곳에는 해령화가 아니라 에메랄드 같은 보석이 떠 있었다. 해령화의 씨앗 같았다.

    씨앗은 기운을 다했는지 말라붙어서 가느다란 싹만 올라와 있었다.

    선조가 무릎을 꿇고 씨앗을 바라보았다. 그는 해령화의 씨앗을 챙기는 대신, 작은 불씨를 넣어주고서 일어섰다.

    마법사가 놀란 듯 소리쳤지만, 선조는 웃으며 무슨 말을 중얼거린 뒤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내게 향한다. 선명한 붉은 눈을 마주한 순간 시야 전체가 다시 금빛으로 물들었다.

    *     *      *

    “허억……”

    라온이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그게 진짜 만화공의 검술들.’

    흔적으로 느낀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흥분으로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검술 경지가 더 높아진 느낌이야.’

    그저 기분 탓일 수도 있지만, 검흔을 보고 올라간 검술 경지가 한층 더 성장한 것 같았다.

    [완벽에 이른 <염해무결>을 관찰했습니다.]

    [모든 검술의 경지가 상승합니다.]

    [<불의 고리>의 경지가 상승합니다.]

    [모든 능력치가 5포인트 상승합니다.]

    고개를 젓고 있을 때 메시지가 떠올랐다.

    “어?”

    기분 탓이 아니었다고?

    아무래도 강해진 건 착각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느꼈던 대로 검술 경지 자체가 상승한 것 같았다.

    -이, 이건 또 무엇이냐….

    라스가 어벙하게 턱을 벌렸다.

    -갑자기 보상을 왜 주는 것인데! 조금 전 몸이 비었더니, 또 어딜 갔다 온 것이냐! 이 좀비 같은 놈이!

    녀석은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음….”

    라온이 짧게 입맛을 다셨다.

    ‘설명할 수가 없네.’

    선조와 만나고 왔다고 말했다간 미친놈 소리를 들을 게 뻔하기에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대체 뭔데! 줄 땐 주더라도 개연성 있게 주어야지! 갑자기 왜 보상을 주냐는 말이다!

    라스는 왜 너만 이렇게 잘 처먹냐며 땅을 치고 울부짖었다.

    “일단 여기서 떠나고….”

    -영약도 뺏기고, 능력치도 뺏기고! 이렇게는 못 사느니라!

    녀석은 해령화의 앞을 막고 몸을 부풀렸다. 퇴근하고 싶은 솜사탕 아저씨의 인심으로 받은 대왕 솜사탕 같았다.

    애초에 네 영약도 아니잖아.

    라고 말을 해도 통할 것 같지 않았다. 녀석에게 먹힐 유일한 단어를 꺼냈다.

    “네가 빨리 비켜야 밖에나 가서 맛난 걸 먹지. 원하는 건 다 사준다고 말했….”

    그 말이 끝나기 전에 라스가 손을 내린 뒤에 어깨 위로 훌쩍 올라왔다.

    -뭣 하느냐? 꽃 안 따고?

    “어휴….”

    지친다. 진짜.

    라온이 한숨을 내쉬며 해령화에게 다가갔다. 꽃을 보고 있으니 조금 전 보았던 지그하르트의 선조가 떠올랐다.

    ‘만화공….’

    이제 왜 꽃 안에서 만화공의 기운이 느껴지는지 알았다. 선조가 싹이 트도록 힘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대단한 사람이야.’

    해령화의 씨앗을 직접 키울 수도 있었고, 그대로 먹어도 중급 이상의 영약이 될 것을 놔두다니. 그는 평범이라는 범주를 한참 벗어난 사람이었다.

    라온은 해령화를 이파리째 따서 조심스럽게 아공간 주머니에 넣었다. 혹시 모르기에 유령 해파리의 사체도 다른 공간에 채워 넣고 일어섰다.

    ‘이제 여길 무너뜨려야겠지.’

    이 던전 자체를 가라앉혀야만 완전 범죄가 될 수 있다.

    화아아아아아!

    라온이 제천검을 들고 만화공을 극성으로 일으켰다. 괴인을 녹여버렸던 초대 가주의 검술을 따라 제천검을 휘어 내렸다.

    치이이이잉!

    검날에 어린 붉은 화염이 창대하게 퍼지며 거대한 불꽃의 바다를 일으켰다.

    선조처럼 푸르거나, 금빛은 아니지만, 무엇보다도 선명한 적염이 공간 전체를 휘감았다.

    콰아아아아아앙!

    성장한 염해무결이 벽과 천장에 그어진 검흔 속으로 파고들며 던전 전체에 강대한 균열을 일으켰다.

    지진이 난듯 바닥과 천장이 마구잡이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됐군.”

    던전을 유지하던 틀 자체를 부쉈으니, 얼마 안 가서 폭삭 무너져 내릴 것이다.

    라온은 제천검과 진혼검까지 아공간 주머니에 넣은 뒤 몸에 달라붙는 푸른 옷을 꺼내 입었다.

    물웅덩이에 들어가기 전 해령화에 기운을 전해주던 선조를 떠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만화공의 검술과 해령화까지 내어준 지그하르트의 초대 가주께 감사 인사를 전하고 허리를 폈다.

    -지금 누구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냐?

    ‘네가 알면 미쳤다고 할 사람이 있어.’

    라온이 피식 웃으며 손을 저었다. 라스가 그 장면을 보았다면 침을 튀기며 욕을 할 게 떠올라서 미소가 지어졌다.

    라온은 무너지는 천장을 올려본 뒤 이곳의 유일한 탈출구이자, 해령화가 피어있던 물웅덩이 속으로 몸을 던졌다.

    푸아아아앙!

    해령화가 피어난 곳답게 썩은 물이 아니다. 청아한 바다향이 전신으로 스며들었다.

    ‘시간이 많지 않아.’

    선조도 던전을 부수고 나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테니, 전부 무너지기 전에 최대한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전투를 치를 때처럼 불의 고리를 극성으로 공명시켜 기척과 기운을 모조리 가라앉혔다.

    화아아아!

    글래시아를 운용하여 바다와 자신의 기운을 동화시켰다.

    바다는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언제나 움직이는 생명의 원천. 차분히 기감을 열자 물살의 흐름이 느껴졌다.

    ‘이쪽이 더 빠르겠군.’

    오른쪽보다 왼쪽이 더 가까웠다. 돌린 호흡법으로 수중 호흡을 하며 피부에 와닿는 흐름을 따라 헤엄쳤다.

    빛이 조금도 들어오지 않는 시꺼먼 통로가 오싹했지만, 글래시아와 불의 고리 그리고 선조가 남겨둔 안배를 믿고 계속 나아갔다.

    어둑한 통로 속으로 작은 빛이 스며들어온다. 그 빛이 이어지며 환한 햇살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밖이다!’

    라온이 허리를 튕겼다. 조금 더 속도를 높여 어두운 통로를 완전히 벗어났다.

    밖이다.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 거대한 바다가 시야를 가득 메웠다.

    ‘꽤 멀어졌군.’

    통로가 꽤 길었기 때문인지 던전에 있던 해저 협곡에서 한참 떨어진 곳이었다.

    그것도 육지가 아니라, 바다 쪽이라서 올라가려면 한참 걸릴 것 같았다.

    쿠구구구구구구!

    웅장한 소리에 뒤를 돌자, 멀리 보이는 거대한 해저 협곡이 폭삭 무너져 내리며 심해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라온은 그 모습을 보며 눈빛을 가라앉혔다.

    ‘바다는 말이 없는 법이지.’

    이제 자신이 이곳에 왔던 것도, 마티오와 코시니가 누구에게 죽었는지도 완전히 묻혔다. 모든 일이 끝났다는 안도감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게 암살이지.’

    -암살? 아아아아암살?

    라스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본왕이 암살이라는 단어를 잘못 아는 것이냐? 얼굴을 드러내놓고 힘으로 다 때려 잡아놓고 무슨 암살!

    ‘목격자가 없으면 암살이야.’

    -대가리에 칼 맞은 소리만 하는구나.

    녀석은 말이 통하지 않는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라온이 피식 웃으며 손을 길게 폈다.

    ‘그럼 나가볼까.’

    -멈춰라.

    데루스가 오기 전에 최대한 빨리 이동하려고 할 때 라스의 외침이 들려왔다.

    무슨 이유인지 알 것 같아서 바로 호흡을 멈췄다.

    ‘설마….’

    -왔느니라.

    숨 몇 번 쉴 시간이 지나자, 좌측 상공에서 뼈가 시릴 정도로 섬뜩한 살기를 두른 괴물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심장이 꽉 조여든다. 숨이 턱 막혀서 헤엄치던 손과 발이 저절로 멎었다.

    라온은 위를 올려다보지도 못한 채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놈이다!’

    데루스 로베르트. 그 미친놈이 하늘 위에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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