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6화
두터운 회색 성벽 뒤로 첨탑처럼 솟아오른 건물들이 보인다.
굳건한 성벽과 높으면서도 세련된 건물들. 하루에도 만 명 이상이 왕래하는 대륙에서 손꼽히는 상업 도시 카멜룬의 모습이었다.
라온과 도리안은 5년 전 처음 카멜룬에 들렸을 때처럼 말을 탄 채 카멜룬의 성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도 벌써 네 번째네요. 많이도 왔다.”
머리를 갈색으로 염색한 도리안이 입맛을 쩝 다셨다.
“그러네.”
흑발흑안으로 머리와 눈동자 색을 바꾼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지그하르트로 복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에 다른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서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을 바꾸고, 옷도 평범한 여행자처럼 바람막이를 걸치고 있었다.
“가자.”
라온은 도리안에게 턱짓을 하고서 카멜룬으로 말을 몰았다.
“저야 물건을 보충할 수 있어서 좋기는 한데, 카멜룬에는 왜 가는 거예요?”
“관광하러.”
“과, 관광이요?”
“그래. 긴장 좀 풀고 가자고.”
“어어….”
당황하는 도리안의 어깨를 툭 치고 성문 경비병에게 위조 신분증을 내밀었다.
-관광은 무슨!
라스는 어깨 위에 내려앉으며 콧잔등을 찡그렸다.
-속이 시꺼먼 네놈이 그냥 왔을 리가 없지. 분명 속셈이 있을 것이니라. 약해 빠진 녀석이 비밀은 더럽게 많아.
‘흠, 오늘 맛난 거 많이 먹으려고 했는데….’
-저, 정말이냐!
‘그래.’
라온은 무릎 반사처럼 벌떡 일어난 라스를 보며 피식 웃었다.
‘즐길 거거든.’
고개를 끄덕이고 카멜룬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옵셔! 오늘 과일들이 아주 좋습니다!”
“이 멍청아! 그건 이쪽으로 가져와야지!”
“좀 싸게 줘봐. 선수끼리 왜 이래.”
“그 가격에 넘겨도 남는 거 없어!”
카멜룬은 언제나 그렇듯 활기찼다. 사람들의 열기가 피부에 와닿을 정도라 당장 검을 휘두르며 수련을 하고 싶었다.
“안 가세요?”
검문을 통과하고 들어온 도리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시만.”
라온은 이전에 왔을 때처럼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카멜룬에 처음 온 듯 얼떨떨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30초 정도 시선을 굴리고 있을 때 옆으로 작은 걸음 소리가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음?”
밝은 목소리에 옆을 보니, 파란 머리카락을 말총처럼 묶은 여자아이 하나가 고개를 꾸벅이고 있었다.
“카멜룬에 처음 오신 건가요?”
“그래.”
라온이 아이를 보며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가 도시를 안내해드릴까요? 저희 <푸른 구름>은 여행객분들에게 전문적으로 가이드를 해드리고 있거든요.”
아이는 본인이 입고 있던 구름이 그려진 조끼를 가리켰다.
“은화 하나에 카멜룬의 맛집, 볼거리, 상징까지 원하시는 건 전부 안내해드릴 수 있어요!”
“네 이름은?”
라온이 아이의 맑은 눈을 마주하며 입을 뗐다.
“파인이에요.”
아이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살짝 틀었다.
“한 번 믿어보지.”
“감사합니다!”
파인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럼 어디부터 가실래요? 지금 축제가 진행 중이라 거기부터 가시는 게 좋을 거예요!”
“축제라….”
-축제하면 먹거리! 먹거리 하면 축제 아니더냐!
라스는 축제부터 가자며 소매를 당겼다.
“좋아. 그럼 축제부터.”
“네! 이쪽으로 오세요!”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자, 파인이 상큼하게 대답하고서 바로 움직였다.
‘유아 같네.’
맑은 목소리와 경쾌한 걸음걸이는 주점에서 일할 때의 유아를 보는 듯 했다.
“저, 저기….”
파인의 뒤를 따라가고 있을 때 도리안이 옆으로 다가왔다.
“저희 여기 처음 아니잖아요. 이번이 네 번짼데 왜….”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며 조용히 속삭였다.
“저 아이도 먹고 살아야지.”
라온이 파인의 등에 있는 파란 구름의 모양을 가리켰다.
“저 문양은 부모 없는 아이들이 스스로 일을 해서 돈을 번다는 표식이야.”
“아! 그, 그건 몰랐어요.”
도리안이 민망한 표정으로 볼을 긁적였다.
“어차피 관광 다닐 거 안내인이 있으면 좋잖아?”
“그건 그렇죠!”
좋은 일을 하기 때문인지 도리안은 에헤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
라스가 파인을 보며 입매를 찡그렸다.
-이따가 저 아이에게 돈을 두 배로 주거라! 저 나이에 벌써 일을 하다니 장하지 않느냐!
‘후….’
라온이 한숨을 내쉬었다. 뭔 놈의 마왕이 이렇게 무른 건지 모르겠다.
도리안과 라스와 대화를 하며 걷다보니, 얼마 가지 않아 축제가 열리는 곳이 나타났다.
“여기예요!”
파인이 손을 들어 축제 장소를 가리켰다. 거의 네 블록 전체가 축제용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생각보다 엄청 크네!”
도리안이 입을 떡 벌렸다.
“도시 건립일 축제거든요! 사람도 많고, 행사도 많고, 음식도 많죠!”
파인이 손을 위아래로 마구 저으며 웃었다. 딱 그 나이대만 보여줄 수 있는 앳된 미소였다.
“그렇구나.”
도리안은 파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웃었다.
-왼쪽에서 닭꼬치의 냄새가 나느니라. 소금과 간장 모두 있느니라! 오른쪽에서는 돼지 통구이의 향이 퍼지고 있느니라! 중앙! 중앙에 아이스크림!
라스는 적의 위치를 파악하듯 순식간에 어디에, 어떤 음식이 있는지를 알아차리고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음식 종류와 위치를 동시에 파악하다니 개코보다 더했다.
‘어휴….’
분노는 개뿔. 얜 아무리 봐도 식욕의 마왕일 뿐이었다.
“어디부터 보실래요?”
“후….”
라온은 라스를 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들었다.
“일단 음식부터.”
“네!”
파인이 싱긋 웃으며 손짓했다.
“이쪽이에요!”
* * *
카멜룬에 저녁이 찾아왔다.
하늘은 천천히 어둑해졌지만, 축제의 열기 덕분에 카멜룬에는 어둠이 찾아오지 않았다.
“죄송해요.”
파인이 오늘 안내를 해준 두 여행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저희 시설은 딱 6시까지만 일을 할 수 있거든요.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6시?”
다정다감하게 말을 걸어준 둥그스름하게 생긴 갈색 머리 남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아이들은 잘 쉬고, 잘 자야 하는 게 저희 원장님 지론이라서요. 저녁부터는 일을 못 해요.”
“좋으신 분이네.”
“그럼요! 얼마나 잘해주시는지 몰라요!”
파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방긋 웃었다.
“알겠다. 오늘 수고했어.”
키가 큰 흑발흑안의 남성이 안내비를 건네주었다. 은화 하나가 아니라, 2개가 손에 올려져 있었다.
“이거 너무 많아요. 오늘 밥도 사주셨는데….”
“괜찮으니 가져가.”
그는 일을 잘해서 조금 더 챙겨주는 거라고 말했다.
“잘 가.”
갈색 머리 남자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감사합니다!”
파인이 방긋 웃고서 허리를 숙였다. 그녀는 두 사람에게 손을 마구 흔들고서 출구로 향했다.
‘좋은 분들이야.’
여행자로 보이는 두 손님은 어린 자신에게도 친절했으며 예의를 갖춰주었다.
노점상에서 음식을 살 때마다 하나씩 사주셔서 오랜만에 배를 가득 채울 수 있었다.
친구에게 줄 과자까지 포장해주셔서 마음까지 든든했다.
‘저런 손님만 있으면 좋을 텐데….’
파인은 오늘 즐거웠던 일들을 생각하며 카멜룬을 나가 한참을 걸었다.
1시간가량 움직인 그녀의 걸음이 멈춘 곳은 구름의 집이라는 이름의 보육원이었다.
“이제 오는구나.”
보육원 입구 앞에는 등불을 든 노인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인자한 얼굴에서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나는 이 노인이 구름의 집의 원장이었다.
“오늘은 어땠니?”
“재밌었어요.”
파인이 밝게 대답하며 구름의 집 안에 들어간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탁 풀렸다. 사람이 아니라, 인형이라도 된 듯 안구가 우뚝 멈춰버렸다.
“그래. 그래. 수고했다.”
고아원장이 등을 두드리자, 파인은 발을 살짝 떨고서 보육원 건물로 걸어갔다.
카멜룬에서 보여주었던 경쾌한 걸음은 사라지고, 끈 달린 인형처럼 딱딱하게 움직임이었다.
‘아….’
파인이 입술을 떨었다.
‘또 왔어.’
매일같이 느끼지만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 감각. 내 몸을 다른 사람이 조종하는 듯한 기분에 소름이 돋아올랐다. 아니, 몸만이 아니다. 정신마저 누군가에 의해 주물러지고 있었다.
파인은 자신의 의지와는 조금도 상관없이 보육원장실로 들어갔다. 오른쪽 벽의 버튼을 누르자, 책상 아래에 구멍이 생겨났고, 거침없이 그 안으로 내려갔다.
깊은 계단 아래에는 거대한 공동이 있었고, 구름 조끼를 입은 파인 또래 아이들이 줄을 맞춰 서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듯 슬프게 가라앉아 잇었다.
아이들의 앞과 뒤에는 검은 복면을 쓴 흑의인이 서 있었다. 그중 뒤에 있던 남자가 파인에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45호. 이쪽으로 와라.”
“예.”
파인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45호. 파인이 아니라, 45호가 그녀의 진짜 이름이었다.
짤그랑.
45호가 남자 앞에 오늘 안내로 번 돈을 내려놓았다.
“또 없나?”
여행자들에게 받은 과자를 품속에서 꺼내놓았다.
뿌드드득!
흑의인은 과자를 구둣발로 으깨고 45호를 바라보았다.
“말해봐라.”
“흑발, 흑안. 신장 187, 체중 88, 오른손잡이, 검사, 빈틈 다수. 갈색 머리, 청안, 신장 178, 체중 79, 오른손잡이, 검사, 빈틈없습니다.”
45호는 오늘 만났던 두 여행자의 정보를 그대로 읊었다. 말하고 싶어서, 조사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다. 그저 교육된 대로 보고 말하는 것뿐이었다.
“죽일 수 있겠나?”
남자의 질문에 45호의 머리가 자연스럽게 돌아간다.
“계단이 높은 가비엘의 주점으로 안내를 하면서 갈색 머리칼의 남자를 뒤에서 기습한 뒤 반응하기 전에 흑발의 남자의 아킬레스건을 자른다면 제거할 수 있을 듯합니다.”
45호는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려본 뒤 대답했다.
“수고했다.”
복면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45호가 다른 아이들처럼 중앙에 가서 섰다. 그녀는 즐겁게 일을 마치고 왔음에도 얼굴을 찡그려 울상을 지었다.
누가 보아도 슬픈 일을 겪었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표정이었다.
“2번.”
앞에 있는 복면인이 2번이라고 외치자, 조금 전까지 울고 있던 아이들이 모두 입꼬리를 올리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
45호가 오늘 안내를 하며 줄곧 보여주었던 행복한 미소였다.
45호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웃음을 흘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지?’
유일한 자유는 낮뿐이지만, 그때도 도망칠 수는 없다.
아니, 도망친다는 생각 자체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선택지 자체가 없었다.
‘죽고 싶어….’
45호는 햇살처럼 방긋 웃으며 스스로의 목숨이 끊어지기를 원했다.
* * *
45호는 표정 훈련과 암살 훈련을 모두 마치고 새벽이 되어서야 방으로 들어갔다. 방이라고 해봐야 낡은 침대 2개만 있는 아주 작은 방이었다.
삐걱 소리가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있을 때 문이 열리고 붉은 머리 소녀가 안으로 들어왔다.
“86호.”
45호가 적발 소녀를 작게 부르며 손짓을 했다.
“왜?”
86호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옆으로 다가왔다.
45호는 무표정으로 허리춤에 손을 넣은 뒤 과자 하나를 꺼냈다. 복면인이 부수기 전에 미리 빼돌려 둔 과자였다.
“이거 먹어.”
그녀는 과자를 반으로 자른 뒤 86호에게 내밀었다.
“머, 먹어도 돼?”
“그럼.”
45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86호는 떨리는 손으로 과자를 받아 입에 넣었다.
“음….”
달달한 과자가 입안을 채우고 있음에도 86호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혼자서는 제대로 웃지도 못하게 만드는 감정 통제 때문이었다.
“이것도 먹어.”
“하지만….”
“난 오늘 많이 먹고 와서 괜찮아.”
45호는 나머지 반쪽도 86호에게 내밀었다.
“정말이야. 받아.”
86호는 처음 이곳에 왔을 때부터 같은 방을 쓰며 서로를 위로해준 사이였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절대 이 생활을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고마워.”
86호의 멎어버린 동공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두 아이는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그대로 잠이 들었다.
* * *
라온은 보육원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구릉 위에서 입맛을 다셨다.
‘여전하네.’
기감과 분노의 마안을 이용하여 지하에 있는 시설을 모두 확인했다. 로베르트 놈들은 20년 전보다 더 지독한 훈련으로 아이들을 조교하고 있었다.
‘후우….’
망할 데루스 로베르트.
보고만 있어도 전생이 떠올라 심장이 꽉 조여들었다.
-개 같은 놈들이니라!
라스가 보육원을 보며 빽 소리를 질렀다. 녀석에게서 강대한 분노의 기운이 활활 타올랐다.
-마계에서도 어린 마족들은 넘어가 주거늘! 저 어리고 약한 것들을 저리 다룬단 말이냐!
‘그래서 말했잖아. 진짜 악당들은 따로 있다고.’
라온은 라스를 툭툭 두드려주며 어금니를 지그시 씹었다.
“그, 그니까 저게 보육원이 아니라….”
도리안은 보육원을 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래. 어린 암살자를 키우는 사육장이다.”
데루스의 시설이라고 말할 수는 없기에 암살자 육성 시설이라고만 말해주었다.
“허어억.”
그가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밝은 얼굴로 축제를 안내해준 그 귀여운 아이가 암살자 훈련을 받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 듯 보였다.
“그 아이의 의지가 아니야.”
“그, 그러면….”
“세뇌해서 다루는 거지. 낮에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안력을 키우고, 밤에는 암살 기술을 가르치는 추잡하면서 더러운 방법이야.”
라온이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저, 저기 부단주님은 그걸 어떻게 아신 거예요?”
-이 비밀이 많은 놈은 절대 말 안 해줄 것이니라.
라스가 입매를 비틀며 인상을 찌푸렸다.
“천검대와 함께 엔씨아 님을 모시고 성자님을 찾으러 간 적 있지?”
라온이 바닥에 걸터앉으며 보육원을 보았다.
“당연히 기억하죠! 거기서 부단주님이 설화검협이라는 이명을 얻은 거잖아요.”
도리안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테머스를 잡았었잖아.”
테머스는 데루스 로베르트를 몰래 따르던 의원이었다. 엔씨아를 치료하는 척하면서 요난 가문을 먹으려던 계획을 실패한 뒤 자신을 쫓아와 기습까지 했었다.
“아!”
-그때인가!
“그놈에게 얻어낸 정보였어.”
이건 거짓이 아니다. 당시에 놈을 고문해서 이곳에 새로운 암살자의 요람이 있다는 것을 들었다.
‘이제야 기회가 왔지.’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아이들을 구해주고 싶었지만, 데루스의 위치를 알 수 없어서 지금까지 참아왔다.
‘하지만….’
지금은 할 수 있지.
현재 데루스는 로베르트 가문 사람들과 발카르 쪽으로 가는 중이다. 꽤 거리가 떨어져 있고 함부로 움직일 수 없으니, 지금이 이곳을 깨부술 수 있는 때였다.
“보육원 입구 왼쪽에 있는 방 아래에 지하랑 연결되는 공간이 있거든.”
라온이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는 보육원장실을 가리켰다.
“넌 그곳에 내려가서 아이들을 보호해.”
“부단주님은요?”
“난 밖에서 쓰레기들을 치워야지.”
내부에는 교육 담당이, 외부에는 보호 담당이 있다. 보호 담당 쪽에 마스터급이 있기에 자신이 처리해야 했다.
“검술은 누구나 알 법한 것만 써. 네 정체를 들키지 않도록.”
“왜요? 좋은 일이잖아요.”
도리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우리는 정체를 감추고 있잖아. 대놓고 움직였다간 다른 오마에게 또 공격당할 수도 있어.”
“아. 그건 그러네요.”
도리안이 본인의 갈색 머리카락을 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은 다시 분노의 마안을 운용하며 보육원을 살폈다.
‘아이들이 생각보다 많아.’
뛰어난 감정 조절 능력과 암살 실력에 비해 아이들의 숫자가 많았다. 상황을 보니, 조만간 ‘그 훈련’을 하려는 것 같았다.
‘당장 내일 할지도 모르겠군.’
‘그 훈련’을 마치게 되면 데루스 로베르트의 세뇌는 아이들의 뇌수를 완전히 집어삼킨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이곳을 부숴야 했다.
“언제 치실 건가요?”
“이틀 뒤에.”
라온이 눈빛을 가라앉혔다.
‘정보를 모아야 해.’
이곳의 인원이 총 몇 명인지, 강자의 수준은 어느 정도인지, 아이들을 안전하게 보호할 방법은 무엇인지 확실하게 파악하고 움직여야 했다.
‘데루스의 위치도 확정해야 하고.’
데루스는 발카르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틀 뒤면 확실하게 발카르에 닿을 테니, 안전한 상태에서 저곳을 칠 수 있다.
“하아….”
도리안은 긴장된다는 듯 깊은숨을 내뱉었다.
“암살자 놈들에게서 아이들을 구해야 한다니 엄청 긴장되네요.”
“그럼 숙소에 가서 쉬고 있어.”
“네? 그럼 부단주님은….”
“난 조금 더 보고 갈게.”
“저, 저도 남을게요.”
“아니야.”
라온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남는 사람은 한 명이면 충분해. 넌 가서 쉬는 게 도와주는 거야.”
가서 자라고 손을 휘휘 저었다.
“으,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돌아오세요.”
“그래.”
도리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서 숙소로 돌아갔다.
라온은 도리안이 돌아간 뒤에도 분노의 마안과 기감을 펼쳐 보육원을 관찰했다.
‘교대는 12시간마다인 모양이네. 예전이랑 똑같아.’
새로 생긴 곳이지만, 운영 방식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경계 시간과 교대 시간, 움직임이 모두 예측대로였다.
‘다른 건 다 예상대로야. 다만….’
아이들을 어떻게 해야 하지?
‘그 훈련’이 끝나지 않아서 아이들이 많이 살아남은 건 다행이지만, 이곳을 처리한 뒤에 아이들을 어디로 보내야 할지 모르겠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내가 데려갈 수는 없고.
저 아이들은 아직 완벽하게 세뇌에 걸리지는 않은 상태다. 미래가 창창한 녀석들이기에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맡겨야 했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
여기서는 그 둘뿐이로군.
라온이 마음을 정하고 뒤를 돌았다.
“있지?”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구릉 뒤편에 있는 수풀을 바라보았다.
“멀린.”
“응!”
상큼한 목소리와 함께 바닥과 비슷한 색의 황색 토끼가 한 마리 튀어나왔다.
“후….”
라온이 눈을 가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했는데 정말 있다. 직접 불렀지만 소름이 돋아 올랐다.
-어흑….
라스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네, 네놈 설마 저 광녀에게 아이들을 맡길 셈이냐?
‘그건 아니야.’
라온이 고개를 저으며 코를 찡긋 하는 멀린에게 다가갔다.
“부탁이 하나 있다.”