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343화 (343/653)

제343화

라스가 라온을 보며 동그란 눈을 부릅떴다.

-금…빛?

루비처럼 시뻘건 색을 띠던 라온의 눈동자가 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그 짧은 순간에 찬란한 금빛은 사라지고 본래의 적색으로 돌아가 있었다.

“금빛이라니?”

라온이 양손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 전에 네놈의 눈깔이 금빛으로 번쩍였었느니라.

“금빛이라.”

선조의 불꽃은 자신처럼 붉은색이 아니라, 찬란한 황금색이다. 머릿속 이미지였을 뿐이지만, 그와 같은 피 때문에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라온이 라스를 흘겨보며 혀를 찼다.

“나름 왕이라는 녀석이 상스럽게 눈깔이 뭐야.”

-크흠, 네놈의 눈알이 금색으로 빛났느니라.

“눈깔이나, 눈알이나….”

음식을 탐할 때만이 아니라, 이런 상스러운 단어를 말할 때도 라스가 마왕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말투만 고급스럽지 사용하는 싼티로 가득했다.

-본왕의 어투는 됐느니라!

라스가 쓸데없는 소리라며 손을 저었다.

-혼자만 다 처먹는 얌체 놈아. 얻었느냐?

“아니. 많이 얻지는 못했어.”

라온이 짧게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오!

라스의 구겨진 얼굴이 빳빳한 종이처럼 활짝 펴졌다. 얻지 못한 게 기쁜 것 같았다.

-그것 보아라! 맨날 나딘 빵이나 먹으면서 본왕을 고문하는데, 일이 잘 풀릴 리가 있겠느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느니라! 본왕에게 조공을 바친다면 네놈의 인생을 쉽게 풀어주는 주문을….

“내 말 아직 안 끝났는데?”

-어…?

“많이 얻지 못한 건 사실이야. 하지만 나머지를 어디서 얻어야 하는지는 알게 됐지.”

라온이 선조가 남긴 만화공 염해무결의 검흔을 매만지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이게 끝이 아니었거든.”

선조가 남긴 염해무결의 끝은 이 부분이 아니었다. 적의 검격 때문에 중간에서 끊겼기에 이런 두꺼운 흔적이 남은 것이다.

‘그래서 도움이 됐지.’

선조의 검술은 하늘에 닿아 있었기에 완벽하게 펼친 것을 보았다면 오히려 아무것도 얻지 못했을 수도 있다. 끊겼던 검술을 보았기에 무학의 경지가 상승할 수 있었다.

무아지경에 빠졌던 시간이 워낙 짧아서 큰 경지의 상승은 이루지 못했지만, 검술과 만화공 그리고 불의 고리의 경지가 상승하여 마스터 중급의 끝에 이르렀다.

‘약간의 계기만 있다면….’

중급의 문을 열고 마스터 상급에 오를 수 있겠지.

그리고 자신은 그 벽을 깰 열쇠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

-열쇠라고?

“그래. 제대로 펼친 염해무결의 검흔이 어디에 새겨져 있는지 알고 있거든. 아니, 그것만이 아니라….”

라온이 선조가 남긴 검흔의 틈에 만화공을 밀어 넣었다. 갈라진 틈에서 피어난 열기가 다른 검흔들과 이어지며 던전 전체로 퍼져나갔다.

“이 던전의 지리와 이 안에 들어와 있는 놈들의 위치까지 알 수 있게 됐어.”

이 던전은 선조와 그의 적이 싸우면 만들어진 던전이다. 즉, 시작부터 끝까지 그 두 사람의 검흔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만화공과 불의 고리를 운용하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디에 누가 있는지까지 알 수 있게 되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나 자신이 마법 지도가 된 듯한 느낌이지.”

-허!

라스는 어처구니가 없는지 입을 찢어질 정도로 떡 벌렸다. 녀석의 목구멍이 보였다.

-어떻게 그런 정신 나간 일이….

“선조님을 잘 둔 덕분이지.”

감사합니다. 선조님!

라온은 검흔에 머리를 숙여서 초대 가주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서 불의 고리를 통해 전해지는 정보를 받아들였다.

‘가장 밑에 큰 기운이 두 개.’

사람의 기운이 아니다. 하나는 영물급에 오른 몬스터고, 나머지는 그 몬스터가 지키는 아티팩트 같았다.

‘그 바로 위에 염해무결의 검흔이 있네.’

몬스터와 아티팩트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 바로 위에서 완성된 염해무결의 검흔이 느껴졌다. 결국 저곳에 가야 보물을 얻고, 무학 경지를 높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아티팩트가 있는 곳에서부터 꽤 위쪽에 해변에서 느꼈던 마티오와 코시니, 그림자들의 기운이 느껴졌다.

‘숫자가 적어.’

해변에서 봤던 것보다 그림자들의 숫자가 적은 것을 보니, 중간중간 보초처럼 암살자를 세워둔 것 같았다.

‘이런 방식이라면 고맙지.’

어차피 모두 처리해야 될 놈들이다. 지금처럼 나눠놓는다면 자신에게는 고마울 뿐이었다.

-이, 이건 말도 안 되느니라! 너희 선조 불러라. 본왕이 옆구리를 걷어차 줄 테니까!

라스는 어이없을 정도로 잘 풀리는 상황이 마음에 안 드는 듯 이를 갈았다.

“내가 빨리 끝내고 나가야 너도 맛난 거 먹을 텐데? 나딘 빵 먹고 싶어?”

라온이 나딘 빵을 꺼내서 라스의 앞에서 흔들었다.

-히이익….

라스는 회초리를 본 아이처럼 눈동자를 떨며 어깨를 축 내렸다.

-아, 알겠느니라.

녀석은 이제 무얼 해야 하는지 깨달은 듯 옆으로 물러나서 허리를 폈다. 저게 허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뭐, 도와줄 거라도 이, 있느냐?

라스의 목소리가 간드러지게 밝아졌다.

‘가만히만 있어 줘.’

라온이 피식 웃고서 아공간 주머니를 열었다. 도리안의 분장 도구를 꺼내서 눈과 머리를 검은색으로 바꾸고, 피부를 창백한 색으로 칠한 뒤 마지막으로 눈 밑에 가짜 상처를 만들었다.

치이잉.

냉기로 둥근 얼음을 만들어서 얼굴을 비쳐 보았다. 라온 지그하르트와는 전혀 다른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완벽하군.’

20년 만인가.

지금 자신의 얼굴은 전생에 데루스의 그림자로 살았던 암살자 라온의 모습이었다.

‘평범하게 죽이기는 너무 아깝지.’

마티오는 자신을 납치하고, 세뇌하고, 교육한 모든 일에 관여한 주동자 중 한 명이다.

놈의 칼에 급소를 찔렸던 적은 수도 없이 많았고, 놈이 풀어놓은 들개에게 살점이 물어 뜯기기도 했으며, 식량을 주지 않아서 한 달 동안 흙 묻은 풀만 뜯어 먹고 산 적도 있었다.

‘절대 그냥은 못 보내.’

마티오를 리스본처럼 편하게 죽일 생각 따위는 없다. 육체적인 고통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충격을 주어 살아 있는 자체를 후회하게 만들 생각이다.

라온이 섬뜩한 미소를 흘리며 제천검과 진혼검을 허리에 착용했다.

고오오오!

벽의 틈을 통해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그림자들의 위치를 파악했다.

‘20분 거리인가.’

지름길을 이용한다면 5분 안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라온은 움직일 방향을 결정하고서 선조가 만들어놓은 통로를 달렸다.

‘쉽네.’

불의 고리를 통해 전해오는 감각 덕분에 수없이 다닌 길처럼 조금도 헤매지 않고 그림자들이 경계를 서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치이이이잉!

라온은 만화공을 운용하여 그림자들이 서 있는 뒤편의 벽을 열었다.

“어….”

“침….”

그림자들은 그 짧은 시간에 반응하여 물러서려 했지만, 제천검이 더 빨랐다.

촤아악!

은색으로 반짝이는 궤적이 그림자들의 목을 가르고 지나갔다.

“끄읍….”

“아악….”

그림자들은 아주 짧은 신음을 흘리고서 본인들의 목을 부여잡고 뒤로 기울어졌다.

타악.

라온은 코시니의 경계 마법에 걸리지 않게 두 그림자의 시체를 잡은 뒤에 벽에 걸쳐놓았다.

-쯧쯧.

라스가 혀를 차며 턱을 치켜들었다.

-멍청한 녀석. 다 들켰느니라.

녀석은 시체들을 가리키며 눈살을 찌푸렸다.

-본왕이 보기에 네놈에겐 암살의 재능이 없느니라. 그냥 대놓고 검이나 휘두르거라.

“풉!”

라스의 말에 오랜만에 진짜 웃음이 터졌다.

-우서?

“미안하지만 일부러 들리게 한 거야.”

-일부러 들리게 했다고?

“그래.”

라온이 빙긋 웃으며 제천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암살자로 살아온 세월이 몇 년인데 이런 실수를 하겠는가. 그림자들이 반응하기 전에 죽이는 건 일도 아니었다.

-왜지?

“내가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

일부러 신음을 들리게 하고, 기척을 단숨에 지워버린 건 나름 실력 있는 무인이 그림자를 베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신호였을 뿐이다.

-…정말 네놈의 대가리는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느니라.

라스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암살의 진의는 죽이는 게 다가 아니야. 내가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게 진짜 암살이지.”

라온이 마티오가 기척이 느껴지는 땅을 내려다보며 입맛을 다셨다.

“잘 보고 있어.”

지금부터 진짜를 보여줄 테니까.

*     *      *

마티오가 조용히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얼음장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반응하지 말고 들어라.”

“또 뭔데.”

코시니가 뒤를 돌아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가뜩이나 피곤한데, 왜 이리 귀찮게….”

“침입자가 있다.”

“침입자?”

그녀는 위를 올려보며 눈매를 좁혔다.

“경계 마법에는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는데? 아까도 말했지만, 여기에 침입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4번에 놓아둔 그림자들의 기척이 사라졌다. 작은 신음도 들렸지.”

마티오가 코시니를 보며 무겁게 턱을 내렸다.

“그 녀석들은 내 명령이 없다면 팔다리가 잘려도 그곳을 벗어나지 않아. 침입자에게 당했다는 뜻이다.”

적이 없다는 코시니의 확신에도 마음이 풀리지 않았기에 위쪽으로 기감을 집중하고 있었는데, 약한 신음과 함께 두 명의 그림자가 쓰러지는 게 느껴졌다.

이젠 확실해졌다. 이 던전에는 자신들 말고 다른 존재가 들어와 있었다.

“그것도 강자다.”

뒤에서 나타났을 텐데 그림자들이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쓰러졌고, 경보 마법조차 울리지 않은 것을 보면 보통 놈이 아니다. 집중하지 않았다면 자신도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확실하지?”

“그렇다.”

“으음, 그런 쪽은 네가 나보다 나으니까.”

코시니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의 기척과 소리를 잡아내는 건 마티오 쪽이 몇 수나 위였다. 저렇게 확신하는 걸 보면 누가 있다는 게 분명했다.

“그럼 어떻게 할까? 멈추고 기다려?”

“아니.”

마티오가 고개를 젓고 바닥을 가리켰다.

“넌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계속 파라. 속도는 유지하되 소음을 줄여.”

“알겠어.”

코시니가 고개를 끄덕이고 손가락을 돌렸다. 땅이 파이고, 다져지는 속도는 그대로였지만, 그곳에서 퍼져 나오던 소리는 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음….”

마티오는 코시니의 뒤를 따라 아래로 내려가며 눈썹을 내렸다.

“둘이 더 당했다. 전보다 소리가 더 작아. 암살에 능숙한 고수다.”

“경계 마법에도 아무것도 안 걸리는 걸 보면 확실하네.”

코시니는 뒤를 힐끔 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그래서 계속 이렇게 갈 거야? 피해가 커질 텐데?”

“어차피 죽어도 상관없는 것들이다. 이렇게 끌어들이는 게 낫다.”

“끌어들인다고?”

“침입자는 우리의 숫자를 알고 있을 것이다. 둘씩 미끼를 던져주면서 내려간다면 좋다고 생각하며 따라오겠지.”

마티오가 나지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놈이 나와 너를 칠 순간은 보물을 얻기 직전. 인간인 이상 방심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겠지.”

“음….”

“우리는 그때까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땅을 파다가 놈이 공격해오는 순간 역습하면 그만이다.”

“지금 쫓아가서 처리하는 게 나을 텐데?”

“거리가 멀다. 도망친다면 잡기 힘들 거야. 절대 놓쳐서는 안 될 놈이다.”

마티오가 빠득 소리가 나도록 주먹을 말아쥐었다.

‘무조건 잡아야 해.’

데루스의 대의를 망치려고 한 놈이다. 어떤 놈인지, 뒤에 누가 있는지, 어디 소속인지 고문을 해서라도 모두 알아내야 한다.

‘또 둘이 죽었어.’

이동속도가 빠르다. 대범하면서도 냉철한 놈이었다. 쫓지 않고 유인하기를 잘했다.

‘다만….’

그런 놈일수록 잡기 쉽지.

암살자든, 무인이든 본인의 실력을 과신할수록 죽이기 편하다. 뒤에 있는 놈은 딱 그 정도 수준이었다.

마티오는 머릿속으로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그리며 서늘한 눈빛을 일으켰다.

‘네놈은 네가 알지 못하는 것까지 뱉어내게 될 거다.’

얼마든지 와라.

*     *      *

얼마든지 오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라온은 점차 가까워지는 마티오와 코시니의 기운을 느끼며 차게 웃었다.

‘예측대로의 움직임이야.’

마티오는 자신이 뒤에서 따라온다고 생각하고 모른 척 앞으로 나아가며 잡아 보라고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단순히 죽이려는 게 아니라, 잡아서 정보를 뽑아내려는 게 분명했다.

‘좋은 방법이지.’

그게 나만 아니었다면.

자신은 마티오가 어떤 인간인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어떻게 움직일지를 모두 알고 있고, 이 던전의 구조도 파악하고 있다.

마티오는 본인이 유리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이쪽이 압도적으로 우위에 설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라온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손가락을 풀었다.

‘이제 내가 해야 할 건….’

기척을 죽이는 것.

그림자들의 뒤에서 나흘을 보낼 때보다 훨씬 더 존재감을 죽여야 했다.

고오오오.

라온이 불의 고리를 모조리 공명시켰다. 평소처럼 존재감을 드높이는 게 아니라, 극한으로 짓누르며 스스로를 감췄다.

바닥에 깔린 작은 돌멩이처럼,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나 자신을 이 던전에 깃든 마나의 한 조각으로 치환했다.

우우우웅!

코시니가 땅을 파는 진동이 느껴진다. 그녀의 마나가 어깨에 닿는 것 같았다.

라온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직 아니야.’

가까이에 있는 건 분명하지만, 지금이라면 부상을 입은 마티오라고 해도 회피할 수 있다.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

‘후우우.’

육체를 너머 감정마저 가라앉혔다. 전생의 원망과 분노, 살기마저 지웠다. 갓 태어난 아이처럼 육체와 정신을 하얀색으로 칠했다.

우우우웅.

코시니의 마법을 지나 마티오와 그림자들의 걸음에서 일어난 진동이 발밑을 간지럽혔다. 그 흐름을 통해 마티오와 그림자들의 움직임이 머리에 그려진다. 저들 모두의 감각은 뒤와 위를 향하고 있었다.

‘지금!’

라온이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며 땅을 박찼다. 나오는 곳은 앞도, 뒤도 아닌 좌측 벽. 한층 더 성장한 태화보가 벽면을 밀어내며 찰나의 순간에 마티오의 뒤편에 이르렀다.

찌이이이잉!

그림자도, 코시니도 그리고 마티오도 반응할 수 없는 맹점과 같은 순간 라온의 검이 섬뜩한 빛을 뿜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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