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340화 (340/653)

제340화

라온이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사자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갑자기 사자라니….’

혹시 몰라서 도리안에게 받은 아공간 주머니에 채소, 과일, 견과류, 곡식, 과자, 초콜릿에 사탕까지 가져왔건만 아무 소용도 없게 되었다.

‘망했어.’

토끼는 과일이라도 가져갈 수 있었지. 이 주머니 안에 사자가 먹을 만한 먹이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저 거대한 주둥이에 초콜릿을 넣을 수는 없지 않은가.

‘팔이라도 뜯겨줘야 하나?’

너무 예상 밖의 일이다 보니 내 살을 줘야 하나 어처구니없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니, 근데 왜 사자야?’

인적이 드물다고 해도 이곳에는 작은 호수와 그리 깊지 않은 숲밖에 없었다. 사자가 왜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다. 정말이지 알 수 없는 여자다.

-저, 저거 정말 제정신이 아니니라….

라스가 멀린이 깃든 사자를 쏘아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본왕을 쫓아다닌 그 녀석도 기괴했지만, 저건 한술 더 뜨고 있느니라! 다음에는 코끼리가 되어서 나타날지도 모른다. 지금 죽여야 한다!

녀석은 찌르라고 손짓하며 어깨를 떨었다.

‘맞아.’

라온이 라스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멀린이 미친 거지. 내 잘못은 아니잖아.’

사자의 모습으로 튀어나온 것도, 먹이를 주어야 하는 것도 본래 멀린의 일이다.

먹이를 주는 일이 반복되어서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고민할 게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넘어갈 뻔했네.’

라온이 멀린을 굽어보며 당당하게 허리를 폈다.

“후후.”

멀린이 눈앞에서 멈춰서서 우아하게 주저앉았다. 지금 보니 사자도 그냥 사자가 아니라, 갈기가 있는 수사자였다. 더 어이가 없다.

“이번엔 왜 사자의 모습으로 나타난 거지?”

다른 무엇보다도 궁금한 것을 물었다.

“전에 말했지만, 난 일방적인 지배를 하는 게 아니야. 서로가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거래를 하는 거지.”

“그럼 그 녀석도….”

“그래. 이 아이도 바라는 게 있다는 뜻이야.”

멀린은 사자의 모습으로 윙크를 했다. 팔뚝에 닭살이 돋아올랐다.

“그 바람 네가 직접 들어주고 사라져.”

라온이 인상을 팍 찡그렸다. 먹이로 줄 게 있었다면 주었겠지만, 저 사자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잘 봤어.”

멀린은 역시나 답을 하지 않고, 본인이 할 말 만을 뱉었다.

“이번에는 너답지 않더구나.”

그녀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지금까지의 넌 많은 피를 보는 걸 피해왔어. 살인을 할 때도 압도적인 힘을 드러내서 적이 덤빌 수 없게 만들었지.”

그 말이 맞았다. 살인 자체가 두려운 건 아니지만, 필요 없는 살생은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적을 죽이는 걸 망설이지 않더구나. 오싹할 정도의 살기였어.”

멀린은 말을 하며 혓바닥으로 본인의 발을 핥았다. 고양잇과 동물 특유의 그루밍이었다.

“후우….”

라온이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미치겠네.’

진지한 이야기를 하면서 사자가 혀를 날름거리는 것을 보려니 집중이 되질 않았다.

“특히 책임자로 보이는 남자는 필요 이상으로 잔인하게 죽였지. 네게 그런 독기가 있을 줄은 몰랐어.”

“그래서 실망했다는 건가?”

“아니.”

멀린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흥분했어. 너무 달아올라서 손이 땀으로 흥건해질 정도였지.”

“으….”

“넌 깔끔한 것도, 진중한 것도 그리고 잔인한 것도 어울려. 언제 봐도 최고야….”

그녀가 깃들어 있는 사자의 뺨이 붉게 달아오르고, 손발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본체의 감정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

쯧.

라온이 짧게 혀를 찼다.

‘이대로 물러나 줬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까지 멀린이 직접 누군가를 죽인 것을 못 봤기에 혹시나 피를 싫어하나 했지만, 아니었다.

그녀는 어떤 걸 보아도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지, 진짜 광녀이니라! 제대로 돌았어!

라스가 신음을 흘리다가 얼음꽃 팔찌로 도망갔다.

“그래서 이번에는 또 무슨 부탁을 하려고?”

멀린은 뭐든 말만 하라는 듯 턱을 끄덕였다.

“부탁 따위는 없어.”

라온이 고개를 저으며 손을 뻗었다.

“네 소원을 말해. 시간을 끌 생각 따위는 없으니, 여기서 듣고 결정하겠다.”

“소원이라.”

멀린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한 발짝 다가왔다. 동물의 얼굴로 저리 표정을 잘 표현하는 게 신기했다.

“내 소원은….”

그녀는 말을 끊고 이쪽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할지 상상이 안 가.’

라스의 말대로 정신이 나가 있는 여자라 무슨 소원을 빌지 전혀 예측이 안 되었다. 긴장하며 멀린의 입을 바라보았다.

“포옹 한 번 해줘.”

“어엉?”

“포옹 몰라? 포옹.”

멀린은 두꺼운 앞발을 들어 휘휘 저었다. 맞으면 살점이 뜯겨나갈 앞발로 포옹하는 모습을 보여주니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 모습으로?”

“그래. 이 상태에도 감각은 전해지거든. 어쩔 수 없으니, 지금은 이걸로 참으려고. 충분히 들어줄 수 있는 소원이지?”

그녀는 거부할 수 없을 거라며 웃었다.

‘그 말은 맞아.’

누구를 죽이라거나, 정보를 팔라거나 하면 바로 거절할 수 있지만, 포옹 정도는 상관없었다. 특히 직접 하는 게 아니니 더더욱.

‘다만….’

이전처럼 납치할 수도 있지.

전처럼 아티팩트를 이용해서 데리고 갈 가능성도 있기에 무조건 받아서는 안 되었다.

“영혼과 육체를 걸고 맹세할게. 너한테 위해가 되는 행동은 절대 안 해.”

멀린이 손을 들어 올리는 순간 그녀의 주변에서 마나의 파동이 일어났다. 스스로 제약을 걸어버리는 영육의 계약이었다.

“네가 아니라, 사자의 영혼과 육체에 충격이 가해지는 거 아니야?”

“절대.”

멀린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저 말이 맞느니라.

라스가 팔찌 위로 머리를 쓱 올렸다.

-저건 본인의 육체와 영혼에 거는 맹약.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저 광녀의 육체와 영혼에 큰 충격이 가해질 것이니라. 그래서….

녀석이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더 무섭다고! 저거 진짜 돌았느니라!

“…좋아.”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했던 말이 있기에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우후후.”

멀린은 빨리 오라는 듯 앞발을 까딱였다.

“기대되네.”

“하아아….”

라온은 깊게 한숨을 내쉬고 멀린의 앞에 섰다. 사자가 꽤 컸기에 무릎을 조금만 굽혔다.

‘한 번만 참자.’

눈을 딱 감고 멀린을. 아니, 사자를 끌어안았다. 갈기는 푹신했지만, 피부는 사포처럼 꺼끌거렸다.

‘딱 3초만.’

3초만 세고 떨어지려고 할 때 갑자기 사자의 몸이 푸딩처럼 부드러워지며 얇아지기 시작했다.

-야! 야! 야 인마!

‘뭐, 뭐지?’

라스의 다급한 부름과 함께 눈을 뜨자, 사자는 사라지고 노파의 가면을 쓰고 있는 멀린이 눈앞에 있었다. 그녀의 청초한 향기가 코를 간지럽혔다.

“좋네. 오늘 밤은 좋은 꿈을 꾸겠어.”

“너!”

라온이 이를 악물며 멀린을 밀어냈다.

“우후후후!”

멀린은 뒤로 훌쩍 물러서며 손을 저었다.

“역시 사람의 온기는 직접 느껴야지.”

“맹세를 해 놓고 이딴 짓을….”

“네게 위해를 가하지는 않았잖아.”

그녀는 괜찮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허….”

라온이 헛바람을 뱉었다. 그 말대로 위해는 아니기에 맹약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함께 하는 동안 즐거웠어.”

그녀는 허공으로 떠오르며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일이 있어서 한동안 못 보겠지만, 네 활약을 기대하고 있을게.”

그 말을 마지막으로 멀린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졌다.

라온이 헛웃음을 흘리며 어깨를 축 내렸다.

‘피곤해.’

하루 종일 달렸던 것보다 지금이 더 피곤해졌다.

그래도….

“사자 먹이는 안 줘도 되겠네.”

멀린이 사라진 덕분에 사자에게 먹이를 줄 필요는 없어졌다는 게 기뻤다.

“다행이야.”

-그게 다 저 광녀의 계획이니라!

라스가 슬쩍 머리를 들어 올리며 눈동자를 굴렸다.

-본왕이 보건데, 저 광녀의 대가리에는 뇌 대신 네놈의 초상화가 걸려 있을 것이니라!

녀석은 오싹하다고 말하며 눈동자를 떨었다.

-이제 네놈의 몸 따윈 필요 없느니라….

그 정도야?

*     *      *

겉으로는 아이들의 웃음이, 속으로는 비명이 가득했던 보육원 구름의 집.

이젠 황량한 흉가가 된 그곳을 지키는 건 오웬의 기사들이었다.

“이 보육원이 암살자를 키우는 곳이었다니, 아직도 믿기지 않아.”

금발 기사가 구름의 집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독하지. 아이들을 납치해서 암살자로 키운다는 건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었는데….”

흑발의 기사가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저었다.

“지독하다는 말로도 부족해. 이 일을 지시한 놈은 인간의 탈을 쓴 악마일 테니까.”

“그래. 사람이 할 수 없는 생각이지.”

두 기사가 아이들을 암살자로 키운 원흉을 떠올리며 이를 갈고 있을 때 카멜룬이 있는 방향에서 두 명의 기사가 다가오고 있었다. 교대하기 위해서 온 인원이었다.

“정지! 정지! 정지!”

금발의 기사가 검을 뽑아서 다가오는 기사에게 겨누었다.

“손들어! 움직이면 벤다!”

그 말에 이쪽으로 오던 기사들이 손을 들어 올렸다.

“누구냐.”

“아, 나야. 네 동기.”

키가 큰 기사가 투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맥주.”

“치킨.”

암구호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금발의 기사가 검을 내렸다.

“고생했다.”

새로 온 기사들은 근무를 서고 있던 기사들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애들은 어때?”

금발 기사가 장비를 챙기고, 새로 온 기사들에게 물었다.

“똑같아. 말도 안 하고, 웃지도 않고, 기계처럼 지시대로만 움직여.”

“보고 있으면 안쓰러워서 죽겠어.”

교대를 위해 온 기사들이 혀를 찼다.

“자연스럽게 나을 수는 없는 건가?”

“세뇌에 걸린 시간이 길었으니까.”

“세뇌를 치료할 사람이 온다고 했으니, 기다려 봐야지.”

기사들은 인형처럼 멍한 아이들의 눈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이런 짓을 한 악마 새끼가 내 앞에 있었다면 바로 썰어버렸을 텐데.”

“아서라. 너는…음?”

금발 기사가 손을 젓다가 뒤를 돌았다.

뚜벅.

검은 피풍의를 두른 키가 큰 남자 하나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얼굴에는 눈까지 가려진 회색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동공의 색이 하얀색인 기괴한 모습이었다.

“정지! 정지! 정지!”

새로 근무를 서게 된 기사들이 검을 뽑았지만, 남자는 멈추지 않고 계속 다가왔다.

“멈춰!”

“그 이상 다가오면 벤다!”

네 명의 기사들이 모두 검을 뽑고, 살기를 일으켰지만 남자는 걸음은 계속 이어졌다.

“나다.”

그는 피풍의 위로 손을 들어 올렸다.

“뭐?”

“이곳을 운영한 게 나라고 했다.”

남자의 입가에서 섬뜩한 미소가 피어났다.

“이 미친!”

“쳐!”

네 명의 기사들이 동시에 움직였다. 평소 수련한 합격진을 운용하여 네 방향에서 달려들어 짙은 검기를 벋어냈다.

푸카아아아악!

남자가 들어 올린 손을 천천히 내리자, 기사들의 몸이 수십 조각으로 잘려 바닥에 흩어졌다. 검술, 오러 같은 게 아니라, 처음부터 그런 결과가 정해진 듯한 모습이었다.

“버러지들.”

그가 손가락을 빙글 돌리자, 기사들의 시체와 핏물이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사람의 흔적 따윈 보이지 않았다.

남자가 보육원 건물 앞에 서자, 그의 뒤로 복면을 쓴 흑의인들이 그림자처럼 솟아올랐다.

남자가 가면을 벗자, 오싹할 정도로 차가운 데루스 로베르트의 얼굴이 드러났다.

“시작해.”

그의 지시에 그림자들이 이곳저곳으로 흩어져서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데루스는 명령을 내린 뒤 직접 보육원으로 들어갔다. 그는 칼날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닥과 벽 그리고 이곳에 남아있던 오러의 잔향마저 살폈다.

그는 보육원 건물에 이어 지하 공동과 비밀 통로까지 모조리 훑어 내린 뒤 다시 보육원으로 올라왔다.

‘아무런 흔적도 없어.’

보리니 키튼은 기사 중의 기사. 너무 고고한 성격이기에 그는 이번 일을 이렇게 깔끔하게 해결할 수 없다. 분명 흙탕물을 뒤집어쓴 적 있는 음지의 인간이 함께했을 텐데, 그에 대한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건 말이 안 되는데….’

아무리 기사들이 휘젓고 갔다고 해도 인간인 이상 흔적은 남는 법인데, 이곳에 남은 흔적은 그림자와 기사들뿐이다. 중간에 끼어든 그 존재의 기척이 완전히 지워져 있었다.

“사육장 외곽, 흔적 없습니다.”

“사육장 내부, 흔적 없습니다.”

“외부와 내부 통로, 흔적 없습니다.”

그림자들이 보고를 할 때마다 데루스의 이마에 힘줄이 올라왔다.

고오오오오오!

데루스 로베르트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피어난다. 오웬에서부터 참고, 참고 또 참았던 그의 인내가 깨지고 분노가 넘쳐 나오기 시작했다.

쿠와아아아아아앙!

그의 눈빛에서 공허한 회색빛이 뿜어진 순간 보육원과 그 밑에 있던 지하공간이 통째로 주저앉으며 가루가 되었다.

후우우우웅!

흩날리는 모래 폭풍 속에서 데루스가 장갑을 벗었다. 그는 손등에서 흘러내리는 핏물을 입술에 바르며 턱을 치켜들었다.

“죽여주마.”

데루스 로베르트는 피가 말라붙을 듯한 건조한 눈동자로 세상을 굽어보며 오싹한 미소를 흘렸다.

“어디에 있건, 어떤 놈이건 모조리….”

*     *      *

라온은 새로운 신분을 이용하여 차원 관문까지 타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일부러 로베르트 가문과 상당히 떨어진 곳으로 이동한 뒤에 보법과 말을 번갈아 사용하며 로베르트의 영지에 이르렀다.

예상보다 훨씬 빨리 도착했지만, 그런 생각 따위는 들지 않았다. 온 감각이 보는 건 저 멀리 있는 로베르트 가문뿐이었다.

‘20년만인가….’

에메랄드빛 바다처럼 아름다우면서도 우아함을 간직한 저택들. 고고한 기상을 뿜어내는 검사들. 밑에서부터 가문을 받치는 가신들까지.

아롱져서 떨어지는 햇살처럼 따스한 저 장소에 자신의 자리는 단 하나도 없었다. 무엇 하나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내가 있던 곳은 시궁창이었으니까.’

저곳은 양지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것. 자신은 지하에 처박혀 송곳니를 갈기만 하는 사냥개일 뿐이었다.

고오오오오.

영혼의 깊고 깊은 밑바닥에서부터 분노가 끓어오른다. 혈관을 통해 퍼지는 분노가 전신을 잠식하려 할 때 불의 고리를 운용하며 흩어버렸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

이 분노는 허무하게 풀어버릴 것이 아니다. 데루스와 놈을 따르는 간부들에게 하나하나 갚아주어야 할 소중하고 귀한 감정들이었다.

-저런 코딱지만 한 집이 뭐가 볼 게 있다고 한 시간 째 서 있는 것이냐! 지루해 죽겠느니라!

라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소매를 잡았다.

-촌놈 같으니! 나중에 본왕의 성을 본다면 네놈은 턱이 빠질 것이니라!

‘그럴지도 모르지.’

라온이 피식 웃었다. 이 녀석 덕분에 가라앉던 기분이 조금이지만 풀렸다.

-지루하니, 이곳의 향토 음식이나 대접하거라! 아까부터 맛 좋은 냄새가 나서 참지를 못하겠느니라!

라스는 해조류가 먹고 싶다며 여러 음식점들을 향해 손짓했다.

‘알겠어.’

어차피 밥때니까.

라온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마지막으로 로베르트 가문의 저택을 눈에 박은 뒤 떠나려고 할 때 적발의 아이가 다가왔다.

“멋지죠?”

“음?”

“저 저택이요. 1시간째 저것만 보고 있었잖아요.”

그는 계속 로베르트 가문을 보고 있어서 다가왔던 것 같다.

“그래. 멋지네.”

로베르트 가문의 건물들이 지그하르트보다도 우아한 건 사실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저곳의 검사가 될 거예요!”

자랑하듯이 말하는 것을 보니, 아이는 자신이 로베르트 가문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천검성님처럼 남방을 지키는 대륙 최고의 검사가 될 거라구요!”

라온이 시선을 내려 아이를 제대로 보았다. 1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아이의 허리춤에는 목검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파인과 비슷하군.’

이번에 보육원에서 구해주었던 아이들과 차이가 없어보이는 나이였다.

하지만 표정은 너무 달랐다.

10대 초반 특유의 장난기가 깃든 이 아이와 달리 달리 파인을 비롯한 아이들은 우러라오는 표정을 짓지 못 했다.

같은 나이. 같은 인간이지만, 한 악마의 의해서 인격 자체가 지워진 것이다.

그런 일을 저지른 악마를 닮고 싶어하는 아이에게 해줄 말이 없다는 게 서글퍼졌다.

덕분에 다시 한번 알게 되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그런가.”

라온이 미소를 지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열심히 해라.”

*     *      *

라온은 라스가 원하는 대로 바닷가재 피자, 문어 스테이크, 철판 오징어 구이, 칠리 새우, 감바스에 구슬 아이스크림까지 먹고 나서 해저 던전이 있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웬일인 것이냐!

라스가 헤죽헤죽 웃으며 어깨를 주물렀다. 기분 좋다의 최상급 표현이었다.

-이제야 본왕의 밑에 들어올 마음이 생긴 것이로군!

맛 좋은 음식을 마음껏 즐긴 라스의 음색은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 맑았다. 이런 목소리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됐다구요.’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라스가 원하는 대로 먹어준 건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녀석의 밑에 들어갈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조만간 난리가 날 테니 빨리 움직이는 게 좋겠네.

끝없이 수다를 떠는 라스를 무시하고, 동쪽 해안을 따라 움직였다. 로베르트 가문 주변에는 관광객이 많았지만, 이동할수록 사람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제 준비를 해야겠군.’

라온은 이곳의 주민처럼 남방 사람들이 입는 옷으로 갈아입은 뒤 기척을 가라앉혔다. 바로 옆에 있어도 존재감을 느끼기 힘들 정도로 존재감을 죽인 뒤에 다시 해안을 따라 움직였다.

그렇게 하루종일 움직이니, 해양 몬스터가 나온다는 푯말과 출입 금지를 알리는 라인이 나타났다.

‘여기다.’

20년도 더 전이지만, 해안의 모습이 그리 변하지 않았기에 던전의 위치가 떠올랐다.

‘더 확실한 점은….’

모래사장과 나무를 보며 찬 미소를 지었다. 이곳을 지키는 그림자들의 존재. 모래사장과 나무 사이에 숨어 있는 그림자들 덕분에 더 확실해졌다.

이 앞의 바다 아래에 그 던전이 가라앉아 있는 게 분명했다.

고오오오.

라온은 더욱더 기척을 죽였다. 생물이 아니라, 흩날리는 모래로 느껴지도록 신체 기관의 박동마처 최소한으로 죽인 뒤에 조용히 바다를 바라보았다.

하루가 지나고, 밤이 되었음에도 라온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자세로 바다를 지켜보았다. 그의 앞에 숨은 그림자들이 못 참고 몸을 움직여도 라온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으으으! 지켜워 죽겠느니라! 배도 고프고!

라스가 참지 못하고 빽 소리를 질렀다.

-하루종일 꼼짝도 못 하고 밥도 안 주는 건 고문이니라!

‘그래서 이틀 전에 많이 먹여줬잖아.’

-어억….

녀석이 입을 떡 벌렸다.

-웨, 웬일로 먹고 싶은 걸 다 사줬나 했더니….

‘이렇게 될 거 같아서 미리 챙겨준 거지.’

-필요 없느니라! 삼시세끼 그냥 꼬박꼬박 먹는 게 더 행복하느니라!

‘그럼 나딘 빵이라도?’

-그건 배만 부른 고무잖아! 이 미친놈아!

‘배고프다면.’

-그걸 먹고 배를 채우느니, 차라리 바닷물을 마시겠다!

‘오, 그거 좋은데?’

-아, 아니야! 실수했느니라!

라스가 고개를 홱홱 저었다. 진짜 할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라온이 피식 웃으며 다시 바다를 바라보았다.

-이 악덕 업주 놈아! 주간 근로 시간 위반이니라! 밥도 안 줬으니, 식품위생법도 위반했다고!

‘식품위생법은 그럴 때 쓰는 게 아니라… 조용!’

라스의 입을 막으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틀만에 바닷가에서 누군가가 나오고 있었다.

찰팍.

바다에서 복면인 서른 명과 마법사로 보이는 여성, 그리고 키가 큰 흑의인이 조심스럽게 걸어 나왔다.

‘역시 있었군.’

마티오.

예상했던 대로 데루스가 다른 곳에 가 있는 동안 던전을 탐색하는 건 음지의 집사 마티오였다.

‘던전 붕괴에 이어서…’

라온의 눈동자에 짙은 적광이 번쩍였다.

‘복수도 할 수 있겠어.’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