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342화 (342/653)

제342화

라온은 새롭게 열린 길로 들어가며 벽과 천장, 바닥에 가득한 틈을 살폈다.

‘단순한 검흔이 아니야.’

전투의 흔적.

불의 고리와 만화공을 익힌 지그하르트의 선조가 누군가와 싸웠던 검흔이었다.

‘이건 회천의 흔적인가.’

우측 벽면에 톱날에 갈린 듯한 검흔이 새겨져 있었다. 깎여나간 자국을 보니, 한층 성장한 자신의 회천보다 훨씬 강한 위력을 가진 것 같았다.

‘저 수많은 구멍은 화령이겠고.’

좌측 벽면에 가득한 수백. 아니, 수천 개의 구멍은 강기의 꽃잎을 뿌리는 화령이 남긴 흔적이 분명했다. 다만 꽃잎의 개수는 자신과 비교하기 민망할 정도로 차이가 났다.

라온은 거대한 구멍 같은 것을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염룡결…….’

염룡결은 만화공의 검술 중에서도 위력에 집중한 단순한 초식이기에 다른 무엇보다도 큰 차이가 났다.

자신의 염룡결이 해츨링의 숨결이라면 이곳에 남아 있는 흔적은 에이션트 드래곤의 브레스였다.

“후우……”

이마에서 흐르는 식은땀을 닦으며 아래로 내려갔다.

‘적섬과 염주벽도 있군.’

벼락처럼 떨어진 흔적과 방패로 후려친 듯한 흔적은 적섬과 염주벽이 남긴 검흔이었다. 이곳에 있는 흔적 중 절반 이상은 만화공에 깃들어 있는 검술들이었다.

‘이건 모르는 건데…….’

선조가 남긴 게 확실한 검흔이 있었지만 무언지 모르겠다. 꼭 파도가 휩쓴 듯한 흔적인데 지금까지 본 만화공의 검술보다 한 차원 높은 곳에 있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이 이렇게까지 싸워야 하는 상대라니….’

꿈 같은 이미지로 봤을 뿐이지만, 선조의 무력은 하늘에 닿아 있었다. 그런 무인이 이 정도로 전력을 발휘했다는 건 상대 역시 고수라는 뜻이었다.

라온이 눈을 가늘게 뜨며 반대편의 흔적을 살폈다.

‘검…인가?’

검인 듯, 검 같지 않은 흔적이었다. 불의 고리를 운용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난해했다.

‘다만….’

확실한 게 하나 있었다. 더럽게 강하다는 것. 선조의 적이 남긴 검흔에서도 하늘에 오른 무력이 느껴졌다. 어마어마한 강자였다.

‘누구도 압도하지 못했어.’

선조와 그의 적이 남긴 검혼의 흐름을 따라가 보면 어느 한쪽도 승기를 잡지 못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전력을 다해서 검을 휘두른 흔적만 가득했다.

-흥, 이제야 눈이 좀 트인 모양이로구나.

라스가 이쪽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맞느니라.

녀석은 검흔을 쭉 훑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설픔에서 벗어난 강한 것들끼리 붙어서 남긴 흔적이니라.

‘강한 것들이라…….’

라온이 눈을 가늘게 떴다.

‘장난이 아니라는 거로군.’

라스는 무력으로 인간을 평가한다. 그랜드 마스터조차 무시하는 녀석의 입에서 강하다는 소리가 나왔다는 건 두 사람이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괴물이라는 뜻이다.

-제대로 말하자면 이 던전 자체가 그 둘의 전투로 인해서 생겨났다고 봐야겠지.

‘싸워서 던전을 만들었다고?’

-그렇느니라. 벽에 남은 검흔들은 이 통로를 파고도 힘이 남아돌아서 새겨진 것이다.

‘허…….’

라온이 뒤를 돌아보며 입을 떡 벌렸다.

‘생각해보면 여기 바닷속이잖아.’

바닷속에서는 필연적으로 기운이 흩어지고, 검술 흐름을 이어가기 어렵다. 당시에는 이 굴 자체가 없었을 테니, 호흡까지 참으며 싸웠다는 뜻이다. 정신이 멍해졌다.

‘…강함에는 끝이 없네.’

-당연하느니라. 본왕도 아직 더 오를 길이 있거늘. 네놈 같은 애송이는 아직 한참이니라.

라스가 비웃음을 흘리며 손을 저었다.

‘그러네.’

아직 멀었지.

라온이 빙긋 웃으며 지금까지 본 검흔들을 다시 살폈다. 회천, 화령, 염룡결, 적섬과 염주벽까지 눈에 담은 뒤 무언지 알 수 없는 마지막 검흔에 손을 얹었다.

이름 모를 검흔을 더 자세히 살피기 위해서 손으로 따라갔다. 흔적은 벽에서 바닥으로 이어지고 있었는데, 땅은 흙이 차올라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파아아악.

라온이 조심스럽게 땅을 파며 바닥에 새겨진 검흔을 살폈다.

고오오오오!

땅이 생각보다 단단해서 불의 고리와 만화공을 운용한 순간 검흔 속에서 붉은빛이 뿜어졌다.

고오오오오!

이 검술을 따라 해보라는 듯 선조가 남긴 이름 모를 검흔이 장대한 선을 펼쳐냈다.

“아….”

다른 생각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새로운 검술로 가득 찬 기분이다.

[<불의 고리>가 염해무결을 관찰했습니다.]

[초집중의 영역에 들어갑니다.]

라온은 눈앞으로 떠오른 메시지조차 보지 않고, 검흔만을 눈에 담으며 몰입의 호수에 빠져들었다.

-또? 또 무아지경에 들어갔다고? 땅굴 파다가 왜 무아지경에 들어가는데!

라스가 눈을 부릅뜬 채 라온의 어깨를 잡았다.

-이건 사기지 않느냐! 신은 어디 있는데에에에!

*     *      *

“정지.”

마티오가 걸음을 멈추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위쪽의 마나가 흔들린 것 같은데.”

그는 의견을 구하듯 좌측에 있는 코시니에게 고개를 돌렸다.

“맞아. 흔들렸지.”

코시니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위만이 아니라, 아래도 흔들리고 있고.”

그녀는 검지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왜 그런 거지?”

“전에 말했잖아. 이 아래에 유물을 지키는 괴물이 있다고.”

코시니가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 만난 해양 몬스터 따위는 가볍게 씹어 먹을 수 있는 놈이라, 지금 우리가 내려오는 것도 알고 있을걸.”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데?”

마티오가 기감을 전력으로 펼치며 고개를 저었다. 밑으로 기운을 집중시켜도 아무것도 감지되지 않았다. 그저 약간의 열기만 느껴질 뿐이었다.

“아티팩트의 힘을 받아서 거의 영물급으로 힘을 키웠으니, 느끼기 쉽지 않을 거야. 자연의 마나와 비슷하니까.”

“그럼 그 기운이 들끓고 있다는 건….”

“그래. 우리와 싸울 준비를 한다는 거지.”

코시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아귀에서 운용된 마나가 바닥을 부드럽게 퍼 올리고, 흙을 다져서 무너지지 않는 기반을 만들었다.

“그렇군. 이해했다. 다만….”

마티오는 빠르게 갈라지는 땅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무언가 불안하다. 느낌이 좋지 않아.”

“위쪽이?”

“그렇다.”

“하아….”

코시니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내 경보 마법에, 중간중간 경계까지 세워둬 놓고 뭐가 그렇게 불안한데.”

그녀는 한심하다는 듯 눈매를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댁이 그렇게 간땡이가 좁으니까. 그 자리에서 밀려난 거야.”

“주둥이를 여전히 함부로 놀리는군. 네가 여전히 부단장인 것도 그 입 때문이다.”

“흥….”

마티오의 서늘한 시선에 코시니가 눈을 내리며 슬쩍 고개를 돌렸다.

“어쨌든 누가 여길 온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만약 여길 찾았다고 해도 우리가 없을 때 들어왔겠지. 다 있는데 들어오는 미친놈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

“음….”

그 의견에는 동의하는지 마티오가 입을 다물었다.

“지금 주간 근로 시간 한참 넘어갔거든. 마법사는 무식한 살수와 달리 예민하니까. 건드리지 마.”

코시니가 콧잔등을 찡그리며 마력의 양을 높였다. 땅이 파이고, 다져지는 속도가 2배가량 빨라졌다.

후우우우웅!

그녀는 동그랗게 파이는 땅굴을 바라보다가 뒤를 돌았다.

“나도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뭐지?”

“그분을 왜 그렇게 따르는 거지? 수장에서 내려오고도 맹목적인 너나, 그런 널 데리고 다니는 그분이나 다 이해가 안 가. 거의 사랑 아니야?”

“사랑? 따지고 보면 그리 다르지 않다.”

마티오의 눈빛이 어둑하게 가라앉았다.

“내게 있어서 그분은 신. 신께 경건한 친애를 보내는데 이유가 필요한가?”

“…신이라고?”

“그렇다. 신성 왕국이 여신을 따르듯 난 그분을 숭배할 뿐이다.”

“으음….”

“내 몸의 피 한 방울까지 짜서 그분을 위해 바칠 것이다.”

마티오의 섬뜩한 눈빛에 코시니가 마른침을 삼켰다.

‘미쳤군.’

자신 역시 데루스를 믿고 따르지만, 세뇌 없이 이 정도로 그 사람을 친애하는 건 마티오와 레젤 그리고 그 남자뿐이었다.

왜 데루스가 실력이 떨어진 마티오를 계속해서 데리고 다니는지 알 것 같았다. 그야말로 광신도나 다름없었다.

코시니는 닭살이 돋아오르는 팔을 잡고 입술을 비틀었다.

‘둘 중 하나라도 죽는다면 재밌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겠네.’

*     *      *

“허어억….”

리메르가 비틀거리며 걷다가 벽을 붙잡고 길고 긴 한숨을 뱉었다.

‘더럽게 아프네.’

글렌의 벼락을 맞은 어깨가 아프다 못해 타는 듯이 쓰라렸다. 아무리 맞아도 익숙해지질 않는 걸 보면 뇌기는 정말 지랄 맞은 속성이었다.

‘아니지.’

리메르가 검게 그을린 보석 반지로 가득한 손을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이게 익숙해진 건가?’

생각해보면 이전에는 벼락을 맞고 기절해서 한동안 일어나지도 못했다.

최소 하루는 누워서 빌빌 거렸는데, 지금은 직통으로 맞고도 쓰러지지 않았다. 걷는 게 조금 힘들기는 하지만 바로 움직일 수 있었다.

“흐음….”

리메르가 손을 들어올리며 아직 전신에 가득한 뇌기를 일으켰다. 파직 소리와 함께 손가락 위로 녹색 뇌기가 치솟았다.

이전에는 임시방편으로 뇌기를 사용했지만, 계속 맞다 보니 자연스럽게 바람의 마나에 뇌기가 깃들어버린 것 같았다.

‘당연한 일일지도.’

생각해보면 삼일에 한 번 씩은 벼락을 맞았으니, 몸에 뇌기가 쌓이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니까.’

아픈 건 그대로였지만, 가주님의 뇌기에 적응을 하다니, 사람의 몸은 역시나 신기함의 극치였다.

‘그러고 보니 이거 잘 이용하면….’

“하아아압!”

리메르가 히죽이며 음흉한 계획을 짜고 있을 때 5연무장 쪽에서 우렁찬 기합이 들려왔다.

‘지금은 밤인데?’

저녁을 지나, 잠을 자야 할 시간임에도 5 연무장은 대낮처럼 밝았고, 많은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흐음?”

리메르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연무장 옆에 세워진 떡갈나무 위로 올라갔다.

‘다 있네?’

라온, 도리안을 제외한 광풍단 모두가 모여서 각자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것도 몸을 푸는 정도가 아니라, 전력을 다하는 제대로 된 훈련이었다.

‘웬일이래?’

육황 결투 대련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고, 복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으며, 라온이 없음에도 모두가 진심으로 훈련에 열중하는 게 신기했다.

‘이것도 다 라온 때문이겠지.’

저 녀석들은 육황 결투 대련에서 라온이 보여준 투지에 감격하여 더 높이 나아가고 싶어 하는 게 분명했다.

‘줗네.’

끝을 모르고 나아가는 라온도, 그를 따라가고 싶어 하는 광풍단도 모두 대견하여 미소가 절로 흘러나왔다.

‘이제 때가 됐네.’

단을 넘어서 그 위로 올라갈 순간이 다가온 것 같았다.

후웅.

옆의 나무에서 가는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리메르가 옆으로 고개를 돌리며 씩 웃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의 시선에는 어느새 나무에 올라가 있는 글렌이 비쳐 있었다.

“무엇이 말이냐.”

“저 녀석들이 내일 죽을 듯이 수련하는 게 다 가장 아끼는 손자 덕분이잖습니까. 뿌듯하시겠네요.”

“커흠!”

글렌은 헛기침을 하고서 고개를 돌렸다. 그의 귓불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뿌듯은 무슨. 무인이 수련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복귀하자마자 저렇게 열중하는 건 누구나 하는 일이 아니죠.”

“음….”

“그래서 말인데….”

리메르는 살짝 올라간 글렌의 입매를 보며 손을 들어 올렸다.

“라온이 돌아오면 광견단. 아니, 광풍단을 광풍대로 전환하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광풍대라….”

글렌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턱을 쓸어내리며 검을 내리치는 광풍단을 바라보았다.

“시험이 있다는 건 알고 있겠지?”

“물론이죠.”

“정식 절차를 밟아서 오도록.”

“예!”

리메르가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목에 걸린 보석들이 줄줄이 흔들렸다.

“그 지저분한 것들 좀 치우고.”

“에이, 이건 재신 라온을 숭배하는 제 정성입니다! 절대 못 빼요!”

그는 물러설 수 없다며 손을 뻗었다.

“점점 미쳐가는군.”

글렌은 한숨을 내쉬고 손가락을 튕겨 리메르에게 무언가를 던졌다.

“어?”

리메르가 손을 뻗어 잡으니, 화상에 바르는 고급 약이었다.

“이건….”

“네놈이 예뻐서 주는 건 아니다.”

글렌은 그 말을 남기고 훌쩍 사라졌다.

“허어, 손주 칭찬해줬다고 약도 주는 거야?”

리메르는 손에 든 약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지금까지 수없이 맞았지만 약을 주는 건 처음이었다.

“라온 효과 무섭네….”

그는 고개를 절래절래 젓고서 숙소로 향했다.

다만 글렌이나, 리메르 둘 다 모르는 점이 있었다.

광풍단은 라온의 전투를 보고 감격해서 지금까지 수련을 하는 게 아니었다.

“절대 검을 멈추지 마! 그 또라이 자식은 어떻게든 트집을 잡을 거라고! 무조건 실력을 길러놔야 해!”

버렌이 핏줄이 돋아오른 눈으로 검을 내리쳤다. 검풍 소리가 꼭 인간의 절규처럼 들렸다.

“난 우승했는데! 시발! 시이발! 시이이이이발!”

마르타는 입을 열 때마다 욕을 뱉으며 짐승처럼 흉폭하게 검술을 펼쳤다. 그녀의 분노에 연무장 바닥이 쩍쩍 갈라졌다.

“흐으으….”

루난은 잠이 오는지 고개를 꾸벅이며 검을 휘둘렀다. 눈은 맹하다 못해 탁하니 풀려서 흐리멍덩하게 보일 정도였다.

“크흐윽!”

“내, 내가 왜 광풍단에 들어와서 이 고생을….”

“그놈은 악마야. 사람을 가지고 노는 조롱의 악마이라고!”

“사, 살려줘…”

“난 차라리 죽여줘….”

“이게 사람 사는 인생이냐고!”

라온이 돌아왔을 때 실력이 늘지 않은 사람에게 집중력 강화훈련을 시킨다고 했기에 다른 광풍단 검사들도 절규하며 검술을 연마했다

“이 악마보다 더한 자식아!”

*     *      *

-이 마왕보다 더한 자식아!

라스가 라온을 보며 이를 바득 갈았다.

-대체 왜 이놈한테만 이렇게 기연이 터지는 것이냐!

무아지경이란 깨달음에 오를 수 있는 계단. 최상급 영약이나, 고대의 아티팩트, 장인의 무구보다도 더한 기연이었다.

평범한 인간은 평생을 수련해도 한 번 만날까 말까 하건만 이 미친 인간은 물건을 훔치러 와서 땅을 파다가 무아지경에 빠져버렸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만 흘러나왔다.

-정신이 나갈 것 같느니라….

오랜 세월을 살며 수많은 인간, 마족, 천족 등 수많은 존재를 봐왔지만 이렇게 기연을 자주 만나는 놈은 처음이었다. 온 세상이 이 꼬맹이를 도와주는 느낌이다.

-심통이 나서 못 보겠느니라!

라스가 떨리는 손으로 라온의 어깨를 잡고 마구 흔들었다.

-일어나거라! 5일 동안 나딘 빵만 먹인 네놈이 잘되는 꼴은 죽어도 못 보겠느니라!

“…….”

라온은 라스가 무슨 짓을 하든 신경 쓰지 않고, 그저 벽면만을 바라보며 깊은 몰입 상태에 빠져 있었다.

‘단순히 검술만을 보아서는 안 돼.’

벽에 새겨진 검흔은 홀로 수련을 한 형태가 아니라, 적과 싸우면서 새겨진 흔적이다. 그걸 염두에 두어야 이 검술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흔적이 길어….’

회천이나, 염룡결처럼 단발로 끝나는 게 아닌지, 검흔은 벽면을 타고 아랫 공간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라온은 구름 위를 밟는 듯한 기분으로 밑으로 내려가며 계속 검술을 살폈다.

‘베고, 치고, 막고.’

모든 게 일검에 담겨 있어.

일필휘지라는 말이 있다. 막힘없이 단번에 여러 글씨를 써 내려간다는 말인데, 지금 벽면의 검흔은 명인의 글씨처럼 한 번에 이어지고 있었다.

라온은 고조되는 감정을 간직하며 아래로 내려갔다. 뱀처럼 길게 이어지던 검흔이 방점을 찍으며 끝이 났다.

그 마지막 점에 열기가 깃드는 순간 머리에 새로운 이미지가 그려진다.

찌이이이잉!

은빛 궤적을 따라 치솟은 불꽃의 파도가 남해를 뒤덮었다.

선조가 이 검술을 통해 만들어낸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며 시야를 가득 채웠다.

‘이런 검술이 있었다니….’

하나의 초식이, 하나의 검결이 되는 특별한 무학이었다.

‘크으….’

경지를 한참 넘어선 검술을 담으려고 했기 때문일까. 불의 고리가 돌아가는 심장과 뇌리가 타는 듯 아렸다.

‘다 얻을 수 없다는 것도, 부족하다는 것도 알고 있어.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 과자를 먹은 아이처럼 선조의 검을 더 갈구하며 온 정신을 집중했다.

태어나서 처음 먹어보는 진미처럼 선조의 검술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실눈을 떠서라도 끝까지 그가 일으킨 흐름을 눈에 담은 순간 머릿속에서 작은 폭발이 일어났다.

-야이 자식아! 기연 좀 나눠 먹자고!

그제야 라스의 부름이 들려왔다.

번쩍.

라온이 두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가 일순간 황금빛으로 번쩍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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