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337화 (337/653)

제337화

“부타아아악?”

멀린이 말꼬리를 치즈처럼 길게 늘였다.

“너한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거야.”

라온이 멀린을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멀린이 긴 귀를 부드럽게 쓸어올렸다.

“당연히 들어줘야지.”

이쪽을 바라보는 토끼의 붉은 눈동자가 귀여우면서도 오싹했다.

“어떤 부탁인데? 말만 해봐.”

멀린은 어떤 일이라도 들어주겠다며 앞발을 까딱였다.

-흐음….

라스가 멀린을 흘겨보며 입맛을 다셨다.

-무슨 일이든 시킬 수 있는 심부름꾼이 생겼구나. 조금 무섭지만….

‘그렇게 쓸 생각 없어.’

보호해야 할 아이들의 숫자가 많은 의외의 사태였기 때문에 멀린에게 부탁하는 것뿐이다. 아이들 때문이 아니었다면 절대 그녀를 부르지 않았다.

-평소에는 감정 없는 귀신 같더니, 이상한 데서 순하다니까.

라스는 이해할 수 없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라온이 혀를 차는 라스를 보며 피식 웃었다.

‘멀린을 쓰는 게 이득인 건 확실하지. 하지만….’

사람의 감정을 지배하는 짓 따위는 죽어도 안 해.

멀린의 호의를 이용하여 그녀를 지배한다면 전생의 자신에게 세뇌라는 목줄을 채웠던 데루스 로베르트와 다를 게 없어진다.

다른 건 몰라도 그놈처럼 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쓴 편지를 다른 사람에게 좀 전해줘.”

“편지? 그거면 돼?”

멀린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그거면 충분해.”

“저기 있는 아이들을 구출할 거잖아. 그거 도와줄 수 있는데.”

“괜찮아. 내 부탁으로 네 손에 피를 묻히게 할 생각 없으니까.”

“아흑….”

멀린이 들뜬 신음을 흘리며 네 발로 바닥을 짚었다. 그녀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방금 오싹했어….”

“그거 착각이다.”

“이런 기분 오랜만이야.”

“후우….”

라온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멀린이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설명해도 통하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을 아꼈다.

“내 걱정해주는 건 기쁘지만, 네 부탁은 뭐든 들어줄 수 있어. 뭐든 말만 해.”

“정말 편지만 보내주면 돼.”

라온이 손을 저었다. 미리 준비해둔 편지지 두 장에 각기 다른 내용을 적은 뒤 멀린에게 건넸다.

“사각으로 접은 편지는 요난 가문에 계시는 넝마의 성자님께 전해줘.”

세뇌를 연구하고 있는 넝마의 성자 페드릭이라면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은 저 아이들의 세뇌를 풀어줄 수 있을 것이다.

“아, 넝마의 성자. 그렇지, 거기서 널 두 번째로 봤었지.”

멀린은 그때가 떠오른다며 볼에 홍조를 띄운 채 하늘을 올려보았다. 본래라면 소름이 돋았겠지만 어린 토끼의 모습이라 그나마 봐줄 수 있었다.

“삼각으로 접은 편지는 오웬 왕국의 보리니 키튼 경에게 전해줘.”

“보리니 키튼? 너한테 진 애잖아.”

“맞아.”

라온이 잔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라면 믿을 수 있지.’

저 아이들을 지그하르트로 데리고 가고 싶지만, 정체를 들키지 않아야 하기에 무리다. 가까운 장소에 있고, 신뢰할 수 있는 보리니 키튼에게 맡기는 게 최선이었다.

기사의 귀감이 되는 그라면 모든 것을 직접 확인하면서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 것이다.

-확실히 그 꼬챙이 녀석이 성격은 꽤 괜찮아 보였지.

라스가 보리니 키튼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악귀인 네놈이랑 정반대였느니라.

‘그래서 맡기는 거야.’

라온이 피식 웃었다.

“정말 어려운 일이 아니네.”

멀린은 쉬운 일에 실망했는지 콧김을 흥 뿜었다.

“정말 다 죽여줄 수 있는데에….”

“됐고. 언제 보내줄 수 있지?”

라온이 필요 없다며 손을 저었다.

“당장도 가능해.”

“그럼 지금 보내줘.”

“알겠어.”

멀린이 웃으며 앞발을 뻗자, 손에 든 편지지가 봄눈처럼 녹아내렸다. 그녀의 본체가 있는 곳으로 이동시킨 것 같았다.

“내가 네 부탁을 들어줬으니, 너도 내 부탁을 들어줘야 해.”

멀린이 앞발을 내리며 입매를 말아 올렸다.

“나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내 마음에 든다면.”

혹시 모르기에 여러 가지 조건들을 걸어놓았다.

“까다롭네.”

멀린이 픽 웃었다. 그녀는 라온과 대화하는 이 시간 자체가 즐거운 듯 보였다.

“그래도 네가 들어줄 만한 일일 거야.”

그녀는 마지막까지 웃음을 잃지 않고서 앞발을 흔들었다.

“그럼 다음에 보자. 뒷일은 말 안 해도 알지? 얘는 파슬리가 좋다던데?”

“그거 나한테 시키지 말고, 네가 미리….”

라온이 멀린에게 다가가서 소리쳤지만, 이미 토끼의 눈은 야생의 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꿍.

토끼는 먹이를 달라는 듯 콧잔등을 찡그리며 다가왔다.

“그으….”

라온이 마른침을 삼키고서 허리를 숙였다.

“파, 파슬리는 없는데….”

혹시 몰라서 도리안에게 이런저런 먹이들을 받아놨다. 곡식, 견과류, 딸기, 말린 벌레까지 있었지만, 파슬리는 당연히 없었다.

“…네가 골라라.”

민망한 표정으로 바닥에 먹이들을 내려놓았다.

꾸웅!

토끼는 내려놓은 먹이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곡식과 견과류를 발로 차고, 벌레를 짓밟은 뒤 딸기 하나를 먹고, 나머지 두 개는 입에 물었다.

투욱.

그리고서 자신의 복숭아뼈를 뒷발로 걷어차고서 수풀로 도망쳤다.

-푸하하하하!

라스가 굳어버린 라온을 보며 낄낄 웃었다.

-토끼한테 맞았어! 추하기 그지없느니라!

녀석은 속이 시원하다며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하아아….”

라온이 깊은 한숨을 내쉬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피곤해.’

전력을 다해서 싸운 것처럼 머리가 멍하다. 멀린과 만날 때마다 힘들어서 웬만하면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네놈에게도 천적이 있구나!

라스는 오랜만에 약점을 잡은 듯 히죽이며 놀려댔다.

‘좀 참아줘.’

고개를 저으며 다시 보육원을 내려다볼 때 청발의 중년인이 보육원 안에서 걸어 나왔다. 부드러운 인상이지만, 눈동자는 차가웠고, 왼쪽 뺨에 얇은 상처가 새겨져 있었다.

‘저놈이었어?’

이곳에 와서 느꼈던 마스터의 기운은 전생의 인연 중 한 명이자, 마티오의 심복인 리스본이었다.

‘책임자라, 출세했네.’

이게 인연이라는 건가.

라온은 리스본을 내려다보며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미소를 흘렸다.

‘오늘은 악몽을 꾸겠군.’

*     *      *

내 삶은 지옥과도 같았다.

유치가 빠지기도 전에 납치되어 어딘지도 모를 지하에 갇혔다.

그곳에는 사육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나와 같은 아이들을 개라고 부르며 살아남는 법과 죽이는 법을 가르쳤다.

피부를 찢고, 뼈를 긁는 고문을 당하며 인내력을 길렀고, 직접 검에 찔리며 어디가 인간의 급소인지를 알았고, 몬스터와 짐승에 쫓기며 실전을 치렀다.

울고 싶었지만, 웃어야 했고, 죽고 싶었지만, 살아야 했다.

벗어난다든가 도망친다는 생각 따위는 들지 않았다.

내가 이곳에 있는 게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당연하다고 여겼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건 세뇌 때문이었다. 뇌를 짓누르는 암시가 도망친다는 선택지를 아예 지워버린 것이다.

반항해도, 실패해도, 기대에 못 미쳐도 살처분 당하는 그 지옥에서 난 삶과 죽음의 줄타기를 하며 간신히 살아남았다.

의식주는커녕 인간의 욕구가 모조리 짓밟히는 곳이었지만, 유일한 빛이 하나 있었다.

친구.

나처럼 이 지하에 납치되어 같은 방을 사용하는 친구의 존재였다.

그는 9호라고 불렸다.

동그스름한 얼굴에 귀여운 인상. 몇 살인지는 모르지만 9호는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만날 수 있는 시간은 잠을 자는 4시간 정도뿐이었지만, 그 시간 동안 그와 말을 나누면 하루종일 차오르던 죽고 싶다는 감정이 가라앉았다.

그는 내 말을 받아주며 조금만 버티면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말해주었다.

외부의 삶이 기억나지 않았기에 뭐가 좋은지는 몰랐다. 그저 그가 그렇게 말하니 그러려니 했을 뿐이다.

우리는 먹을 것도, 즐길 것도 없는 공간에서 서로를 보며 웃었다.

그게 그곳에 있던 나의 유일한 빛이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르고 우리의 교육이 끝나갈 무렵 모든 아이들이 지하 공동에 호출되었다.

사육사들은 같은 방을 쓰는 아이들끼리 앞으로 불렀다.

그리고 그 둘을 싸우게 만들었다. 아니, 서로 죽이게 만들었다.

당연히 싸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지옥 같은 곳에서 같은 방을 쓰는 사람은 유일한 친구였으니까.

나 역시 그랬고, 9호 역시 그랬다.

우리는 손에 쥔 단검을 버리고 팔을 들었다. 사육사에게 죽더라도 친구에게 검을 휘두르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다만 왼뺨에 작은 상처가 있는 청발 사육사의 입이 열리는 순간 그런 생각 따위는 사라졌다.

“죽여라.”

그 말에 머리가, 몸이 내 의지를 벗어났다.

바닥에 떨어진 단검을 주워서 9호에게 달려들었다.

9호 역시 눈에 시뻘건 살기를 일으킨 채 단검을 내리쳐왔다.

우리는 서로의 숨통을 노리며 지금까지 배워온 암살 기술을 쏟아냈다.

오늘 새벽까지만 해도 서로의 상처를 꿰매주던 손이 상대의 급소를 향해 칼을 찔러 박았다.

나와 9호의 실력은 호각이었다.

생살이 찢겨나가고, 새하얀 뼈가 피부 위로 삐져나왔다.

아팠다. 더럽게 아팠지만, 고통 따위는 상관없었다.

그저 친구와 싸우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9호에게 죽고 싶었지만, 내가 쥔 단검은 어느새 그의 심장에 박혀 있었다.

“…….”

9호는 어떠한 말도 남기지 않았다. 내 어깨를 부드럽게 치고 웃으며 죽었다.

내 유일한 친구는 진짜 이름조차 밝히지 못한 채 죽음으로 가라앉았다.

내 눈에서 그 삶의 마지막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날 내 감정은 어둠 속에 묻혔다.

“…님.”

“…주님.”

“부단주님!”

경쾌한 목소리에 눈을 떴다. 도리안의 동그스름한 얼굴이 눈앞에 떠 있었다.

“도리안이냐.”

정말 오랜만에 본 9호와 비슷한 분위기의 도리안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이런 때에 주무시다니, 별일이 다 있네요. 시작할 시간이에요.”

도리안이 껌껌해진 하늘을 가리켰다.

-…….

라스는 웬일로 조용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래.”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일어났다.

‘이 꿈을 꾸다니.’

리스본을 보았기 때문일까. 습격 전에 잠이 든 것도 모자라, 전생의 꿈까지 꿔버렸다. 참으로 별난 일이었다.

“준비는 됐지?”

“예. 제가 죽더라도 아이들을 지킬게요!”

도리안은 결심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죽으면 의미 없어.”

“그래도요.”

“마음은 받을게. 무조건 살아.”

보육원을 굽어보는 라온의 눈동자에 어둠이 차올랐다.

“가자.”

*     *      *

“음….”

파인이라는 이름으로 가이드 일을 하던 45호는 86호의 손을 잡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오늘 좀 이상하지 않아?”

“그래. 일도 안 시키고, 훈련도 안 하고.”

벼락이 치고, 지진이 나도 훈련은 쉬지 않건만, 오늘은 어떠한 훈련이나, 작업도 시키지 않고 먹을 만한 음식까지 내어주었다. 평소 사육사들의 행동을 떠올리면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앞으로도 이러면 좋겠어.”

86호가 희망을 품은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난 조금 불안해.”

45호가 짧게 한숨을 뱉었다. 자신들을 납치해서 암살자로 기르는 이들이 괜히 이런 일을 할 리가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겁나서 손이 떨렸다.

“좋게 생각하자.”

86호가 고개를 저으며 45호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

“몇 년 동안 우릴 교육해놓고 그냥 죽일 리는 없잖아.”

“그건 그래.”

45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 시간 교육해놓고 자신들을 그냥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86호의 말대로 하루의 휴식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럼 자자.”

잠을 잘 시간이라 침대에 누우려고 할 때 방문이 열리고 복면인이 손짓했다.

“둘 다 나와라.”

“예.”

“예….”

거부 따위는 없다. 목소리를 듣는 순간 따를 수밖에 없었다.

45호는 86호와 함께 공동으로 나갔다. 다른 아이들은 이미 줄을 맞춰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두 사람이 다른 아이들의 뒤에 자리를 잡았을 때 단상 위로 4번 사육사가 걸어 나왔다.

“지금부터 전투를 시작한다. 가장 마지막에 나온 45호와 86호. 앞으로 나오도록.”

“네.”

그의 손짓에 45호와 86호가 마른침을 삼키고 앞으로 나갔다. 다른 아이들도 불안함을 느낀 듯 어깨를 떨었다.

“단검을 쥐어라.”

사육사의 명령에 45호와 86호는 시퍼런 빛을 발하는 단검을 하나씩 잡았다.

45호가 예리함을 뿜어내는 단검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뭔가 이상해.’

진검을 쥐고 대련을 한 적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지금처럼 섬뜩한 분위기는 처음이었다.

“지금부터 싸워라.”

45호가 단검을 쥐고, 86호의 떨리는 동공을 보고 있을 때 사육사의 말이 이어졌다.

“상대가 죽을 때까지.”

“예?”

45호가 눈을 부릅뜨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4번 사육사는 그 이상의 말을 하지 않았다. 빨리하라는 듯 턱짓만 했다.

“주, 죽이라는 게….”

“말 그대로다. 네 앞에 있는 상대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싸우라는 뜻이다.”

“아….”

그 차가운 음성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으으….”

45호가 이빨을 딱딱 부딪치며 앞을 보았다. 86호 역시 같은 감정을 느낀 듯 안색이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지금까지 그녀와 함께 보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서로를 위로해주고, 서로를 보듬어주던 시간들. 이 악의로 가득 찬 지하에서 유일한 등불이 된 그 기억에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괜찮아.’

45호가 눈을 꾹 감으며 손에 쥔 단검을 떨어뜨렸다. 앞에 있는 86호에게는 죽어도 좋다는 마음이었다.

캬걍.

하지만 단검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는 두 번 울렸다. 눈을 떠보니, 86호의 발밑에도 단검이 떨어져 있었다. 그녀 역시 싸우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아….”

마음이 통한 게. 서로를 생각한 사람이 나만이 아니라는 게 기쁘면서도 이런 곳에서 만났다는 게 너무 서글펐다. 감정 통제를 벗어나 처음으로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싸, 싸울 수 없어요.”

45호가 손을 들어 올렸다. 싸울 생각이 없다고 표현하며 사육사를 바라보았다. 86호와 뒤에 있는 다른 아이들의 시선이 힘이 되어 주는 듯한 기분이었다.

“역시 이렇게 되는군.”

4번 사육사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너무나도 담담한 음성에 오싹한 소름이 등골을 스쳤다.

“…그럼 죽여라.”

죽여라.

죽이라는 말이 머리에 울린 순간 45호의 손은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바닥에 떨어진 단검을 잡고 있었다. 86호 역시 단검을 꼬나쥐고 몸을 일으켰다.

타악!

45호가 단검을 역수로 쥐고 앞으로 내달렸다.

‘뭐야.’

이게 뭐냐고!

몸이 통제를 벗어났다. 그 어느 때보다 쾌속하게 움직여 86호의 목을 향해 단검을 내리찍었다.

캬아앙!

변한 건 자신만이 아니다. 86호 역시 지금까지 느낀 적 없는 지독한 살기를 일으키며 이쪽의 숨통을 노려왔다.

같은 방을 쓰며 서로가 서로의 유일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두 아이는 실 달린 인형처럼 본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상대를 향해 검을 꽂아 넣었다.

피이익!

45호의 가슴께에 핏줄기가 터지고, 86호의 어깨 살이 잘려 나갔다.

두 아이는 고통 따위는 느끼지도 못하는 듯 재차 달려들어 단검을 쑤셔 박았다.

파아아앙!

오싹한 파공음 속에서 45호가 부러져라 이를 깨물었다.

평소의 실력 차이 때문인지 86호의 움직임이 느려지고, 단검술의 예리함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자신의 검이 그녀의 목에 박힐 것이다.

“으으!”

45호가 뼈가 분질러질 듯한 고통을 참으며 4번 사육사를 돌아보았다.

‘머, 멈춰 줘!’

그에게 이 지독한 싸움을 그만두게 해달라고 눈으로 빌었다.

“이 싸움은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는다.”

사육사의 입가가 가늘게 말려 올라갔다.

“기뻐하도록. 너희들은 너희가 가장 아끼는 사람의 죽음을 통해 진정한 그림자로 태어나게 될 것이다.”

그의 음성에는 지금까지의 냉혹함과 다른 흥겨움이 스며들어 있었다.

“죽여라.”

그 단어에 억지로 늦추던 몸이 다시 빨라지기 시작했다.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까. 제발 멈춰줘!

마음속에서 소리 없는 절규를 터트렸지만, 손은 점점 더 빠르게 유일한 친구의 숨통을 향해 나아갔다.

캬아앙!

86호의 단검이 자신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허공으로 튕겨 나갔다.

‘아….’

45호의 손은 그녀의 마음과 정반대로 86호의 목을 향해 단검을 내리찍어갔다.

“그래. 그걸로 됐다.”

사육사의 눈동자가 차갑게 번뜩였다.

“이제 너도 그림자의 일원이… 크헉!”

그의 비명에 정신이 들었다. 단검이 86호의 피부만 살짝 찢은 채 멈춰 섰다.

“뭐, 뭐….”

“입 닫고 사라져.”

나지막한 음성과 함께 4번 사육사의 심장에서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끄윽….”

기울어지는 4번 사육사 뒤에서 키가 큰 남성이 나타났다. 어딘지 모르게 우리와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이제 괜찮아.”

그는 처연한 눈동자로 자신의 손에 들린 피 묻은 단검을 가져가며 미소를 지었다.

“너희들의 이름을 되찾아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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