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1화
라온은 조금 더 기척을 가라앉히며 숨을 실처럼 가늘게 내쉬었다. 작은 돌멩이 수준으로 존재감을 지운 뒤 해변에 있는 그림자들을 하나씩 살폈다.
-얼굴이 안 보이는데, 구별이 되는 것이냐?
라스는 대체 무엇을 보는 거냐며 혀를 찼다.
‘체형과 기운으로.’
전신을 가리고 있다고 해도 키와 어깨너비 같은 체형 차이는 숨길 수 없다. 기운 역시 사람마다 타고난 결이 다르기에 저들을 구별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흥. 본왕에게는 다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놈들이라 구별할 필요가 없느니라.
‘그렇겠지.’
정신세계에서 만난 라스의 본체는 아름다움과 강함을 모두 지니고 있었다. 음식에 정신을 빼놓는 것만 아니라면 저런 말을 할 자격 있는 마왕이었다.
‘난 약하니까. 정보를 모아서 어떻게 움직일지를 생각해야 해.’
-허? 웬일로 네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이냐?
‘이제 당하는 건 싫거든.’
멀린에게 납치를 당한 이후로 당시의 일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여러모로 어려운 상황이었던 건 맞지만, 조금만 더 현명하게 움직였다면 납치당하는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을 수도 있었다.
-흐음….
라스가 라온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성장한 건가.’
인간은 두 종류로 나뉜다. 실패를 통해서 배우는 자, 실패는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라고 자기 위안을 하는 자. 그중 어떤 인간이 더 높이, 더 멀리 갈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라온은 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누구보다도 높이 올라갈 수밖에 없는 놈이었다.
‘다만….’
열받는 점이 하나 있었다.
-네놈 그 일로 인해서 얻은 게 많지 않았느냐!
라스가 라온을 보며 인상을 팍 찌푸렸다.
-본왕의 능력치를 다 뺏어가 놓고 그런 소리를 지껄이다니! 이 양심에 털 난 놈이!
‘아니.’
라온이 손을 저었다.
‘그건 운이 좋았을 뿐이야.’
납치당한 덕분에 강해질 수 있었고, 가문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지만, 다시는 적에게 목숨을 맡기고 싶지 않았다. 정보를 파악하고 예측해서 스스로 상황을 지배해야 한다.
‘이번에는 특히 정보가 중요해.’
던전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기에 들어가기 전에 저들의 움직임과 대화를 통해서 상황을 파악해야 했다.
“끝에 닿는 데 얼마나 걸리지?”
마티오가 마법사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으음, 이대로라면 일주일 정도?”
마법사가 복면을 벗으며 대답했다. 물에 젖은 분홍색 머리카락의 어린 여성의 얼굴이 드러났다.
‘코시니 시온….’
마법사의 정체는 그림자에 속한 마법사단의 부단장 코시니 시온이었다. 20년 전과 얼굴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아서 알아보기 어렵지 않았다.
‘반말을 하는군.’
코시니가 마법사단의 단장이 되었다고 해도 마티오의 지위가 더 높을 텐데 반말을 하는 게 무언가 이상했다.
“더 빠르게 할 수는 없나?”
마티오가 바다로 시선을 돌리며 손짓을 했다.
“할 수는 있지만, 무너질 가능성이 높지. 처음부터 던전을 생각하고 만든 곳이 아니라, 지반이 약해. 잘못 건드렸다간….”
코시니가 손가락을 들어 올리자, 발밑의 모래가 폭삭 주저앉았다.
“이렇게 되겠지. 산채로 파묻히고 싶다면 말리지 않을게.”
라온이 코시니의 말을 들으며 입맛을 다셨다.
‘던전을 생각하고 만든 게 아니었다고?’
아무래도 어떤 사건이 일어난 이후에 던전으로 개조를 했다는 뜻 같았다.
“후우….”
마티오가 복면을 벗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답답함이 가득 차오른 표정이었다.
“일주일이면 앞으로 2번은 더 와야 한다는 뜻이로군.”
“뭐, 그렇지.”
코시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올렸다.
“아직 부상도 다 안 나았으면서 왜 그렇게 급해. 저 밑에는 무조건 상급 이상의 몬스터가 있다니까?”
라온이 코시니의 말을 듣고 살짝 주먹을 움켜쥐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정보야.’
마티오가 아직 회복 중인 건 지금까지 들은 내용 중 가장 귀중한 정보였다. 던전 안에서 놈을 죽일 가능성이 훨씬 높아졌다.
“그분께 하루라도 빨리 좋은 소식을 알려드리고 싶을 뿐이다.”
마티오가 로베르트 가문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육장 일 때문인가? 나도 그분을 따르지만, 당신은 못 따라가겠어. 실력에서 밀렸는데도 신용 받는 이유가 있네.”
“입 다물어라.”
“휴식은?”
“당연히 하루다.”
“하아, 너무 짧아.”
코시니가 한숨을 내쉬고 로베르트 가문으로 향했다.
“나와라.”
마티오는 그 뒤를 따라가지 않고 모래사장을 향해 손짓했다.
파아아악!
모래와 나무 사이에 숨어 있던 네 명의 그림자가 그 앞으로 달려가 부복했다.
“사흘 전에는 주민 두 명이 다가왔고, 이틀 전에는….”
그들은 지금까지 누가 이곳에 다가왔고, 지나갔는지를 보고했다. 물론 그 안에 라온의 이름은 존재하지 않았다.
“계속 지키도록.”
“예.”
그림자들은 대답한 뒤에 다시 본래의 자리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가자.”
마티오의 지시에 바다에서 나온 그림자들이 그의 뒤를 따라 사라졌다.
-바로 들어갈 것이냐?
‘아니.’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내 목적은 하나가 아니라서.’
던전을 무너뜨리기만 하는 거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하지만, 정말 원하는 건 마티오를 죽이고, 던전의 보물을 챙기는 거다.
그 둘 모두를 이루기 위해서는 놈이 다시 저 안으로 들어가길 기다려야 했다.
‘던전 안에도 분명 그림자가 있겠지.’
마티오의 성격상 던전 내부에 그림자를 배치해 놓았을 게 뻔해서 들어갈 수도 없었다.
‘그래도 정보는 많이 얻었어.’
라온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휴식 시간, 던전 공략 시작, 적의 인원과 무력 수위까지 파악했기에 이걸 바탕으로 계획을 짜면 된다.
-그럼 밥이나 먹고 오자. 이틀 동안 아무것도 안 먹지 않았느냐.
‘아, 그러네.’
고개를 끄덕이고 조심스럽게 일어나 뒤로 물러섰다. 그림자들이 기척을 느끼기 힘든 곳까지 떨어진 뒤에 아공간 주머니에서 나딘 빵을 꺼냈다.
-야아아아아아!
‘참아 줘.’
-하루 휴식이라잖아! 다른 곳에 가서 먹고 오면 되지 않느냐!
‘마티오라면 분명 중간에 다시 올 거야.’
마티오 역시 데루스처럼 의심이 많기에 무조건 부하들에게만 맡기지 않는다. 언제 또 와서 정보를 풀어줄지 모르기에 대기해야 했다.
라온이 미소를 지으며 나딘 빵을 입에 넣었다. 고무를 씹는 듯한 식감과 씁쓸함을 넘어선 텁텁함이 입을 가득 채웠다. 목을 꽉 조이는 듯한 맛이었다.
-우에에에엑!
라스가 구역질을 하듯 입을 쫙 벌렸다.
-더, 더럽게 맛없느니라. 이거 만든 놈 본왕에게 걸리면 사지를 뽑아버릴 것이니라!
녀석은 죽겠다며 볼을 꽉 움켜쥐었다.
‘그 정돈가?’
라온은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먹을만한데.’
맛이 좀 애매한 건 사실이지만, 하나만 먹어도 하루종일 배가 고프지 않다는 게 무엇보다 편했다.
-펴, 평소에도 네놈을 미쳤다고 생각했지만, 그중에서도 혓바닥이 제일이니라! 네놈의 혀는 강철로 만든 게 분명하느니라!
‘그럴지도.’
라온은 배를 채운 뒤에 바다로 들어가며 전생에 배웠던 돌린 호흡법을 운용했다.
‘오랜만에 쓰네.’
돌린 호흡법은 물고기처럼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있는 호흡법으로 수면에 기포가 생기지도, 기척이 드러나지도 않기에 암살로는 제격인 기예였다.
호흡법으로 천천히 숨을 내쉬며 기척을 가라앉힌 뒤 던전이 있는 곳을 향해 잠수했다. 수평선을 따라 한참 나아가자, 지진이 난 듯 갈라진 틈이 눈에 들어왔다.
‘찾았다.’
두 개의 절벽이 교차하듯 서 있는 웅장한 협곡 아래에 사다리꼴로 보이는 틈이 하나 돋아나 있었다. 안쪽에서 강한 마나의 흐름이 뿜어지고 있었다.
‘여느라 고생했겠네.’
원래는 저 입구는 물론이고, 이 협곡 자체가 막혀 있었다. 무너지지 않게 이걸 다 뚫다니, 집착 하나는 대륙 제일인 놈이었다.
‘음….’
라온이 반대편 절벽을 타고 내려가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역시 놔뒀군.’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
예상대로 틈 속에는 그림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상대를 보니, 틈 안쪽에 호흡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 것 같았다.
‘시작해볼까.’
글래시아의 기운을 펼쳐서 던전 내부로 흘려보냈다. 던전 입구 바로 뒤에서 경계를 서는 두 명의 그림자를 지나 그 밑을 살폈다.
‘꽤 깊게 팠네.’
코시니의 말대로 이미 상당히 깊게 내려간 듯 보였다.
차갑게 식은 몬스터나 그림자의 사체가 중간중간 느껴졌다. 길과 함정들을 머릿속에 담으며 천천히 던전을 파악해나갔다.
-자, 잠깐만! 네놈 설마 계속 여기에 있으려는 것이냐?
라스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턱을 파들파들 떨었다.
‘그래. 4일은 움직이지 않을 거야.’
-이 미친! 또 굶겠다고?
‘요즘 좋은 식단법이 있더라고. 알아?’
-시, 식단법?
‘그래. 간헐적 단식이라고 일정 시간 동안 밥을 먹지 않고 버티는 거야.’
라온은 빙긋 웃으며 계속 던전 내부를 살폈다.
-이 정신 나간….
라스가 분노를 끌어 올리며 이를 바득 갈았다.
-간헐적 단식을 나흘 동안 하는 미친놈이 어디 있단 말이냐!
* * *
“라온이 바로 세피아 상회로 가지 않을 듯하던데, 괜찮을까요?”
셰릴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맛을 다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따라 가볼 걸 그랬네요.”
그녀는 아쉽다는 듯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아무리 그 반지가 있다고 해도 혹시 모를 일이 터질 수 있으니….”
로엔이 셰릴의 찻잔에 차를 따라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낭비다.”
셰릴 앞에 마주 앉은 글렌이 고개를 저었다.
“그 녀석은 광풍단의 부단주. 누군가에게 보호받아야 할 아이가 아니라, 누군가를 보호해주어야 할 무인이다.”
글렌은 찻잔을 들어 올리며 차가운 미소를 흘렸다.
“으음….”
“뭐, 그건 맞지만….”
로엔과 셰릴은 글렌의 말이 의외였던지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를 바라보았다.
“흥.”
글렌은 차를 입 안에 머금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찻잔에 가려진 그의 입매가 가늘게 떨렸다.
‘괘, 괜찮겠지.’
라온에 대한 걱정이라면 이곳에 있는 누구보다 깊게 하고 있지만, 보호받기만 하면 아이는 성장할 수 없다.
때로는 믿어주는 것도 필요한 법. 이번 육황 결투를 통해 보여준 라온의 특별함을 믿고 기다려보기로 했다.
“후우….”
가는 숨을 뱉으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을 때 문이 부서질 듯 거칠게 열렸다.
“웃기시네!”
리메르가 쿵쿵거리는 걸음으로 들어와 인상을 팍 찡그렸다.
“우리 가문 최고의 천재이자, 보물을 호위도 없이 보내다니, 정신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그는 셰릴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당연히 저 힘만 센 바보도 딸려 보냈어야지!”
“보, 보물?”
“바, 바보?”
로엔과 셰릴이 리메르를 보며 입을 떡 벌렸다.
“육황 결투 대련에서 보리니 키튼, 가로나, 카디스를 모조리 제압하고 우승해서 무력을 증명하고, 타천에게서 관객들을 구해서 인기와 협의까지 쌓은 우리 백검룡 라온 님을 안 챙기면 어떻게 하냐구요!”
리메르는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마구 저었다. 반짝이는 목걸이 열댓 개가 함께 흔들렸다.
“셰릴만이 아니라, 천검대 전체를 보내서 호위해도 모자랄 판인데, 혼자 보내다니 이해할 수가 없어!”
그는 각종 보석 반지로 가득한 양손을 펼치며 인상을 찌푸렸다.
“…라온 님? 저거 왜 저러는 거냐.”
글렌이 눈이 훼까닥 돌아간 리메르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그 타버린 도박권을 사용한 모양인데요?”
셰릴이 리메르 손과 목에 가득한 보석들을 보며 혀를 찼다.
“상황을 보니 라온 도련님이 돈을 찾게 해준 모양이군요.”
로엔은 재밌다는 듯 허허 웃었다.
“크윽, 눈치는 빨라 가지고.”
리메르가 인상을 찌푸린 채 다가갔다. 이제 보니, 머리에는 백금으로 만든 핀까지 꽂혀 있었다.
“어, 어쨌든 전 돈 때문에 라온을 챙기라는 게 아닙니다. 정말로.”
“그럼?”
“라온이 저의 재신이자, 등불이자, 빛과 소금인 건 맞지만 그 녀석의 진짜는 그 천재성이지 않습니까. 대륙십이성 중위를 모조리 꺾은 무력과 성장력은 어떤 세력이든 노릴 법한 먹이라구요! 당장 호위를 보내야 합니다! 우리의 보물을 지켜야지요!”
그는 라온에게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고 외치며 손을 들어 올렸다.
“부단주에게 무슨 호위를 하겠다고. 관심 없다.”
“라온이랑 여행이 끝났다고 바로 차원문 타고 가문까지 온 양반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윽….”
리메르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글렌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라온이 좋으면 나처럼 표현을 좀 하라구요! 뒤에서 웃어봤자 음흉한 뒷방 늙은이 밖에….”
“잡아.”
글렌의 말에 셰릴과 로엔이 번쩍이며 이동하여 리메르의 양팔을 움켜잡았다.
“어억….”
그제야 정신을 차린 리메르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아하하, 저는 그 가주님이 가장 아끼시고, 사랑하는 라온이 걱정되어서….”
“지금부터는 네 걱정을 하는 게 좋을 것이다.”
글렌의 손짓을 따라 리메르의 머리 위로 거대한 뇌기가 꿈틀거렸다.
“죽어.”
“죽어는 심하잖… 끄아아아아악!”
* * *
“이번이 마지막이겠네.”
해변에 선 코시니가 허리에 손을 올린 채 옅게 웃었다.
“문제 생기지 않게 준비 단단히 했지?”
그녀의 물음에 마티오가 인상을 찌푸렸다.
“네 할 일만 잘하면 문제가 생길 일이 없다.”
“심판도 제대로 못 봐서 부상이나 당하고 온 주제에 말은 잘하네.”
“그 주둥이는 쉬지를 않는군.”
“그러라고 있는 거니까.”
코시니가 마티오를 놀리듯이 손을 젓고서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후우….”
마티오는 긴 숨을 뱉어내고서 턱짓을 했다. 뒤에 있던 그림자들이 모두 조용히 잠수해 코시니의 뒤를 따랐다. 그는 주변을 살핀 뒤에 마지막으로 물속으로 걸어서 내려갔다.
그들이 모두 움직이고 나서 한 시간가량 지났을 때 해변 뒤에 있는 나무 아래에서 라온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시작이로군.’
-흐으으윽….
라스가 눈물을 글썽이며 라온을 돌아보았다.
-이 싸이코패스 자식….
‘뭐?’
-어떻게 인간이 3일 동안 물속에 처박혀 있고, 이틀 동안 땅속에 처박혀 있냔 말이다! 네놈이 두더지고, 참치냐고!
라온은 정말 물속에서 3일 동안 버티면서 기감으로 던전 내부를 탐색하고, 적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까지 파악했다.
그 이후에는 다시 육지로 올라와서 적들의 대화를 통해 또 다른 정보마저 얻어냈다. 거의 5일 동안 나딘 빵만 먹으며 물과 땅속에 박혀 있다 보니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라온이 라스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 정도면 보통 아닌가?’
전에 비하면 훨씬 나은데.
이전에는 암살 대상을 죽이기 위해서 연못 밑이나, 땅속에서 일주일 넘게 버틴 적도 있었다.
5일. 그것도 음식을 먹으면서 버티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본왕이 잘못 생각했느니라. 네놈은 그 광녀에게 딱 맞는 미친놈이니라!
‘농담도 그런 농담은 하는 게 아니야.’
라온이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욕을 먹는 것보다 조금 전의 말이 더 무서웠다.
-노, 농담? 무슨 농담! 본왕은 진심이니라! 괴물은 괴물끼리 만나야….
‘됐고.’
라스를 밀어내고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걸음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용히 움직여 나무 아래로 다가갔다. 그대로 위로 도약하여 나무 위에 몸을 숨기고 있는 그림자의 심장을 찔렀다.
읍….
입을 막아서 자그마한 소리도 나지 않게 제압한 뒤 그를 땅에 내려놓고, 옆으로 이동해 모래사장 속에 몸을 숨기고 있는 그림자의 목을 찔렀다.
푸욱.
모래가 바람에 날리는 소리와 함께 그림자의 생명이 꺼졌다.
라온은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고, 해변가를 움직이며 몸을 숨기고 있던 네 명의 그림자들을 모조리 제압했다.
‘일 단계는 끝났군.’
5일 넘게 숨어 있으면서 적들의 행동을 모두 봐왔기에 암살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자신과 적의 흔적을 모두 지워버린 뒤에 바다 앞에 섰다.
-다 죽일 필요 없지 않느냐? 던전을 무너뜨릴 거라면 그냥 놔두는 게 더 좋을 텐데?
‘그럼 자연스럽긴 하겠지. 하지만….
라온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로베르트 가문의 저택 쪽을 바라보았다.
‘놈을 열받게 하려면 이쪽이 더 좋아.’
자연스럽게 던전이 무너진 것보다는 내가 원하던 것을 누군지 모를 놈에게 빼앗긴 쪽이 훨씬 데루스를 화나게 만들 수 있다.
원하는 건 데루스를 계속 자극해서 단단한 가면을 깨뜨리는 것이기에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채 데루스를 공격해야 한다.
-음, 역시….
라스는 생각에 잠긴 듯 눈을 내리감았다.
‘…….’
라온은 잠시 라스를 바라보다가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물을 타듯이 천천히 헤엄을 쳐서 던전으로 향했다. 3일 전에는 반대편에서 보기만 했던 던전 입구를 향해 몸을 던졌다.
후우웅!
던전 내부로 들어가서 물이 사라지자마자, 허공을 향해 제천검을 두 번 내질렀다.
푸칵!
은신술을 사용하고 있던 그림자 두 명이 심장에서 피를 흘린 채 쓰러졌다. 기감을 이용하여 위치를 확실하게 잡았기에 조금의 실수도 없이 급소를 찌를 수 있었다.
“후우.”
라온이 던전 안으로 올라가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전에 느꼈듯이 이 안은 숨을 쉴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특이하군.’
던전 내부는 아이가 낙서한 듯이 기괴하게 갈라진 틈이 많았다. 오래되어 보이는 걸 보니, 마티오와 코시니가 만든 것 같지는 않았다.
‘일단 내려가 보는 게 좋겠…음?’
라온은 흔적들을 눈에 담으며 마티오가 뚫어놓은 길을 따라가려다가 우뚝 멈춰 섰다.
‘뭐지?’
마티오가 만든 계단 바로 옆의 틈을 본 순간 불의 고리와 만화공이 동시에 일어났다.
고오오오오!
두 연공법이 동시에 출렁이며 뇌리에 하나의 이미지를 그려냈다. 불꽃의 검을 든 금발의 기사가 이곳에서 누군가와 싸우는 듯한 장면이었다.
‘설마….’
이곳에도 왔었던 건가?
꿀꺽.
라온이 마른침을 삼켰다.
‘이건 그냥 틈이 아니라, 검흔이었어.’
조금 전 이미지를 보여준 검흔을 향해 손을 얹고 만화공을 일으켰다.
화아아아아아!
불의 고리를 통해 정화된 시뻘건 불꽃이 던전 내부에 돋아난 무수한 검흔 사이로 스며들더니, 벽이 부드럽게 가라앉고, 새로운 길이 열렸다.
-허?
“아!”
라온은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은 회색 통로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제 길 안내까지 해주시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