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9화
라온과 도리안은 비밀 통로를 빠져나와 다시 보육원이 내려다 보이는 구릉으로 올라갔다.
“진짜 죽는 줄 알았네.”
도리안은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닦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무 긴장했는지 머리가 멍해요.”
아이들을 지키느라 무리했는지 그의 눈동자는 탁하게 풀려 있었다.
“다친 곳에 약이나 발라.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상처가 남으니까.”
라온은 입고 있던 바람막이를 벗으며 손짓을 했다.
“아, 그래야죠.”
도리안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배 주머니에서 하얀색 약품 상자를 꺼냈다. 그는 상자 속에서 소독약과 상처약, 내상약을 우르르 꺼내서 바닥에 내려놓았다.
“부단주님부터 바르세요.”
“난 안 다쳤는데?”
“예에?”
도리안이 입을 떡 벌렸다.
“마, 마스터도 있었다면서요.”
“금방 끝냈어.”
라온이 허리춤의 장검을 툭 두드렸다.
“마스터 하급이라 그리 어렵지 않았거든.”
“아, 아무리 하급이라고 해도 마스터는 마스터잖아요! 마스터를 그렇게 쉽게 잡을 수가 있어요?”
“응.”
“흐, 흔적도 안 남기고?”
“그래.”
도리안의 의문이 이상한 건 아니다. 지금 자신의 경지는 마스터 중급. 아무리 상급에 가까운 경지라고 해도 하급을 쉽게 상대할 수는 없으니까.
‘다만….’
난 가능하지.
자신의 실제 무력은 상급을 넘어서 있었고, 리스본의 움직임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잡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허우….”
도리안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바람을 내뱉었다.
“부단주님하고 대화하면 매번 상식이 깨지는 느낌이에요.”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서 상처에 약을 바르기 시작했다.
-흥!
라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본왕이었다면 그딴 녀석 손가락. 아니, 혓바닥으로도 죽였을 것이니라! 고작 검으로 죽여놓고 잘난척하지 말거라!
녀석은 부하라고 생각하는 도리안이 감탄한 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매번 느끼지만, 마왕 주제에 속은 밴댕이보다 좁다.
“그냥 평범해. 별거 아니야.”
다만 틀린 말은 아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평범하면 전 죽어야 해요.”
도리안이 약의 뚜껑을 닫으며 울상을 지었다.
“전에도 말했잖아. 사람마다 잘하는 게 다르다고.”
라온은 피식 웃으며 피에 젖은 바람막이를 땅에 묻은 뒤 연기가 나지 않도록 단숨에 태워버렸다. 많은 피가 묻었기에 지우기보다는 아예 없애버리는 게 나았다.
타버린 바람막이의 흔적을 모두 지운 뒤에 품에서 두 권의 책자를 꺼냈다.
‘예상치 못한 전리품이었어.’
이 두 책자에는 보육원과 거래를 한 발카르, 오웬, 카멜룬 간부들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아직은 증거가 많지 않아서 사용해도 데루스를 끌어낼 수는 없지만, 훗날 놈의 진짜 모습을 밝히는 데 큰 도움이 되어 줄 것이다.
‘그리고….’
이게 진짜지.
라온이 주머니에서 푸른 구슬을 꺼냈다. 구슬 속에는 작대기가 하나 새겨져 있었다.
‘이 유물을 그곳에 숨겨두고 있었다니.’
이 구슬은 고대의 유물 중 하나로 가지고만 있어도 수속성 마나의 위력을 상승시켜주는 아티팩트였다. 하급이지만, 글래시아의 기운이 강해진 게 확실하게 느껴졌다.
‘여전한가 보네.’
데루스 로베르트는 이 유물을 찾기 위한 조사대를 따로 만들 정도로 수색에 열심이었다.
하급이라서 이곳에 있었을 뿐이지, 상급 이상은 전부 놈이 직접 관리하고 있었다.
‘잘 쓸게.’
라온은 구슬을 품에 넣으며 죽은 리스본에게 비웃음을 보냈다.
구릉 위에 있던 모든 흔적을 깔끔하게 정리했을 때 보육원 입구에서 기사와 아이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부단주님!”
상처를 치료한 도리안이 아래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아이들의 얼굴을 살폈다. 가장 앞에는 파인이 있었는데, 불안해하면서도 약간의 기대감이 깃든 눈빛이었다.
“봐요! 애들이 제 과자를 들고 있어요!”
도리안은 아이들이 품에 안고 있는 과자와 사탕을 가리키며 웃었다. 녀석이 제일 좋아하는 간식들인데, 다 나눠줬음에도 굉장히 기뻐 보였다.
“수고했어.”
도리안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따지고 보면 그에게는 남의 일이었음에도 전력을 다해 도와주었다는 게 고마웠다.
‘나오는군.’
보육원에서 마지막으로 나온 사람은 보리니 키튼이었는데, 그는 여러 가지로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그리고 부탁합니다.’
솔직히 보리니 키튼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이곳에서 아이를 맡길 만한 사람은 그뿐이었다.
“치료할 수 있겠죠?”
도리안은 자근자근 걸어가는 아이들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목소리가 물기에 젖은 것을 보니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 같았다.
-당연하느니라!
라스가 코를 훌쩍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안 되면 본왕이 어떻게 해서든 해결할 것이니라! 걱정하지 마라!
주변에 있는 사람 중 가장 마음이 여린 녀석들이라 잘 통했다. 둘이 만나게 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래. 어떻게 해서든 치료할 거야.”
라온이 도리안과 라스를 차례로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을 찾아주겠다고 약속했잖아.”
조금 밝아진 아이들의 표정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일한 친구를 죽이는 투쟁식이 열리지 않았기에 세뇌는 완성되지 않았다.
지금의 페드릭이라면 저 아이들을 분명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데루스에게도 신호가 갔겠지.’
데루스는 심복이라고 해도 믿지 않는다. 리스본에게도 레이지 웜을 심었을 테니, 지금쯤이면 놈도 그의 죽음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직접 이곳에 오겠지.’
그런 놈이니까.
남을 믿지 않는 인간답게 데루스는 이곳에 직접 와서 모든 흔적을 확인할 것이다.
노리는 건 바로 그 시간.
‘네가 여기에서 시간 낭비를 하는동안….’
라온의 눈동자에 차디찬 냉기가 번쩍였다.
네 보물을 가져가 주지.
* * *
발카르 왕국의 기둥 중 하나라 불리는 바비룬 공작의 영지. 그 거대한 공간의 중심에 있는 연회장에서 부드러우면서도 청아한 음률이 흘러나왔다.
데루스는 그 연회장에서 바비룬 공작과 가벼운 술자리를 가지고 있었다.
“아들의 팔을 자른 놈을 그냥 보내시다니, 역시 대범하시군요.”
바비룬 공작이 백금만큼이나 귀하다는 루나틱이라는 이름의 포도주를 따라주며 미소를 지었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니까요.”
데루스는 인자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아이의 살기가 진하기는 했지만, 아직 어린 나이이니 이해해야지요. 가장 큰 문제는 그걸 받지 못한 제 아들놈이지 않겠습니까.”
그는 교묘하게 라온을 까 내리고, 본인의 대범함을 드러냈다.
“그게 대단하다는 겁니다. 저라면 그 라온이라는 녀석의 팔을 똑같이 잘라놓았을 겁니다!”
바비룬 공작은 그 자리에 없었던 게 아쉽다며 인상을 찌푸렸다.
“어린 녀석이 벌써부터 명성에 취해 함부로 칼을 휘두르는 꼴을 보니,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겁니다.”
“그런 말씀은 자제하시는 게….”
“제가 화가 나서 그럽니다! 파랑검이 보통 인재도 아니고, 그렇게 흉폭하게 팔을 자르다니! 싹수가 노란 놈입니다!”
“대신 이렇게 공작님과 만나서 즐겁게 대화를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데루스는 빙긋 웃으며 바비룬 공작의 어깨를 두드렸다.
“허허, 아닙니다. 제가 영광이지요.”
바비룬 공작이 고개를 숙이며 입술을 살짝 비틀었다.
“파랑검의 어깨는 저희가 책임지고 정상으로 돌려보도록 하겠습니다. 계속 연구해온 회진 마법이라면 분명 차도를 보일 겁니다.”
바비룬의 마법사들은 치료의 스페셜 리스트. 바비룬 공작이 이렇게 말한다면 시간은 걸려도 충분히 고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로베르트와 바비룬이 좋은 관계가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물론이지…요.”
데루스가 바비룬 공작에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멈춰 섰다.
‘레이지 웜이?’
조금 전 자신의 머리에 있는 레이지 웜의 모고에 떨림이 있었다. 감각으로 보니, 리스본에게 넣어둔 레이지 웜이 죽은 것 같았다.
지금 시대에 레이지 웜만 제거하는 방법 따위는 없다. 레이지 웜이 죽었다는 건 9번 사육장을 관리하는 리스본에게도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이게 갑자기 무슨….’
9번 사육장은 아직 그림자의 자격을 얻지 못한 아이들을 사육하는 곳이다. 특히 조심히 운영하는 그곳에서 이변이 발생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쯧.
데루스는 들리지 않게 혀를 차고서 뒤에 있는 집사 레젤에게 의념을 보냈다.
[레젤.]
-예. 가주님.
레젤은 조금의 미동도 없이 오러 메시지로 답해왔다.
[9번 사육장의 상태를 확인하고 오도록.]
-예.
그는 갑작스러운 지시에도 의문을 품지 않았다. 조용히 물러나서 연회장 밖으로 나갔다.
“발카르와 로베르트. 아니, 바비룬과 로베르트는 앞으로도 계속 친구가 될 수 있을 겁니다.”
데루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바비룬 공작과 잔을 부딪쳤다.
캬앙.
맑게 울리는 잔소리와 달리 그의 가슴에선 어둠이 스며 내리는 기괴한 울림이 일었다.
* * *
데루스는 연회를 끝낸 후 공작이 숙소로 내준 별채로 향했다. 레젤은 이미 정보를 모아온 듯 입구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무, 문제가 생겼습니다.”
레젤의 목소리는 드물게도 격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9번 사육장에 연락이 닿질 않았습니다.”
“그게 끝은 아니겠지.”
데루스가 차가운 눈동자로 레젤을 굽어보았다.
“예. 근처에 있던 그림자에게 명령을 내려서 사육장을 확인하라고 지시를 내렸는데….”
레젤이 말을 멈추고 식은땀을 흘렸다.
“사육장에서 오웬 왕국의 기사들이 나왔다고 합니다.”
“오웬? 그놈들이 왜!”
“거기까지는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보리니 키튼과 은기사들이 어린 개들을 데리고 오웬으로 향했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데루스 로베르트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카벨이랑, 리스본은!”
“보육원에서 살아남은 그림자는 한 명도 없습니다. 반면 어린 개들은 전부 살았다고 합니다.”
레젤은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이게 말이 되는 건가?’
9번 사육장의 위치가 들킨 것도 모자라, 리스본과 카벨은 죽고, 어린 개들이 모조리 살았다니, 이건 자신이 아는 상식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무언가가 어긋났어.’
리스본과 카벨이 죽을 수는 있다. 하지만 절대 그냥 죽지는 않는다. 교육된 대로 보육원 전체를 터트려서 모든 증거와 개들을 지워야 하건만 놈은 그것조차 못하고 허무하게 죽은 것 같았다.
“오웬 왕성에도 그림자는 있잖아! 보고된 건 없는 건가?”
“보, 보리니 키튼이 은기사 중에서도 심복들만 데리고 나갔다고 합니다. 어디에 가는지를 알리지 않아서 정보가 아예 없었다고….”
“…….”
데루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언제 습격을 당한 거지?”
“오늘 밤이었다고 합니다.”
“그럼 투쟁식도 열리지 않은 건가?”
“예. 그곳에 있던 모든 개들이 살아 있습니다.”
레젤이 입술을 깨물며 눈을 내리감았다.
“하.”
데루스가 헛웃음을 흘렸다.
“크하하하하하하!”
그는 드물게도 상스러운 웃음을 터트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한참 동안 폭소를 터트린 그가 테이블을 잡았다.
찌이이이잉!
금속으로 만든 금빛 테이블과 주변의 잡기들이 한순간에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조사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놈이 끼어들었는지. 모조리.”
데루스의 표정은 연회장에 있을 때와 그리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의 눈동자는 물기가 모조리 증발한 듯 건조하게 가라앉았다.
“못 찾는다면 오웬과 카멜룬에 처박힌 돼지들의 목을 모조리 날린다고 전해.”
* * *
라온은 도리안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가 모트런이라는 도시에 도착했다.
이 도시는 서남에 있는 세피아 상회 총단과 남쪽에 있는 로베르트 가문으로 갈 수 있는 교차로 같은 곳이었다.
“여기까지 오니까. 조금 긴장되네요.”
도리안이 숙소에 짐을 풀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게 어떨까요? 아이들도 잘 지내는지 궁금하고….”
“안 돼.”
라온은 도망치려는 도리안의 어깨를 잡고 그대로 내쳤다.
“우흑….”
도리안은 바닥에 엎어지며 훌쩍였다.
“진짜 저 반겨주는 사람이 없을 거라니까요!”
저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듣던 대로 매일 같이 구박만 받으며 살았던 것 같다.
“집에서도 욕먹는 모습 보여주기 싫어요!”
“그걸 못 하게 하려고 가는 거다.”
라온의 나지막한 말에 도리안이 고개를 흔들던 도리안이 우뚝 멈췄다.
“예?”
“광풍단의 일원이 집안에서 구박만 받게 놔둘 수는 없잖아?”
가장 큰 목적은 데루스가 심혈을 기울이고 있을 해저 던전을 깨부수는 것이지만, 도리안의 본가에 가는 것도 대충 넘길 생각은 없다. 세피아 상회에 가서 도리안을 우습게 본 놈들을 확실하게 조질 생각이었다.
“아….”
도리안은 그런 쪽은 생각도 못 했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하, 하지만 저희 상회는 5대 상회….”
“걱정 마. 난 육황 지그하르트의 부단주니까.”
라온이 옅게 웃으며 도리안의 어깨를 툭 쳤다.
“그, 그건 그렇죠. 백검룡이라는 이명도 받으셨으니….”
도리안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최근 가장 유망하다는 광풍단 부단주에, 어린 무인 중 최강이라는 용의 칭호. 그 누구도 라온을 우습게 볼 수가 없을 것이다.
“넌 여기서 물건 보급이나 하고 있어. 난 며칠 동안 나갔다 올 테니까.”
“예? 어딜 가시는데요?”
“아이들을 못 건드리게 할 조치.”
라온이 서늘한 눈빛을 발하며 일어섰다.
“저, 저도 도울 수 있는 거면 도울게요!”
도리안이 아이들을 구하고 싶다며 따라 나왔다.
“아니, 이건 나 혼자 해야 해.”
해저 던전에는 마티오나 그와 비슷한 급의 간부가 들어가 있을 가능성이 높기에 도리안 정도는 들어가는 순간 들키게 될 거다.
이번 일은 예측이 불가능하기에 도리안을 데리고 가는 건 서로에게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으, 그래요….”
도리안은 실망한 듯 고개를 툭 떨궜다.
“다만 도와줄 게 없지는 않지.”
“그, 그게 뭔데요?”
“혹시 아공간 주머니 있어?”
“물론이죠!”
그는 냉큼 고개를 끄덕이고서 배 주머니에서 아공간 주머니를 하나 꺼냈다.
“근데 이건 얼마 못 들어가요. 압축률이 10배밖에 안 되어서.”
“음….”
라온이 아공간 주머니와 도리안의 배 주머니를 보면서 입맛을 다셨다.
‘보통은 이게 맞지.’
아공간 주머니는 압축률에 따라 가치가 다르다. 큰 명성을 가진 무인이나, 부자들도 제한이 있는 아공간 주머니를 사용하건만, 도리안의 배 주머니에는 그런 한계 자체가 없었다.
설명하지 않았다는 어이없는 이유로 저런 보물이 도리안에게 넘어간 걸 떠올려보면 상회주가 무조건 저 녀석을 싫어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넌 여기서 상회주님에게 줄 선물이나 골라 놔.”
“저희 집 만물상이라 없는 게 없는….”
“됐고. 무조건 골라.”
라온은 협박하듯이 도리안의 어깨를 눌렀다.
“아, 네에….”
도리안이 덜덜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녀올게.”
라온은 피식 웃으며 숙소 문을 열고 나가려다가 다시 뒤를 돌았다.
“…너 혹시 파슬리 있냐?”
* * *
라온은 바로 모트런을 떠나서 로베르트 가문을 향해 전력으로 달렸다.
-어디로 가는 것이냐?
라스는 요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보면 알아.’
-끄응, 이 비밀만 가득한 놈….
녀석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콧잔등을 찡그렸다.
-본왕도 네놈이 평범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
‘오늘 점심은 새우 소금 구이 어때?’
-새, 새우 소금….”
‘거기에 바닷 가재까지 추가!’
-오오!
라스는 순식간에 본론을 잊어버리고 입맛을 다셨다.
라온은 그런 라스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런 것도 얼마 통하지 않겠지.’
아니면 이미 눈치챘을 수도 있고.
다만 이번 일 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자신이 먹지 못하더라도 데루스에게 더 큰 힘이 가는 건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했다.
‘시간이 그렇게 많지는 않아.’
카멜룬에 들리면서 4일을 소모했다. 보육원을 무너뜨린 덕분에 시간은 벌었지만, 언젠가 일정이 밝혀지더라도 의심을 피하려면 최대한 빨리 해저 던전을 무너뜨리고 세피아 상회에 도착해야 한다.
‘그래도 기분은 좋네.’
그곳에서 할 일은 다 했으니까.
리스본에게 복수를 하고, 아이들을 모두 구했다는 것에 마음이 뿌듯하면서, 데루스가 부하들을 닥달하며 분노를 터트릴 모습을 떠올리니 자연스레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걸 직접 못 보는 게 아쉽네.’
데루스의 일그러진 표정을 직관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게 안타까웠다. 놈의 옆에 붙어 있을 레젤이 부러워졌다.
라온은 데루스의 찌그러진 표정을 기대하며 하루종일 달린 뒤 작은 호숫가에 노숙을 할 자리를 잡았다.
“음….”
아무것도 없는 수풀 쪽을 바라보며 짧게 숨을 내쉬었다.
“멀린. 있지?”
지금 기감에 느껴지는 건 몇몇 야생돌물 뿐이지만, 분명 멀린은 있을 것이다.
“소원을 들어줄 테니. 나와.”
멀린에게 소원권을 길게 맡길 생각은 없다. 지금 바로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고 끝내고 싶었다.
‘이번에는 준비 단단히 했어.’
멀린은 작은 동물에 깃드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서 곡식, 견과류, 과일, 채소, 벌레, 사탕에 과자까지 준비를 마쳤다. 파슬리로 모자라, 샐러리까지 가져왔다. 어떤 녀석이 나와도 감당할 수 있었다.
쿠웅.
다만 멀린은 바로 나타나지 않았다. 30초 정도 지났을 때 묵직한 걸음 소리와 함께 사자 한 마리가 수풀을 헤치고 나타났다.
“불렀어?”
사자의 주둥이에서 걸쭉하지만, 어조만큼은 상큼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허.
“…….”
사자 먹이는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