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344화 (344/653)

제344화

똑똑.

레젤이 데루스가 머무는 방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들어와라.”

방 안쪽에서 데루스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레젤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이지?”

깔끔하게 정돈된 원목 책상에 앉아 있던 데루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의 목소리는 문을 열기 전과는 전혀 달랐다. 부드러움은 지워지고 얼음장 같은 차가움만이 남았다.

레젤은 데루스의 잔잔한 눈동자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벌써 안정을 찾으신 건가.’

데루스의 눈빛에는 더이상 분노가 보이지 않았다. 9번 사육장이 망가지고, 세뇌가 완성되기 직전이었던 어린 개들이 풀려났음에도 그는 냉정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다만 절대 잊지 않으시겠지.’

이번 일을 주도한 자는 보리니 키튼이 아니다. 자신이 아는 데루스라면 대륙 전체를 뒤져서라도 범인을 찾아 그의 모든 것을 파괴할 것이다.

레젤은 고개를 숙인 뒤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마티오에게서 온 전언입니다. 계획은 문제없이 진행 중이고, 이번 탐사에서 좋은 소식을 가지고 돌아오겠다고 합니다.”

“그렇군.”

데루스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눈을 내리감았다. 마티오를 전적으로 믿는 듯한 모습이었다.

“음….”

레젤은 그런 데루스를 보며 짧게 입맛을 다셨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코시니에게 던전 아래에 영물 급 몬스터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마티오의 부상이 아직 낫지 않았는데, 괜찮을까 걱정이 됩니다.”

마티오와 자신은 똑같은 나이에 데루스에게 거두어져 지금까지 함께 살아남았다. 긴 시간을 함께 보낸 형제와도 같은 사이였기에 걱정이 되었다.

“걱정할 필요 없다. 마티오와 코시니라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니까.”

데루스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 책임감 강한 녀석이 좋은 소식을 가져온다고 했으니, 이번에는 믿어주는 게 맞겠지.”

마티오는 오웬 왕국에서의 실수를 잊지 않았다. 저런 말을 할 정도라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안에 있을 유물을 챙겨 올 것이다.

“지금은 밀려났다고 해도 음지의 수장이었던 녀석이다.”

그는 담담한 눈빛으로 시선을 내렸다.

“믿어주도록.”

*     *      *

마티오는 짓쳐 드는 칼날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당했어!’

뒤쪽에 감각을 집중하느라, 옆에서 튀어나오는 건 상상도 못 했다. 몸이 굳어버린 듯한 느낌이다.

‘막아야 해….’

그렇다고 그냥 죽어줄 수는 없다. 검에 찔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여야 했다.

다만 놈의 검극이 흔들리고 있어서 목과 심장 중 어디를 노리는지 확실하게 알 수가 없었다.

‘그럴 때는….’

심장.

암살자가 가장 많이 노리는 부위는 일반적으로 심장이다. 목과 달리 조금만 갈라져도 살아남을 수 없기에 가슴을 막는 게 옳았다.

“흐읍!”

마티오는 입술을 깨물며 상체를 최대한 비틀었다.

치이이잉!

그 순간 예상했던 대로 침입자의 검이 심장을 향해 쏘아졌다.

푸카아악!

부러질 정도로 휘어진 허리 덕분에 놈의 검은 심장이 아니라, 가슴의 중심인 명치를 베고 밀려났다.

터엉!

마티오가 가슴을 부여잡고 빠르게 물러서서 코시니 옆에 섰다.

‘크으윽….’

지독한 고통에 머리가 멍해졌다. 명치는 전신의 마나회로가 지나가는 통로이자, 치명적인 급소. 심장을 찔리는 건 피했지만 손해는 막심했다. 평소 실력의 절반도 발휘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다만….’

버틸 수는 있어.

혼자라면 모를까. 그림자들과 코시니가 있으니 저런 암살자 따위는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었다.

“저놈을 잡… 어?”

마티오가 침입자를 가리키며 공격 명령을 내리다가 멈추고,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마, 말도 안 돼….’

흑발흑안. 창백한 피부에 눈매가 날카롭고, 오른쪽 눈 밑에 작은 상처가 돋아난 평범한 얼굴을 제대로 본 순간 머리털이 쭈뼛 섰다.

“아아….”

저자는 이곳에 있어서 안 되는. 아니,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되는 인간이었으니까.

“라온….”

심장이 터질 듯 꽉 조여들었다. 암살자 라온. 자신이 직접 키웠던 전대 그림자의 수장 라온이 눈앞에 서 있었다.

“라온?”

코시니가 턱을 떨며 눈을 부라렸다.

“지, 진짜 라온이잖아!”

그녀 역시 경악한 듯 목소리가 거칠게 갈라졌다.

“네놈이 어떻게 여기에. 아니, 어떻게 살아 있는 거냐!”

마티오가 질겁하며 악을 질렀다.

‘있을 수 없어.’

말이 안 된다고!

라온을 죽인 건 데루스고, 시체를 처리한 사람은 자신이다. 뼈와 살을 녹여서 세상에 존재했다는 흔적 자체를 지웠는데, 어떻게 살아 있는 건지 모르겠다.

“돌아왔다.”

라온이 빙긋 웃으며 검을 그어 내렸다. 멍하니 서 있던 그림자 셋의 목이 동시에 굴러떨어졌다. 직접 가르쳤던 흑살검이었다.

“지옥에 있어야 할 너와 네 주인을 데리고 가기 위해서.”

“아….”

목소리도 이전과 같았다. 등골을 스치는 오싹함에 지혈한 명치의 상처에서 핏물이 터져 나왔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세상에 그런 일은 없… 헉!”

마티오는 라온의 검을 보고서 눈동자를 떨었다.

“제천검?”

라온의 검은 최근에 보았던 라온 지그하르트의 검과 똑같이 생겼다.

“알아보는군.”

그는 숨길 생각이 없는 듯 검을 눈앞으로 들어 올렸다. 확실하다. 저건 라온 지그하르트가 사용했던 제천검이었다.

“서, 설마….”

“그 설마가 맞아.”

라온이 얼굴에 손을 얹고 불길을 일으켰다. 붉은 아지랑이와 함께 그의 얼굴이 변해간다. 검은 머리가 금발로, 검은 눈동자에 적색 빛이 돋아난다.

고오오오오!

인세에 드문 외모. 하지만 너무나도 잘 알려진 지그하르트의 특징 금발적안이 그대로 드러났다.

“라온 지그하르트….”

“그래.”

라온이. 아니, 라온 지그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가 직접 키우고, 잡아먹었던 라온이 나다. 네놈들을 지옥으로 끌어내리기 위해서 돌아왔다.]

마지막 말은 오러 메시지로 들려왔지만, 그걸 깨달을 정신은 없었다. 머리가 텅 비어버린 느낌이었다.

‘그분이….’

데루스 님이 옳았어!

암살자 라온과 라온 지그하르트를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했던 데루스의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죽여야 해. 아니, 일단 알려야 해.’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해도 코시니와 함께라면 대련장에서 보았던 라온 정도는 상대할 수 있다.

다만 저 괴물 같은 놈이 이곳에 그냥 왔을 리가 없다.

‘지금 해야 할 일은….’

마티오가 검을 뽑아 들며 그림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곳을 빠져나가서 데루스 님께 알려라! 라온과 라온 지그하르트가 동일 인물이라고!]

이상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말이었지만, 스물에 가까운 그림자들은 그 지시를 듣자마자 라온을 피해 던전의 출구로 달려갔다.

“나는 말이야.”

라온은 그림자들의 뒤를 쫓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미소를 지었다.

“당신에게 배운 걸 잊지 않고 있어.”

“뭐?”

“암살이란 내가 원하는 상황을 만들어야 성공한다는 것을.”

그가 손가락을 튕겼다. 딱 소리가 퍼지는 순간 던전이 뒤흔들리며 뒤쪽으로 달려간 그림자들의 머리 위 천장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콰아아아아앙!

그림자들은 단 한 명도 피하지 못하고, 바위와 흙무더기에 파묻혔다. 스물이 넘는 그림자 중 살아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저벅.

라온이 미소를 지으며 한 걸음 다가왔다.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걸음 소리에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이곳에서 나갈 수 있는 건….”

그의 음성이 낮고, 낮고, 낮게 흘러내렸다.

“망자뿐이다.”

*     *      *

라온은 안색이 창백해진 마티오와 코시니를 보며 찬 미소를 흘렸다.

‘제대로 먹혔군.’

처음에 마티오의 목을 벨 수 있었음에도 명치를 찌른 건 저 경악한 표정을 보기 위해서였다. 가면을 쓴 듯 항상 냉정하던 놈의 넋이 나간 표정을 보자, 20년간 응어리졌던 체증이 조금이나마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이이….”

마티오가 검을 쥔 손을 덜덜 떨었다. 이 상황도, 본인의 명령으로 그림자들이 전멸한 것에도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절망과 경악이 깃든 표정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끝을 보자. 마티오.”

라온이 제천검을 들어 마티오의 심장을 겨누었다. 서릿발 같은 기세에 마티오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어, 어찌….”

“이 병신 새끼!”

코시니가 어쩔 줄 모르는 마티오의 뺨을 후려쳤다.

“놀라는 게 당연해! 나도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으니까. 그런데 여기서 뒤질 거야? 우리가 여기서 죽는다면 저놈의 칼이 어디로 향하겠냐고!”

“아….”

그 말에 마티오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놈의 눈동자가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네 말이 맞군.”

마티오가 고개를 끄덕이며 반대편 뺨을 스스로 후려쳤다.

“그분을 위해서 어떻게 해서든 저놈을 죽여야겠지.”

그의 눈동자에서 숨이 막힐 정도의 살기가 피어났다.

“코시니. 죽을힘을 다해 싸워라.”

“알아. 나도 뒈지기는 싫으니까.”

의견이 일치한 두 사람의 기세에 던전 전체가 뒤흔들렸다.

우우우웅!

먼저 움직이는 건 당연히 마티오다. 부상의 여파가 없다는 듯 순식간에 치고 나와 검을 내리친다. 짙은 검은색 강기가 목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촤아아아악!

라온은 가볍게 몸을 띄우고서 검날에 갇혀있던 흉폭한 맹수의 철창을 열었다. 광아검 폭전살이 마티오의 검을 물어뜯었다.

쩌어어어엉!

의지만으로 심각한 부상을 극복할 수는 없는 법. 마티오가 광아검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벽에 처박혔다.

우우우웅!

라온이 그를 쫓아 움직이려고 할 때 강력한 마나의 파동이 일어났다. 코시니 시온이다. 그녀의 특기인 정신 조각 마법이 뇌리를 파고들어 왔다.

“헛짓이다.”

불의 고리가 운용될 때는 정신 공격 면역과도 같은 상태다. 심장을 회전하고 있는 불의 고리가 정신을 지배하려던 코시니의 마나를 봄눈처럼 녹여버렸다.

화아아악!

라온이 발 앞꿈치로 땅을 밀어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찰나의 순간에 코시니의 앞으로 이동해 설풍검결의 바람을 일으켰다.

“크윽!”

코시니가 재빠르게 다중 쉴드를 펼쳤지만, 푸른 바람이 깃든 제천검의 칼날은 세 겹의 벽을 깨부수고 그녀의 목을 향해 짓쳐 들었다.

쩌어어엉!

코시니의 목에서 핏물이 터지려는 찰나 마티오가 끼어들어 제천검을 쳐냈다.

“이놈!”

검은 강기가 타오르는 마티오의 검이 회전한다. 극한으로 갈고 닦은 살검이 왼쪽 가슴을 향해 찔러 들어왔다.

‘느려.’

라온이 발목을 돌리며 제천검에 분노를 담아 그었다. 전력이 담긴 광아검이 피로 얼룩진 송곳니를 드러냈다.

콰아아아앙!

강대한 충격 이후 마티오가 검과 함께 밀려나며 피를 토했다. 대련장에서 입었던 부상과 명치의 부상이 겹치며 큰 충격을 일으킨 것 같았다.

“처먹어!”

코시니가 마티오의 뒤에서 손을 뻗었다. 샛노란 뇌전의 줄기가 눈앞으로 짓쳐 들었다. 체인 라이트닝. 그녀가 정신 조작 다음으로 자신있어하는 뇌속성 마법이었다.

치이이잉!

라온이 태화오보를 밟으며 왼손으로 진혼검을 뽑았다. 지붕을 흘러내리는 빗방울처럼 부드럽게 그은 붉은 칼날이 벼락 줄기를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마법을 지우는 요혈. 마법사에게는 재앙과도 같은 특성이었다.

“아직 멀었다!”

코시니의 손아귀에서 돋아난 원형의 뇌전에서 수십 줄기의 벼락이 뿜어져 나왔다. 플라즈마 볼트. 그녀가 사용할 수 있는 최강의 공격 마법이었다.

“말했지. 헛짓이라고.”

라온은 플라즈마 볼트가 다 완성되기 전에 진혼검을 내질렀다. 음습한 요기가 코시니의 마나 사이에 끼어들며 완성되기 직전의 플라즈마 볼트를 터트렸다.

콰아아아아앙!

눈앞에서 터진 마나 폭발에 코시니가 반쯤 파인 땅에 처박혔다.

“허억….”

입에서 피를 토한 코시니가 눈을 부릅뜰 때 라온은 이미 그녀의 앞에 이르러 있었다. 블링크로 도망칠 수 없게 제천검을 내려찍으려 했지만, 마티오가 끼어들며 검을 막아섰다.

치이이잉!

라온이 검날을 비틀어내며 흑수족의 비기를 운용했다. 촌경에서 뻗어나가는 강대한 충격에 마티오가 뒤에 있던 코시니와 함께 바닥을 굴렀다.

“크윽…”

“으….”

압도적으로 밀리는 무력에 두 사람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걱정 마라. 곱게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라온이 건조한 눈동자로 마티오와 코시니를 굽어보았다.

“아는 것, 그리고 모르는 것 전부 뱉어야 할 거야.”

“으윽!”

코시니가 어깨를 움켜쥔 채 턱을 떨었다.

“저, 정신 조작도, 뇌전 마법도 안 통해. 저놈 괴물이 되어서….”

[나를….]

마티오가 피나도록 주먹을 말아쥐며 코시니의 어깨를 잡았다. 그의 오러 메시지가 들려왔다.

[나를 써라.]

[뭐?]

[원기를 폭발시키겠다. 내게 버서커를 써라.]

그 말에 코시니의 표정이 굳어졌다.

[원기 폭발 상태에서 버서커를 쓰면….]

[상관없다.]

마티오가 흔들림이 멎은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놈의 칼날은 언젠가 그분께 닿는다. 여기서 끝을 봐야 한다.]

“음….”

단단하게 굳은 마티오의 목소리에 코시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코시니가 뒤로 훌쩍 물러나 손을 뻗었다. 손아귀에서 운용된 마나가 정상적인 마나 배치와 반대로 일그러지며 마티오의 전신에 깃들었다.

버서커 마법. 그것도 최상급 효과를 지닌 광렬이었다.

우우우우우웅!

마티오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며 그의 전신 근육이 오크처럼 우락부락하게 부풀어 올랐다. 단순히 육체만 변한 게 아니다. 가지고 있는 기운이 화산처럼 폭발해 공간을 뒤덮었다.

“으음….”

라온이 마티오의 모습을 보며 눈매를 찡그렸다.

‘원기 폭발인가.’

원기란 태어날 때부터 인간이 가지는 생명력. 한 번 사용하면 회복할 수 없는 그 힘을 끌어낸 것 같았다.

‘거기다….’

코시니의 버서커 마법을 이용하여 그 힘을 증폭한 것 같았다. 단순히 오러만 따지면 평소의 3배가량 늘어난 것 같았다.

“죽어라!”

마티오가 대지를 뭉개며 검을 내리쳤다. 칼날에 어린 강기가 창대처럼 길어지고, 도끼처럼 두꺼워졌다. 마르타의 광폭화와 다르게 그는 조금도 이성을 잃지 않고, 냉정하게 흑살검을 찔러왔다.

“발악해봐라.”

라온이 차게 웃으며 진각을 밟았다.

“너무 쉬워서 섭섭할 뻔했으니까!”

설풍검결의 연청화를 펼쳤다. 휘어 올라가는 바람을 탄 강기가 마티오의 검격과 정면에서 격돌했다.

쩌어어어엉!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충격. 원기 폭발과 버서커가 조화를 이루며 3배 이상의 위력을 뿜어낸 것 같았다.

찌지지직!

라온이 마티오와 힘 싸움을 벌이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이렇게 나와야지.’

당한 것 이상으로 갚아주어야 하니까.

쿠우웅!

설풍검결로 마티오의 검을 쳐냈다. 놈의 칼날이 벽면으로 밀려났을 때 제천검을 아래에서부터 위로 올려 그었다.

화아아아아!

검날에서 피어난 염열의 봉오리가 무수히 퍼져나간다. 선조의 검흔을 통해 한층 성장한 화령의 꽃잎이 공간을 뒤덮었다.

라온은 화령을 일으키고 나서도 검을 멈추지 않았다. 만화공 회천. 제천검의 칼날 위에서 돋아난 구체가 강대한 회전을 일으키며 짙은 화염을 뿜어냈다.

콰아아아아아!

화령과 회천의 연계 검격이 마티오의 방위를 모조리 차단했다.

“이까짓 것!”

마티오가 악을 지르며 검을 뻗어낸다. 칼날에 깃든 검은 강기가 거미줄처럼 퍼져나가며 불길에 맞선다. 흑살검의 절기, 창영귀였다.

콰아아아아앙!

라온이 일으킨 적색 강기와 마티오가 뽑아낸 흑색 기운이 맞물리며 어마어마한 폭발을 일으켰다.

쿠구구구구!

충격파가 벽을 넘어 바닥으로 번지며 잘 다져놓았던 땅이 무너져 내렸다.

타악!

라온은 허공에서 몸을 휘돌려 울퉁불퉁한 바닥에 착지했다. 먼지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반대편에서도 마티오와 코시니가 서 있는 게 느껴졌다.

‘장난 아니로군.’

검을 맞부딪친 오른팔이 부러진 것처럼 아렸다. 목숨을 불태우고, 코시니의 마법까지 받은 마티오의 검격은 정상적인 범주를 한참 벗어나 있었다.

‘그러니 꺾을 맛이 있지.’

20년 동안 벼른 원수 중 한 놈이 허무하게 쓰러진다면 그것도 허무한 일이다. 저렇게 발악을 해주는 게 훨씬 나았다.

후우우웅!

라온이 제천검을 휘둘려 흙먼지를 걷어냈다. 마티오가 더욱 진해진 붉은 눈으로 이곳을 노려보고 있었다.

‘뭐지?’

더 강해졌다고?

마티오의 기운은 그 눈빛처럼 이전보다 더 강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쓰면 쓸수록 줄어드는 원기가 오히려 늘어나다니,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이곳을 벗어날 수 있는 건 망자라고 했던가?”

마티오가 땅을 부수며 쇄도해온다. 알고 있는 흑영보와 흑살검이지만 그 속도와 움직임이 차원이 달랐다.

“네놈 역시 살아서 여길 벗어날 수 없다!”

“난 제외야. 호스트니까.”

“닥쳐!”

라온이 뒤로 젖히고 있던 제천검으로 하나의 선을 그렸다. 그 궤적을 따라오는 푸른 물결. 서리연의 두 칼날이 마티오의 검과 목을 노렸다.

쩌어어어어엉!

마티오는 살기를 다져서 일으킨 검강을 휘돌려 서리연을 단번에 차단했다. 너무도 강대한 기운 때문인지 밀려나지도 않았다.

“소용없다!”

놈의 기운이 한층 더 강해진다. 폭발하기 전의 화약처럼 끝도 없이 기운이 증폭하는 것 같았다.

‘화약?’

설마….

찬물로 전신을 뒤집어쓴 느낌이다. 놈이 노리는 건 아무래도 자폭인 것 같았다.

“이제 알아차렸나? 지금의 나는 폭탄이다.”

마티오가 입꼬리를 길게 말아 올렸다.

“나를 공격해도, 공격하지 않아도 네놈의 운명은 죽음뿐이다.”

그가 재차 달려든다. 전보다 더 짙고 두꺼워진 강기가 좌측에서 밀려들어 왔다.

우우우우웅!

라온이 제천검의 칼날 위에 열화의 선을 피워냈다. 벼락처럼 떨어지는 일격. 만화공 백화 적섬이다.

찌지지지지직!

불꽃으로 이루어진 섬광으로도 생명의 기운을 담은 마티오의 오러는 베이지 않았다.

“크으으윽!”

마티오는 입에서 피를 토하면서도 함으로 공간을 밀고 들어왔다.

라온이 살의로 가득한 마티오의 눈동자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영혼까지 걸었군.’

마티오는 코시니의 마법을 매개체로 원기를 넘어, 영혼까지 바치고 힘을 끌어내고 있었다.

캬아아앙!

라온이 마티오의 힘을 이용하여 뒤로 물러섰다.

‘이대로 폭발하면 산채로 묻히겠어.’

아무리 이곳의 지리를 알고 있다고 해도 마티오의 자폭은 버틸 수 없다. 폭발하기 전에 놈을 베어야 했다.

‘일단 백영섬으로 저 힘을 지우고 은검몽을 이용하면… 음?’

마티오를 끌어들일 공간을 찾기 위해 주변을 돌아보는데 벽면에 익숙한 흔적이 보였다.

던전 위에서 보았던 선조의 검술. 만화공 염해무결의 검흔이었다.

‘달라.’

하지만 검술의 흐름은 달랐다. 벽과 바닥에서만 요동치던 입구 쪽과 달리 이 넓은 공간 전체에 염해무결의 검흔이 이어지고 있었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거대한….’

대해.

강물처럼 이어져서 바다가 되는 로베르트 가문의 검술과 달리 처음부터 모든 것을 포용하는 대해가 되는 게 염해무결의 진의인 것 같았다.

빠지직!

그걸 깨달은 순간 머리에 붉은 선이 내리꽂혔다.

두 번째 무아지경. 라온의 손이 벽에 그어진 검흔을 따라 흘러간다. 선조가 남긴 검술의 극의를 담은 제천검이 앞으로 나아갔다.

“무얼 해도 이미 늦었다.”

마티오가 핏줄이 가득 돋아난 얼굴로 달려든다.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육체가 곧 터질 폭탄처럼 붉게 물들었다.

“네놈은 여기서 죽는다.”

그의 검 위로 강기가 끝없이 치솟는다. 말 그대로 강기로 이루어진 검은 산이 솟아오른 듯한 모습이었다.

화륵!

공간을 집어삼킨 채 떨어지는 강기의 산 앞에서 라온의 검이 작은 불똥을 일으킨다.

벽면의 궤적을 따라 회전한 칼날이 고고한 선을 그리며 불새처럼 하늘을 향해 비상했다.

만화공 백화.

염해무결.

수평선을 따라 그어진 화염의 해일이 검은 산을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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